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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욱의 생활에서 만난 철학 | 레닌 - 근대를 넘어서고자 했던 혁명적 실천가 

마르크스주의를 왜곡한 사이비 유물론인 ‘경험비판론’ 비판… 추상과 구체의 조화를 추구해 변증법적 방법론의 초석을 놓다 

박영욱 숙명여대 교양학부 교수
러시아 화가인 카지미르 말레비치(Kazimir Severinovich Malevich, 1878~1935)는 슈프레마티즘(Suprematism, 절대주의)을 대표하는 작가다. 회화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혹은 말레비치나 슈프레마티즘이라는 용어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마치 몬드리안의 작품처럼 한 번쯤은 그의 그림을 보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의 작품<검은 사각형>(1915)은 그저 흰 바탕에 검은 사각형만 그려져 있다. 언뜻 보면 추상화처럼 보이는 말레비치의 작품은 추상화와도 구별되는 더욱 급진적인 작품이다. 추상화는 말 그대로 어떤 대상의 추상이지만 말레비치의 작품에서는 흰 바탕과 어떠한 대상의 추상도 아닌 그저 하나의 대상인 검은 사각형만 있을 뿐이다. 말하자면 말레비치의 절대주의는 추상화마저도 ‘추상’해버린 것이다.


말레비치의 이러한 급진적인 예술 태도는 이후 젊은 러시아 예술가들에게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그래픽디자이너인 알렉산더 로드첸코(Alexander Rodchen ko, 1891~1956)나 엘 리시츠키(El Lissitzky, 1890~1941) 등 일련의 혁명적 화가는 이러한 말레비치의 급진적 시도 속에서 진정한 프롤레타이아트 혁명의 예술적 수단을 발견했다. 얼핏 말도 안 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말레비치의 예술적 시도는 당대 러시아의 젊은 혁명적 예술가들에게는 낡고도 진부한 부르주아지 예술로부터 벗어나는 탈출구로 받아들여졌다. 특히 엘 리시츠키가 1919년부터 꾸준히 제작한 일련의 실험적 작품인 <프라운(Proun)> 연작은 이를 잘 보여준다. 그는 원, 사각형, 삼각형 등과 같은 기하학적인 추상의 조합만으로 그림을 그렸다.

말레비치는 왜 추상화를 포기해야 했을까?


▎러시아 화가 말레비치의 ‘슈프레마티즘’을 대표하는 작품 <검은 사각형>(1915). 흰 바탕과 검은 사각형이 있을 뿐으로 추상화와도 구별되는 급진적인 작품이다.
그가 이러한 기하학적 추상을 선호한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원, 사각형, 삼각형 등의 기하학적 추상은 구상적 이미지와 달리 사회적 통념이나 이데올로기를 배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과거에 구체적인 대상을 그리는 화가들은 귀족을 그리거나 호수나 바다를 그릴 때는 귀족이라는 통념을 버리지 못하고 위엄 있게 그리거나 호수의 쓸쓸함을 표현하기 위해서 자연을 고독하게 그렸다. 하지만 이러한 회화는 궁극적으로 보자면 당시의 부르주아지 지배계급의 편견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이었다. 이에 반해 리시츠키의 <프라운>은 어떠한 선입견도 배제된 기하학적인 도형으로 구성된 것이므로 그 구성의 원리는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계급적 편견으로부터의 해방’은 곧 과학적 세계관을 의미함과 동시에 프롤레타리아트의 세계관을 의미하는 것이다.

말레비치를 추종하는 일련의 이러한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 자신을 ‘구성주의자(constructivist)’라고 자처하며 새로운 사회의 건설을 위한 온갖 전위적인 예술적 실험을 감행했다. 물론 이러한 전위적인 예술적 실험이 가능하였던 것은 레닌(Vladimir Illich Lenin, 1870~1924)의 예술관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의 구습을 타파하기 위한 예술적 관행에 대해 관대하였으며 이를 새로운 사회건설을 위한 실험으로 여겼다. 그러나 러시아의 이러한 과감한 예술적 실험들, 흔히 말하는 일련의 구성주의자의 실험적 예술은 스탈린이 집권을 한 1934년 이후 그러니까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공식적으로 선언된 뒤에는 강제적으로 퇴각하고 말았다.

스탈린 정부가 공식적으로 표방하여 유일하게 인정한 ‘사회주의 리얼리즘 예술’이란 말 그대로 러시아의 발전된 사회주의 사회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알리는 것이었다. 그들에 따르면, 이것이야말로 인민의 예술이었고, 과거의 구성주의자들이 행한 온갖 예술적 실험은 서구 부르주아지 퇴폐예술의 아류이자 모방으로서 사회주의를 좀먹는 세균과도 같은 것으로 취급당했다. 그리하여 러시아의 회화는 현실 대상을 재현하는 사실주의의 회화라는 19세기 이전의 회화로 되돌아가게 되었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스탈린주의가 표방한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그 이론적 기초로 레닌의 예술 원칙인 현실에의 충실성·사상성·당파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레닌이 생각하는 현실의 충실성과 프롤레타리아트 당파성이 새로운 세계를 위한 과감한 혁명적 시도와 배치되는 것이 아닐뿐더러 오히려 레닌의 사상은 부르주아지 세계와 급진적으로 단절된 혁명적 시도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근대적인 사상의 굴레를 넘어서는 지적인 면모를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전체주의와 획일성을 강조하는 스탈린주의와는 전혀 딴판이라고 할 수 있다. 레닌이 집권한 이후 러시아는 근대 자본주의 사회를 넘어서려는 일련의 혁명적인 실험의 장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실험은 스탈린의 집권과 더불어 일소되었으며, 현실 사회주의는 획일화된 전체주의와 동일한 말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

구시대의 전통회화를 넘어서려는 말레비치 역시 스탈린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선언 이후 스탈린 정부가 허용하는 유일한 형태의 회화인 사실주의 회화로 퇴화하고 만다. 그가 그린 1930년대 이후의 작품을 본다면 사람들은 그 작품이 과연 말레비치의 작품이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다. 1930년대 이후 그는 수프레마티즘이 아닌 구상회화를 그리는데 이 당시 그린 <자화상>(1933)은 바로 이러한 퇴행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더군다나 이 그림을 보면 구상화를 그리면서도 여전히 말레비치는 옷의 주름이라든지 목을 둘러싼 흰색 컬러 등의 모양을 기하학적으로 강조하는 방식으로 기존의 기하학적 도상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안쓰러운 흔적마저 보인다. 그는 외압에 의해서 자신의 실험적인 시도들을 거세당한 현실에 대해서 수치스러움을 느꼈다. 어쩌면 이는 레닌의 혁명적 실험이 스탈린주의에 의해서 좌절 당하는 상징의 하나일지도 모른다.

근대 자본주의 사회를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


▎엘 리시츠키의 <프라운>(1919). 원과 사각형, 삼각형 등과 같은 기하학적인 추상의 조합만으로 그림을 그린 작품으로 사회적 통념을 배제한 프롤레타리아트 세계관을 나타낸다.
프랑스 출신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샤를 베틀레임(Charles Bettelheim, 1913~2006)은 그의 저서 <경제적 계산과 소유의 형태>(Calcul économique et formes de propriété. 1971)에서 자본주의 사회와 사회주의 사회를 소유형태로 구분하는 밑바닥에는 보다 심층적인 경제적 차원이 놓여있음을 주장한다. 그것은 다름아닌 경제적 계산의 형태이다. 그는 부르주아지 사회의 사적 소유가 무엇보다도 모든 재화를 상품으로 취급하고 이를 화폐의 형태로 환원시키는 화폐적 계산의 체계에 바탕을 둔 것으로 해석했다. 그래서 베틀레임은 부르주아지 자본주의 사회를 넘어선 새로운 사회를 만든다는 것은 새로운 경제적 계산의 체계를 창출하는 것이지 외관상 소유의 형태를 국가소유의 형태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새로운 경제적 계산의 형태를 창출하지 않고서 모든 재산을 국가의 소유로전환하는 것은 새로운 형태의 기형적인 지배 권력을 창출할 뿐이다. 그의 주장은 스탈린 시대 이후의 소련 사회를 정확하게 적용된다.

실제로 레닌은 1917년 러시아 혁명과 더불어 정권을 장악한 이후 단지 국유화라는 형식적 제도에 집착하지 않았다. 그는 근대 부르주아지 국가가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착취에 기반한 사회였다면 이러한 사회의 전복은 곧 프롤레타리트와 농민이 역으로 이외의 계급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사회로 바꿔야 한다고 믿지 않았다. 오히려 근대 부르주아지 사회를 넘어선다는 것은 착취와 억압이 없는 사회를 만드는 것을 의미했다. 모든 토지와 산업기반, 그리고 토지를 단순히 국가의 소유로 강제한 스탈린의 정책과 달리 레닌은 착취 일반을 없앨 수 있는 새로운 제도가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해서 고민했다. 국제사회에서의 고립을 피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일시적으로 화폐 및 시장경제를 일부 수용하게 된 1920년대의 ‘신경제정책(NEP, New Economic Policy)’으로 전환하기 이전까지 레닌은 실험적이고도 혁명적인 사회적 정책을 시도했다.

가령 그는 화폐를 없애기 위해서 현물중심의 경제를 운영하기도 하여 화폐에 의한 자본의 가치증식과 착취 일반의 가능성 자체를 차단하고자 하는 시도를 했다. 물론 이러한 실험이 성공적인 것은 아니었다고 할지라도 여기서 레닌의 의도는 외관상 평등을 지향하면서 착취를 정당화하는 부르주아지 근대사회의 모순을 극복하고자 하기 위한 것이 틀림없다. 이러한 노력이 비록 성공적인 것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레닌의 머릿속에는 부르주아지 자유주의라는 관념론적 체계를 어떻게 극복하는가 하는 것이 너무나도 중요한 문제였던 것이다. 부르주아지 자유주의는 겉으로는 시민의 자유, 만인의 평등을 떠들어대지만 그것은 밑바닥에 존재하는 착취의 현실을 은폐하거나 미화하는 데 그치는 관념적 허울에 지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이비 유물론인 ‘경험비판론’을 공격


▎말레비치의 1930년대 이후의 작품인 <자화상>(1933). 스탈린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선언 이후 슈프레마티즘에서 사실주의 회화로의 퇴행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레닌은 철저한 유물론 신봉자,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변증법적 유물론의 신봉자였으며 그의 사상적 적은 관념론이었다. 레닌이 생각하기에 관념론은 물질적 세계를 의식의 한 형태로 간주하여 인간의 의식이야말로 세계를 변형시키는 힘으로 간주한다. 이러한 관념론적 세계관은 현실이 아닌 복잡하고도 고차원적인 인간의 정신적 힘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으며, 일반인들은 그러한 관념으로부터 철저하게 배제된다. 관념론은 지배계급의 이익과 불가분의 관련을 맺고있는 것이다. 레닌이 관념론을 배격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에 전제된 계급적 이해관계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유물론적 세계관은 관념론과 달리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세계에 대한 명쾌한 이해방식이기 때문이다.

레닌이 자신의 유물론 철학을 설파하고자 한 대표적인 저서는 <유물론과 경험비판론>(Materialism and Empiriocriticism, 1908)이다. 이 책은 변증법적 유물론을 왜곡과 속류화로부터 구해낸 레닌의 철학 저작으로 꼽힌다. 레닌은 이 책에서 자신의 유물론 교리를 설명하기 위해서 이와 대비되는 ‘경험비판론’이라는 이론을 비판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경험비판론’이라는 철학은 대표적인 관념론 철학이라기보다는 스스로 유물론 혹은 경험론을 자처하는 철학이었다는 점이다. ‘경험비판론’은 오스트리아 출신의 사회주의적 성향을 지닌 과학 철학자 에른스트마흐(Ernst Mach, 1838~1916)에 의해서 창시된 것으로서 당시 레닌이 소속되었던 러시아 사회민주당의 많은 사람들이 신봉하던 이론이었다.

레닌이 마흐의 ‘경험비판론’을 공격한 것은 사회주의 혁명을 신봉하던 러시아 사회민주당의 멘셰비키가 신봉하던 철학이었기 때문이다. 볼셰비키를 대표하는 레닌이 보기에 멘셰비키가 추종하는 ‘경험비판론’은 결코 유물론의 한 형태가 아닌 관념론의 한 변형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경험비판론이 유물론의 교의와는 전적으로 다른, 아니 정반대인 관념론의 성격을 지닌다는 것을 명확하게 밝히는 것을 이 책의 목표로 삼는다. 레닌의 말에 따르자면 그가 이 책을 쓴 동기는 마르크스주의의 옹호라는 허위적인 슬로건으로 마르크스주의를 왜곡하고 관념론으로 둔갑시킨 마흐주의의 오류를 폭로하는 것이었다.

레닌에 따르면 경험비판론이 유물론을 빙자하고 있으나 관념론의 특성을 지니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다. 유물론의 가장 기본적인 교의는 물질과 의식의 관계에서 물질은 우리의 의식과 관계없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눈을 뜨고 있건 감고 있건 태양은 그대로 존재하며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사과는 그 물질적 특성 때문에 빛에 반사되면 대표적으로 붉은색 파장을 띠게 되어 우리에게 붉은색으로 지각된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어떻게 보느냐에 따른 것이 아니라 물질 그 자체가 지닌 특성들이다. 유물론은 물질과 의식의 관계에서 물질에 우선성을 부여한다.

이에 반해서 마흐의 ‘경험비판론’은 매우 교묘한 방식으로 유물론의 교의를 관념론으로 바꿔놓는다. ‘경험비판론’에서 핵심은 경험이다. 이때 경험은 우리의 물질세계에 대한 경험을 뜻한다. 그런데 이때 우리가 경험하는 물질세계는 오로지 감각을 통해서만 알려진다. 가령 사과는 우리가 만져봤을 때 일정한 공간을 점하고 있으며 빨간색을 띠며 시고 단 맛이 난다. 사과에 대한 이 모든 정보는 우리의 감각으로 알아낸 것들이다. 따라서 마흐는 ‘존재란 감각’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마흐에 따르면 이때 감각은 단지 우리의 주관적인 의식 활동에 국한되지 않는다. 감각자체가 물질을 이루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빨간색, 신맛, 구형 등의 요소는 사과라는 물질의 특성이자 동시에 우리의 감각에 의해서 지각되는 이중적인 특성을 지니는 것이다. 한마디로 마흐가 말하는 이러한 감각적 요소는 물질이자 동시에 의식이다.

레닌이 보기에 이러한 마흐의 주장은 하나의 궤변이자 궁극적으로 관념론의 변형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과 상관없이 독립적으로 자연과 물질 자체가 가지고 있는 합법칙적 특성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감각이란 인간의 의식 활동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만 마흐는 감각을 의식과 물질이라는 두 항 모두를 포괄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결국 마흐의 감각이론, 즉 경험비판론은 물질적 세계의 독자성을 거부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유물론의 교의와 양립할수 없는 관념론의 한 양태에 불과하다.

레닌에게 철학이란 사상투쟁이자 계급투쟁


▎1 레닌에게 철학적 사상논쟁이란 그 자체가 하나의 사상투쟁이자 계급투쟁이었다. 모스크바 붉은광장에 있는 크렘린의 한쪽 담 옆에 피라미드처럼 돌로 단을 쌓아 만든 레닌의 묘지가 있다. 2 어두운 공간 안에 홀연히 홀로그램처럼 빛이 비추는 레닌의 얼굴. 생전 모습 그대로 주검을 방부 처리해놓았다.
레닌은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을 통하여 치열한 철학적 논쟁을 벌인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그는 자신의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한다. 그는 결코 철학의 전문가가 아니며 그가 철학적 논쟁을 벌이는 것은 진리를 설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레닌이 이 책을 통하여 치열하게 경험비판론을 공격하는 것은 정치적 목적을 위한 것이었다. 말하자면 그의 사상투쟁은 일종의 정치투쟁인 셈이다. 그는 유물 변증법을 단지 진리이기 때문에 그것을 지지하며 이를 위하여 정적들과 목숨을 걸고 투쟁하고자 한 것만은 아니다. 레닌에 따르면 유물변증법이야말로 유일하게 모든 인민이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자명한 철학적 학설이자 이론이다. 진리가 특정한 사람들만 볼 수 있는 비밀의 언어로 쓰여 있다는 것은 마치 바티칸의 미사를 특별한 사람들만 알아들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미사가 반드시 라틴어로만 진행되어야만 하나님에게 그 뜻이 전달될 수 있을까?

레닌에게 철학적 사상논쟁이란 그 자체가 하나의 사상투쟁이자 계급투쟁이었던 것이다. 그는 진리를 탐구하고 진리의 탐구장에 들어서서 아카데믹한 철학적 논쟁을 벌이고자 한 것이 아니다. 레닌이 보기에 철학이란 사상의 형태로 이루어진 계급투쟁에 불과한 것이다. 레닌의 이러한 생각은 근대적인 사유를 뛰어넘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근대의 많은 사상가는 철학이란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며 진리란 곧 어떠한 특정한 관점이나 편견에도 좌우되지 않는 객관적이고 의심의 여지없는 진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서 레닌에게 철학이란 하나의 사상적 투쟁의 수단에 지나지 않았으며, 진리란 바로 현실의 국면에서 그것이 어떤 기능과 의미를 지니는가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이었다.

레닌에게 철학이란 그저 진리탐구나 앎의 활동이 아니다. 그것은 정치적 활동과 관련이 있다. 이러한 점에서 레닌의 철학적 태도는 니체나 푸코의 태도와도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주지하다시피 니체에게 철학이란 진리탐구라기보다는 진리탐구를 빙자하는 하나의 권력 행위이며, 푸코에게서도 앎이란 ‘앎의 의지’, 즉 권력의 의미를 바탕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니체는 자신의 책에서 니체와 푸코처럼 지식을 권력투쟁이라는 말로 명시적으로 정의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미 이들의 생각을 실행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레닌의 철학은 근대 철학의 관행을 훌쩍 뛰어넘은 것이기도 하다.

레닌의 강점은 추상적인 교리에 맹목적으로 빠지거나 혹은 구체적인 현실 자체에 매몰되지 않고 추상과 구체를 적절하게 조화하여 사고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를 변증법적 유물론의 사고라고 믿었다. 가령 러시아 사회민주당의 멘셰비키는 마르크스의 역사 유물론 공식을 추상적으로 대입하여 현 러시아 사회가 봉건제 농노사회이기 때문에 가장 시급한 혁명의 과제는 부르주아 시민사회 혁명을 통하여 자본주의를 발전시키고 난 후 사회주의 혁명으로 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자신들이 알고 있던 마르크스 텍스트나 교리를 기계적으로 적용한 것이었다.

레닌은 <러시아에서 자본주의의 발전>(1899)이라는 책을 통하여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철저하게 분석하고 이를 융통성 있게 적용하여 러시아에서 봉건제 농업양식의 형태와 더불어 시장경제가 발생하고 있음을 학술적으로뿐만 아니라 구체적으로 증명했다. 그리하여 그는 현재의 시기가 사회주의 혁명의 시기임을 명백하게 밝히고 이를 실행하고자 했다. 이는 거대이론이라는 추상에 사로잡힌 근대적인 방식에 일침을 가하는 것이었다.

로자와 힐퍼딩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다


▎레닌이 추구하고자 했던 것은 바로 추상과 구체의 결합, 즉 변증법적 통일이었으며 레닌의 이러한 이상은 근대적인 합리성의 추구나 거대이론의 집착을 넘어선 것이었다.
레닌이 추구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추상과 구체의 결합, 즉 변증법적 통일이었으며 또한 제국주의나 독점자본주의의 문제에 있어서도 그는 추상에 사로잡혀 구체적 현실의 가능성을 묵과한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 1871~1919)나 정반대로 일시적이고 구체적인 현상을 일반론으로 확장한 루돌프 힐퍼딩(Rudolf Hilferding, 1877~1941)을 비판적으로 수용한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자본의 축적>(Die Akumulationdes Kapitals, 1912)에서 제국주의의 정치경제학적 토대를 명쾌하게 다룬다. 그녀는 마르크스의 <자본론> 2권에 나타난 ‘확대재생산의 표식’을 전제로 자본주의의 발전은 추가적인 자본의 공급, 즉 확대 재생산이 자본주의 경제의 필수불가결한 조건임을 증명한다. 제국주의란 서구사회가 이미 포화된 국내 시장의 범위를 벗어나서 추가적인 이윤을 습득하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비서구적인 시장을 개척하는 과정이다. 말하자면 자본주의가 살아남기 위해서 확대재생산을 하는 과정이 제국주의인 것이다. 그녀에 따르면 제국주의는 자본주의의 마지막 단계로서 제국주의의 과정이 완성되면, 즉 비서구 시장이 모두 자본주의 시장으로 전환되면 더 이상의 자본축적이 불가능 해져서 자본주의는 붕괴하고 만다. 레닌은 이러한 로자의 생각이 마르크스의 확대재생산 표식을 추상적이고 기계적으로 적용한 결과이며 현실의 구체를 무시한 것이라고 보았다. 현실에서 제국주의 국가는 내수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확대재생산이 가능하다.

한편 힐퍼딩은 그의 주저 <금융자본론>(Finazkapital, 1910)을 통해서 자본주의 사회가 발전하며 금융자본이 산업자본을 지배하여 금융자본의 독점이 도래하여 자본주의 사회는 금융자본에 의한 독점자본주의로 이행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그의 분석은 실제로 19세기말 독일의 자본주의 상황에 의해서 충분히 증명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레닌에 따르면 이는 오로지 19세기말 독일의 자본주의 현상을 일반화한 것에 불과하며 자본의 근본적인 출처는 산업자본이라는 마르크스의 전제와도 상충되는 것이었다.

이는 21세기의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충분히 목격된다. 미국이나 아이슬란드, 아랍에미레이트와 같은 국가는 20세기 후반 들어 금융산업에 집중했다. 한때 이들은 번성할 수 있었지만 어느 순간 사상누각처럼 허물어지고 말았다. 그 이유는 아무리 금융자본이 힘을 발휘한다고 해도 산업자본이 이익을 발생 시키지 못한다면 일순간 파산하고 말기 때문이다.

레닌은 로자 룩셈부르크의 분석은 지나치게 마르크스의 이론을 교조적으로 해석하고 이를 추상화하여 현실에 적용한 반면, 힐퍼딩은 구체적인 상황을 성급하게 일반화하여 마르크스의 원칙으로부터 일탈하여 현실을 왜곡하는 오류를 범했다고 비판했다. 레닌이 추구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추상과 구체의 결합, 즉 변증법적 통일이었으며 레닌의 이러한 이상은 단순히 근대적인 합리성의 추구나 거대이론의 집착을 넘어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박영욱 고려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칸트 철학에서의 선험적 연역의 문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사회철학에 대한 관심에서 철학에 입문한 이후 문화와 예술의 영역으로 관심의 지평을 확대해 대중음악과 예술사, 특히 매체예술 분야를 공부해 건축 디자인의 사회철학적 의미를 연구했다. 현재 숙명여대 교양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매체, 매체예술 그리고 철학> <철학으로 대중문화 읽기> <필로아키텍처-현대건축과 공간, 그리고 철학적 담론> <들뢰즈와 데리다-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에서> 등이 있다.

201412호 (2014.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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