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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호의 ‘조선왕조 스캔들’(4)] 태조 이성계, 사리(舍利) 수집에 몰두하다 

조선왕조 창업 직전, 아내 강씨와 함께 심취… 태종 대에 들어 명에 보내지는 등 모두 사라져 

신명호 부경대 사학과 교수

▎조선 태조 이성계와 그의 부인 강씨는 사리신앙에 심취해 있었다. KBS 사극 <용의 눈물>에서 병들어 누워 있는 이성계를 그의 5남인 태종 이방원(유동근 분, 왼쪽)과 2남인 정종 이방과(태민영 분)가 보살피는 장면.
1392년 7월 17일, 태조 이성계가 백관의 추대를 받고 개경 수창궁에서 즉위함으로써 조선왕조가 개창됐다. 태조 3년(1394) 10월에는 한양 천도가 단행돼 한양 조선이 개시됐다. 천도 당시 한양의 종묘, 사직, 궁궐 등은 터만 결정된 상태라 태조는 임시 거처에서 생활했다.

궁궐과 종묘 공사는 태조 4년(1395) 9월에 마무리 됐고, 한 달 후에는 종묘이안도감(宗廟移安都監)이 설치됐다. 당시 종묘 이안은 개경에 있던 종묘 신주를 한양 종묘로 옮겨 모시는 역사적인 행사였다.

10월 5일 태조는 면류관 차림으로 종묘제사를 거행했다. 유교의례에 맞춰 거창하고 웅장하게 치러진 이 행사는 신왕조 조선이 유교국가임을 만천하에 선포하는 의식이었다. 새로 건설된 궁궐 역시 조선이 유교국가임을 만천하에 공포했다.

10월 27일 정도전은 궁궐 이름을 경복궁으로 지어 올리고, 그 외 각 건물과 문의 이름도 지어 올렸다. 정도전은 연침을 강녕전, 동소침을 연생전, 서소침을 경성전, 보평청을 사정전, 정전을 근정전, 정전의 문을 근정문 등으로 지었는데 이런 이름들은 모두 이상적인 유교정치를 상징했다. 이처럼 종묘제사, 궁궐명명 등이 모두 유교식으로 이루어진 이유는 태조가 신왕조 조선을 유교 국가로 표방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막을 좀 더 들여다보면 신왕조 조선이 과연 유교국가인지, 또 태조는 과연 유교국가 왕인지 의심하게 만드는 일이 적지 않았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사례가 태조의 사리 수집과 사리탑 건축이었다.

태조가 경복궁에 입주한 시점은 4년(1395) 12월 28일이었는데, 당시 한양은 도성 축조로 분주했다. 태조는 ‘씨 뿌릴 때가 되면 모두 돌려보내 농사짓게 하겠다’고 공언함으로써 적어도 다음해 3월 이전에 공사를 마무리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냈다. 과연 태조는 다음해 2월 28일 일꾼을 모두 돌려보냄으로써 공사를 마무리했다. 이로써 한양건설은 일단락됐다.

그런데 실록에 의하면 한양건설이 일단락되기 직전에 태조는 기이한 명령을 내렸다. 개성 송림사에 보관돼 있던 불두골(佛頭骨)·불아(佛牙)·진신사리·가사·보리수엽경(菩提樹葉經) 등을 궁궐로 가져오라 명령했던 것이다. 왜 이 명령이 기이한가?

태조가 가져오게 한 불두골·불아·진신사리·가사·보리수엽경 등은 본래 통도사에 보관돼 있었다. 그러다가 고려 말 왜구가 창궐하자 안전 보관을 위해 개성 송림사로 옮겨왔다. 이 불두골·불아·진신사리·가사·보리수엽경 등은 불교 보물 중에서 가장 영험하다고 알려졌는데, 태조는 바로 그것들을 수집하려 했던 것이다. 유교국가를 표방하는 창업군주가 다른 것도 아닌 불교 보물을 공개 수집하려 한 것은 아무래도 기이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부처님의 분신이자 영물로 알려져


▎이성계의 어진(御眞).
삼국시대에 불교가 전래된 이래 우리나라 사람들은 진신사리를 부처님의 분신이자 신통한 영물로 신앙했다. 신라 이래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신앙한 진신사리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가져왔다는 진신사리였다.

자장율사는 선덕여왕 때 당나라 오대산으로 가서 흙으로 빚은 문수보살상을 만났다. 그 앞에서 기도하던 율사는 문득 잠이 들었다. 꿈에서 문수보살이 율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범어로 된 노래를 불렀지만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다음날 이상한 스님이 나타나 “너의 나라 왕은 인도 크샤트리아 종족의 왕이고, 미리 부처님의 예언을 받았기에 특별한 인연이 있어서, 동쪽 오랑캐의 종족과는 같지가 않도다. 그러나 동쪽 오랑캐는 산천이 험악하고 사람 품성이 거칠어 사악한 견해를 많이 믿으므로, 간혹 천신이 화를 내리는도다. 하지만 법문을 많이 들으신 스님이 나라 안에 머문다면 이로써 군신이 평안하고 만민이 화평하리라”는 뜻이라고 해석해줬다. 율사는 그 이상한 스님이 바로 문수보살의 화신임을 깨닫고 피눈물을 흘리며 물러갔다고 한다.

그렇다면 율사는 왜 피눈물을 흘렸을까? 그 이유를 이렇게 추정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문수보살의 노래에 의하면 신라에서 군신이 불화하고 만민이 불행한 이유는 왕 즉, 선덕여왕은 훌륭한데 비해 사람들은 거칠고 사악한 견해를 많이 믿기 때문이었다. 그런 비극에서 벗어나려면 법문을 많이 들으신 스님이 나라 안에 머물러야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만한 스님이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율사는 신라의 비극이 계속되리라는 절망감에 피눈물을 흘렸다고 짐작된다. 그렇게 절망 상태로 오대산 태화지(太和池)를 지나던 율사에게 문득 신인(神人)이 나타나 “어째서 이곳에 왔습니까?” 하고 물었다. 율사는 “깨달음을 구하고자 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신인이 율사에게 예배하고 묻기를 “당신 나라에 어떤 어려움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율사는 “우리나라는 북으로 말갈에 이어 있고 남으로 왜인에 인접해 있으며 또 고구려와 백제가 번갈아 침략하고 왜구가 날뛰니 이것이 백성의 환난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신인은 신라의 왕이 여성이기 때문에 그렇게 됐다고 하며 율사에게 속히 귀국하라고 했다.

“자기가 귀국한다고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라는 율사의 항변에 신인은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우고 팔관회를 열면 이웃나라가 항복하여 나라가 태평해지리라고 예언했다. 아울러 자신을 위해 경주 남쪽에 절을 세우고 복을 빌어달라며 불두·불아·진신사리·가사 등을 주고 사라졌다.

자장율사가 태화지에서 만난 신인은 사실 태화지의 용이었다. 그 용은 절망에 빠진 율사에게 신라의 비극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은 바로 자장율사 본인과 더불어 불두·불아·진신사리·가사 등이라고 알려줬던 것이다. 자장율사 본인은 문수보살이 예언한 ‘법문을 많이 들으신 스님’이었고 불두·불아·진신사리·가사 등은 사악한 견해를 많이 믿는 신라 사람들을 제압할 불교 보물이었다. 황룡사 9층탑과 경주 남쪽의 절은 바로 이 같은 불교 보물을 모시기 위한 사리탑으로서 필요했던 것이다.

귀국 후 율사는 황룡사 9층탑, 울산 태화사, 양산 통도사를 세우고 당나라에서 가져온 진신사리를 나눠 모셨다. 이 중에서 황룡사 9층탑은 이웃나라를 제압하고 나라의 태평을 가져오기 위한 국가적 목적을 띠었다. 반면 울산 태화사는 태화지의 용을 위한 개인적 목적을 지녔다.

사리신앙에 흠뻑 빠진 태조 내외


▎고려 말 사리신앙의 중심지였던 경남 양산 통도사에 있는 사리탑.
태화사라는 절 이름 자체가 태화지에서 왔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양산 통도사는 이웃나라를 제압하고 나라의 태평을 가져오기 위한 국가적 목적, 태화지의 용을 위한 개인적 목적에 더하여 이 둘을 포괄하려는 자장율사의 사명을 위해 세워졌다고 할 수 있다. 즉 ‘법문을 많이 들으신 스님’으로서의 사명과 역할을 수행하기 위한 목적에서 양산 통도사가 지어졌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자장율사의 사후 유품뿐만 아니라 율사가 당나라에서 가져온 진신사리에 더하여 불두·불아·가사·불경 등이 모두 양산 통도사에 모셔졌다. 양산 통도사에 모셔진 불두·불아·진신사리 등은 황룡사 9층탑 같은 탑이 아니라 부도 형태의 계단(戒壇)에 모셔졌다.

<삼국유사>에서는 신라가 황룡사 9층탑, 울산 태화사, 양산 통도사를 세워 불두·불아·진신사리·가사 등을 모신 후부터 운수 대통해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고 기록했다. 이런 기록은 자장율사 귀국을 기점으로 신라에 사리신앙이 크게 일어났으며 사리신앙의 중심지는 황룡사 9층탑, 울산 태화사, 양산 통도사였음을 알려준다.

그런데 황룡사 9층탑은 몽고의 침입 때 소실됐고, 울산 태화사는 고려 말 왜구가 창궐하면서 크게 훼손됐다. 반면 양산 통도사는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아 온전했다. 이에 따라 고려 말 사리신앙의 중심지는 단연 양산 통도사였다.

고려 말에 양산 통도사의 사리신앙이 왕실에서도 얼마나 독실했는지는 공민왕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1361년(공민왕 10) 겨울에 홍건적이 대거 침입해 오자 공민왕은 안동으로 파천했다. 다음해 1월 최영 장군, 이성계 장군 등의 활약으로 개경에 있던 홍건적이 격멸되자 공민왕은 안동을 떠나 개경으로 향했다. 상주를 지나 속리산을 지나던 공민왕은 속리사(俗離寺)에 들렀다. 통도사에서 옮겨온 불골(佛骨) 즉 불두와 불아 그리고 진신사리·가사 등을 친견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기록이 <고려사>에 실린 것을 보면, 당시까지도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가져온 불두·불아·진신사리·가사 등이 통도사 계단에 보관 돼왔다는 믿음이 이어지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공민왕이 불두·불아·진신사리·가사 등을 양산 통도사가 아닌 속리산 속리사에서 친견했다는 것은 이 불교 보물들이 이미 속리사에 옮겨와 있었다는 뜻이 된다. 아마도 그 이유는 고려 말의 왜구 창궐 때문일 듯하다. 이후 어느 시점인지는 모르지만 속리사에 모셔졌던 불두·불아·진신사리·가사 등이 또다시 개성의 송림사로 옮겨졌는데 공민왕이 가져왔을 가능성이 높다.

홍건적과 왜구가 날뛰는 당시의 상황은 자장율사 당시 신라가 남북에서 침략당하던 상황과 유사했다. 그런데 신라는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가져온 불두·불아·진신사리·가사 등의 영험한 힘으로 국난을 극복하고 3국을 통일했다.

그렇다면 공민왕 역시 부처님 사리의 영험한 힘에 의지해 홍건적과 왜구를 극복하려 염원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나아가 이런 염원은 공민왕 개인뿐만 아니라 당시 고려인들 사이에도 널리 퍼져 있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실제 그런 증거들이 적지 않게 발견되는데, 예컨대 조선 창업 이전의 이성계에게서도 사리신앙 흔적이 보인다.

1932년 금강산에서 산불 저지선 공사를 하던 중 우연히 월출봉의 한 석함(石函) 안에서 여러 종류의 사리장엄구가 발견됐다. 사리장엄구는 말 그대로 사리를 모시기 위한 장엄구인데 백자사발, 청동그릇, 라마탑형 사리기, 팔각탑형 사리기 등 여러 가지였다. 이들 사리장엄구 중에 ‘금강산 비로봉 사리 안유기(安遊記)’라는 명문이 있어서 원래는 비로봉에 모셔졌다가 후에 월출봉으로 옮겨졌음을 미뤄 짐작할 수 있다.

명문에 의하면 사리장엄구는 1390년 봄 그리고 1391년 봄과 여름에 제작됐다. 이때는 조선이 건국되기 1~2년 전이었다. 핵심 발원자는 당시의 실력자로서 시중의 자리에 있던 이성계 그리고 그의 부인 강씨였다. 이들 사리장엄구는 종류가 다양해 여기 들어간 사리는 몇 십 과는 됐으리라 추정된다.

사리 그리고 사리장엄구에 필요한 비용은 핵심 발원자인 이성계와 부인 강씨가 중심이 돼 마련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따라서 1390년과 1391년 즈음에 이성계와 부인 강씨가 사리신앙에 깊이 빠져 있었을 뿐만 아니라 사리 수집에도 몰두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사리장엄구의 명문 중에는 “석가모니께서 입멸하신 때로부터 2400여 년이 지난 대명(大明) 홍무 24년(1391) 신미 5월 모일에, 월암(月菴) 스님이 지금의 시중 이성계 등과 함께 서원(誓願)을 내어 (사리를)금강산에 묻어뒀다가, 미륵께서 세상에 나올 때를 기다려 사람들에게 받들어 보임으로써 진정한 교화를 돕고 불도(佛道)를 함께 이루고자 했다”는 내용이 있다. 이에 의하면 이성계 등이 사리를 금강산 비로봉에 모신 이유는 미륵이 출현했을 때 공양물로 바치기 위해서였다.

미륵은 석가모니 부처님 다음에 오실 미래불로 먼 훗날 인간세계로 내려와 용화수 밑에서 깨달음을 얻고 3회 설법을 통해 중생을 구제한다고 믿어지는 부처님이었다.

한국사에서 미륵불은 현실세계의 절망과 비극이 높을 때 유행하곤 했다. 고려 말 홍건적과 왜구로 고통받던 우리조상들 역시 미륵불에게서 희망을 찾았던 것이다. 미륵 신자들은 언제 오실지 모르지만 미륵이 오시는 그때 구원받기 위해서는 미륵의 3회 설법에 참여해야 한다고 믿었다. 당연히 설법에 참여할 때는 자신들의 정성을 표시할 만한 공양물 예컨대 향·옥·사리 등등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문제는 미륵이 언제 오실지 기약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기약이 없기에 준비한 공양물을 오래도록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는 장소가 필요했다. 그래서 금강산 비로봉처럼 신비롭고 외진 곳이 안전한 보관처로 선호되곤 했다.

이성계 등이 발원한 사리장엄구 역시 미륵의 3회 설법에 참여할 때 바치기 위한 공양물로 준비됐고, 또 안전하게 오래 보관하기 위해 비로봉에 봉안됐던 것이다. 특이한 점은 사리장엄구의 발원자로 월암 스님, 시중 이성계 이외에 이성계의 부인 강씨, 낙랑군 부인 김씨, 강양군 부인 이씨, 낙안군 부인 김씨, 흥해군 부인 배씨 등 여성이 대거 참여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고려 말 여성들이 사리신앙 활동에 열성적으로 참여했음을 방증한다고 하겠다.

태조, 세상 떠난 강씨 위해 사리탑을 짓는데

그런데 홍무 24년(1391) 5월 당시에는 이성계의 향처(鄕妻) 한씨도 살아 있었다. 그럼에도 한씨는 발원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도 못했다. 이성계 등이 발원한 사리장엄구가 미륵의 3회 설법에 참여할 때 바치기 위한 공양물이라면, 명단에서 빠진 향처 한씨는 참여자격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나쁘게 해석하면 이성계와 강씨 둘만 구원받아 불국정토로 들어가고 향처 한씨와는 같이 가지 않겠다는 뜻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생각은 아무래도 이성계 본인 보다는 경처(京妻) 강씨가 더 강했을 듯하다. 이는 조선창업 전에 이성계의 사랑을 경처 강씨가 독점했으며, 나아가 이성계의 사리신앙 활동 역시 경처 강씨가 좌우했고, 사리수집 활동 역시 강씨가 주도했기 때문이라 짐작된다.

이성계의 사리신앙이 미륵의 3회 설법에 참여할 때 바치기 위한 공양물과 연관되었다면 이성계는 가능한 더 영험한 사리를 원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아마도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 이후 권력을 이용해 영험하다고 소문난 사리들을 열성적으로 수집했을 듯하다. 그러다가 조선을 건국한 후 불두·불아·진신사리·가사까지 확대해 수집했던 것이라 하겠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태종 7년(1407)에 국왕이 전국에서 영험하다 소문난 사리를 모두 수집했는데 그 결과 경상도에서 164과, 전라도에서 155과, 강원도에서 90과, 충청도에서 45과 등 총 254과였다. 그런데 당시 상왕으로 있던 이성계 개인이 소장한 사리가 300여 과가 넘었다. 이는 그동안 이성계가 강씨와 더불어 전국적으로 사리 수집을 한 결과일 것이다.

조선 건국 후 태조 이성계와 더불어 열성적으로 사리를 수집하던 왕비 강씨는 1396년(태조 5) 8월 13일 세상을 떠났다. 가장 영험하다고 소문난 불두·불아·진신사리·가사 등을 수집한 지 반년 만이었다.

태조 이성계는 왕비 강씨를 위해 한양 도성 안에 무덤을 만들었고 절도 지었다. 정릉과 흥천사가 그것이었다. 나아가 흥천사에 사리탑을 조성하기 위해 1398년(태조 7) 4월 흥천사에 행차해 사리탑의 터를 살폈고 5월에는 흥천사 북쪽에 3층의 사리탑을 세우라 명령하기까지 했다. 이렇게 시작된 흥천사 사리탑은 1년 반 정도의 공사를 거쳐 정종 1년(1399) 10월에 완공됐다.

흥천사 사리탑은 흔히 볼 수 있는 석탑과는 달리 3층의 거대한 목탑이었다. 그것도 직접 안으로 들어가 예불할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건물이어서 사리전이라고도 했다. 사리전 안에는 3층의 석탑을 세우고 그 안에 사리를 모셨는데, 바로 태조가 수집한 사리 중에서 가장 영험하다고 알려진 불두·불아·진신사리·가사 등이었다.

현재 흥천사 사리전이 남아있지 않아 정확히 어떤 모습인지는 알 수 없지만 짐작하건대 전체적인 분위기는 경주의 황룡사 9층탑에 비견됐을 듯하다. 안에 모신 사리 역시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가져왔다는 부처님의 사리였다. 이에 따라 흥천사 사리전은 조선건국 직후 한양을 대표하는 건축물이자 종교성지로서 관광객과 불교신도들로 북적대는 명소가 됐다.

태조 이성계 역시 자주 흥천사 사리전에 행차해 예불했다. 태조가 상왕으로 있던 정종 2년(1400) 4월에는 상왕 자신이 예불하던 중 사리 4매가 분신하는 기적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처럼 조선 초기 흥천사 사리전은 태조가 세웠다는 상징성을 갖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사리분신 기적까지 일어나는 영험한 도량이기도 했다. 훗날 세조도 사리분신으로 얻은 102개의 사리를 이곳에 모시고 그 기념으로 흥천사 종을 만들기도 했다.

흥천사의 권위를 추락시킨 태종


▎개성에 있는 고려 공민왕릉 전경.
그러나 태조의 사리신앙은 바로 아들 태종과 손자 세종에 의해 산산조각 나기 시작했다. 1398년 8월, 정안군 이방원은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태조 이성계를 왕위에서 밀어냈다. 태조가 불두·불아·진신사리·가사 등을 수집한 지 2년 반 만의 일이었고, 흥천사 사리전 공사를 시작한 지 3개월 만이었다.

태조가 세상을 떠나자 태종은 흥천사 사리전에서 기적 실험을 감행하기까지 했다. 사리분신이라고 하는 현상이 실제로 일어나는 기적인지 아니면 사기행위인지를 실험했던 것이다.

태종은 동왕 15년(1415) 7월에 100명의 스님을 모아 흥천사 사리전에서 사리분신을 기도하게 했다. 그 정근법석에는 당대의 고승 설오를 비롯하여 유명한 스님들도 참여했다. 불교계 입장에서 본다면 최고의 영험도량에 최고의 스님들이 모인 정근법석이었다. 만약 사리분신 기적이 실제 일어나지 않는다면 불교계에 막대한 타격이 예상됐다. 정근법석은 호조참의 김계란과 환관 노희봉이 관장했다. 법석이 시작된 지 하루 만에 사리분신 기적이 일어났다며 환관 노희봉이 분신사리 1매를 바쳤다.

실록에 의하면 정근법석을 시작한 다음날 아침에 푸른 보자기 위에 분가루같이 희고 작은 물건 네 개가 나타났다고 한다. 스님들은 “세 개는 서기(瑞氣)이고 조금 큰 것 한 개는 사리”라고 했다. 사리분신 기적이 일어났다는 뜻이었다. 이에 김계란은 사리 1개를 향수로 씻은 후 서기 3개와 함께 그릇에 담고 보자기로 싸서 노희봉에게 줘 태종에게 올리도록 했다. 태종은 그것이 진짜 사리인지 확인하기 위해 마늘을 먹지 않는 사람을 시켜 손으로 비벼보게 했다. 만약 진짜 사리라면 그대로 남아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가루로 부서졌다.

태종은 김계란과 노희봉을 불렀다. 먼저 김계란에게 “어찌하여 나를 속였느냐?”라고 물었다. 김계란은 “그때 여러 스님과 직접 보고 바쳤습니다. 분명 중간에 잃어버린 것일 것입니다. 또 사리라고 하는 것은 신통한 물건이어서 숨었다 나타났다 하는 것이 무상합니다. 스님들이 모두 말하기를 불결하면 곧 없어진다고 하였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속인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었다.

태종은 다시 노희봉에게 “네가 처음에 가지고 올때 분명 사리를 보았느냐?”라고 물었다. 노희봉은 “김계란과 스님들이 모두 분신사리라 말했고, 신도 또한 가늘고 작은 흰 물건을 봤습니다. 그것을 사리라 생각하고 받들어 올렸는데, 지금 내어 보니 과연 흰 가루였습니다”라고 했다. 태종이 김계란에게 “네말이 정말이냐?” 하고 묻자 그는 “정말입니다. 감히 속이지 못합니다”라고 대답했다.

김계란의 주장대로라면 어떤 경우이든지 상관없이 사리가 분명하다는 것이었다. 만약 태종이 본 것이 사리가 아니라 그냥 가루였다면 그것은 중간에 누군가가 바꿔치기를 했거나 아니면 불결하기 때문에 사리 스스로가 숨어버렸다는 것이다. 부처님의 영험함은 확실하다는 것이었다. 이런 태도는 부처님에 대한 신앙심에서 나왔다고 하겠다. 그러나 사리분신 기적을 믿지 않는 태종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불법의 허실을 시험하고자 하여 스님들을 모아 기도하게 하였다. 또 사리를 가져왔다는 말을 듣고 근시(近侍)하는 어린 환관으로 하여금 깨끗한 곳에서 보게 하였다. 만약 그것이 정말 사리였다면 무슨 불결한 것이 있다고 도로 숨었겠는가? 너희들이 처음에 다른 물건을 가지고 와서 나를 속인 것이다. 속인 것이 드러나고 변명할 말이 궁색해지자 도리어 사리가 숨었다고 하니 정말로 속이는 것이다.” [<태종실록> 권 30, 15년 7월 23일]

허망한 결말은 제왕학이 허약했던 탓

사기당했다고 생각한 태종은 김계란과 노희봉을 의금부에 하옥하고 국문까지 하려고 했다. 임금을 속인 죄라면 그 파장이 일파만파로 확대될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김계란과 노희봉뿐만 아니라 정근법석에 참여한 100명의 스님도 무사할 리 없었다. 나아가 불교계 전체가 말할 수 없는 불명예를 뒤집어쓸 판이었다. 결국 국문까지는 하지 않고 사태가 해결되었지만, 불교계는 타격을 면할 수 없었다.

태종의 실험으로 흥천사 사리전의 권위는 크게 추락했다. 설상가상 세종은 흥천사 사리전에 모셨던 불두·불아·진시사리 등을 모두 명나라 황제에게 보내버렸다. 태조가 수집했던 300여 과의 사리 역시 명나라 황제에게 보내졌다. 그나마 껍데기만 남은 흥천사 사리전은 중종 때 유생들의 방화로 아예 없어졌다. 태조 이성계가 평생에 걸쳐 수집한 사리는 이렇게 흔적도 없이 허망하게 사라지고 만 것이다.

창업군주 태조의 사리 수집은 왜 허망한 결말로 끝났을까? 그 이유를 유학자들은 제왕학의 기본이 약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유교 제왕학은 요순이 전했다는 16자 비결에 압축돼 있다.

‘인심유위(人心唯危) 도심유미(道心唯微) 유정유일(唯精唯一) 윤집궐중(允執厥中)’이 바로 그것이었다. ‘인심유위’는 희로애락의 감정에 휘둘리는 사람의 마음은 갈대처럼 위태위태하다는 뜻이다. ‘도심유미’는 감정을 넘어 ‘도의 마음’, 즉 ‘내 안의 이성’을 찾으려 해도 잘 찾아지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위태한 마음을 잘 살펴서 위태함에 빠지지 말고, 잘 찾아지지 않는 내 안의 이성을 찾아 꽉 붙잡아야 한다는 것이 ‘유정유일, 윤집궐중’의 핵심이다. <대학연의> ‘제왕위학지본(帝王爲學之本)’에서는 바로 이런 내용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신명호 -강원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201504호 (2015.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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