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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정의 ‘책 읽는 영화관’] ‘야설’과 ‘로설’ 사이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 ‘엄마들의 포르노(Mommy Porn)’ 그 은밀한 상상력 

알파걸이 경쟁 스트레스 해소 위해 성적 굴복을 상상하게 된 아이러니, 그 기묘한 매커니즘 속으로… 

강유정 영화평론가

▎사진·중앙포토
‘야설’과 ‘로설’의 차이는 무엇일까? 야설은 야한 소설의 줄임말이고 로설은 로맨스 소설의 줄임말이다. 차이는 우선 독자층에서 발견된다. 야설의 주요 독자층은 남성이고 로설의 주요 독자층은 여성이다. 차이점은 예상한 대로다. 야설은 묘사보다는 서술이 먼저이고 로설에서는 묘사가 서술보다 더 중요하다. 야설에서 ‘무엇’이 중요하다면 로설에서는 ‘어떻게’가 더 중요한 셈이다.

소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이하 ‘그레이’)에는 ‘엄마들의 포르노(Mommy Porn)’라는 다소 경멸적인 별명이 있다. 그런데 이 별명이야말로 <그레이>의 차별성을 보여주는 호명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이 소설을 읽는 주 독자층은 30대 이상의 여성이라는 의미다. 이는 기존의 할리퀸 로맨스류의 소설들이 주요 대상층으로 노렸던 순진한 10대 소녀 독자들과는 전혀 다른 성향의 독자층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과연 어떤 특성이 육아나 재테크에 지쳐 현실과 결부하고 로맨스와 결별한 아줌마들을 독자로 끌어들인 것일까? 놀랍게도 <그레이>에서 여러 번 상세하게 정성 들여 묘사한 정사는 우리로 하여금 사디즘(sadism)을 떠올리게 한다. 묶고 지배하고 때리고 그것을 즐기는 행위, 우리가 흔히 변태성욕이라고 부르는 행위들이 소설 속에 묘사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변태적 성행위라는 것은 어떤 것일까?”라는 궁금증이 바로 <그레이>를 읽게 되는 첫 번째 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은밀하게, 위대하게… 알파걸의 해방


▎영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에서 주인공 그레이는 27세의 재벌이자 변태성욕자다. 그는 스스로를 가리켜 사랑할 줄 모르는 냉혈한이라면서도 어느새 아나스탸샤에게 빠져들고 만다. 그녀는 밀당의 여왕처럼 그레이를 쥐락펴락한다.
2012년 소설 <그레이>는 출간된 지 석달 만에 2천만 부라는 놀라운 판매 부수를 기록했다. 가히 <해리포터>를 능가하는 수준이었다. 심지어 유명 시사주간지 <뉴스위크>가 “직장 여성의 판타지 삶: 어째서 ‘굴복’이 페미니스트의 꿈이 되었나?”라는 글을 커버로 결정했을 정도였다. 케이티 롤피 뉴욕대 교수는 <그레이> 열풍 가운데서 현대 여성들의 아이러니한 욕망을 읽어 냈다. 사회적으로 주도권을 가지게 된 ‘알파걸(alpha girl)’들이 오히려 성적인 부분에서는 굴욕과 복종을 원하게 됐다는 분석이었다.

롤피의 분석은 사뭇 의미심장하다. 공부, 운동, 대인관계 등 모든 분야에서 또래 남성과 동등하거나 그 이상의 성과를 보이는 엘리트 계층의 여성을 지칭하는 이 알파걸들은 그간 양성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전투적 인간으로서 스스로를 꾸며왔다. 굴복하는 여성상이란 알파걸들에게 가장 먼저 처리하고 고쳐나갔어야 할 모습이기도 하다. 그러는 한편 경쟁에 시달리는 알파걸들은 경쟁으로부터의 해방으로서 성적 굴복을 상상하기도 한다. 상상, 그렇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상상이다.

<그레이>의 판매부수는 이북(E-book)의 은밀함과도 연관된다. 손쉽게 은밀하게 구매할 수 있다는 것이 낯뜨거운 금서를 손에 넣는 기쁨과 연동된다는 것이다. <그레이>의 원작자인 E.L 제임스가 기존의 베스트셀러였던 <트와일라잇>의 설정을 가져다 쓴 팬픽(fan fic) <우주의 절대자>로 인터넷에서 큰 인기를 얻은 게 열풍의 시작이 됐다는 대목을 우선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팬픽은 만화·소설·영화 등 장르를 구분하지 않고 대중적으로 인기를 끄는 작품을 재창작한 것을 말한다. <우주의 절대자>가 첫 경험을 앞둔 예민하고 섬세한 10대 소녀의 성적 환상을 서사화했다면, <그레이>는 이미 긴장을 잊고 습관처럼 섹스를 나누는 30대 여성의 성적 환상을 그려냈다. 환상,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그 ‘환상’의 실체다.

<그레이>는 엄마들의 포르노그래피가 맞다. 하지만 여기서 다시 한 번 구분하자면 <그레이>는 엄마들의 야설이 아니라 엄마들의 로설이라고 말하는 편이 더 옳다. 사실 <그레이>는 이른바 가학·피학적 행위인 SM 플레이와 성적 묘사로 화제가 됐다. 최소 호기심의 대상이 된 것까지는 맞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 보면 <그레이>에서 보여주는 성적 일탈은 몹시 온건하고 수줍은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니 도대체 이게 어떻게 수줍은 성욕이 될 수 있을까?

‘성’, 즉 섹슈얼리티를 정면에서 다루고 있는 남성 감독의 영화 두 편만 비교해봐도 정확히 알 수 있다. 가령 이 안 감독의 <색계>에서 왕치아즈와 이가 나누는 첫 섹스를 떠올려보자. 친일파 정보부장인 이는 아무도 믿지 않는다. 그에게 섹스는 지나친 긴장감을 푸는 스트레스 해소용 스포츠이자 친일의 자멸감을 가학으로 씻어내는 굿판이기도 하다. 그래서 처음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왕치아즈를 매춘녀보다 더 가혹하게 다룬다. 옷을 찢고 벨트로 손을 묶고 전희나 애무도 없이 그녀를 범한다. 몸을 돌린 채 고개를 눌러 자신을 바라볼 수도 없게 억누른다. 말하자면 그녀는 철저히 그로부터 무시받고 유린당한다.

칸느에서 여러 번 주요 부문을 수상한 라스 폰트리에 감독의 문제작 <안티 크라이스트>나 <님포 매니악>을 봐도 그렇다. 최근작인 <님포 매니악>에도 똑같이 SM 플레이가 등장한다. 어린 시절 영화 <빌리 엘리엇>의 빌리로 출연했던 배우 제이미 벨은 이 영화 속에서 가학 전문가로 등장한다. 그는 건축술처럼 정교하게 가학과 고문의 장소를 연출하고 엉덩이 살이 떨어져나갈 정도로 채찍질을 한다. 말하자면 <님포 매니악> 속에서 지금까지 묘사되었던 SM은 우리가 쉽게 상상하거나 근접할 수 없는 세계다. 즉 우리와 성적 코드를 공유할 수 없는 ‘그들만의 세계’에 가까운 것이다.

‘엄마들의 포르노그래피(Mommy Porn)’


▎영화 <늑대의 유혹>의 한 장면. 완벽한 남자 주인공에 비해 여자는 평범하기 그지없다. 여자는 남자 앞에서 넘어지기 일쑤고 심지어 술을 마시고 토악질을 해대기도 한다. 하지만 이 모든 실수는 그녀가 ‘처녀’이기 때문에 용서된다.
반면 소문과 달리 <그레이>의 SM 플레이는 무척 온건하다. 만약 영화를 보고 실망한다면 그것은 아마 남자 관객일 것임에 틀림없다. 소문은 SM으로 났지만 사실 영화 속에서 묘사된 SM은 ‘여자들이 원하는 SM’이다. 이건 또 무슨 말일까? 바로 여성의 성욕을 자극하는 약간의 연출된 가학이지 공포를 불러 일으키고 남성의 지배욕에 치를 떨게 되는 변태적 성욕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이는 소설 <그레이>가 전 세계의 수많은 여성독자의 선택을 받은 이유이기도 하다. 사실 <그레이>에 묘사된 가학과 피학의 시나리오는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 나눌 수 있는 약간의 역할극에 더 가깝다. 소설 <그레이>를 열독한 여성 독자들이 남편이나 애인에게 소설 속에 묘사된 성행위를 요구했다는 사실에서도 입증된다. 즉 사랑하는 사람과 나누는 독특한 사랑, 그 정도의 일탈이 바로 <그레이>의 일탈인 셈이다.

이는 소설과 영화에서 묘사된 섹스 장면만 봐도 알 수 있다. 남자의 ‘플레이 룸(Play room)’이라고 말하는 은밀한 방은 아마 사드가 생각했던 밀실에 비해 훨씬 더 여성 취향적이다. 대담한 가학적 행위가 이뤄질 것 같지만 소설이나 영화에서 오히려 섹스는 우연적이고 돌발적이며 순진한 방식으로 일어난다. 가령 그레이는 계약서가 있어야만 섹스할 수 있다고 공공연히 말하지만 “더 이상 널 참을 수 없어”라며 사인도 하기 전에 스스로 먼저 원칙을 위배한다. 그레이는 말로는 심장도 없는 냉혈한이고 ‘섹스(fuck)’는 해도 ‘섹스(사랑)’는 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매번 자신의 말을 지키지 못한다.

겉으로 봐선 그레이가 아나스타샤를 지배하고 그녀 위에 군림하지만 실상 아나스탸샤는 밀당의 여왕처럼 그를 쥐락펴락한다. <그레이>가 얼마나 순진한 환상을 무대화했는지는 대학 졸업반인 아나스타샤가 그레이를 만나기 전까지 처녀였다는 설정에서도 드러난다. 아무것도 모르지만 밀당의 여왕인 아나스타샤. 사실 이는 모든 여성이 꿈꾸는 로맨스의 원형이다. 관계에서는 수동적이지만 심층적으로는 관계를 지배하는 것. 거절함으로써 유혹하는 아이러니 말이다.

<트와일라잇> 시리즈가 처음부터 끝까지 셰익스피어를 운운했다면 <그레이>는 소설 <테스>의 현대적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순결했기 때문에 더욱 불행해졌던 테스, 영화 속에서 그레이는 아나스탸사가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고 하자 이런 질문을 던진다. “샬롯 브론테, 제인 오스틴, 토머스 하디, 당신은 어느 쪽이오?”라고 말이다.

사실 이 세 작가는 ‘처녀’들의 다른 삶을 그려낸 영국문학의 대가들이다. 샬롯 브론테의 소설에서 처녀 제인은 마침내 사랑하는 남자와 결합을 이뤄낸다. 나이차가 어마어마하게 나는 남자의 두 번째 아내가 되는 것이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에서 처녀들은 마을에서 가장 유복하고 현명한 남자들의 아내가 된다. 거액의 유산은 덤으로 따라온다. 하지만 토머스 하디의 소설 속 여성의 삶은 당당하지만 그럼으로 인해 더욱 불행하다. <비운의 쥬드>에 등장하는 ‘수’는 제도권을 넘어서는 사랑을 쟁취하지만 자식을 잃는 아픔으로 인해 신 앞에 굴복하고 만다. <테스>의 테스는 영혼의 순결함을 믿고 육체적 오점을 고백하지만 당시의 도덕은 이 순결한 고백을 받아들일 여유가 없다.

아나스탸샤는 토마스 하디를 선택한다. 영혼의 순결과 육체적 타락을 선택하겠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자 약간의 문학성을 지탱하는 일종의 액세서리(accessory)이기도 하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토머스 하디의 <테스>와 <그레이> 사이엔 공통점이 없다. 시대와 사회의 관습 앞에 철저히 무너졌던 아름다운 여성이 테스였다면 아나스타샤는 시대와 사회가 제공하는 달콤함을 모두 누리는 판타지의 수혜자이기 때문이다.

더버빌가 테스와 21세기 아나스타샤


▎영화 <테스>의 한 장면. 여성의 순결한 정신과 그 때문에 타락하게 된 육체에 모티브를 뒀다는 점에서 <그레이>는 <테스>의 현대적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테스는 사회에 철저히 유린당한 피해자인 반면 아나스타샤는 여성 판타지의 수혜자다.
아나스탸사의 환상은 샤를 페로의 동화 <푸른 수염〉에 기인한 21세기 여성의 판타지를 보여준다. <그레이>의 남자주인공 그레이는 <푸른 수염>의 남주인공처럼 갑부로 나온다. 그는 27세에 거대한 기업을 소유한 인물이자 자신의 이름을 옆면에 새긴 전용 헬기와 기분 따라 날씨 따라 바꿔 탈 수 있는 수많은 슈퍼카를 소유한 재벌이다. 잘생긴 외모를 갖췄지만 게이도 아니다. 이미 15명의 여자와 나눈 풍부한 관계를 바탕으로 성적으로도 해박한 경험과 지식을 가지고 있다. 아나스타샤는 싫다고 거절했지만 맥 에어와 아우디를 선물하는 남자다. 게다가 인터넷전화 스카이프를 쓰고 SNS 메시지를 통해 대화를 나눌 줄아는 남자이기도 하다. 그는 재벌 사업가로서 엄청나게 바쁠 텐데도 금, 토, 일만큼은 ‘사랑의 아파트’에 머물며 종일 그녀와 사랑만을 나눈다. 그녀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관리해주고 심지어 음식과 건강, 몸매까지 신경써준다. 여자에게 완벽한 수동성을 요구하는 배경에는 어마어마한 재력과 그만큼 잘 관리된 젊고 탄탄한 몸이 있다.

마치 귀여니의 하이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늑대와의 유혹>처럼 이 완벽한 남자 주인공에 비해 여자들은 평범하기 그지없다. 여자는 남자 앞에서 넘어지기 일쑤고 심지어 술을 마시고 토악질을 해대기도 한다. 하지만 이 모든 실수는 그녀가 ‘처녀’이기 때문에 용서된다.

<그레이>는 여러모로 잘 팔릴 수밖에 없는 소설이며 이야기다. 21세기 여성이 원하는 남성, 그리고 그들이 은밀하게 꿈꾸는 아이러니한 복종심리를 잘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엔 <테스>가 보여주는 동시대 이데올로기에 대한 통렬한 시각은 없다. 토머스 하디에게 세상의 편견과 사회적 도덕은 한 여성의 죽음까지 가져오는 비합리적 폭력이었다. 사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돈이 곧 그런 권력 아닐까? 아나스타샤에게 돈은 선물일 뿐 악마의 유혹이나 보이지 않는 사슬이 아니다.

영화사에는 몇몇 기념비적인 에로 영화가 있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나인하프위크>, <색계>등의 작품이 그러할 것이다. 우리 영화들로 보자면 장선우 감독의 <내게 거짓말을 해봐>와 같은 센세이셔널한 작품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돌이켜보면 이러한 포르노그래피나 로맨스가 개봉관에서 화제가 되었던 게 언제인가 싶다. 어쩌면 우리는 에로스와 성욕이 부재하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최근 소설이나 영화에서 현저하게 줄어든 에로스는 이를 잘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그레이>는 우리가 은밀히 숨기고 싶은 욕망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아닌 척하면서 바라는 무엇, 그 금기된 열망이 숨어 있는 <그레이>다.

강유정 - 영화·문학평론가. 강남대 국문과 교수. 2005년 <조선일보> <동아일보>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동시 당선돼 평론 활동을 시작했다. 고려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현재 KBS <박은영, 강유정의 무비부비 2> 프로그램을 진행 중이다. 저서로 <스무살 영화관> <사랑에 빠진 영화, 영화에 빠진 사랑> 등이 있다.

201504호 (2015.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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