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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 연구] 여심은 왜 셰프 앞에 흔들릴까 

고독과 소외감 따윈 쿡방에서 날려버려! 

이은주 서울신문 문화부 기자
요리하는 남자에 대한 로맨틱한 판타지 확산 … 셰프테이너가 남녀 성 역할의 고정관념을 바꾼다

▎JTBC <냉장고를 부탁해>에 출연하는 남성 셰프들. 요리사의 노하우가 담긴 15분 조리법과 요리사의 개성이 인기를 더한다.
한때 남자가 주방에 들어가면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던 시절이 있었다. 가사를 여성들의 전유물로 취급하는 가부장적인 한국 사회에서 남성이 부엌에 들어간다는 자체를 남자답지 못한 행동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어디 귀하게 키운 내 아들에게 부엌일을 시키느냐”며 며느리의 머리 뒷꼭지에 대고 레이저 눈빛을 쏘아 대는 시어머니들도 왕왕 있었다.

하지만 세상이 달라졌다. 남자들은 주저 없이 흰색 앞치마를 두르고 주방에 들어가 요리 실력을 다투고 남자들도 자신 있게 하는 요리가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시대가 됐다. 여성들은 그런 남성들을 ‘요섹남’(요리하는 섹시한 남자)라고 부르며 환호한다. 요리하는 남자들이 예능은 물론 드라마, CF까지 점령했다. 2015년 대한민국은 왜 요리하는 남성들에게 푹 빠졌을까.

요즘 TV는 ‘셰프테이너(셰프+엔터테이너)’가 점령했다. 이들은 요리를 주제로 한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각종 토크쇼,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연예인 못지 않은 인기를 누린다. 먹방(먹는 방송)의 다음 주자로 대한민국을 강타한 쿡방(요리 방송)의 인기에 힘입어 셰프테이너의 전성시대가 열린 것이다.

JTBC <냉장고를 부탁해>는 말 그대로 셰프테이너의 산실이다. 요리를 할 때 허세가 섞인 과장된 동작으로 일명 ‘허셰프’라는 별명을 얻은 최현석과 중화 요리의 대가 이연복은 이 프로그램이 배출한 스타다. 이들은 연륜이 묻어나는 출중한 요리 실력뿐만 아니라 맛깔 나는 입담으로 각종 프로그램의 단골 손님으로 각광받고 있다. 6월 15일에는 밤 11시 SBS <힐링캠프>와 MBC <다큐 스페셜> 등 서로 다른 방송사의 동 시간대에 최현석과 이연복이 출연해 셰프에 대한 사회적인 관심을 확인시켰다.

‘요리하는 남자’에 대한 대중의 열광은 각종 지표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CJ E&M과 닐슨코리아가 콘텐츠 파워지수(CPI)를 측정한 결과에 따르면 상반기 방송된 125개의 프로그램 가운데 비드라마 부문에서 tvN <삼시세끼> 어촌편과 정선편이 각각 3, 4위를 차지했고 요리연구가 백종원의 ‘쿡방’이 나오는 MBC <마이 리틀 텔레비전>, tvN <집밥 백선생>이 각각 9위, 14위를 차지했다. 모두 요리하는 남성들이 등장하는 프로그램으로 예능 대표 프로그램격인 KBS <개그콘서트>(15위)보다 순위가 높았다.

매주 화요일 밤 10시대에 방송되는 tvN <집밥 백선생>은 가파른 시청률 상승세로 주중 10시대 미니시리즈를 흔들 정도의 위력을 보였고 올리브TV의 <한식대첩3>도 역대 최고 시청률을 갱신했다. 요리 연구가 백종원은 이미 방송가의 귀하신 몸이 된 지 오래다. SBS는 8월 28일부터 백종원이 진행하는 새 예능 프로그램 <백종원의 3대 천왕>을 방송할 예정이다.

사실 국내에 본격적으로 스타 셰프 시대를 연 주인공은 에드워드 권과 강레오다. 해외 유명 레스토랑에서 헤드 셰프로 경력을 쌓은 이들은 주로 요리 분야의 전문가로서 활약했다. 때문에 주로 <예스 셰프> <대결! 스타 셰프> <마스터 셰프 코리아> 등 TV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 다른 사람의 음식을 평가하는 독설가의 임무를 맡았다.

스타 셰프와 여성 연예인의 결혼도 증가


▎tvN <집밥 백선생>에 출연한 윤상·박정철·백종원·김구라·손호준 씨.(사진 왼쪽부터)
하지만 쿡방 시대의 셰프테이너들은 다소 권위적이던 예전의 모습과는 다르다. 어려운 요리보다는 실용적인 음식을 소개하고 친근한 화법으로 대중에게 다가선다. 때문에 해외가 아닌 국내에서 경력을 쌓은 경우도 많고 백종원처럼 조리사 자격증은 없지만 스타 셰프 못지 않은 요리 실력을 자랑하는 요리 연구가도 있다. 골무 모자를 쓴 통역가 셰프 정창욱, 드라마 <파스타>의 실제 모델인 샘킴, 셰프계의 ‘먹방 요정’ 이원일 등 젊은 셰프도 각광받고 있다.

그 덕분에 인기 스타 셰프들과 여성 연예인과의 결혼도 부쩍 늘었다. 해외파 셰프인 레이먼킴은 뮤지컬 배우이자 탤런트인 김지우와 2013년 5월 결혼했고 요리 연구가 백종원은 15년 연하의 탤런트 소유진과 2013년 1월 백년 가약을 맺었다. 한편 <냉장고를 부탁해>의 이찬오는 최근 김새롬과 결혼을 발표했다.

여성들이 남성 셰프들에게 열광하는 이유는 여성의 사회적 진출이 늘어나면서 가부장적인 남성상이 점차 힘을 받지 못하는 사회적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쿡방’은 남녀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을 바꿨고 셰프테이너들은 그 선봉에서 이 같은 트렌드를 이끌고 있는 것이다.

한 지상파 예능국 PD는 “요리 잘하는 여자, 요리 못하는 남자는 재미없지만 그 반대가 되면 신선함과 의외성 때문에 예능이나 드라마 소재로 인기가 있다”고 말했다. 때문에 요리 잘하는 미남 셰프의 등장에 연령에 상관없이 여성 시청자들은 환호했고 양성 평등에 개방적인 사고를 가진 젊은 남성들에게 셰프는 따라 하고 싶은 롤모델로 자리 잡았다.

맞벌이를 하는 한 30대 남성 직장인은 “아내가 늦게 귀가하는 날 스스로 요리를 한다”면서 “주변에 주말부부나 혼자 사는 독신남들도 한 끼 직접 요리를 하는 것에 대해 전혀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다”고 말했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쿡방’은 ‘솥뚜껑 운전’이라고 폄하됐던 요리에 대한 인식 자체는 물론 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바꾸고 있다”면서 “여성들도 사회 활동으로 바쁘고 경제적인 지위가 올라가면서 가사 분업을 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커졌고, 요리하는 남자에 대해 매력을 더욱 느끼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곽 교수는 이어 “남성 셰프들은 남성들도 누구에게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스스로 음식을 만들 수 있고 아빠들에게도 요리하라는 명제를 던지면서 우리 사회 곳곳에 남아있는 가부장적인 사고를 깨부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최근 요리 학원에 남성들이 몰리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말했다.

이처럼 ‘요리하는 남자’들은 부드럽고 자상한 남성상을 선호하는 여성의 심리를 정확히 저격했다. 가만히 앉아서 밥상을 받아들면서도 늘 반찬 투정을 하는 아버지 세대에게 회의를 느낀 젊은 여성들은 요리하는 남자에게서 가정적이고 유연한 가치관을 가졌을 것이라는 로맨틱한 판타지를 품게 된 것이다.

그래서 당대 트렌드를 반영한다는 인기 드라마에서도 요즘 셰프는 인기 직종이다. tvN 금토 드라마 <오 나의 여신님>의 조정석, MBC 수목 드라마 <멘도롱 또똣>의 유연석, 웹드라마 <당신을 주문합니다>의 유노윤호 등의 극중 직업은 모두 셰프였다. 그뿐만 아니라 SBS 토요 드라마 <심야식당>의 김승우는 밤 12시부터 아침 7시까지 식당을 찾는 손님들에게 묵묵히 음식을 해주는 마스터로 등장해 요리를 매개로 사람들과 소소한 대화를 나눈다.

백종원이 진행하는 대표적인 쿡방 프로그램 tvN <집밥 백선생>의 고민구 PD는 “음식을 하는 방법을 나누고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음식을 해준다는 자체가 일종의 소통이자 배려”라면서 “백종원이 인기를 끈 이유도 자신이 알고 있는 요리 비법을 아낌없이 나누고 시청자들과 소통하는 데 있다”고 말했다.

차승원·이서진, 요리 하나로 10여 개 광고 대박


▎해외파 셰프 레이먼킴은 뮤지컬 배우이자 탤런트인 김지우 씨와 결혼했다.
트렌드를 민감하게 반영하는 광고계에서도 ‘요리하는 남자’들의 주가는 하늘을 찌르고 있다. 이전과 다른 새로운 남성상을 제시하고 친근하고 자상한 매력으로 제품 홍보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지난 1월 종영한 <삼시세끼> 만재도 편에서 전무후무한 요리 실력을 보여주며 ‘차줌마’라는 별명을 얻은 차승원은 이 프로그램에서 이미지 변신에 성공하며 기존에 출연하던 자동차, 맥주 등 이외에 의류·게임·음료·면세점·제약·패스트푸드·조미료·라면 등 10여 개의 광고를 더 찍었다.

<삼시세끼>와 <꽃보다 할배> 등으로 배우보다 예능인으로 주가를 올리고 있는 이서진도 프로그램에서 요리는 물론 설거지까지 도맡는 가정적인 이미지로 인기를 얻었다. 지난해 10월 이후 이동통신사·치킨·에어컨·여행사·식품 등 10여 개의 광고의 모델로 활동하고 있다.

스타 셰프들의 CF 촬영도 부쩍 늘었다. 최현석은 카메라·금융·마트 등 음식과 무관한 품목의 CF 모델로도 발탁됐고 이연복과 김풍 역시 각종 식품 관련 CF를 촬영했다. 가전제품 등 다양한 CF 모델로 활동하고 있는 백종원은 치약, 과자 CF 출연료를 저소득층 어린이 환자에게 기부했다. 그는 “앞으로 방송 출연료는 물론 광고 수익금 전액을 사회에 기부하겠다”고 밝혀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광고기획사 제일기획의 캐스팅 디렉터 송문규 씨는 “셰프 테이너는 인기뿐만 아니라 전문성을 확보하고 있고 남성이 요리를 한다는 의외성 때문에 광고 모델로 선호되고 있다”면서 “스타 셰프들은 여성 소비자뿐만 아니라 다양한 연령층을 대상으로 한 광고 모델로 선호되고 있다”고 말했다.

물론 최근 셰프 전성시대는 미디어에서 만들어낸 허상이라는 분석도 있다. 국내 대표적인 이탈리아 요리 연구가이자 작가인 셰프 박찬일씨는 “개화기 우리나라에도 근대적 식당이 생겨났고 유명 맛집을 이끄는 멋있는 남자 요리사들이 많았지만 식당업은 천한 일이라는 선입견과 더불어 일제 식민지 시대와 전쟁을 겪으면서 모두 다 사라지는 역사적 비극을 겪었다”면서 “현재의 셰프 전성시대는 늘 새로운 직군을 발굴해온 미디어에서 소비하려는 대상을 찾는 데서 비롯된 일시적 현상”이라고 분석했다.

‘요리하는 남자’의 근원을 역사 속에서 찾는 분석도 있다. 각종 요리 관련 다큐를 제작한 KBS 이욱정 PD도 “고대에는 사냥뿐만 아니라 체력이 많이 소비되는 요리 역시 남성들의 몫이었고 음식을 신에게 바치는 제사장이 남자가 많았던 것도 그런 이유”라면서 “우리나라에도 대를 잇는 유명식당에는 남성 요리사가 많았다”고 말했다.

여성들이 셰프들에게 열광하는 또하나의 이유는 음식을 통해 진짜 행복을 찾고 싶은 심리 때문이다. 최근까지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문화적 키워드는 웰빙이었다. 다이어트와 유기농 음식, 1일1식 열풍이 불었고 몸매 관리에 실패하면 자기 관리에 실패한 사람으로 낙인찍혔다. 특히 여성들에게 있어서 이에 대한 압박감은 남성들보다 심하다.

불황은 요리를 직업으로 인식케 해


▎음식과 무관한 CF 모델로도 활동하는 스타 셰프 최현석.
요즘 쿡방 속 셰프들은 웰빙과 다이어트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음식을 통한 ‘진짜’ 행복과 소통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백종원은 음식에 다이어트 금기 음식인 설탕을 듬뿍 넣어 ‘슈가보이’라는 별명이 붙었고 소금이나 버터도 아낌없이 사용한다. <냉장고를 부탁해>의 김풍은 라면 수프로 맛을 내기도 한다. 백종원은 단맛, 짠맛 등 다소 자극적인 입맛을 강조하는 조리법에 대해 “시청자들이 ‘저러면 죽을 텐데’라는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하지만 지금은 (웰빙 열풍에 대한) 통쾌함을 느끼고 재밌어 하는 분이 많은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음식에 간을 맞추는 것이 가장 어려운데 아예 금을 밟아 스스로 조절하는 자신감을 쌓게 하도록 하는 순기능도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CJ E&M 방송부문 김지영 팀장은 “다이어트에 대한 강박에 시달리는 여성들에게 ‘쿡방’은 일종의 정신적인 해방구”라고 말했다.

곽금주 서울대 교수는 “경쟁 논리와 물질만능주의에 지친 한국인에게 웰빙이나 힐링 등 서구적인 명제는 또 다른 스트레스로 다가왔고 현재 ‘쿡방’의 인기는 더 이상 허울이나 형식을 떠나 소박하고 편안함 속에 인간의 기본적인 먹는 욕구를 제대로 충족시키면서 진짜 행복을 추구하려는 심리와 연관이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요리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진 것은 경제불황의 방증이라는 분석도 있다. 경제 불황일 때는 불안감으로 인해 의식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만큼 경제적으로 끼니도 해결하고 색다른 취미 활동의 하나로 요리를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냉장고를 부탁해>나 <집밥 백선생>의 경우 냉장고의 남은 음식이나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 만들 수 있는 요리를 한다. 박찬일 셰프는 “현대인을 위로해줄 만한 도구가 없는데 음식은 크게 비용을 들이지 않고 만족을 줄 수 있다”면서 “‘푸드 포르노’처럼 방송에서 음식을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과거와 달리 음식에 대한 관심이 진지해졌다”고 말했다.


▎1. 중화요리의 대가 이연복 셰프도 요즘 대세남으로 떠올랐다. / 2. 드라마 <파스타>의 실제 모델인 샘킴 셰프.
물론 오히려 ‘먹고 살 만 해져서’ 쿡방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는 반론도 있다. 백종원은 “일본에서도 어마어마한 ‘쿡방’ 열풍이 분 것은 음식을 하나의 분야로 인정하는 의식 수준이 높아지고 있는 현실을 반영한 것”이라면서 “오히려 마음의 여유가 생겨 요리와 음식에 관한 관심으로 이어진 것”이라고 말했다.

그뿐만 아니라 1인 가구가 늘고 디지털의 발달로 외로워진 현대인들이 요리하고 함께 음식을 나눠먹는 과정에서 안정감을 느낀다는 분석도 있다. 영화 <심야식당>이 국내에서 10만 명을 돌파하는 등 인기를 끈 것은 음식을 통해 위로받고 새로운 인연을 이어가는 소시민의 삶을 소탈하게 그렸기 때문이다. 영화평론가 정지욱 씨는 “하루 세 끼 음식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고 누구도 소외시키지 않는 소재”라면서 “음식을 통해 타인을 이해하고 함께 요리하는 과정을 통해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과 관계를 회복하고 소통할 수 있고 셰프들이 그 가교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이들의 인기는 상당기간 지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 이은주 서울신문 문화부 기자

201509호 (2015.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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