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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연재 | 장석주의 ‘인류의 등대(燈臺)’를 찾아서(1)] ‘동양사상의 아버지’ 공자(孔子) 

‘“상갓집 개’에서 성인(聖人)으로” 

장석주 전업작가
배움의 철학을 세운 ‘지성의 용병’이 전 인류에 던진 메시지… “앎을 사랑하고 기뻐하라, 그곳에 ‘군자’의 길이 있나니”

▎공자는 열다섯 살의 나이에 배움을 인생의 큰 목표로 세웠다. 서른에 자립하고 마흔에는 흔들리지 않았다. 쉰에 이르러서 천명을 깨닫는 경지에 도달했다. / 사진·중앙포토
인류 영혼의 성장을 이끈 지성들이 있다. 어두운 바다를 떠도는 배에게 길을 이끄는 등대와 같은 존재! 이들이 처음부터 빛이었던 건 아니다. 불운과 불행에 단련됐고 혼돈 속에서 창조로 나아가는 고투(苦鬪)를 겪었다.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살기를 실천했던 공자에서 스티브 잡스에 이르기까지…. 새해를 맞아 우리에게 영감을 주고 삶의 도약을 이루는 데 보탬이 될 지성사를 살펴보고자 한다. 인류를 가치 있는 삶으로 이끈 지적 섬광의 찰나를 조명한다.

발정기가 아닌데도 짝짓기를 하고 위가 비어 있지 않은데도 뭔가를 꾸역꾸역 먹는다. 남의 것을 훔치고 갖가지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으며 망상에 쉽게 빠져 가끔 엉뚱한 짓을 하고 더러는 세계를 온통 회색 빛으로 채색하는 우울증에 걸린다. 다른 한편으로 제 이익을 위해서 전쟁을 일으키고 수백만 명을 잔혹하게 살해한다. 이것이 인간이다!


▎인천 차이나타운에 위치한 공자상의 모습. 공자는 관직을 내려놓고 사학(私學)을 열어 계층 구분 없이 제자들을 가르쳤다. / 사진·중앙포토
인간은 자기 의지적 진화를 이루고 환경의 제약을 넘어서왔다. 자기 운명에 대한 통제권을 거머쥔 유일한 종이면서(대다수 인간이 그렇게 믿는다), 그 권력을 남용해 제 숙주인 지구 생태계를 가차 없이 파괴한다. 강물을 오염시키고 열대 우림을 베어내며 숱한 동물들을 멸종에 이르게 하는 유해 동물이다. 지구의 처지에서 보자면 인류 번성은 자연을 파괴하고 교란시키며 괴사로 몰아넣는 재앙이다.

그러면서 인간은 살아있는 동안 생명활동을 하는 존재다. 분자 생물학자 자크 모노는 생명이 사물의 본성에서 연역해 낼 수 있는 요행의 결과라고 말한다. 생명은 동적평형을 이룬 상태에서 끊임없이 변화한다. 변화는 생명에게 내재된 숙명이다. 생명활동이란 얼마나 고결하고 놀라운 일인가? 시·음악·그림·춤 등 모든 ‘상상 예술’은 생명활동의 일환이다.

생명활동을 이행하는 인간의 몸은 경이롭다. 디자인과 기능이 최적으로 결합된 완벽에 가까운 공학적 구조로 이뤄졌다. 손의 근육과 골격을 보라. 인대, 뼈, 관절과 근육으로 이뤄지는 이 작고 단순한 도구는 만능에 가깝다. 이 손으로 기도하고 아기를 돌보며 피아노를 연주한다. 때로는 심장 수술을 집도하고 연인의 몸을 애무한다.

시골에서 만난 <논어>의 미학


▎1. 노자는 공자에게 “군자는 현명한 군주를 만나면 뜻을 펼칠 수 있고 못난 군주를 만나면 운명에 맡기는 수밖에 없다”고 조언했다. 2. 공자는 주나라 도읍지인 낙읍에 가서 왕실도서관의 하급 관리로 일하던 노자를 만나 예(禮)에 대해 물었다. / 사진·중앙포토
체중을 지탱하는 뼈들은 어떤가? 뼈는 화강암보다 두 배는 더 튼튼하고 콘크리트보다 네 배 더 탄력이 있고 철강보다는 다섯 배 더 가볍다. 건축가들이 탐낼 만한 꿈의 소재인 것이다. 또한 1.4㎏의 작은 뇌와 신경계는 초고속 정보통신망보다 더 뛰어난 기적의 도구다.

결국 인체는 내분비계와 면역체계를 갖추고 똑같은 DNA를 가진 생명을 복제하는 완벽한 시스템이다. 기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이 놀라운 몸을 써서 일하고 사랑을 나누는 존재가 바로 인간인 것이다.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경이로운 신의 피조물인 셈이다.

삶이 곤경에 처했을 때 시골로 거처를 옮겼다. 마흔을 갓 넘긴 시절 아직 살날은 아득하고 삶은 고삐 풀린 미친 말 같아서 이를 틀어쥐기가 쉽지 않았다. 그리하여 적막한 시골의 물가에 집을 짓고 들어앉았다.

시골구석에 삶을 꾸리니 피는 무기력하고 마음은 성난 짐승이었다. 자꾸 세상과 적대하며 싸우려 들었다. 토마스 홉스의 “만인은 만인에 대해 늑대다”라는 금언을 가슴에 품고 살던 시절이다.

숨쉬는 것조차도 힘들던 그 시절 가슴에 일렁이는 적대감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피가 곤두서는 분노를 다스리려고 무작정 노자의 <도덕경>과 <장자>를 끼고 읽었다. 꾸역꾸역 읽어내는 일은 돈 드는 일도 아니어서 할 만했다. 마음에 지옥과 천국을 품고 두 서책을 읽다 보니 봄가을이 지났다. 금광 저수지 가장자리의 버드나무는 연두색이었다가 잎들이 퇴색하여 떨어졌다. 뜰에 심은 명자나무와 반송은 키가 높게 자랐다.

백 번쯤 읽었더니 변화가 일어났다. 마음의 변화였다. 늘 충분한 것을 적다고 생각하며 살았음을 깨달았다. 욕심을 덜어내고 천천히 밥을 먹는 일부터 실천했다. 어리석음과 불편을 끌어안으니 시름은 줄고 설렘은 커졌다. 유배지라고 여겼던 시골이야말로 조촐한 삶을 꾸리는데 최적의 곳이었다. 안 보이던 다른 사람의 마음이 보이고 혼돈이 서서히 걷혔다. 어느새 내 눈은 세계를 투명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노자을 끼고 사는 동안 공자는 한사코 멀리했다. 공자라니? 이 고리타분한 것을 왜 읽어야만 하나? 유학의 원천, 혹은 윤리의 바탕이 되는 것에 대한 필요는 내 안에 없었다. 그럼에도 어느 여름날 갑자기 뭔가에 끌리듯 <논어>를 손에 들었다. 인상적인 것은 계속되는 배움의 강조였다.

“나는 열다섯 살에 배움에 뜻을 두었고, 서른이 되어서는 자립했으며, 마흔이 되어서는 흔들리지 않았고, 쉰이 되어서는 천명을 알았고, 예순이 되어서는 귀가 순해졌고, 일흔이 되어서는 마음이 가는 대로 따라도 법도를 넘지 않았다.”

공자는 열다섯 살의 나이에 배움을 인생의 큰 목표로 세웠다. 서른에 자립하고 마흔에는 흔들리지 않았다. 35세 때 제나라에 가서 일자리를 찾았으나 구하지 못했다. 노나라에서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백수건달로 지낼 수밖에 없었다. 공자는 35세에서 50세 이르기까지 그저 빈둥거리며 서책들을 읽고 배움에 전념했다. 예를 익히고 배움에 몰입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쉰에 이르러서 천명을 깨닫는 경지에 도달했다고 선언한다. 쉰을 바라보는 나이에 너무나 많은 미혹에 감싸여 있던 내게 공자의 말들이 두개골을 쪼개는 듯 우레와 같이 울려 퍼졌다. 세상 물정을 잘 모르고 예도 모른 채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자 부끄러웠다. 밥 먹는 것도 부끄럽고 남 앞에 나서는 것도 부끄러웠다. 하지만 그 부끄러움을 굳이 내치지 않고 도리어 그것을 품고는 이를 동력삼아 <논어>를 낮 밤 가리지 않고 깊이 파고들었다.

공자는 배우기 좋아하는 사람이다. “열 가구 정도의 작은 마을에도 나처럼 충성스럽고 신의가 두터운 사람은 있겠지만 나만큼 배우기를 좋아하지는 못할 것이다.” 다시 공자가 말했다. “배우면서 그것을 익히는 것도 기쁘지 않은가? 친구가 먼 곳에서 찾아오는 것도 즐겁지 않은가? 사람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는 것 역시 군자답지 않은가?”

배움은 어디서 시작해서 어디서 끝나는가? 모름에서 앎으로 나아가는 것, 생각과 실천에 막힘이 없는 경지로 나아가는 것, 그게 배움이다. 배움에는 끝이 없다. 궁극을 말하자면 ‘군자’가 되는 것에 있다.

야합으로 태어나니… 비천한 어린 시절


▎공자와 선현을 추모하는 ‘갑오년(2014년) 춘계석전대제’의 장면. 대구향교 대성전에서 열린 석전대제는 공자를 모시는 사당인 문묘에서 지내는 큰 제사로 매년 음력 2월과 8월 상정일(上丁日)에 열린다. / 사진·중앙포토
그리스의 사모스 섬에서 태어난 피타고라스는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를 여행하고 돌아온 뒤 그리스에 철학 학교를 세운다. 피타고라스는 ‘수(數)’가 우주 만물의 본질이라는 것을 깨닫고 이것이 만물의 궁극적인 구성 요소라고 이해했다. 이것으로 음계의 속성을 밝혀내고 비율 이론을 제시했다. 철학 학교에서는 철학, 과학, 종교를 가르쳤는데 이곳을 거친 무리가 피타고라스학파를 이룬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믿는 시대였지만 피타고라스학파 사람들은 달랐다. 그들은 우주 중심에는 불이 있고 지구가 그 둘레에서 원을 그리며 회전하기 때문에 낮 밤의 변화가 생긴다고 확신했다. 같은 시기 인도의 한 왕조에서 왕자로 태어난 젊은이가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은 뒤 대중에게 설법을 베풀기 시작했다. 석가모니였다. 훗날 붓다라고 불린 사람이다.

중동 지역에는 감수성 예민한 청년이 나타나더니 한 결혼식장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꿨다. 자신을 하느님의 독생자라고 칭하던 이 청년이 포교를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500년이나 더 지난 뒤다. 당시 중국은 금·진·제·위·정·노·송·주·진·오 등 열 개의 제후국으로 나뉘어 경쟁하고 있었는데 그중 하나인 노나라 수도 곡부에서 편모슬하의 가난한 소년이 인격을 단련하고 있었으니 그가 바로 공자다. 당시 나이는 열 세 살이었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숙량흘과 안씨가 야합하여 공자를 낳았다”고 쓴다.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은 전쟁 영웅이다. 공자를 얻었을 때 숙량흘의 나이는 64세, 어머니 안징재의 나이는 15세였다. 상나라에는 춘제 때 하늘과 조상에게 제사 지내고 남녀가 들에서 먹고 마시다가 교합하는 풍속이 있었다. 이 야합 풍속은 나라의 평안과 풍년을 기원하는 의례에서 생겨난 것이다. 안징재는 니구산에서 아들 낳기를 기원하러 갔다가 숙량흘을 만나 교합한 뒤 공자를 얻는다.

<사기>에는 이 사실이 이렇게 기록된다. “니구산에 기원하여 공자를 얻었다. 노 양공 22년에 공자가 태어났는데 머리 가운데 움푹 팬 곳이 있어 이름을 구(丘)라고 지었다. 자는 중니(仲尼)이며 성은 공씨다.” 숙량흘은 안징재를 세 번째 아내로 취한다. 하지만 숙량흘은 공자가 세 살 나던 해 대가족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다. 숙량흘에게는 둘째 아내와 딸이 아홉 명이나 있었다. 하지만 봉토는 없었고 겨우 봉록을 받아 살림을 꾸렸는데 그가 죽고 난 뒤에는 그마저도 끊어졌다.

갑자기 가장을 잃은 안징재는 망연자실하다가 어린 자식을 데리고 공씨 집안을 나와 노나라 수도인 곡부로 이사했다. 안징재의 나이가 겨우 열여덟이었으니 두 모자의 살림이 얼마나 곤궁했는지는 짐작할 만하다. 안징재는 각종 제기를 사놓고 어린 아들에게 갖고 놀도록 하고 자신은 생활비를 벌기 위해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배움은 평등하리라… 사학(私學)을 세우고


▎성균관 학생들이 ‘고유례’ 의식을 하고 있다. 고유례란 공자에게 중요 행사를 ‘예’를 통해 알리는 의식이다. / 사진·중앙포토
공자는 15세 때 학문에 뜻을 두었다고 했다. 학문에 뜻을 둔다는 것은 자기 수련과 기초 교양을 쌓는 일을 뜻한다. 공자는 ‘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를 익히는데 열심이었다. 비록 출신이 비천하고 살림은 가난했으나 배움에 꿋꿋하였다. 공자는 노나라 상경 계평자 집안의 위리(委吏, 창고 보관직)로 발탁돼 일하다가 이듬해에는 승전(乘田, 목장 관리직)이 됐다.

공자가 17세 때 모친이 세상을 떠난다. 소년 공자는 어렵게 부친 숙량흘의 묘소를 찾아내 모친을 합장한다. 그 직후 노나라의 권력자 상경 계씨의 연회에 초대받는다. 상중(喪中)이던 공자는 어렵게 연회에 참석하기로 마음먹는데 상경 계씨의 가신 양화에게서 문전박대를 당한다. 양화는 공자를 가로막아서며 “주인어른께서 연회에 초청한 사람은 사족이지 너같이 천한 사람은 아니다”라며 공자를 내쳤다. 공자는 그 일에 큰 충격을 받고 노나라를 떠나 송나라로 갔다.

송나라는 은나라의 높은 문화 전통을 잇고 있는 나라였다. 공자는 송나라에서 작은 관직을 얻고 약관의 나이에 기관씨 집안의 한 여성과 결혼한다. 그리고 다시 노나라로 돌아온다. 이듬해 아들 공리를 얻었다. 공자가 아들을 얻었다는 소식을 듣고 노 소공은 잉어를 하사한다. 공자가 군주의 예물을 받은 것은 갈고 닦은 학문으로 상류층의 인정을 받았다는 징표였다.

공자가 34세 때 노자는 주나라의 수도 낙읍(洛邑)에 머물고 있었다. 공자는 어린 제자 남궁경숙에게 “내가 주나라를 방문해 노자의 가르침을 받고 싶은데 네가 국군에게 말해줬으면 좋겠구나”라고 말했다. 남궁경숙이 노 소공을 만나 공자의 뜻을 전하자 노 소공은 흔쾌하게 받아들이며 말 두 마리가 끄는 마차와 시종을 내준다.

공자는 13세 소년인 남궁경숙과 시종을 마차에 태우고 노자를 만나러 떠난다. 공자는 주나라의 도읍지인 낙읍에 가서 왕실도서관의 하급 관리로 일하던 노자를 만나 ‘예’에 대해 물었다. 뿐만 아니라 역사 문화에 대한 제 생각을 장황하게 펼쳐 보였다.

노자가 말했다. “당신이 말하는 그 사람들은 이미 죽고 많은 시간이 흘러 흙으로 돌아간 지 오래 되었소. 남은 것은 그들의 말뿐이오. 군자는 때를 잘 만나서 현명한 군주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관직에 나가 제 뜻을 펼칠 수 있소. 허나 때를 잘못 만나 좋은 군주를 얻지 못하면 그저 흘러가는 대로 모든 걸 운명에 맡길 수밖에 없소.”

노자는 공자보다 스무 살 연상이었지만 이미 현인의 경지에 들어선 사람이다. 공자는 다소곳하게 노자의 충고를 경청한다. 공자는 늘 배우는 사람의 태도를 취한다. 공자는 노자 말고도 위나라의 거백옥, 제나라의 안평중, 초나라의 노래자, 정나라의 자산, 노나라의 맹공자, 그 밖에 장문중·유하혜·동백화·개산자연 등에게 배움을 얻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공자는 성실하게 제 직분을 수행하고 학문 연마에 게으름 피우지 않았던 터라 차츰 그 능력을 인정받았다. 직급이 ‘위리’에서 ‘승전’으로 높아졌고 태묘에서 제사의례를 돕는 일을 맡았다. 그러나 공자는 관직을 내려놓고 ‘사학(私學)’을 열어 사람을 두루 받아 가르쳤다. 공자의 사학 이전에는 나라에서 세운 ‘관학(官學)’이 주를 이뤘다. 관학에서는 귀족 자제를 받아들여 <시경>을 가르쳤다. 공자의 사학은 배우고자 하는 이들을 차별하지 않았다. 육포 열 묶음 이상을 가져오는 사람이면 가르침을 주지 않은 경우가 없었다. 귀족 자제 뿐만 아니라 신흥지주, 상인, 평민의 자식들이 공자의 사학으로 몰려들었다.

거듭되는 불운에도 태연히 노래 부르네


▎1. 중국 산둥성에 공자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제당(祭堂). 공자는 동서고금을 통틀어 영향력이 가장 큰 철학자 중 한 명으로 꼽힌다. 2. 공자의 고향인 산둥성 취푸에서는 매년 그의 탄신일을 맞아 공자를 기리는 공연이 펼쳐진다. 배우들이 <논어>의 구절을 노래하고 있다.
사학의 번성은 일종의 교육 혁명이다. 공자 사학을 거친 제자는 3천 명에 이르고 그중 현인이라고 일컬을 만큼 걸출한자가 70명이 넘게 나왔다. 당시 중국 전체 인구가 1천만 명 정도였으니 이 수는 엄청난 것이다.

공자는 널리 구해 배우고 가장 고매한 것들에 대해 알기위해 가장 단순한 것들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인과 예에 대해 깨닫고 그 바탕 위에서 자신의 철학을 세운다.

이름은 널리 알려졌지만 어느 군주도 그를 중용하지 않았다. 공자는 제 뜻을 세상에 펼칠 기회를 잡지 못한 채 기원전 496년부터 491년까지 위, 송, 정, 진나라를 정처 없이 떠돌았다. 일례로 진나라의 한 관헌 집에서 1년 넘도록 객식구로 얹혀살았다. 공자가 무리와 함께 떠도는 동안 비웃음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어느 마을에 들렀을 때 한 사람이 “공자는 많이 알기는 하지만 그 어떤 전문가도 아니지!”라고 큰소리로 떠들었다. 공자는 “내가 무엇을 전문으로 하면 좋을지 알려주시오! 활쏘기요, 아니면 수레 끌기요?”라고 반문한다. 그를 따르는 무리는 지쳐서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공자에 대한 불만과 실망이 컸다. 공자는 <시경>에 나오는 한 구절을 인용해서 무리에게 말했다. “그들은 물소도 아니고 호랑이도 아니지만 사막을 헤매고 다니는구나!” 그 소리는 탄식에 가까웠다.

어느 날 공자는 제자 자로를 붙잡고 물었다. “자로야, 내 가르침이 잘못됐다고 생각하느냐? 어쩌다 내가 이런 곤경에 처했느냐?” 자로가 답했다. “모두가 저희 잘못입니다. 저희가 못난 탓에 군주가 저희를 기용하지 않은 것이지요.” 제자 안회는 자로보다 솔직했다. “스승님의 교리는 너무 고매하여 백성들이 따를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스승님의 사상을 전파하는 데 애쓰십시오. 이해받지 못한다 한들 무엇이 대수겠습니까? 사람들이 그 사상을 밀쳐낸다는 것이야말로 곧 스승님이 진정한 현자임을 증명하는 걸요!”

공자는 원하는 자리를 얻지 못한 채 마치 상가(喪家)를 기웃거리는 비루먹은 개처럼 이 나라 저 나라를 떠돌았다. 이 과정에서 네 차례 이상 목숨을 잃을 뻔했다.

공자의 불운은 나이가 들어서도 나아지지 않았다. 이순이 되던 해, 공자와 무리는 노나라에 들어가지 못한 채 진나라에서 3년을 머물렀다. 공자가 진나라에 머문다는 사실을 알고 초나라 임금이 공자를 초빙했는데 진나라와 채나라가 군대를 보내 공자와 무리들을 황야에서 포위하고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황야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처지에 빠진 공자와 무리는 식량이 떨어져 굶는 날이 많았다.

그러나 공자는 태연하게 금(琴)을 타고 노래를 불렀다. 제자 자로가 분함을 참지 못해 붉어진 얼굴로 스승에게 따졌다. “군자도 곤궁한 경우가 있습니까?” 공자가 답했다. “군자라야 곤궁함을 능히 지킬 수가 있다. 소인은 곤궁해지면 못하는 바가 없다.” 군자는 곤궁하더라도 존엄과 예를 벗어나지 않지만 소인은 강물이 범람하는 바와 같이 된다. 곤궁에 빠진 소인은 범람하는 강물이 방향이나 원칙 없이 사방으로 흘러나가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물이 되어라, 물처럼 살아라”


▎노자는 공자보다 스무 살 연상으로 현인의 경지에 들어선 사람이다. 공자는 서른네 살이 되던 해 노자로부터 “사람은 죽고 남는 것은 말(배움)뿐”이라는 학문의 철학을 배운다. / 사진·중앙포토
공자는 55세에 노나라를 떠나 열국을 주유한다. 68세에 이르러 비로소 노나라에 돌아올 수 있었다. 공자가 저를 따르는 무리와 함께 집도 없이 열국을 떠도는 열네 해 동안 그의 부인은 노나라에 머물렀고 아들이 생계를 떠맡았다. 공자에겐 원대한 꿈이 있었지만 제 정치의 이상을 펼칠 기회를 잡지 못한 채 기약 없이 이리저리 헤매 다녔다.

어느 날 제자 자공이 사방으로 공자를 찾았는데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다. “성의 동문 앞에 한 노인이 서 있는데 혼이 나간 듯 보이는 것이 꼭 상갓집 개 같았소.” 그 말을 전해 듣고 공자는 흔쾌하게 “바로 맞혔구나, 바로 맞혔구나!” 하고 감탄했다. 그의 인간 됨됨이를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공자는 기괴한 것, 폭력적인 것, 어지러운 것, 귀신에 대해 말하기를 꺼려했다. 제자 자로가 귀신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 묻자 공자는 말했다. “사람도 제대로 섬기지 못하는데 어떻게 귀신을 섬기겠느냐?” 자로가 죽음에 대해 묻자 공자는 말했다. “삶의 도리도 미처 깨닫지 못했는데 어찌 죽음을 알 수 있겠느냐?”

공자는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바로 아는 것이라는 태도를 취한다.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안 사람은 아니다. 다만 옛것을 좋아하고 지식을 구하는 데 민첩했을 뿐이다.” 공자의 태도에는 일관성이 있었다. 공자는 오로지 인과 덕을 따랐던 스스로의 삶과 품행이 군자의 도에 충실했다고 평가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의 행함은 공손하고 섬김에서는 공경스러웠다. 백성 기르는 것을 은혜로 했으며 백성 부리는 것을 의로움으로 했다.” 어느덧 공자는 군자의 경지에 든 것이다.

공자가 말했다.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물같이 움직이고, 어진 사람은 산같이 고요하다. 지혜로운 사람은 즐거워하고 어진 사람은 장수한다.” 공자는 항상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을 좋아했다. 종종 강가에 서서 흐르는 물을 보며 “물이여, 물이여!”라고 감탄하며 “가는 세월이 이와 같구나! 밤낮을 가리지 않고 흘러가는구나!”라고 했다. 제자 자공이 “왜 그리 물을 좋아하십니까?”라고 물었다. 공자가 말했다.

“물은 군자의 덕에 견줄 만하다. 고루 퍼져 어느 한 곳에 몰리지 않으니 덕(德)과 닮았다. 그 미치는 곳마다 생명을 주니 인(仁)과 닮았다. 그 흐름은 늘 아래로 향하고 굽이굽이 이치를 따르니 의(義)를 닮았다. 얕은 물은 흐르고 깊은 물은 그 안을 예측할 수 없으니 지(智)와 닮았다. 백척 높이에서 떨어질 때도 망설임이 없으니 용(勇)과 닮았다. 면면히 미치지 않는 곳이 없으니 찰(察)과 닮았다. 싫어하는 것을 사양하지 않고 받아들이니 포(包)와 닮았다. 더러운 것을 받아들여 깨끗하게 내보내니 선화(善化)와 닮았다. 정해진 양에 도달하면 반드시 편평해지니 정(正)과 닮았다. 넘치면 더는 보태지 않으니 도(度)와 닮았다. 굽이가 아무리 많아도 동쪽으로 향해 가니 의(意)와 닮았다. 그러므로 군자는 물을 보면 반드시 비춰본다.”

공자는 한결같이 ‘예’를 중시했다. 예는 사람이 마땅히 따라야 할 바다. 예는 따르고 취해야 할 바로서의 질서이며 인격적 이상이다. 군자는 조화를 이루지만 동화되지 않고 소인은 동화되지만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조화를 이루려면 적당하게 타협하고 조정해야 한다. 공자는 “매사에 일일이 물어 명확히 하고 실수를 하지 않는 게 곧 예가 요구하는 신실한 자세다”라고 말했다. ‘예’는 형식이고 기쁨은 내용이다. 공자는 기쁨이 높은 가치라고 말했다. “한 가지를 아는 자는 그것을 사랑하는 자보다 못하다. 그것을 사랑하는 자는 그것 때문에 기뻐하는 자보다 못하다.” 공자는 무뚝뚝하고 근엄한 사람이 아니다. 공자는 매사에서 기쁨을 찾고 자주 웃는 사람이었다.

공자는 시련 속에서도 꿋꿋하였을 뿐만 아니라 작은 행동거지 하나에도 주의했다. 무엇보다도 음식을 취하는 원칙이 삼엄했다. 첫째 음식을 가리지 않았다. 둘째 먹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음을 미워했다. 상한 것은 그것이 생선이건 고기건 전혀 손대지 않았고 색깔이 변한 것도 먹지 않았다. 그 냄새가 좋지 않은 것, 푹 삶아지지 않은 것, 제철이 아닌 것, 똑바로 잘리지 않은 고기도 절대로 손대지 않았다. 장(醬)이 없을 때도 음식에 손대지 않았다. 먹는 데도 절제가 있었는데 식탁에 고기가 남았어도 탐식하지 않았고 술은 두루 마셨지만 적당히 마시고 그칠 줄 알아 말과 행동이 문란해지는 법도 없었다.

그리스 철학자 탈레스가 일식을 예언하고 아낙시만드로스가 이오니아 지도를 제작할 당시 중국 지식인들은 제후국들을 떠돌며 제후의 조언자로 활약하거나 제후 자제들의 교육, 의식과 제례의 주재, 정부의 자문기록집록 등의 일을 맡는 ‘지성의 용병’의 삶을 이어간다. 공자도 그중 한 사람이지만 거기서 머물지 않고 사람에게 필요한 덕목의 철학을 세우며 지식의 거인으로 돌출한다.

아시아의 철학자, 세계에 가르침을 남기다


▎영화 <공자>의 한 장면. 공자는 일생 동안 널리 구해 배운 끝에 인과 예에 대해 깨치고 그 바탕 위에서 자신만의 철학을 정립했다. / 사진·중앙포토
공자 철학의 핵심은 ‘인’과 ‘군자’다. 인의 바탕은 효도와 우애로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먼저 주체가 돼야 한다. 그래야만 타인을 사람으로 섬기고 품을 수 있다. ‘군자’는 어떤 사람을 가리킴인가? “군자가 먹음에 배부름을 추구하지 않고 거처함에 편안함을 추구하지 않으며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군자의 인격적 바탕은 인이다. 군자가 된다는 것은 ‘어른스럽게 처신하라’는 것이다. 늘 배부름과 편안함에 이르기를 바라는 것은 어린아이의 태도다. 배움을 좋아하지 않는 것도 어린아이의 특징이다. 그러나 어른은 다르다. 어른은 가난하면서도 즐거워하고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한다. 앎과 생활이 어긋난 것은 어른답지 못하다. 그러므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자신을 끊임없이 돌아보고 어제보다 오늘이 더 미더운 존재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공자는 불운하고 삶은 불행했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55세 때 부인과 생이별한 채 타국을 열네 해 동안 떠돌다가 사별하고 말년에는 아들을 먼저 떠나 보냈다. 제자 안회마저 공자보다 앞서 세상을 떠났는데 그때 몹시 슬퍼하며 탄식했다. “아, 하늘이 나를 버렸구나! 하늘이 나를 버렸구나!” 제자 자로가 죽었을 때 공자는 태산이 무너지고 대들보가 주저앉는 충격에 빠져 통곡했다. “하늘이 나를 저주하는구나! 하늘이 나를 저주하는구나!” 공자는 자로가 죽은 뒤 7일 후 기원전 479년 5월 11일 일흔둘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공자를 비방하는 사람도 없지 않지만 동서고금을 통틀어 그 영향력이 가장 큰 철학자 한 명을 꼽으라면 공자를 꼽아야 하리라. “공자의 가르침에 따라 세상을 보는 방식을 근절하겠다는 불가능한 일을 감행했던 비판자들 중 아무도 그의 유산에서 벗어나는 일에 성공하지 못했다. 마오쩌둥의 사상도 유교 사상에서 파생된 상황철학의 하나일 뿐이다.”(자크아탈리, <자크 아탈리, 등대>, 36쪽) 생존 당시 어떤 제후국도 공자를 중용하지 않고 겨우 노나라 행정부의 말단 관리직을 맡겼을 뿐이지만 그만큼 인류에게 영향을 끼친 사람을 찾기는 어렵다. 공자는 아시아가 낳은 철학자, 대지식인, 성인(聖人)이다. 그는 인간 존엄의 철학을 펼친 ‘동양 사상의 아버지’라 할 만하다. 그 가르침은 뼈에 사무치는 바가 있다.

장석주 - 전업작가. 충남 논산 출생. 1979년 조선일보·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와 문학평론 당선으로 등단했다. <월간문학> 신인상(1975년)과 해양문학상(1976)을 수상했다. ‘고려원’ 편집장을 거쳐 청하출판사를 운영했다. 지금까지 시집, 비평집, 인문서 등 70여 권을 펴냈다. 대표 저서로 <일상의 인문학> <마흔의 서재> <철학자의 사물들> 등이 있다.

201601호 (2015.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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