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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길이 쓰는 ‘생명의 비밀’] 목도장 되어 우리와 함께한 회양목 

성장속도 느려 나무의 질이 단단하고, 진통·진해·거풍·백일해·치통에 치료제로 사용하기도 

권오길 강원대 명예교수

▎회양목은 이른 초봄에 꿀 향이 풍기는 꽃을 피운다. / 사진·중앙포토
회양목에 관한 글을 쓰자면서 생뚱맞게도 동회(洞會, 주민센터)를 찾는다. 갑자기 불초자(不肖子)는 선친(先親)의 정확한 생년월일을 알고 싶었던 것이다. 동회 담당자가 한참을 찾더니만 “예, 찾았습니다” 하면서 건네주는 제적증명서를 보고는 망부(亡父)를 만난 듯 어안이 벙벙하면서도 야릇한 반가움에 넋을 잃을 지경이었다. 출생 일자를 보니 일본 연호로 ‘大正 四年(대정 4년)’ 몇 월 며칠이라 적혀 있고, 옆에 단기(檀紀)로 적어놨으나 흐린 탓에 당최 알아볼 재간이 없다. 여기저기를 찾다 보니 대정 4년이 서기 1915년에 해당한다. 올해가 2015년이니 살아계셨으면 세는 나이로 상수(上壽)를 지나 101세가 되신다. 어머니는 네 살 많은 1911년생이시고.

시골집에 선친이 보통학교(지금의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해(13세)에 심었다는 회양목이 치올려봐야 하게끔 우람하게 자라 융성하기 그지없다. 아흔 살에 접어드는 그 나무를 이사 때마다 고인이 된 숙부께서 금지옥엽으로 옮겨 심고, 돌보아 보살폈다고 한다. 사실 일제 때 학병(學兵)으로 끌려가 필자 나이 고작 다섯 살 때에 전사하신 당신께서 심은 이 나무는 유일한 유품이요, 가보이다.

시골에 내려가면 늘 산소에 들르기 전에 찾는 ‘아버지 나무’ 회양목이다. 합장기도하고, 아버지의 숨결이 살아 숨쉬는 소담스럽고 살가운 회양목을 살포시 자식의 가슴에 품어드린다. 나무는 늙을수록 저렇게 듬직한 기품(氣品)이 서리는데 사람은 왜 늘그막에 볼품없이 추레해지고 마는 걸까.

회양목(Buxus microphylla var.koreana )은 회양목과의 상록활엽수며, 다른 이름으로 황양목, 화양목, 도장나무라고도 불린다. 학명 Buxus microphylla var. koreana에서 Buxus 는 회양목, microphylla는 작은 잎, var.는 품종(variety)이란 뜻으로, 본종은 한국이 원산지요 한국 고유종(固有種, endemic species)이다. 그래서 보통 이름으로 Korean box tree 또는 Korean boxwood로 불린다. 그냥 예사로 봐왔던 도장나무가 우리 나무라니 더 새롭게 느껴지지 않는가.

그리고 석회암지대가 발달한 북한 땅인 강원도 회양(淮陽)에서 많이 자랐기에 회양목(淮陽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전국에 걸쳐 요소요소에 자생하지만 특히 석회암지대의 산중턱이나 언덕바지에서 천지로 난다. 식물들도 토질에 따라 다소간 다르게 나는지라 회양목은 석회가 풍부한 곳에서 잘 생육하는 호석회성식물(好石灰性植物)이다.

회양목은 일본이나 중국 등지에도 분포하고, 관상용으로 세계 여러 나라에서 수입해 재배하고 있으니, 우리처럼 화단 둘레꾸미기(edging)로 많이 심는다고 한다. 무엇보다 회양목은 성장속도가 매우 느리기 때문에 나무의 질이 매우 단단하고, 대신 꺾으면 똑똑 잘 부러지기도 한다.

키 작은 사람 이르는 ‘윤달에 만난 회양목’

그리고 새파랗고 모가 진 잔가지를 많이 쳐서 전체 허우대(나무모양)가 더부룩하다. 수고(樹高) 7m까지도 자라며 수피(樹皮)는 회색으로 줄기가 네모지다. 잎은 마디마다 두 장이 마주 자리하는데 워낙 마디 사이가 좁아 잎이 잔가지들을 완전히 덮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또 잎은 가죽처럼 단단하고 질긴 타원형이며 가장자리가 밋밋하게 뒤로 젖혀진다. 잎 길이는 1㎝ 안팎인데 잎 가장자리에는 톱니가 없이 밋밋하고, 앞면이 반들반들하며, 잎자루에 털이 딥다 빽빽하게 난다.

회양목은 일찍 꽃을 피우는 산수유나 목련 꽃망울들이 된통 시린 추위가 무서워 옹송그리고 있는 이른 초봄에도 진한 꿀 향이 풍기는 꽃을 헤벌쭉 피워줘서 부지런한 꿀벌들이 일찍이 첫 꿀 따기를 한다. 꽃은 가지 끝이나 잎겨드랑이에 수꽃과 암꽃이 함께 소담스럽게 몇 송이씩 뭉쳐 피는데 한가운데에 암꽃이 자리한다. 꽃의 지름은 3㎜도 채 안 되며, 빛깔은 연한 노란빛이다. 암꽃엔 세 개의 암술머리가 있고, 수꽃은 1~4개의 수술이 있으며 암꽃 주변에 둘러 핀다. 열매는 1㎝쯤 되는 삭과(蒴果, 익으면 말라 쪼개지면서 씨를 퍼뜨리는, 여러 씨방으로 된 열매)로 둥글며, 6∼7월에 갈색으로 익는다.

필자의 교수 시절 이야기다. 어느 늦여름 날에 학교 정원에 늙수그레한 할머니 한 분이 바싹 마른 회양목 열매를 주섬주섬 따 보자기에 넣고 있었다. 꽃이 피어 열매가 열리고, 영그는 것을 눈여겨봐왔지만 그것의 쓸모에 무심하였던 것이다. 나중에 보니 그분뿐만 아니라 여기저기 여러분이 열매 따기(채종, 採種)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섬섬옥수로 모운 씨를 종묘장에 비싸게 판다고 하는데, 걀쭉하고 새까만 씨앗을 심어 회양목 묘목을 얻는다고 한다.

회양목의 생약명은 황양목(黃楊木)으로 잔가지와 잎을 약재로 쓴다. 아무 때나 잎줄기를 채취하여 잘게 썰어 햇볕에 말려 쓴다. 이 나무엔 생약 성분인 북신(buxin), 파라 북신(parabuxin), 북시니딘(buxinidin), 파라북시니딘(parabuxinidin), 북시나민(buxinamin) 등의 알칼로이드 물질이 들어 있다. 이들은 진통·진해·거풍·백일해·치통 등에 효과가 있고, 통풍이나 류머티즘, 매독 치료약으로도 쓴다. 그러나 과용하면 구토, 설사, 현기증이 인다고 한다. 뒤탈(부작용)이 없는 약은 세상에 없는 법이니 약을 아주 멀리하면 오래 산다. 사람에 따라서는 이파리 즙액이 손에 닿으면 가려움증이 생기는 수가 있다 한다.

회양목은 자람이 느린 탓에 목질이 매우 단단하고 결이 골라 쓰임새가 많은 나무였다. 옛날엔 목판 활자나 호패(號牌), 표찰(標札), 도장, 장기 알을 만들었다. 사실 우리가 지금까지 자주 써왔던 목도장(목인, 木印)은 거의가 회양목을 썼던 것이다.

끝으로 ‘윤달에 만난 회양목’이란 속담이 있다. 회양목이 윤달이 되면 그 키가 한 치씩 준다는 전설에서 키 작은 사람을 놀림조로 이르는 말이요, 또한 일의 진행이 더딤을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권오길 - 1940년 경남 산청 출생. 진주고, 서울대 생물학과와 동 대학원 졸업. 수도여중고·경기고·서울사대부고 교사를 거쳐 강원대 생물학과 교수로 재직하다 2005년 정년 퇴임했다. 현재 강원대 명예교수로 있다. 한국간행물윤리상 저작상, 대한민국 과학문화상 등을 받았으며, 주요 저서로는 <꿈꾸는 달팽이> <인체기행> <달과 팽이> <흙에도 뭇 생명이> 등이 있다.

201601호 (2015.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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