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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이슈] 한일 ‘12·28 위안부 문제 합의’ 막전막후 

“이행 성공하면 양국 간 교류에 획기적 변화 온다” 

콘도 다이스케 일본 <주간현대> 부편집장
이병기-야치 쇼타로 양국 온건파 라인의 합작품… 합의 좌초되면 미국의 한·미·일 3국 군사동맹 수립 복안에 타격 줄 듯

▎사진·중앙포토지난 11월 1일 오후 청와대 영빈관에서 제6차 한중일 정상회담에 앞서 3국 정상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아베 일본 총리, 박근혜 대통령, 리커창 중국 총리. /
아쉬움도 있지만 합의 이행의 결실도 적지 않다. 일본 내 극우강경파의 입지를 약화시키고 한일 경제협력의 새로운 계기가 마련된다. 일본 내 혐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는 데에도 기여할 것이다. 일본이 우려하는 것은 중국의 움직임이다. 시진핑이 중국 내 위안부 문제를 전면에 내세우면 동아시아 정세는 다시 한번 요동치게 된다. 한·미·일 동맹에 맞서는 중국의 전략이 주목된다.

1월 4일, 도쿄는 섭씨 15도를 넘어선, 한겨울로서는 이례적으로 따뜻하고 청명한 날이었다. 이날 아베 신조 총리는 역시 ‘이례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통상국회를 소집했다. 4월부터 집행되는 신년예산을 심의하는 통상국회 소집은 예년대로라면 1월 하순이다. 그런데 지난해의 통상국회는 안전보장 관련 법안을 성립시키기 위해 역대 최장 기간인 95일이나 연장했고 그 때문에 9월 27일에야 종료됐다. 그래서 아베 총리는 가을 임시국회를 소집하지 않고 외교에 전념했다.(건강상태 악화로 임시국회를 기피했다는 설도 있다) 그 대신 연초의 통상국회 소집을 앞당긴 것이다. 아무튼 국회가 열리는 것은 3개월하고도 10일 만의 일이었다.


▎2014년 10월 21일 외교부 청사에서 윤병세 외교부장관(오른쪽)이 야치 쇼타로 일본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국장을 만나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 양국 현안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 / 사진·중앙포토
“실로 쾌청하고 좋은 날씨가 아닌가! 정말로 하늘은 내편이구나. 올해는 좋은 해가 될 것 같구나!” 아베 총리는 이날, 대단히 기분이 좋았다. 2016년 새해가 밝아오자 아베 총리를 둘러싼 정치부 기자들의 관심은 온통 7월에 ‘W(더블)선거(민의원·참의원 동시 선거)’가 있을지 여부 한 가지에 집중돼 있었다. 원래 7월에는 참의원 선거 실시가 예정돼 있다. 임기 6년의 참의원은 3년마다 전체 242개 의석의 반을 선거를 통해 교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의 야당은 전면 붕괴상태로 아베 총리가 거느리는 여당(자민당)의 1당 독주시대다. 그래서 헌법 개정이 비원인 아베 총리는 참의원 선거에 즈음하여 중의원도 동시에 해산해 중·참의원 동시선거를 실시하는 것을 모색하고 있다. 헌법 개정에는 국회의원 전체의 3분의 2의 찬성이 필요하기 때문에 단숨에 그 수준까지 올라가려는 속셈인 것이다.

“W선거는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아베 총리는 기자단의 질문에 태연한 표정으로 이렇게 대답했다. 그러나 아베 총리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일 만큼 기자들은 순진하지 않다. ‘없다’라고 말하면 ‘있다’라고 의심하고 억측하는 것이 기자의 습성이다. 왜냐하면 “선거 일정과 각료 인사에 관해서는 거짓말을 해도 상관없다”는 것이 총리와 기자들 간의 오랜 세월에 걸친 불문율이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아베 총리가 1월 4일에 국회에서 행한 ‘외교보고’는 일본 국내에서는 대부분 주목받지 못했다. 아베 총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현안은 해를 넘기지 않는다”


▎지난 1월 3일 서울 중학동 주한 일본대사관 앞 위안부 소녀상의 손 위에 작은 꽃다발과 장갑이 놓였다. / 사진·중앙포토
“지난해 11월의 일한 정상회담에서, 일한 간의 여러 현안에 대해서 논의했습니다.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미래 세대의 장애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관점에서 협의를 가속화하는 것으로 합의했습니다. 그것을 근거로, 12월 28일에 이뤄진 일한 외무장관회담에서의 합의, 그리고 저와 박근혜 대통령과의 전화 회담을 통해서 이 문제가 최종적이며 동시에 불가역적으로 해결됐습니다. 이것을 바탕으로 일한 관계가 미래지향의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아베 총리의 심정을 설명하면 이런 것이다. 아베는 대단히 ‘신도(神道)적’인 정치가다. 그 특징 중 하나가 “현안은 해를 넘기지 않는다”라는 것이다. 즉 그해의 현안사항은 그해 안에 처리하고 1월 1일 새해를 맞아 깨끗하고 새로운 기분으로 신도의 상징인 이세진구(伊勢神宮, 미에현 이세시 소재)를 참배하려는 것이다. 올해는 1월 5일에 참배했다.

2015년 12월 28일 아베 수상은 다시 한번 ‘연말 서프라이즈’를 선택했다. 기시다 후미오 외무대신을 서울에 파견하여 한일 간의 해묵은 현안이었던 종군 위안부 문제를 ‘해결해’ 보인 것이다. 이것은 일본 국민에게도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서프라이즈였다.

현재의 아베 정권은 국가적 결단을 재촉받는 중요 문제에서, 자주 ‘이중외교’를 구사한다. 그것은 ‘무대 앞 외교’와 ‘무대 뒤 외교’다. 무대 앞 외교란 일본 외무성이 창구가 되는 공식 외교다. 이에 반해 무대 뒤 외교란, 아베 총리 관저가 주도권을 행사하는 외교다. 아베 총리는 1980년대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집권한 3년 8개월간 아버지인 아베 신타로 외무 장관의 비서관 직을 수행했다. 이 기간에 아베 신타로 외무 장관은 39번의 외유를 통해 81개국을 방문했고, 당시 신조 비서관은 모든 외교일정에 동행했다. 그 때문에 외교 문제만은 자신의 전권사안이란 자부심이 아주 강하다.

실제로 2014년 1월에는 총리관저의 외곽조직인 ‘국가안전 보장국’을 설치하고, 야치 쇼타로 전 외무차관을 초대 국장에 임명했다. 이 국가안전보장국은 이른바, 아베 총리 직속의 ‘제2 외무성’이며 지난해 인원을 늘려 현재에는 100명에 가까운 스태프를 거느릴 정도로 세를 불려 놓았다. 당연히 일반적인 일본 외교는 일본 외무성이 주관하고 있다. 그러나 보수적이며 동시에 강경파인 일본 외무성이 해결하기 어려운 사항에 관해서는 아베 총리의 ‘칙명’을 받은 국가안전보장국이 ‘무대 뒤 외교’를 구사하는 투 트랙 외교가 정착했다.

주요 대상국으로는 중국(중일 수뇌회담), 러시아(푸틴 대통령의 방일), 북한(납치 문제), 몽골(자원 획득), 동남아시아(인프라스트럭처 정비), 그리고 한국이 있다. 이 점은 한국도 마찬가지다. 지난해부터 한국은 대일외교에서 ‘이중외교’ 노선을 유지하고 있다. 대일강경파의 윤병세 장관이 거느리는 한국 외교부와, 대일 온건파의 이병기 청와대 비서실장(전 주일대사)이 거느리는 청와대 비서실이다.

2015년에는 이 한일 간의 제2의 외교 루트가 3번에 걸쳐 꽃을 피웠다. 첫 번째는 지난 6월 22일에 열린 한일국교 정상화 50주년 기념 리셉션이다. 2013년 2월 출범한 박근혜 정권은 기본적으로, “종군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일본과의 관계개선은 없다”는 태도를 견지했다. 그에 대해 아베 총리는 “문은 항상 열려 있으며, 양국 간의 모든 문제를 정상회담을 통해서 해결해나가자”는 입장이었다. 또 일본 외무성은 “종군 위안부 문제를 포함한 모든 역사문제는 1965년의 한일기본조약으로 해결완료”라는 강경한 태도를 유지했다. 이것은 이른바 ‘입구론’과 ‘출구론’의 대립이었다. 곧 박근혜 대통령은 종군 위안부 문제를 대일교섭의 ‘입구’에 두었고, 아베 총리는 ‘출구’에 둔 것이다. 양국 수뇌부는 모두 종군 위안부 문제를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보았으나, 그 ‘수법’을 둘러싸고 대립하고 있었던 것이다.

강경 일변도로 충돌했던 양국 외교부 국장회담


▎지난해 8월 15일 종전기념일을 맞아 중국 남방항공 승무원들이 기내에서 중국 위안부 피해 할머니 사진을 승객들에게 보여주고 있다. / 사진·중앙포토
꽉 막힌 한일 외교라인을 대신해서 돌연 ‘암약(暗躍)’을 시작한 것이 야치 쇼타로 국장-이병기 비서실장의 ‘온건파 라인’이었다. 이 비서실장이 주일대사를 지낼 때부터 마음이 맞았던 두 사람은 ‘멋진 연출’을 실현시켰다. 즉 국교정상화 50주년 기념일을 맞는 6월 22일에, 도쿄에서는 한국 대사관이 주최하고, 서울에서는 일본 대사관이 주최하는 리셉션을 연다. 그리고 도쿄의 리셉션에는 아베 총리가, 서울에서의 리셉션에는 박근혜 대통령이 참석하여 각각 축사를 하기로 한 것이다. 이 ‘연출’은 훌륭하게 성공했고, 아베 총리도 박근혜 대통령도 미소 띤 표정으로 리셉션 회장에 모습을 나타냈다. 도쿄 리셉션장에는 필자도 취재를 갔지만 정말로 훈훈한 분위기에서 파티가 진행됐으며 케네디 주일 미 대사도 얼굴을 비쳤다. 이렇게 해서 ‘50년만의 최악’이라고 일컬어지던 한일관계는 어떻게든 체면을 유지한 것이었다.

이 ‘온건파 라인’이 두 번째로 움직인 것은 11월 2일 열린 아베 총리와 박근혜 대통령의 첫 한일정상회담이었다. 우선은 7월 16일에 야치 국장이 방중하고, 중국의 카운터파트인 양제츠 외교담당 국무위원(전 외무장관)과 한중일 정상회담을 서울에서 개최하는 것에 대해 상의하여 큰 틀을 다졌다. 한중일 정상회담을 하는 김에 한일 정상회담을 하게 되면 “위안부 문제가 해결하지 않는 한, 아베 총리와의 정상회담은 하지 않는다”는 박근혜 대통령의 체면은 유지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11월 1일 서울에서, 실로 3년 반 만에 한중일 정상회담이 열리게 되고, 그 후의 실무교섭은 양국 외무성의 공식 외교루트로 되돌아왔다. 그런데 강경파가 득세한 양국 외교 라인은 다시 충돌했다. 당시 일본 외무성 실무담당자의 주장은 이랬다.

“한중일 정상회담은 3개국이 대등해야 하는데, 한국은 어느 사이에 중국 대표로 참석하는 리커창 총리만 국빈대우를 했다. 청와대에서 리 총리를 맞이하여 박근혜 대통령 주최의 공식만찬회가 열리고 있는 동안, 아베 총리는 명동에서 혼자서 쓸쓸하게 불고기나 먹고 있으라는 말인가? 이처럼 무례한 나라에 아베 총리를 보낼 수 없다.” 이것에 대하여 한국 외교부도 “아베 총리가 오지 않는다면 리커창 총리만 공식 방문하는 것으로 해도 무관하다”라며 강경한 태도를 이어갔다.

결국 교섭 창구는 다시 야치 쇼타로 국장-이병기 비서실장의 ‘온건파 라인’으로 되돌아갔다. 이리하여 10월 31일 리커창 총리가 국빈 자격으로 방한했다. 11월 1일 한중일 정상회담, 그리고 11월 2일 오전 한일 정상회담 일정이 확정된 것이다. 정상회담에서 아베 총리의 양쪽에는 기시다 외무장관과 야치 국장이, 박 대통령의 양쪽에는 윤병세 외교장관과 이병기 비서실장이 포진했다. 이 회담의 ‘그림자 주인공’이 이 비서실장과 야치 국장이었던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이 자리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강한 어조로 “위안부 문제를 연내에 매듭짓기 위해 교섭을 가속화해야 한다”는 의지를 밝혔다. 아베 총리도 미국으로부터 강한 압력을 받고 있던 터라 하루 빨리 한국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싶어 했다. 이 정상회담의 후속조치로 11월 11일 이시카네 기미히로 외무성 아시아 대양주국장과 이상덕 외교부 동북아 국장에 의한 한일 국장급 회담이 서울에서 개최됐다.

일본이 원하는 것은 ‘불가역적인 최종해결’


▎2006년 5월 한국을 방문한 일본인 납치피해자 요코다 메구미의 부친 요코다 시게루 씨. / 사진·중앙포토
한일 국장급 회담은 2014년 3월 오바마 대통령의 주도로 한미일 3개국 정상회담이 열린 것을 계기로 그 다음 달인 4월에 시작되었다. 지금까지 총 9번의 국장급 협의가 열렸지만, 마치 서로 ‘상대를 매도하는 모임’인 것처럼 보였다. 국장급 회담이 열릴 때마다 상대에 대한 감정은 더 격앙됐다.

10번째가 되는 11월 11일의 국장급 회담은 최초의 한일 정상회담을 연 직후인 만큼 관심과 기대가 높아졌다. 그러나 일본 측 대표를 맡은 이시카네 국장은 회담 직전인 10월 16일에 아시아대양주 국장으로 막 발탁된 새로운 인물이었다. 게다가 지금까지 주로 동남아 국가와의 경제협력을 전문적으로 맡아온 외교관으로 한국과의 정치교섭에는 경험이 전무했다. 이시카네 국장의 발탁은 지난가을에 실시된 외무성 인사 중 가장 놀라운 인사로 화제가 됐다. 왜 한국이나 중국, 북한과의 복잡한 정치교섭을 책임지는 자리에 경제통 외교관을 임명했는가에 대한 의구심이기도 했다.

11월 11일 서울에서 열린 국장급 협의는 이시카네 국장의 ‘신고식’으로 끝나버려 한국 측을 낙담시켰다. 계속해서 12월 15일 도쿄에서 열린 12번째의 한일 국장급 회담에서도 양국의 주장은 평행선을 달렸다. 이때쯤 일본 측 실무담당자가 다음과 같은 말을 들려줬다.

“2015년 내에 무슨 일이 있어도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는 것은 한국 측이다. 그렇다면 한국 측이 양보해야 한다. 일본으로서는 서두를 필요도 없고 초조해할 필요도 없기 때문에 한국 측이 양보해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상태다. 처음부터 식민지시대의 청구권은 1965년의 시점으로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을 완료했기 때문에 국제 사회에서 비난을 받을 이유도 없다.”

일본 측이 이처럼 강경한 태도였기 때문에 위안부 문제는 다시금 궁지에 빠졌다. 이때 3번째로 등장한 것이 야치 쇼타로 국장-이병기 비서실장의 ‘온건파 라인’이었다. 양자는 마치 난해한 방정식을 푸는 것처럼, 하나하나 면밀하게 그리고 전체적인 밸런스를 봐가면서 ‘해법’을 찾아 갔다.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양국의 갈등 포인트는 책임과 사죄, 보상, 소녀상, 최종해결 방법 등 4가지였다.

먼저 책임과 사죄에 대해서는, “무라야마 내각시대의 전례가 있었다”라는 점을 들어 일본 측이 그동안의 입장을 접고, 거의 대부분 한국 측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했다. 즉 일본 정부는 종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구 일본군의 관여를 인정하고, ‘책임을 통감’하는 동시에 아베 총리가 ‘마음 속으로부터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표명키로 한 것이다.

그 다음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에 대한 보상 문제는 한일 양측이 타협했다. 일본 정부로서는 위안부 피해여성에게 직접적으로 ‘배상금’을 지불하는 방법에 강한 저항감을 느끼고 있었다. ‘완전하고 최종적인 해결’로 규정한 1965년의 한일기본조약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한국 측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이번에는 새로운 재단을 한국 정부가 만들고, 일본정부는 거기에 ‘인도적 원조’라는 명목으로 10억 엔 규모의 자금을 제공하기로 했다. 일본 측은 자금을 제공하는 것 자체에는 20년 전인 1995년에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국민기금(아시아 여성기금)’을 설립한 전례도 있기 때문에 저항감이 적었다.

한국 시민사회의 움직임 숨죽여 주시하는 일본 정부


▎2012년 8월 10일 전격적으로 독도를 방문한 이명박 대통령. 이 대통령의 독도 방문을 계기로 일본 내 반한감정이 높아졌다는 평가다. / 사진·중앙포토
소녀상에 대해서는 일본 측이 “서울의 일본 대사관 앞에 소녀상을 설치하는 것은 국제상식으로부터 맞지 않는 행위이며, 한국 국내의 법률(도로교통법)에도 위반되는 것이다. 신속하게 철거하기 바란다”고 여러 번에 걸쳐 요구했다. 이에 대해 일본 측 관계자는 “한국 측이 철거를 약속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그러나 12월 28일 윤병세 외교장관은 회견을 통해 “관련 단체와의 협의 등을 통해서 적절하게 해결되도록 노력한다”라고 발표했을 뿐이다. 더욱이 한국 외교부는 그 후 “(소녀상은) 민간단체가 만든 것이며 한국 정부와는 관계없다”고 한발 더 물러났다.

마지막 위안부 문제의 최종해결도 역시 일본 측이 강하게 요구한 것이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하나는 한국 정부가 두 번 다시 위안부 문제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최종적인 동시에 불가역적인 해결’을 해달라고 하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지난해 한국과의 교섭에서 ‘골포스트 이동론’이라는 말이 회자됐다. “축구는 세계 공통의 룰로 치르는 게임인데, 한국만은 골포스트를 자기 멋대로 옮긴다”는 비유다. 일본 입장에서 보면 1965년 모두 해결했고 더구나 전후 50주 년인 1995년에 한 번 더 양보한 문제인데, 한국은 도대체 언제까지 일본의 전쟁 책임을 추구하는 것인가라는 불만이다. 아마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피해자가 언제까지나 계속 요구하는 것은 당연하다”라고 말하고 싶겠지만, 이것은 각각의 입장 차이에서 오는 문제다.

최종해결 방법에 관해 일본이 한국에 요구한 또 한 가지는 “중국 측에 가담하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이었다. 사실은 일본이 가장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 중국 정부가 위안부 문제를 정치 문제화하는 것이다. 일본정부의 한 관계자는 다음과 같은 말을 들려줬다.

“한국의 위안부 피해자 중 생존자는 이미 50명 이하다. 그러나 이후, 중국에서 위안부 피해자라고 자칭해서 나오는 여성이 최대 1만 명 정도 될 가능성이 있다. 시진핑 정권은 이들을 이용해 새로운 난제를 일본에 던질 위험이 있다. 만일 그렇게 되었을 경우 한국 정부는 절대로 중국 정부 측에 가담하지 않기를 일본 측은 바란다.” 굳이 ‘중국’이라는 국명은 언급하지 않았지만 ‘한국 이외의 나라나 지역’이라는 말로서 이 점을 상당히 강하게 주장했다.

동시에 유네스코(UNESCO)가 세계문화유산에 위안부 문제 관련 자료를 등록 신청하는 움직임에 한국이 가담하지 않도록 부탁했다. 한국 측은 “위안부 문제는 어디까지나 한일 양국 간의 문제”라는 말로 이해를 표시했다. 이렇게 복잡한 방정식의 ‘해법’을 찾아낸 야치 쇼타로 국장-이병기 비서실장의 ‘온건파 라인’은 각각 자국의 외교부에 명예를 양보했다.

2016년 새해가 밝자 한국의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과 지원단체인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거기에 야당이 맹렬하게 반발하고 나서며, “한일정부의 합의는 무효다”라고 외치기 시작했다. 한국은 4월 총선거를 앞두고 있는 만큼 ‘12·28합의’가 선거의 쟁점이 될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예측을 불허하는 상황이다. 일본정부는 그러한 한국의 움직임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다. 국회에서 아베 총리나 기시다 외무장관이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말을 아끼는 것은, 한국을 자극하지 않도록 배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1월 6일 북한이 4번째 핵 실험을 강행하고 나서는 바람에 일본 국내에서 위안부 문제는 완전히 관심 밖의 일이 돼버렸다. 신년 인사 차 찾아간 일본정부의 한 관계자는 필자에게 “한국 내의 위안부 문제가 점차 2002년의 일본처럼 되어간다. 이것은 대단히 우려할 만한 일”이라는 관측을 들려줬다. ‘2002년의 일본’이란 납치 문제를 둘러싸고 북한에 대한 일본 여론의 광기를 가리킨다.

돌이켜보면, 한국에서의 위안부 문제와 일본에서의 납치 문제는 대단히 비슷하다. 첫째로, 피해자국(위안부 문제에 있어서의 한국, 납치 문제에 있어서의 일본)은 대단히 민감하고 동시에 국민적 문제라고 집착하고 있지만 가해자국(위안부 문제는 일본, 납치 문제는 북한)은 ‘이미 해결완료’라는 지극히 둔감하고 동시에 냉담한 태도를 보인다. 두 번째로, 피해자 측의 지도자(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총리)가 각각 위안부 문제와 납치 문제의 제1인자이며, 앞장서서 해결을 목표로 삼고 있다. 세 번째로, 어느 쪽도 과거 역사상의 문제이며 현재와는 관계없는 일이다. 네 번째, 그렇지만 피해자들이 고령에 도달했기 때문에 조기 해결이 필요한 사안이다.

2002년 당시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북한을 방문하여 김정일 총서기와 정상회담을 하고 5명의 납치 피해자가 일본에 귀국했다. 이때 가해자 측인 북한은 납치 문제가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피해자 측 일본에서는 “5명뿐만 아니라 생존자 전원을 돌려달라”는 여론이 비등했다. 그 때문에 북한 측도 태도를 경직화했다. 결국 고이즈미 정권은 북한과의 교섭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 결과 2002년 북일 정상이 서명한 ‘북일 평양 선언’은 그로부터 14년의 세월이 지난 현재까지 허공에 떠 있다.

이번 ‘12·28합의’도 한국 여론의 비등에 의해 ‘북일 평양 선언’의 실패를 되풀이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면 임기가 2년 남은 박근혜 정권 기간 중 한일관계의 개선은 이미 불가능할 것이다. 게다가 일본 국내에서는 심한 ‘혐한 무드’가 더욱 거칠게 불어댈 것이 틀림없다.

중국과 대만의 움직임에 촉각 곤두선 미·일

김대중 정권 이후 1998년의 일본문화 개방, 2002년의 월드컵 동시 개최, 그리고 2004년에 시작된 욘사마 인기로, 2000년대의 일본은 한류 붐에 들끓었다. 방송국은 한류 드라마만 내보내고 많은 여성이 한국어 공부를 시작하고, 한국 여행을 다녀왔다. 그러나 2012년 여름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상륙과 천황모욕 발언으로 일본에서의 한류 붐은 단숨에 식어버렸다. 그리고 그 후는 ‘혐한 시대’가 도래하여 서점에서는 아주 최근까지 ‘한류 코너’였던 선반이 ‘혐한서적 코너’로 바뀌었다.

이번 ‘12·28합의’가 향후 사실상 파기된다면 한일 간의 무역은 더욱 부진해질 것이며 일본 관광객의 한국방문은 더욱 격감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12·28 합의’는 일본에서의 ‘혐한 무드’를 잠재울 수 있는 최대의 기회임이 틀림없다.

필자가 주시하고 있는 또 한 가지는 위안부 문제의 동향이 앞으로의 동아시아의 국제정세에 크게 영향을 주리란 것이다. 이번 ‘12·28합의’를 뒤에서 지원한 나라는 미국이다.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일본과 한국은 아시아의 2대 군사동맹국이다. 하루라도 빨리 ‘한미일’의 군사적 연대를 통해 부상하는 중국의 위협에 대처해야 한다. 그런데 중요한 아시아의 두 동맹국이 70년이 지난 옛날 일을 둘러싸고 싸움만 해대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12·28합의’ 직후 미 백악관의 라이스 보좌관은 “미국은 이번 합의와 그의 완전한 수행을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금후 ‘12·28합의’가 좌초되면 미국은 크게 실망할 것이며 반대로 중국은 어부지리를 얻은 셈이니 함박웃음을 지을 것이다. 대만의 마잉주 총통은 발 빠르게 선쓰춘 주일대사에게 “대만인 위안부들에게도 동등한 대응을 요구하며 일본정부와 교섭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중국도 지금 대만과 같은 행동에 나올 가능성이 있다.

1월 5일 중국 외무성의 정례회견에서 화춘잉 대변인은 위안부 자료의 유네스코 등재에 관한 일본인 기자의 질문에 날카로운 어조로 다음과 같은 대답했다.

“위안부 문제는 일본 군국주의가 아시아 각국에 범한 중대한 범죄행위다.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에 위안부 관련 자료를 제출하는 것은, 이 자료가 인류 공통의 기억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자료들은 전 인류에게 중시되고 보호되지 않으면 안 된다.”

중국은 위안부 문제를 이용해서 한미일의 군사관계를 벌려놓을 속셈인 것이다. 그리고 한국, 중국, 대만이 주축이 된 ‘위안부 동맹’을 맺으려고 할 것임에 틀림없다. 그런 의미에서 위안부 문제는 단순히 한국의 국내문제, 혹은 한일 양국의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는 동아시아 정세를 좌우하는 커다란 문제로 부상할 리스크를 안고 있는 것이다.

- 콘도 다이스케 일본 <주간현대> 부편집장

201602호 (2016.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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