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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호의 ‘조선왕조 스캔들’(15)] 조상묘 도굴당한 선조, 거짓으로 복수하다 

 

신명호 부경대 사학과 교수
임진왜란 당시 성종과 중종의 능(陵)이 왜군에 짓밟힌 데 격분했지만, 끝내 진범 여부 확인 못한 채 도굴범 두 명 공개처형 후 왜와 화친

▎조선 제14대 왕인 선조는 재위 후반 임진왜란과 여진족의 침입을 받는 등 외환에 시달렸다. 지난해 10월 부산 동래구 동래읍성에서 열린 ‘제21회 동래읍성역사축제’에서 배우들이 임진왜란 당시 첫 전투였던 동래읍성 전투 장면을 재연하고 있다.
임진왜란 후 조선 사람들에게 일본은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였다. 당시 확인된 조선의 인구 500만 명 중에서 3분의 2에 육박하는 300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대략 20만 명 정도는 포로로 끌려갔다. 7년 난리 통에 희생된 300만 사망자와 20만 포로는 누군가의 부모자식이거나 형제자매였다. 생때같은 혈육을 빼앗긴 채 상처투성이가 된 조선 사람들은 일본을 불구대천의 원수로 증오했다.

그런데 일본은 임진왜란이 끝나자마자 사죄와 배상도 없이 화친하지 않는다면 또다시 침략하겠다는 협박을 내세우며 국교 재개를 요구했다. 이는 상처투성이인 조선 사람들의 몸과 마음에 소금을 뿌리는 만행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전쟁을 각오하지 않는 이상 화친하지 않을 수 없던 당시 국왕 선조(宣祖)로서는 달리 대안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조는 일본으로부터 최소한의 사죄와 배상이라도 받아내고자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일본의 만행과 협박이 무한 반복될 것이라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선조는 두 가지를 요구했다. 화친을 요청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국서를 먼저 보내라는 요구와 함께 선릉과 정릉의 도굴범을 체포해 압송하라는 요구가 그것이었다. 당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자기 휘하의 병사 중 단 한 명도 조선 침략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모든 전쟁 책임을 이미 죽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게 떠넘겼다. 따라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런 사실을 공식적인 국서에 명시하고 화친을 요청한다면 이는 결국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전쟁 책임을 시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미 사후였기에 그에게서 사죄를 받아내는 것은 불가능했고 그래서 양국은 서로에게 유리하게 해석할 수 있었다.

즉 선조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전쟁 책임을 시인한 것은 곧 전쟁 사죄나 마찬가지라고 해석할 수 있었다. 반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비록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전쟁 책임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사죄할 일인지 아닌지는 자신이 알 바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었다. 선조는 이 정도의 타협으로 일본의 전쟁 책임과 사죄 문제를 매듭지으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선조 입장에서 선릉과 정릉의 도굴범 문제는 국서만큼 쉽게 타협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선릉은 성종의 능이었고 정릉은 중종의 능이었다. 그 선릉과 정릉이 임진왜란 중 도굴당했다. 뿐만 아니라 성종과 중종의 관이 파헤쳐져 불태워지기까지 했고 시체는 행방이 묘연했다. 유교 가치관에서 볼 때 시체를 파내 훼손하는 것은 살인보다 더한 만행이었다.

“이 원수를 갚지 못한다면 사람이 아니다”


▎큰 인기를 모았던 영화 <명량>의 한 장면. 정명가도(征明假道: 명을 치러 가니 조선은 길을 빌려달라)를 명분으로 조선을 침공한 왜군이 행군하고 있다.
성종과 중종은 선조 개인에게는 직계 조상이었고, 조선 사람들에게는 선왕이었다. 그래서 선릉과 정릉의 도굴범은 선조에게 조상을 살해한 원수보다 더 한 원수였고, 조선 사람들에게는 국왕을 살해한 원수보다 더한 원수였다. 유교의 교주 공자는 부모를 살해한 원수와는 같은 하늘을 이고 살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불구대천의 원수가 바로 그것이었다. 유교 가치관이 팽배했던 당시, 선조와 조선 사람들에게 선릉과 정릉의 도굴범은 불구대천보다 더한 원수였다.

만약 선릉과 정릉의 도굴범을 찾아 죽이지 못한 상황에서 일본과 화친한다면 선조는 조상의 원수도 갚지 못한 모자란 후손이자 최소한의 전쟁 배상도 받아내지 못한 무능한 국왕이란 지탄을 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선조는 일본의 화친 요청에 먼저 도굴범부터 체포해 압송하라고 요구했던 것이다.

선릉과 정릉은 1592년(선조 25) 9월쯤 도굴됐다. 당시 한양은 일본군이 점령한 상황이었고 선조는 의주에 파천(播遷)해 있었다. 그래서 조선군도 도굴 사실을 몰랐고 선조도 몰랐다.

도굴 사실이 조선군 사이에 알려진 시점은 1593년(선조 26) 4월이었다. 2월 12일의 행주대첩 이후 조선의 관군과 의병은 수도를 탈환하기 위해 한양 주변에 집결했다. 의병장 김천일 역시 수도 탈환 작전에 참전하기 위해 관악산에 주둔하던 중 선릉과 정릉이 도굴됐다는 소문을 들었다.

김천일은 상부에 급보하는 한편 특공대를 조직해 현장을 조사하게 했다. 그때 선조는 평안도 영유에 머물고 있었다. 선조가 관찰사 성영의 급보를 받고 도굴 사실을 알게 된 때는 4월 13일이었다.

선조는 3일간 애도를 표하는 한편 대신을 파견해 현장을 확인하게 했다. 아울러 “이 도적을 잊고 이 원수를 갚지 못한다면 천리가 없어지고 인륜이 무너지게 되어 장차 다시는 사람 축에 들지 못할 것은 물론 중국에서도 우리나라를 인정해주지 않을 것이니 자애로움을 베풀어 긍휼히 여기기를 간절히 바랍니다”는 탄원서를 명나라에 보냈다. 명나라의 강력한 군사력으로 원수를 갚아달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선릉과 정릉은 일본군이 주둔 중인 한양 주변에 자리하고 있어서 현장 조사가 몹시 위험했다. 김천일은 자신이 신임하던 이준경이라는 장교를 중심으로 30명의 특공대를 조직했다. 길안내는 서개똥이라고 하는 병사가 맡았다.

4월 17일 오전 8시쯤 관악산을 출발한 특공대는 작전을 개시했다. 이준경은 서개똥과 이충윤을 선발대로 보내고, 본대는 은밀한 길을 골라 천천히 전진했다. 성종의 4대 후손인 이충윤은 왕릉이 도굴됐다는 소문을 듣고 자발적으로 참가한 인물이었다. 밤 12시 즈음, 이충윤과 서개똥이 먼저 정릉에 도착했다. 소문대로 정릉은 파헤쳐져 있었다. 참담해진 이충윤은 서개똥과 함께 숨죽여 곡을 했다. 광(壙) 안이 어떤 상황인지 알아보기 위해 이충윤은 먼저 서개똥을 내려 보냈다.

광은 대략 10m 깊이로 파여 있었다. 서개똥은 부싯돌로 불을 붙여가며 광 속을 조사했다. 불에 타고 남은 나뭇조각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는데, 관이 타고 남은 조각들이 분명했다. 광 안을 둘러보던 서개똥은 깜짝 놀랐다. 광 중앙에 시체 하나가 가로놓여 있었다.


▎성종의 아들이자 조선 11대 왕인 중종의 무덤인 정릉.
광 중앙에 시체가 있다는 서개똥의 말에 이충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 시체는 중종의 시체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었다. 이충윤은 일단 본대를 기다리기로 하고 서개똥을 나오게 했다. 이충윤과 서개똥이 정릉 주변을 둘러보던 차에 이준경이 도착했다.

선왕 유골 수습한 뒤 국장 다시 치러

이충윤의 말을 듣고 이준경은 직접 확인하기 위해 광 안으로 들어갔다. 부싯돌로 불을 붙여가며 확인해보니 시체는 머리털과 수염이 전혀 없었고 옷은 벗겨진 상태였다. 이준경은 자신의 옷을 벗어 시체의 아래를 감싸고, 윗부분은 이충윤의 옷으로 감쌌다. 마침 서개똥이가 곡장(曲墻) 밖에서 흰 끈을 주워왔기에 그 끈으로 시체를 단단히 묶고 땅을 파서 묻은 다음 기와로 덮었다. 뒤이어 선릉으로 옮겨가 확인해보니 그곳도 파헤쳐지기는 했지만 시체는 보이지 않았다.

선릉과 정릉이 도굴됐다는 소문이 조선군 사이에 퍼지면서 전의가 불타올랐다. 선왕의 무덤을 파헤치고 시체를 훼손한 저 야만인들에게 복수하지 않으면 세상사람들에게 얼굴을 들 수 없다는 도덕적 의무감은 조선군을 더더욱 용맹하게 만들었다. 4월 19일 마침내 일본군은 한양에서 자진 철수했다.

정릉 광 안에 시체가 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이 시체가 과연 중종의 시체인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일이 급선무로 떠올랐다. 중종은 1544년에 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므로 1593년 당시에는 장례를 치른 지 이미 50년 가까이 흐른 뒤였다.

상식적으로 그 정도 세월이면 시체가 썩어 없어졌을 수도 있지만, 회격(灰隔)으로 밀봉된 왕릉의 특성상 미라 상태로 보존될 수도 있었다. 만약 정릉의 시체가 정말 중종이라면 이 시체를 가지고 다시 국장을 거행해야 했고 그렇지 않으면 시체 대신 불에 타고 남은 유골로 해야 했다.

선조는 시체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중종을 직접 모셨던 사람들을 찾아 조사하도록 했다. 그 결과 종친·외척·궁녀 중에서 5명이 선발됐다. 그들은 옛날 자신들이 본 중종의 모습을 회상했고 그것을 토대로 중종의 모습을 그렸다.

증언에 의하면 생전의 중종은 보통사람보다 신장은 컸지만 체중은 보통이어서 훤칠한 느낌이었으며 5㎝ 정도의 누르스름한 수염이 있었다. 얼굴은 전체적으로 갸름했고 곰보자국이 있었다. 또한 코는 매부리코였으며 양 눈썹 사이에 녹두알만한 검은색 사마귀가 있었다. 이런 증언을 바탕으로 중종의 모습을 그려서 발견된 시체와 대조했다.

그런데 그 시체는 모발이 모두 빠졌고 콧등은 깨져 이지러졌으며, 얼굴 피부도 모두 녹아 없어서 알아볼 수가 없었다. 수염도 있었는지 없었는지 확인할 수 없었고, 겨우 신장과 몸통만이 확인 가능했다. 측정 결과 신장은 150㎝ 정도였는데 이 정도는 조선시대 남자 신장으로도 작은 편이었다. 또한 남아 있는 몸통은 뚱뚱한 편이었다. 전체적으로 시체는 작고 뚱뚱한 체형이었던 것이다. 이는 마르고 훤칠하다는 중종의 모습과는 일치하지 않았다. 그 결과 정릉의 시체는 중종이 아니라는 의견이 다수였다.

선조는 선릉과 정릉의 시신이 모두 불탔다는 결론을 내리고 남아 있는 유골로 국장을 치르게 했다. 현장을 조사한 결과 선릉과 정릉의 광 안에는 흙색과 백색 그리고 뼈마디와 피부조각이 뒤섞인 재가 있었다. 이런 유골을 두 개의 종이 봉지로 수습했는데 큰 봉지에는 뼈마디와 피부조각 등을 수습했고, 작은 봉지에는 타고 남은 재 등을 수습했다.

선조는 1593년 가을에 성종과 중종의 국장을 다시 치렀다. 물론 시체가 없어서 불탄 유골을 가지고 국장을 치렀다. 유교 가치관으로 볼 때 성종과 중종은 두 번 죽은 셈이었다. 첫 번째는 자연사였지만 두 번째는 시체가 불타 없어지는 타살이었다. 가까운 친족이 타살됐을 때 어떻게 복수해야 하는지에 대해 공자는 이런 가르침을 남겼다.

“자하가 공자에게 묻기를 ‘부모의 원수가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니 공자가 대답하기를 ‘거적을 깔고 방패를 베개삼아 잠자고, 벼슬하지 않으며, 원수와는 함께 세상을 살아가지 않을 결심을 해야 한다. 만약 원수와 시장이나 관청 같은 곳에서 만나면 무기를 챙기러 가지 않고 즉시 싸울 수 있어야 한다’ 했다. 자하가 다시 묻기를 ‘청하여 묻습니다. 형제의 원수가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니 공자가 대답하기를 ‘원수와는 같은 나라에서 함께 벼슬하지 않으며 임금의 명령으로 출사할 경우에는 비록 원수를 만나더라도 싸우지 않아야 한다’ 했다. 자하가 또 묻기를 ‘가르침을 청합니다. 백부나 숙부 또는 종형제의 원수가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니 공자가 대답하기를 ‘앞장서서 원수를 갚아서는 안 된다. 본인이 원수를 갚을 수 있으면 무기를 잡고 뒤에서 도와야 한다’ 했다.”[<예기(禮記)>, 단궁]

도쿠가와의 국서와 도굴범 압송을 요구하고


▎서애(西厓) 유성룡이 임진왜란 동안 경험한 내용을 기록한 <징비록(懲毖錄)>.
공자의 가르침에 따른다면 선조는 도굴범을 찾아 죽일 때까지 ‘거적을 깔고 방패를 베개 삼아 잠자고, 벼슬하지 않으며, 원수와는 함께 세상을 살아가지 않을 결심을 해야’ 마땅했다. 국왕 선조는 실제 그렇게 할 수 없었지만 그런 마음가짐은 항상 지녀야 했다.

그렇지 않다면 선조는 공자의 가르침을 저버린 배신자라는 지탄을 면할 수 없었다. 군사부일체라는 가르침에 따르면 선조뿐만 아니라 조선 사람 모두가 같은 상황이었다. 선조와 그 시대 사람들이 공자의 가르침대로 실행하려면 국력을 키워 일본을 정복하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임진왜란 후 일본이 사죄와 배상도 없이 전쟁 운운하며 화친을 요구하자 국론은 둘로 갈렸다. 선조와 조정 중신들은 현실에 입각해 화친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반면 젊은 관료들은 복수를 주장하며 화친을 반대했다. 예컨대 선조는 ‘우리나라와 일본은 불행히도 서로 가까이 붙어 있어서 일본과는 천지가 끝나도록 함께해야만 하는 관계이니, 이는 마치 음양이 마주하고 주야가 마주하는 것과 같아 한쪽을 없앨 수가 없어 어렵고도 어렵도다’라고 탄식했는데 이는 일본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는 현실에서 나오는 한탄이었다.


▎일본 가라쓰(唐津)시 히젠나고야(肥前名護屋)성에서 바라본 대한해협. 이 성에서 왜군 12만 명이 조선을 향해 출격했다.
이에 비해 젊은 사관들은 ‘임진왜란으로 우리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고 심지어 선왕의 무덤까지 도굴되는 치욕을 당했으니 일본은 우리의 영원한 원수다. 와신상담해 이 치욕을 씻지는 못하더라도 관문을 걸어 닫아 일본과는 절대로 화친할 수 없다는 의리를 보여야 하는데 지금 화친하고자 하니 복수의 의리에 크게 어긋날까 염려스럽다’고 했다.

이 같은 젊은 관원들의 대의명분이 아무리 훌륭하고 당당해도 전쟁 재발이라는 현실 앞에서는 무력하기 짝이 없었다. 사관의 논평대로 ‘와신상담해 이 치욕을 씻으려면’ 무엇보다도 일본보다 강한 군사력을 양성해야 했다. 이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이 같은 현실과 명분 사이에서 선조는 최소한의 사죄와 배상을 받아내기 위해 도쿠가와 이에야스 국서와 도굴범 압송을 요구했던 것이다. 길고 긴 논쟁 끝에 선조가 화친의 전제조건 두 가지를 요구하는 사신을 대마도에 파견한 때는 1606년(선조 39) 8월이었다. 일본에서는 바로 다음달에 도쿠가와 이에야스 국서와 도굴범 2명을 보내왔다.

“아무런 조처 없다면 불의·불효한 일”

그런데 문제는 도굴범 2명의 진범 여부였다. 진범이 아니라면 억울한 사람을 죽이는 것일 뿐만 아니라 신명(神明)을 속이는 일이었다. 선조는 도굴범이 진범인지 아닌지를 엄중하게 조사하게 했다.

당시 조선 사람들 사이에는 대마도 출신의 평조윤이 도굴 주범이라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그러나 일본은 평조윤이 이미 죽었다고 하며 그 대신 평조윤과 함께 도굴에 참여했다는 대마도 사람 두 명을 체포해 압송한다고 했다.

하지만 평조윤의 조카로 알려진 한 사람을 조사한 결과 그는 “조선땅은 이번이 처음으로 능침을 범한 절차에 대해서는 전연 모르는 일이고 평조윤이라고 하는 자도 모릅니다. 저에게는 부모형제도 없고 4∼5촌 이내의 친척도 없습니다”라고 주장했다. 다른 한 사람 역시 한양에는 간 적도 없다고 주장했다.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이들이 도굴범일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선조는 그들이 진범일 경우 죽인 후 종묘사직에 고하는 것으로 복수를 대신하려고 했다. 하지만 조사 결과 두 명은 진범이 아닐 가능성이 훨씬 컸다. 조정 신료들의 의견은 둘로 갈렸다. 첫째는 가짜 도굴범 두 명을 석방하고 화친 요구를 거절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가짜 도굴범을 보낸 것은 신명에 대한 기만행위이자 조선에 대한 모욕행위이기에 단호히 응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둘째는 도굴범이 비록 가짜라고 해도 대안이 없으니 그들을 죽이는 것으로 복수를 대신하고 화친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대의명분을 내세우는 첫 번째 주장이나 현실을 중시하는 두 번째 주장 역시 일리가 있었다. 두 주장은 타협 없이 팽팽하게 맞서며 평행선을 달렸다. 그러자 선조는 이런 논리를 폈다.

“가령 어떤 사람이 자기 부모의 무덤을 도굴당했다면 수천 명의 도적 모두는 응당 그 아들이 직접 베어 살을 저며야 할 자들이다. 그러나 그 수천 명을 다 잡을 수 없게 됐고 다행히 한두 명을 잡았다면 아들 된 자는 실성해 미친 듯 뛰면서 부모의 묘에 가서 통곡하고 손수 죽여서 원수를 갚겠는가, 아니면 가만히 서서 냉소하면서 ‘이는 묘를 도굴한 괴수가 아니라 수종(隨從)한 적일 뿐이니 이들에 대해 노할 것이 없다’고 하겠는가? 만약 그렇게 하고서 아무런 조처도 취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의한 일이요 불효한 일이 아닐 수 없다.”[<선조실록> 39년(1606) 11월16일]

선조는 일본이 압송한 도굴범이 비록 진범이 아니라고 해도 일본인이라는 사실 자체로 도굴범이라는 논리를 폈던 것이다. 아울러 선조는 ‘한번 화친을 잃게 되면 사납게 무기를 잡고 쳐들어와 우리 백성들이 말할 수 없는 피해를 입을까 걱정되는 것은 물론 크게는 종묘사직의 안위에 관계되고 작게는 수십 년 동안 병란(兵亂)이 계속될 것이니 그 사이의 일을 어찌 말로 다하겠는가?’라는 현실론을 제기했다.

치열한 논쟁 끝에 선조는 도굴범 두 명을 공개적으로 사형시켰는데 그때가 1606년(선조 39) 12월이었다. 비록 진짜 도굴범은 아니지만 일본인이기에 도굴범으로 간주돼 처형됐고 이것으로 복수가 마무리된 것으로 여겨졌다.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이는 진짜 복수가 아니라 가짜 복수였다.

어쨌든 복수를 마무리한 선조는 1607년(선조 40) 1월에 ‘회답겸쇄환사’라는 이름으로 정식 사절단을 일본에 파견했다. ‘회답겸쇄환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국서에 회답하는 동시에 포로를 송환하기 위해 파견하는 사절이란 뜻이었다. 이 같은 사절단의 명칭으로써 선조는 자신이 최소한의 사죄와 배상을 받고 난 후 국교를 재개했다는 사실을 천명하고자 했던 것이다.

반성도 노력도 부족했던 임금

회답겸쇄환사 파견은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무엇보다 조일 양국간에 평화관계가 성립돼 19세기 말까지 지속됐고, 9000여 명의 포로가 송환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인 측면에서 비판받아야 할 부분도 없지 않다. 우선 분명한 사죄와 배상을 받아내지 못했다는 엄연한 사실이었다. 비록 9000명의 포로가 송환되기는 했지만 이를 20만의 전체 포로에 비춰보면 5%도 못 되는 수다.

만약 어쩔 수 없이 최소한의 사죄와 배상만으로 화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면 그 이후에 선조는 와신상담하며 치욕을 씻도록 노력해야 마땅했다. 오히려 선조는 기울어가는 명나라에 대한 사대외교 그리고 세자 광해군과의 권력투쟁에 몰두하다 세상을 떠났다.

<대학연의> ‘우재지경(遇災之敬)’은 가뭄이나 홍수 같은 비상사태 때 제왕의 마음가짐에 대한 가르침이다. 그 옛날 오랜 가뭄이나 큰 홍수는 인간의 힘으로 맞서기 힘든 도전이었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다는 포기나 내 책임 아니라는 무대책이 아니라 그 도전을 계기로 자신의 부족한 면을 반성하고 더더욱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 ‘우재지경’의 가르침이다.

기상이변이나 전쟁 같은 거대한 도전 앞에서 현실을 들먹이며 자신의 책임을 쉬이 모면하려는 지도자들이 고금에 적지 않으니 슬픈 일이다.

신명호 - 강원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201603호 (2016.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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