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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계 화제] 반상 위에 피어난 사랑 

“너는 흰 돌, 나는 검은 돌” 사랑에도 승부처 있었네! 

정아람 기자 aa@joongang.co.kr
프로기사 부부 1호인 김영삼(42) 9단·현미진(37) 5단 백년가약 맺은 이후 커플 급증… 대부분 프로기사 소모임이나 바둑 도장에서 의지하며 사랑 키워와

▎사진제공·최철한 9단·윤지희 3단
지난 1월 종영한 tvN <응답하라 1988(이하 응팔)>의 인기로 바둑에 관심이 높아졌다. TV드라마에서 좀처럼 다뤄지지 않은 바둑의 세계를 그린 데다 최택 6단 역을 맡은 박보검의 인기가 치솟으면서다. 최택 6단은 이창호 9단을 모티브로 한 천재 바둑기사다.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여린 외모지만 첫사랑을 느끼는 덕선(혜리 분)에게 남자답게 다가가는 반전의 매력을 보여줬다. 결국 덕선이와 맺어지면서 ‘어남택(어차피 남편은 택이)’ 지지자들을 기쁘게 했다.

실제 프로기사들은 사랑 이야기는 어떨까? ‘응팔’에서 택이는 어려서부터 같이 자란 동네 친구 덕선이에게 사랑을 느낀다. 하지만 실제 프로기사들은 바둑 도장이나 프로기사 소모임에서 사랑을 키우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렇게 맺어진 부부 프로기사는 김영삼 9단·현미진 5단, 이상훈 9단·하호정 4단, 박병규 9단·김은선 4단, 최철한 9단·윤지희 3단, 윤재웅 4단·김세실 3단이 있다. 여기다 오는 3월 19일 결혼하는 김진훈 4단·김혜림 2단 예비 부부도 있다. 바둑계에는 기사부부가 어림잡아 20쌍은 될 거라는 후문이다. 바둑이 맺어준 특별한 사랑 이야기를 복기해보았다.

먼저 바둑 도장에서 피어난 사랑이다. 주로 집에서 혼자 바둑 공부를 하는 택이와는 달리 프로기사들은 보통 바둑 도장에서 함께 공부한다. 어려서부터 입단을 위해 도장에서 살다시피 하고, 입단한 뒤에도 같은 도장 출신끼리 자주 만나고 뭉친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도장 안에서 사랑이 싹 트는 경우가 많다.

부부 프로기사 1호인 김영삼(42) 9단과 현미진(37) 5단이 대표적이다. 2004년에 결혼에 골인한 이들을 맺어준 곳은 허장회 바둑도장(현재 충암바둑도장)이다. 처음 만났을 때 김 9단과 현 5단은 각각 17세, 12세로 다섯 살 터울이었다. 현미진 5단은 “당시 난 도장에서 입단을 준비하고 있었고, 오빠는 입단한 뒤 바둑 공부를 하기 위해 도장에 다녔다”고 말했다. “그때만 해도 내게는 사범님같이 어려운 존재였다”고 현 5단은 덧붙였다.

<바둑TV> 함께 보며 기량 쌓은 동반자


▎프로기사들은 바둑 도장에서 함께 공부하면서 사랑이 싹트는 경우가 많다. 최철한 9단·윤지희 3단도 선·후배 프로기사 사이로 지내다 부부의 연을 맺었다.
둘 사이가 더 깊어진 것은 현미진 5단이 입단을 하고 나서부터였다. “열여섯 살에 입단하고 나서 마음에 여유가 생겨 다른 데에도 눈을 돌리게 됐던 것 같아요. 전에는 무서운 사범님이었는데 입단하고 나서는 동료 프로기사가 돼서 오빠 대하기가 편해졌어요.”(현미진)

20~30대 프로기사들의 연구 모임인 ‘소소회’에서 눈이 맞아 맺어진 커플도 많다. 지금이야 뜸해졌지만 몇 년 전만 해도 소소회를 중심으로 모임이 활발히 이뤄졌다. 같이 바둑 연구를 하고 MT도 가면서 청춘들끼리 많은 시간을 보냈다. 젊은 피가 한데 모여 있으니 자연스레 정분이 안 날래야 안 날 수 없었다는 것이다.

2011년 결혼한 박병규(35) 9단과 김은선(28) 4단은 소소회에서 맺어졌다. 2002년 당시 박병규 9단은 소소회 부회장을 맡고 있었고, 김은선 4단은 갓 입단한 새내기였다. 박 9단은 “은선이가 작은 도장 출신이라 친구가 많지 않아서 소소회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며 “처음에는 오빠의 심정으로 챙겨주다 나도 모르게 마음이 갔다. 귀여워서 마음에 들었다”고 돌이켰다. 둘은 서로 첫 남자친구, 여자친구였다고 한다.

“열일곱 살에 오빠를 만나 처음 연애를 했어요. 6년 정도 연애하고 스물세 살에 결혼했어요.”(김은선)

“태어나서 처음으로 은선이에게 (사랑) 고백이라는 걸 했는데 잘돼서 결혼까지 할 수 있었죠. 첫 여자친구와 결혼했습니다.”(박병규)

김진훈(25) 4단과 김혜림(24) 2단 예비 부부도 소소회가 낳은 커플이다. 둘은 입단 전부터 교류전 등을 통해 서로 알고 지낸 사이다. 입단 뒤에 소소회에서 함께 활동하며 급속도로 가까워졌단다. 2014년 김진훈 4단이 사랑을 고백해 사귀기 시작했고 2년 뒤에 백년가약을 맺게 됐다.

“바둑을 하는 아이들은 내성적인 경우가 많은데 혜림이는 활발해서 마음에 들었어요. 물론 외모도 제일 낫고요.”(김진훈)

“남자답고 자상한 점이 마음에 들었죠. 오빠가 덩치가 조금 큰 편인데 남자답게 느껴져서 더 좋았어요.”(김혜림)

좁디 좁은 바둑계에서 자주 부딪히다가 정이 들기도 한다. 2005년 결혼한 이상훈(43) 9단과 하호정(36) 4단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이창호 9단, 강승희 2단 등 동료 프로기사들과 함께 자주 어울렸다고 한다. 그러다가 하호정 4단이 이상훈 9단에게 자신의 가까운 친구를 소개해준 것이다. 이상훈 9단은 “소개팅이 잘 안 되고 난 뒤 호정이와 자주 연락을 하게 됐다”며 “호정이가 배려심과 이해심이 남다르다고 느껴서 호감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하호정 4단으로서는 뜻밖의 일이었단다. “너무 갑작스럽게 고백을 받아서 처음엔 거절을 했어요. 그랬더니 오빠가 저를 버스정류장에 버리고 가버리더라고요. 그때 오빠 집이 분당이고 저는 서초동이었는데, 내심 집에 데려다줄 걸로 기대했는데 많이 당황했죠. 튕기는 매력에 끌린 것 같아요.”(하호정)

2012년 결혼에 성공한 최철한(31) 9단·윤지희(28) 3단도 선후배 프로기사 사이에서 부부로 발전했다. 두 사람의 만남에는 동료 프로기사들의 지원사격이 한 몫을 했다는 후문이다. 2007년 최철한 9단이 대만에서 열린 응씨배에 나갔을 때 함께 갔던 한해원 3단과 이민진 7단이 대뜸 “지희가 너한테 관심 있어”라고 말을 건네준 것이다. 이후 최철한 9단이 윤지희 3단에게 연락해서 만남이 시작됐단다.

“저도 지희에게 호감이 있었는데 옆에서 도움을 주니까 용기를 낼 수 있었죠. 제가 수동적인 성격인데 지희가 적극적이고 활발한 성격이라서 잘 맞았던 것 같아요.”(최철한)

지난해 결혼한 윤재웅(32) 4단·김세실(28) 3단은 특이하게 바둑도장이나 한국기원이 아닌 오락실에서 사랑을 키운 경우다. 신촌의 오락실이 연애장소였단다. 김 3단은 “2009년 오빠가 연세대에 다니고 내가 명지대에 다닐 때 신촌에서 친구들과 함께 자주 만나서 놀았다”며 “오락실에서 펌프를 하면서 친해졌고 호감을 느끼게 됐다”고 돌이켰다.

“바둑 대결요? 승부욕 안 생겨 재미 없어요”

이들의 사랑 이야기는 저마다 각양각색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모두 입을 모아 ‘바둑’이라는 공통분모를 프로기사 부부의 최대 장점으로 꼽는다. 김세실 3단은 “같이 <바둑TV>를 보면서 수에 대해 이야기하고 바둑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면서 공감대를 이룰 수 있어 좋았다”고 말했다. 박병규 9단은 “아내와 함께 바둑을 가르치고 있는데 학생들 이야기를 하면 대화가 끊이지 않는다”며 “일할 때 의지가 된다”고 했다.

불편한 점은 없을까? 서로 속속들이 너무 많이 아는 게 단점이라면 단점이라고 한다. 최철한 9단은 “바둑계가 워낙 좁아서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곳이 없다”며 “서로 너무 잘 안다는 게 장점이자 단점”이라며 미소를 지었다. 김혜림 2단은 “둘 다 바둑계에 종사하다 보니 공통으로 얽히는 일이 많고 만나는 사람도 비슷하다”며 “서로 너무 많이 알다 보니 가끔은 불편한 일도 생긴다”고 말했다.

부부끼리 두는 바둑은 재미 있을까? 바둑은 의외로 거의 두지 않는다고들 한다. 프로기사 부부는 바둑으로 설거지 내기바둑 등을 할 거라는 기자의 예상은 빗나갔다. 하호정 4단은 “신혼 때 한 판 두고는 둔 적이 없다. 내기할 게 있으면 차라리 다른 게임을 해도 바둑은 안 두게 된다”고 했다. 그는 “승부욕이 바둑의 생명인데 남편을 이겨봤자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너스레를 떨었다. 박병규 9단은 “하루 종일 바둑 일을 하는데 집에서까지 바둑을 두고 싶지는 않다. 집에서는 좀 TV도 보고 영화도 보면서 쉬고 싶다”고 웃으며 말했다.

- 정아람 기자 aa@joongang.co.kr

201603호 (2016.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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