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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연구] 워싱턴의 한·일 외교력 

스킨십 중시하는 일본, 이벤트 치중하는 한국 

유민호 월간중앙 객원기자·‘퍼시픽21’ 디렉터
한국은 ‘황혼 미국’, ‘중국 올인’, ‘반일 정책’ 기조에 갇혀 외교의 본질 간과… 깨끗한 외모와 산뜻한 매너를 기반으로 한 인간적 매력 경쟁도 고려해야

▎지난해 4월 벚꽃이 만발한 가운데 미국을 방문한 아베 일본 총리 부부가 백악관 환영행사에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 부부와 함께 취재진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 사진·중앙포토
‘최강 미군은 아니지만, 국방비 증액은 반대.’

2월 중순 여론조사 기관인 갤럽이 흥미로운 결과를 하나 발표했다. ‘미군이 세계 최강이라 믿는 미국민이 얼마나 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반응이다. 49%가 최강이라고 답했다. 매년 이뤄진 조사 결과 가운데 가장 낮다고 한다. 가장 높을 때가 64%, 가장 낮을 때도 50%는 넘어섰다고 한다. 조사 결과 중 주목할 부분은 최강이지 못한 미군의 개선 방안에 대한 반응이다. 국방비 증액 부분이다. 응답자의 37%만이 국방비가 너무 적기 때문에 늘려야 한다고 답했다. 나머지는 국방비 증액에 무관심하거나 반대한다. 미군이 점점 약해지긴 하지만 국방비 증액에는 찬성할 수 없다는 것이 미국인의 마음이다.

모순되는 부분은 최강 미군 필요성에 관한 조사 결과다. 최강 미군을 통해 글로벌 슈퍼파워인 미국의 위상이 유지되고 있다고 믿는 미국민이 67%에 달한다. 최강 미군이 중요하지만, 절반의 미국민은 더 이상 최강 미군이 아니라고 믿고 있고, 국방비 증액을 통한 군사력 증강에도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강력한 파워가 필요하고 약해져 가는 미군의 현실도 알고 있지만 주머니 속 돈은 못 내겠다는 의미다. 미국 대통령 후보 도널드 트럼프가 한국·일본의 국방비 분담을 요구하는 것은 이 같은 상황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한국에서는 트럼프를 정신 나간 인종차별주의자라 부르지만, 갤럽 조사 결과를 보면 트럼프의 동맹국에 대한 국방비 분담 요구는 너무도 당연하다. 자기 주머니 속의 돈을 못 내는 대신 잘산다는 한국과 일본이 대신 지불하라는 심리다. 따라서 트럼프는 미국민의 마음을 정확히 읽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갤럽은 ‘동맹국에 국방비를 분담시킬 것인가’라는 문제는 다루지 않고 있다. 필자의 판단이지만 만약 그 같은 질문을 던진다면 공화·민주당 지지 여부에 관계없이 90% 이상이 “그렇다”고 동의할 듯하다. 2016년 미국은 그 같은 흐름으로 치닫고 있다.

갤럽에서 나타난 미국민의 모순된 정서를 보면서 한국민은 어떤 반응을 보일 수 있을까? 트럼프를 인종차별주의자라 무시하듯, ‘맛이 간 미국, 황혼길의 늙은 대제국’이란 식으로 해석하지 않을까?

흑백 뚜렷한 바둑형 논리에 사로잡힌 한국

역사상 나타난 수많은 대제국의 흥망성쇠에서 보듯, 마침내 미국도 똑같은 길을 걷고 있다는 식의 연민과 동정도 보낼 듯하다. 북핵 문제 때문에 다소 소원해지고 있지만 한국 정부 스스로가 G2라 부르는 중국이야말로 미국에 맞설 강력한 뉴파워라 확신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황혼의 미국과 전도 양양한 중국을 보는 한국적 세계관은 지난 2~3년의 행적을 통해 재삼 확인해볼 수 있다. 한·중 자유무역협정(FTA)체결에 이어, 중국판 국제통화기금(IMF)인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에 적극 가입하면서 14년간 지속된 일본과의 통화 스와프도 중단한다. 더불어 미·일 주도의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는 불참하고, 미국이 제의한 사드(THAAD) 배치를 둘러싼 중국 눈치보기가 한동안 이어졌다.

‘황혼 미국’, ‘중국 올인’, 나아가 ‘반일 정책’이라는 ‘3박자’가 빚어낸 결과라고 볼 수 있지만, 미국을 한 수 아래로 내려다 보면서 중국을 받드는 것이 최근 한국 지식인의 전형(典型)으로 자리 잡아왔다. 박근혜 대통령이 톈안먼(天安門) 망루에 서서 중국 공산당 군대에 박수를 보낸 것은 바로 그 같은 한국적 세계관의 하이라이트에 해당된다. 자주적 외교, 다변화된 국제 정세, 21세기 입체 외교, 대박 통일 외교와 같은 말은 한국 외교의 급작스런 노선 변화를 수식하는 슬로건으로 활용됐다.

그 결과는 어떤가? TPP 참가에 목을 매는 한국 외교, 한·중 FTA협정을 무시하는 중국 정부의 보복형 관세 장벽, 아시아 인프라 구축은커녕 전 세계가 걱정하는 중국 경제, 거꾸로 미국에 사드 배치를 요청하고 중국으로부터는 공개적 협박을 당하는 한국 정부, 통화스와프 재개를 원한다면 한국 스스로가 머리를 숙이고 요청해야 한다는 여유만만의 일본 정부…. 2016년 3월의 현실이자 상황들이다. 엇갈린 ‘3박자’에 따른 맹신이 낳은 달갑지 않은 결과들이다. 한국의 정치·경제·군사·안보가 떠안고 가야 할 무거운 업보의 원인들이기도 하다. 북핵 때문에 ‘잠시’ 잊고 있지만, 그럴 듯한 슬로건으로 막기에는 너무도 벅찬 시련들이 한국 외교의 앞길에 놓여 있다.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이 글의 중심은 친미나 반중과 같은 흑백논리와 무관하다는 점이다. 인간 관계가 그러하듯 친(親)과 반(反)이 될 수도 있는 것이 외교다. ‘친박(親朴)’이 아니면 ‘비박(非朴)’이라는 새로운 흑백논리가 한국 정치의 풍경으로 자리 잡은 듯하지만, 세상이란 것이 ‘친반(親反)’이나 ‘친비(親非)’처럼 둘로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단기적, 장기적으로 왔다갔다하면서 어딘가에서 균형점을 찾는 것이 세상사다. 한 번 눈밖에 났다고, 또 마음에 드는 행동을 했다고 ‘친반’, ‘친비’라는 딱지를 붙인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인간에 대한 딱지는 평생 가도 뭐라고 규정하기 어렵다. 나폴레옹에 대한 프랑스인의 평가는 아직도 명확히 규정되지 못한 상태다. 유럽의 해방자인가, 혁명정신을 무너뜨린 독재자인가?

한국 정치가 그러하듯 한국 외교를 보면 상대방에 대한 ‘친반’이 너무도 명확하다. 끓었다가도 곧바로 차갑게 식는 한국적 냄비정서를 대변하는 듯, 흑백이 뚜렷한 바둑형 논리가 국제 무대에서 여과 없이 전개된다. 반일로 치닫던 정서가 북핵 한 방에 반중으로 치닫는다. 반일 이전에는 반미를 자랑스럽게 말하던 대통령도 있었다. 결과가 나타나기 훨씬 전이지만, ‘친반’을 통한 분명한 행보 덕분에 모든 것이 상대에게 노출된 상태다.

‘트럼프 현상’ 발 빠르게 대응하는 일본의 외교 내공


▎뉴욕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내 일본 전시관. 미국 박물관을 활용한 문화전시회는 조용하지만 각론에서 승부를 펼치는 일본 외교의 전형에 해당한다. / 사진·유민호
필자는 워싱턴을 중심으로 18년간 일해오고 있다. ‘중국 올인’을 믿는 사람이라면 베이징(北京)이라 말할지 모르겠지만, 워싱턴은 대부분의 나라가 인정하는 21세기 로마에 해당한다. ‘황혼 대국’이라고 하지만, 아직 글로벌 파워의 출발지는 워싱턴이다. 과연 21세기 로마에서 벌어지는 한국 외교는 어떤 것인지? 왜 얼굴 표정 하나만으로도 알 수 있는 ‘친반’을 앞세운 외교가 자행되고 있는지? 어떤 식의 대응방식과 논리, 다시 말해 외교적 전략·전술을 기초로 한 외교가 워싱턴에서 이뤄지고 있는지? FTA·TPP·AIIB에서 보듯, 불과 3년 만에 드러난 참혹한 결과가 왜 사전에 여과 없이 그대로 결정됐는지? 모든 것이 그러하듯 비교·연구는 필수적이다. 문화적·지리적·지정학적으로 볼 때 경쟁자이자 협력 관계에 있는 일본을 통해 한국의 워싱턴 외교를 살펴보는 것이 보다 더 효과적일 듯하다.

앞서 살펴본 갤럽 조사 결과로 되돌아가보자. 갤럽 결과가 나오는 즉시, 일본은 발 빠르게 대응하고 있다. <월간중앙> 2월호에 기고한 글에서 강조했듯이, 트럼프는 대통령 당선 여부에 관계없이 ‘트럼프 현상’으로 존재할 것이다. ‘미국병’의 분신이기도 한 것이 트럼프 현상이기 때문이다. 미국병이란 소수자 보호, 이민 대국, 글로벌리즘으로 인한 미국 전통가치의 전도(轉倒)를 의미한다. 소수자, 이민자, 중국 제품이 기승을 부리면서 나타난 백인 기득권자들의 소외감이 트럼프를 통해 발산되고 있다. 따라서 트럼프의 추락 여부에 상관없이, 앞으로도 트럼프 현상이 가속화될 것이다.

파워로 군림하되 돈은 못 내겠다는 졸부식 정서는 바로 미국병의 또 다른 표현이다. 흑인, 히스패닉이라는 이유로 갖가지 복지 혜택을 받는 데 대한 백인의 반발이다. 그 돈은 백인의 세금으로 충당하기 때문이다. 백인의 세금으로 운영되던 글로벌 동맹 비용도 더 이상 못 내겠다는 것이 트럼프의 대외 정책의 핵심 중 하나다.

한국과 달리, 워싱턴의 일본인 나아가 워싱턴발 일본 뉴스는 트럼프를 단순한 인종차별주의자로 해석하지 않는다. 비난하고 빈정대기보다 국민적 지지를 기반으로 한, 엄연한 미국 정치의 현실로 해석한다. 갤럽조사에서 알 수 있듯이, 어떤 식으로든 국방비가 다른 나라에 전가될 것이라는 점을 기정사실로 보고 있다. ‘언제 얼마’가 되느냐가 문제일 뿐, 곧 닥칠 상황이란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필자가 아는 한, 2016년 3월 워싱턴 일본 대사관의 가장 큰 업무 중 하나는 바로 ‘언제 얼마’라는 분야에 집중되고 있다. 각론으로 들어가자면, 어떤 영역에서 어떤 식으로 국방비 부담이 일본에 전가가 될 것인가라는 점으로 압축된다. 먼 미래가 아니라 곧 닥칠 현실로서의 대미관(對美觀)이다. 동맹관계를 기초로 하지만, 각론 차원에서 대차대조표와 손익 계산서를 두드리면서 앞으로 닥칠 난제를 준비하고 있다.

한국은 어떨까? 갤럽 조사 결과의 경우 한국에서는 제대로 보도조차 되지 않았다. 트럼프에 관한 뉴스는 꾸짖고, 비난하고, 조롱하는 기사로 메워져 있다. 트럼프의 대외·외교 정책이 왜 극단으로 치닫고, 보통 미국인은 왜 거기에 열광하는지에 대한 분석이나 관찰도 없다. 아래로 내려다보는 책상물림 하향식 기사가 99%다. 일본 언론 내 단카이(団塊)세대들이 펴는 반(反)아베 논리와 논조를 한국 신문·방송에 그대로 옮기는 것과 비슷하다. 한국 신문·방송을 보면 아베는 진작에 망했어야 한다. 트럼프가 정신 나간 인종차별주의자라는데, 아베가 군국주의로 치닫는 전쟁광이라는데도 불구하고 왜 자국민들이 지지하는지에 대한 배경이나 이유를, 한국 언론에서는 발견하기 어렵다.

워싱턴을 무대로 한 한·일 외교의 특징으로 채널의 다양화를 빼놓을 수 없다. 한국이 1차원 채널이라고 할 때, 일본은 3차원 입체 채널로 와 닿는다. 주된 무대는 싱크탱크다.

워싱턴의 4월은 일본판으로 변한다. 벚꽃 축제가 주인공이다. 올해의 경우 3월 20일부터 4월 17일까지 계속된다. 1912년 당시 도쿄시장에 의해 3000본의 벚나무가 워싱턴에 수송돼 입식되면서 시작된, 114년 전통의 축제다.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해 벚나무가 잘려나가는 등 수난기도 있었지만, 짧은 미국 역사를 통틀어 가장 오래된 축제 중 하나로 정착된다. 워싱턴 시민만이 아니라 전국의 관광객이 몰려들어 벚꽃 축제에 참가한다. 덕분에 매년 4월은 워싱턴 관광 수입이 절정에 오르는 시기이기도 하다.

벚꽃처럼 동시다발로 열리는 일본 관련 세미나


▎매년 4월 워싱턴에서 열리는 벚꽃축제는 일본 소프트 파워의 결정판이다. 꽃잎이 만개한 벚꽃나무 뒤로 미 의회 건물이 보인다. / 사진·유민호
축제 기간 중 일본 문화가 총동원돼 워싱턴 곳곳을 달군다. 도쿄만이 아니라 지방에서 올라온 일본인들이 음식, 춤, 노래, 연주, 차(茶), 유도 같은 일본만의 소프트 파워를 워싱턴에 펼쳐놓는다. 필자가 아는 한, 포토맥 강변의 벚꽃을 배경으로 한 워싱턴 축제는, 미국 내 최대 연례행사가 아닐까 판단된다. 흥미롭게도 벚꽃 축제는 일본인이나 일본대사관이 아닌 워싱턴 커뮤니티가 주관한다. 대부분의 축제 비용과 이벤트는 일본 기업과 일본인이 제공하지만, 주관은 워싱턴 커뮤니티가 집행한다.

싱크탱크는 벚꽃 축제와 더불어 일본이 주력하는 정책 축제의 무대다. 4월 말은 일본의 골든위크, 즉 장기간 연휴에 해당한다. 법정공휴일인 헌법의날, 식목일, 어린이날 등이 겹치면서 주말을 이용할 경우 최소한 1주일간 연휴에 들어간다. 일본 정치인들은 틈만 나면 지역구로 내려간다. 예외적으로 골든위크의 경우 외국에 나가 외교도 하고 나름대로의 견문을 넓힌다.

워싱턴은 일본 정치인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다. 벚꽃 축제와 관련한 행사에 참여할 경우 무려 2주 정도 미국에 머물 수 있다. 골프를 치거나 눈요기 관광을 할 정도로 여유롭지 못하다. 다음 지역구에서 재선되기 위해 미국 전역을 돌면서 갖가지 포석을 뿌려놓는다. 지역구와 자매 결연을 맺은 도시를 방문해 서로간의 협력 증진을 논의하는 식이다. 싱크탱크는 그러한 정치와 정책 토론을 겸한 공간이다. 외교에 특화한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와 브루킹스연구소, 헤리티지재단, 뉴아메리카파운데이션 같은 곳이 주된 방문지다. 일본이나 아시아 관련 정책 전문가와 만나 대화를 나누고 서로의 생각을 교환한다. 워싱턴 내 정책 전문가와 함께 싱크탱크에서의 포럼이나 토론회도 개최한다. 중국의 남중국, 동중국 해양 팽창과 함께 늘어나는 추세지만, 대략 4월 한 달 동안 최소한 10개 정도의 크고 작은 일본 관련 정책포럼이 개최될 예정이다.

포럼 주체는 CSIS에 이뤄지는 미·일연례안보회의(U.S.-Japan Security Seminar)처럼 일본 정부가 직접 주관하는 경우도 있지만, 일본 싱크탱크나 대학처럼 민간 차원에서 이뤄지는 합동 포럼이 일반화돼 있다. 싱크탱크와 더불어 의회도 일본 정책 전문가들의 주된 방문지다. 현직 상·하원의원도 만나지만, 의회 내 정책 전문가도 주된 방문 대상자들이다.

하나라도 더 듣고 서로의 의견을 교환한다. 골든위크 기간 중 워싱턴 호텔과 레스토랑은 일본 관련 정책 전문가나 의회 인사들을 위한 연회장으로 변한다. 워싱턴 주재 일본 특파원들까지 가세해 골든위크 외교를 돕는다. 평소 안면이 있는 일본 정치인에게 국무성·국방성 내 고위 관료나 정책 전문가를 소개하고 식사를 하면서 의견을 교환하는 식이다. 필자도 얼떨결에 불려가 자리를 같이한 적이 있지만, 워싱턴 정보나 분위기를 하나라도 얻으려는 일본 정치인들의 노력과 의지가 남다르게 느껴졌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라도 현장 분위기를 통해 다시 한번 확인해가는 식의 자세다. 워싱턴을 무대로 한 일본 외교는 골든위크만이 아닌, 1년 365일 내내 이뤄진다. 꾸준히 찾아오고 열심히 만난다. 워싱턴에서만이 아니라, 직접 도쿄에 불러 정책 포럼이나 대화를 갖는다. 한번 일본과 인연을 맺으면 평생 가는 식의 인맥 관리다.

워싱턴에서 보면 한국도 일본과 비슷한 외교 형태를 보여 준다. 싱크탱크를 통해 정책 포럼도 열고 나름대로 워싱턴 인맥도 관리한다. 그러나 질적, 양적으로 너무도 부족하다. 세계 10위권을 넘나드는 무역대국이자 선진국이라고 하지만, 외교 수준을 보면 동유럽에도 못 미친다. 일단 워싱턴 이곳 저곳을 찾아다니면서 정책 전문가를 만나는 한국인이 극히 드물다. 사람과 직접 만나 식사하면서 대화를 나누는 식의 외교에 익숙한 사람도 찾기 어렵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레스토랑에 가서 주문을 제대로 하는지도 의문이다. 한반도와 관련도 있고, 주기적으로 중국 대사 물망에도 오르는 군 출신 미국인과 만났을 때 들은 얘기다. “왜 한국 국회의원은 전부 스테이크만 시키고, 빵을 갖다 주는 종업원에게 곧바로 주문을 하느냐?” 한국 음식에 중독이 된 탓인지 모르겠지만, 미국 레스토랑에서의 경험이 일천하다는 게 질문의 행간에 녹아든 의미다. 빵이나 물을 갖다 주는 종업원이 아닌, 주문 전문 스텝을 통해 천천히 음식을 시키고, 맛에 어울리는 와인과 함께 식사를 즐길 줄 아는 한국 정치인을 찾기 어렵다는 얘기다. 메뉴를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한국인에서 익숙한 스테이크 하나로 통일해 전부 똑같이 시켜먹는 것이 한국 정치인에 대한 일반적 이미지다. 고급 레스토랑에 가서 맥주부터 시키고, 빵에다 버터를 그대로 발라 한 입에 먹는 식의 촌스러운 식사 매너와 같은 의미다.

정책 중심의 일본, 자리 중심의 한국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국의 노병들이 지난해 11월 워싱턴DC 한국전 참전기념비 앞에서 부산 방향을 향해 묵념하고 있다. / 사진제공·주미한국대사관
워싱턴은 입으로 살아가는 곳이다. 입을 통해 각 나라의 운명을 결정할 정책들이 결정된다. 집행은 워싱턴 밖에서 이뤄진다. 입에서 이뤄지는 워싱턴 정치는 입을 위한 레스토랑을 기반으로 한다. 말로 표현하기 어렵지만, 너무도 부끄러운 레스토랑 매너가 한국 외교의 특징 중 하나다. 필자의 지론이지만, 거대 담론을 논하기 전에 음식 주문과 와인 마시는 법부터 배우는 것이 워싱턴 외교의 기본에 해당한다. 외교를 포함해 모든 관계의 출발은 인간에서부터 시작된다. 깨끗한 외모와 산뜻한 매너를 기반으로 한 인간적 매력이야말로 외교적 수준을 끌어올리는 기본이다. 한국 외교는 아직 그 같은 기준에서 한참 뒤쳐져 있다.

싱크탱크를 통한 정책 포럼의 경우 단발성 초대형 이벤트가 한국 외교의 특징이다. 후속타가 없다. 심하게 말하자면, 한바탕 크게 벌인 뒤 그냥 끝이다. 꾸준히 계속해서 의견을 교환하고, 합동 리포트나 정책 제언서도 만들면서 장기적으로 이어가는 식의 논의가 없다. 대통령이 워싱턴에 들르면 엄청 크게 벌어지지만 ‘비수기’에는 파리만 날린다. 부분적으로 열리기는 하지만 워싱턴에 대한 외침이 아닌 한국 미디어를 통한 한국용 기사 재료로 제공될 뿐이다. 아마도 1년 뒤 한국 대통령 선거 직전은 싱크탱크 성수기가 될 듯 하다. 정책이 아니라, 대통령 후보자의 구미에 맞추는 이벤트들이다. 안 하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별로 울림이 없는 골목대장 이벤트에 불과하다. 싱크탱크 입장에서는 볼 때 대통령 선거 직전의 정치 이벤트로서의 포럼은 기부금이나 한국과의 관계를 고려한 보험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이 주도하는 싱크탱크 포럼 특징의 하나로 ‘그 나물에 그 밥’을 빼놓을 수 없다. 미국인 참가자의 비중이나 역할도 일본에 비해 크게 낮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들어서면서 워싱턴 내 정책 전문가의 얼굴도 크게 변하고 있지만, 한국 관계자의 경우 대부분 동일한 인물이다. 기존의 인맥에 대한 관리도 느슨하지만, 새로운 워싱턴 정책 전문가나 파워를 개발하지도 않고 관심도 없는 듯하다. 워싱턴 싱크탱크에서의 30대 중반 연구자의 월급은 대략 5만 달러 선이다. 세금 빼면 3만5000달러 선이다. 경제적인 면에서 빠듯하다. 고급 레스토랑에 초대해 식사 한 끼라도 대접하면 곧바로 달려와 대화에 응한다.

워싱턴만큼 글로벌 핵심 정보를 ‘빠르고 간단히’ 얻을 수 있는 곳도 없다. 일본과 달리, 한국은 그 같은 워싱턴 스타일의 ‘거품을 뺀’ 외교에 너무도 무심하다. 싱크탱크 포럼에 참가하는 한국인 전문가의 얼굴도 극히 제한적이다. 유능한 사람이 없다고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렇지도 않다. 영어도 능통하고 워싱턴 정치에도 밝은 한국인 정책 전문가도 많지만, 한국식 줄과 연에서 벗어나면서 대화에 끼어들지 못한다. 따라서 거의 똑같은 얼굴들로 이뤄진 친선 파티가 싱크탱크를 무대로 한 한·미 포럼의 실체다.

미국인 참가자의 경우, 면면을 보면 정책 전문가라기보다 싱크탱크 회장, 부회장 같은 행정적 차원의 고위 타이틀에 집중돼 있다. 현실에 적용될 중요한 정보나 대안은 60대 회장이 아니라, 40대 정책 전문가의 머리에 있다. 한국식으로 내용이 아닌, 자리를 보면서 벌이는 포럼이 주종이다. 60대 회장, 부회장은 총론이다. 한국이 필요로 하는 부분은 ‘한미동맹 강화’라는 총론이 아니다. 40대 정책 전문가의 머리에서 나오는, 한미동맹을 강화하기 위한 구체적인 각론이 필요하다. 사실 고위 타이틀을 중심으로 한 친선 파티라고 해서 나쁠 것은 없다. 그러나 조금만 신경을 쓰면 싱크탱크 본연의 목적에 맞춘 정책 제안형 포럼을 창출해낼 수 있을 것이다. 최근에는 한국 언론사를 중심으로 한 싱크탱크 포럼도 경쟁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서울과 워싱턴을 오가며 연다. 긍정적인 면이 많지만, 아쉬운 부분도 많다.

개개인 친분에 근거한 사적 외교가 극히 드물다는 점은 일본과 비교되는 워싱턴 한국 외교의 맹점 중 하나다. 입의 도시 워싱턴은 파티의 도시이기도 하다. 저녁 곳곳에서 크고 작은 파티가 열린다. 워싱턴에는 약 200개의 각국 대사관이 몰려 있다. 자국의 독립기념일, 국왕 생일 같은 축제를 맞아 곳곳에서 파티가 벌어진다. 대사관 주최만이 아닌, 문화원 싱크탱크 나아가 워싱턴 내 수많은 글로벌 민간단체가 파티를 주최한다. 파티를 잘 활용하면 평일에는 ‘외식’만으로도 살아갈 수 있을 정도다.

고칼로리로 범벅이 된 파티 음식을 즐기지는 않지만, 가능하면 파티에 참가하자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뷔페식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줄을 서서 음식을 고른 뒤 어딘가에서 음식을 먹게 된다. 바로 옆에 있는 사람과 간단히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이민대국 워싱턴은 국가·인종·민족과 같은 낯을 가리지 않는다. 이름과 하는 일을 알린 뒤 곧바로 대화에 들어간다. 필자는 주로 질문을 던지는 식이다. 특급 정보까지는 아니더라도 워싱턴에서 통용되는 분위기, 상식 정도는 찾아낼 수 있다. 아시아 전문가가 아닌 사람이라 해도, 간접적으로 쿠션을 넣은 상태에서 다른 시각의 얘기를 들을 수 있다. 반드시 한반도 전문가에게서 한국에 관한 얘기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한국계 로비회사 통한 돌려먹기’식 이벤트


▎2014년 7월 열린 워싱턴 중국의 날 기념행사. 중국은 이벤트성 단기 초대형 행사로 주변을 압도한다. / 사진·유민호
워싱턴 파티장을 오가면서 느낀 것은 한국인을 만나기가 참 어렵다는 점이다. 반면 일본인은 어딘가에 반드시 있다. 서투른 일본식 영어로 거의 매달리다시피 얘기를 듣고 있다. 한국의 경우 참석자를 찾기도 어렵지만, 있다 해도 파티 문화에 익숙하지 못한 탓에 그냥 구석에 서 있다.

복수의 한국인이 모일 경우 한국인끼리 얘기하는 게 전부다. 수 년 전 경험이지만, 유럽 대사관 파티장에서 10여 분간 혼자 우두커니 서 있는 한국 대사를 만난 적도 있다. 대사라는 자리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적극적으로 상대에게 다가서지 않고 기다리는 문화에 익숙한 결과로 비친다. 서투른 영어 때문에 파티에 나서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진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영어 능력과 외교는 전혀 다르다. 영어를 잘할 경우 외교 능력도 높아질 수 있다. 그러나 영어를 잘 못한다고 해서 정보 취득 능력이 떨어진다고 보기는 어렵다. 열심히 탐구하고 공부하는 자세로 달려들면 상황을 이해하게 된다.

사적인 차원의 파티는 워싱턴 주재 일본인들의 공통 관심사 중 하나다. 자신의 집에서 행하는 파티가 곳곳에서 열린다. 서로 정보를 주고 받으면서 겹치지 않도록 노력한다. 한국 외교관이나 특파원 가운데 집에서 주기적으로 파티를 여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지 궁금하지만, 일본인의 경우 웬만하면 파티를 정기적으로 개최한다. 외교관, 특파원 기자, 기업가 심지어 자위대 군인들까지도 집에서 파티를 한다. 보통 가족 초대 파티가 많다. 미국 부모들은 자식들의 외국 문화 경험을 적극 권한다. 주말을 이용한 일본인 가정에서의 파티는 워싱턴의 미국인이 반기는 행사이기도 하다. 일본인 들은 스시(すし)나 사케(酒)를 내놓으면서 일본 문화 강론도 잊지 않는다. 사적인 파티는 자신이 알고 있는 인맥 관리를 위한 것이다. 복잡한 얘기보다 인간적인 친분을 중시 여긴다. 나중에 일본에 돌아가서도 이메일이나 전화로 얘기를 나눌 수 있는 관계가 된다. 사실 필자의 워싱턴 인맥의 대부분은 개인 파티장에서 만난 사람들이다. ‘계급장을 떼고’ 만날 경우 서로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진다. 일이 아니라 인간적 측면에서 시작되는 관계가 오래간다.

워싱턴 외교를 얘기할 때 로비 활동을 빼놓을 수 없다. 한국 신문에 자주 오르내리는 얘기로 ‘엄청난 자금력에 기초한 일본 로비’에 관한 소문이 자주 등장한다. 더불어 한국 정부도 로비 관련 예산을 대폭 증액해야 한다는 논리로 이어진다. 필자의 생각은 다르다. 기초가 없는 상황에서 아무리 돈을 퍼부어봤자 아무런 효과도 없다. 일본이 로비에 돈을 많이 쓰는 것은 맞다. 그러나 적절한 타이밍에 적정 장소에 사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일본을 빌미로 한국 정부가 사용하는 워싱턴 로비 자금의 내막을 살펴보면 ‘한국계 로비회사를 통한 돌려먹기’라는 인상이 강하다. 돈을 통한 로비로 순간을 넘기기보다 개개인의 ‘외교력, 로비 능력’을 키우는 것이 한층 더 중요하다. 레스토랑에서의 식사나 집에서 하는 간단한 파티 같은 부분이다. 국민소득 10만 달러가 한국인의 행복을 보장한다고 믿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일본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투입할 경우 더 큰 효과를 볼 수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워싱턴에 무지하다는 증거다.

한국인 스스로의 입장, 방향, 세계관 보여줘야


▎21세기 외교는 강자일수록 약하게 보인다. 강하게 나타내지 않더라도 확신과 자신이 있을 경우 고개를 숙일 수 있다.
한반도 평화협정이 급물살을 타는 듯하다. 워싱턴 분위기를 보면, 가까운 시일 내에 미국과 북한이 평화협정 문제에 나설 듯하다. 북한이 주장하는 평화협정은 미군 철수와 같은 의미다. 필자는 냉전 논리로 미군 철수 반대를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미군이 빠져나갈 경우 그 공백은 어떻게 될지, 중국이나 일본과의 관계 등을 생각하면 경천동지할 일들이 벌어질 듯하다.

멀고 먼 얘기라 말할지 모르지만 현실을 보면 그렇지도 않다. 핵폭탄 100개를 수 년 내 만들 수 있는 나라가 북한이다. 사실, 미군 철수가 이뤄질 경우 북한이 핵을 포기한다고 믿기도 어렵다.

이 모든 복잡하고 예민한 상황들은 워싱턴을 기반으로 벌어지고 있다. 한국인들의 상식과 달리 워싱턴에서 보는 한국은 뭔가 불투명하다. 워싱턴에서 보면 미군 철수를 한국인 스스로 원하는지 여부마저도 모호하다. 한국인이 원한다면 결국 그렇게 갈 수밖에 없을 듯하다. 필자는 모든 선택에 대해 문을 열어두고 싶다. 중요한 것은 한국 스스로가 생각하는 세계관, 입장, 방향을 워싱턴을 무대로 활발히 적극적으로 알려야 한다는 점이다. 스스로의 생각을 정확히 알리면서 워싱턴과의 접점을 찾아내는 것이 한국의 미래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미군이 더 이상 최강이 아니라는 갤럽 조사 결과를 ‘황혼 미국’이나 ‘동맹국 국방비 분담’으로 해석하는 것이 한국식 정서다. 미국에 대한 한국의 역할과 몫이 늘어날 것이라는 해석은 어떨까? 드디어 미국이 한국을 필요로 하는 시대가 왔다는 식으로 풀이하는 것은 어떨까? 워싱턴은 한국의 위상을 높일 수 있는 ‘상승 무대’가 될 수 있다. 중국이나 일본이 아닌, 워싱턴이야말로 한국의 미래를 가늠하는 기본이자 기초에 해당된다.

북핵 문제와 관련해 미·중이 워싱턴에서 협상을 벌이는 동안 당사자인 한국은 눈뜬 봉사처럼 떠밀려 다니는 신세로 전락했다. 그렇게 자주 들락날락하던 한국 정치인의 그림자는 물론, 한국의 입장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싱크탱크, 포럼 하나 발견할 수 없었다. 메아리조차 없는, 한국 내에서나 통하는 골목대장 수준의 논리와 주장만이 판을 친다. 돈이 아니라, 사람이다. 군사력이 아니라 외교력이다. 초대형 이벤트가 아니라 작고 오래가는 가정용 파티다. 요동치는 한반도 전체의 미래는 바로 여기에 달렸다.

- 유민호 월간중앙 객원기자·‘퍼시픽21’ 디렉터

201604호 (2016.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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