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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초대석] 사서집주 부안설 완간한 한학자 성백효씨 

“사서삼경 제대로 성독(聲讀)할 한학자 10명도 안 남았다” 

글·사진 최경호 기자 squeeze@joongang.co.kr
논어·맹자에 이어 최근 대학·중용까지 ‘10년 대역사’ 완성… “모내기 전통방식도 전수되는데 한학만은 소외되는 현실 안타까워”

▎한송은 서울 종로구 익선동에 있는 해동경사연구소에서 요즘도 일주일에 서너 차례 강단에 선다. 그는 “건강이 허락하는 한 학생들을 가르치고 싶다”고 말했다.
원로 한학자 한송(寒松) 성백효(成百曉·71) 해동경사연구소장(海東經史硏究所長)이 또 하나의 역작인 <부안설(附按說) 대학·중용집주(集註)>를 펴냈다. 2013년 <부안설 논어집주>, 2014년 <부안설 맹자집주>에 이어 10년 대역사(大役事)의 마지막 공정을 끝낸 것이다. ‘안설’이란 여러 학설을 살핀 뒤 내 견해를 말한다는 의미다.

“유학의 기본인 사서(四書)는 주자(朱子)가 완성했지만 그 이후 발전돼온 다양한 학설을 수용해야 합니다.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제기된 여러 견해 가운데 학문적으로 경청할 만한 것을 소개하고 제 생각을 덧붙였습니다.”

<사서집주(四書集註)>는 중국 남송 때 유학자 주희(朱熹·1130~1200)가 <논어> <맹자> <대학> <중용>에 대한 주석을 정리해서 펴낸 책이다. 한송은 “주자 이후의 학설과 함께 내 생각도 들어 있는 책을 만들어달라는 주위의 요청에 따라 작업을 시작한 지 10년 만에 공정을 마무리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1945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난 한송은 한학자인 부친 성용기(成龍基) 선생의 영향을 받아 어려서부터 신학문 대신 한학에 몰두했다. 아버지에게 회초리를 맞아가며 한학을 배우던 한송은 여덟 살이던 1952년 전북 익산으로 내려가 월곡(月谷) 황경연(黃璟淵) 선생을 사사(師事)했다. 이후 전북 정읍으로 옮겨 서암(瑞巖) 김희진(金熙鎭) 선생의 문하생이 됐다. 하지만 스무 살 무렵부터 갈등이 깊어졌다. 머릿속이 맑지 않았다. 아무리 마음을 다잡으려 해도 좀처럼 공부에 전념하기 어려웠다.

“공부가 돈이 되는 일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갈등이 생기고 생각이 많아지더라고요. 말이 주경야독(晝耕夜讀)이지 낮에 일하고 밤에 공부한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공부를 그만두고 농사꾼으로 살아보려고 동생과 함께 농사도 짓고 농촌지도자 활동도 해봤습니다. 그런 방황이 10여 년 계속된 거죠. 제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일 겁니다.”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시듦을 안다”


▎원로 한학자 한송(寒松) 성백효 선생이 <부안설(附按說) 대학· 중용집주(集註)>(한국인문 고전연구소)를 펴냈다. 한송은 “중국과 우리나라의 여러 견해와 함께 내 생각도 덧붙인 책”이라고 설명했다.
고향에서 농사를 짓던 한송은 서른세 살이던 1977년 봄 서울로 올라가 민족문화추진회 부설 국역연수원 연수부 4기로 입학했다. 인생의 변곡점을 맞은 것이다. 이 단체는 월탄(月灘) 박종화(1901~1981) 선생, 일석(一石) 이희승(1896~1989) 선생 등이 주도하고 있었다. 당대의 내로라하는 교수들로부터 “선생보다 나은 학생”이라는 찬사를 들었던 그는 그해 여름부터 학생 겸 민족문화추진회 전문위원으로 고전 번역에 참여했다.

한송은 비로소 이곳에서 자리를 잡았다. 학생으로 들어간 지 반년 만에 실력을 인정받아 전문위원으로 채용됐고, 이후 강의를 맡기도 했다. 한송은 “20여 년간 고전을 공부한 덕분에 어느 정도의 수준에 올라왔던 것 같다. 당시 민족문화추진회 강의는 원로들만 맡았는데 30대 교수는 내가 유일했다”고 회고했다.

이어 한송은 단국대 동양학연구소,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에서 한문사전 편찬과 병서(兵書) 번역에 종사하는 한편 민족문화추진회와 서울대에서 한문을 가르치기도 했다. 1997년 민족문화추진회에 교수로 돌아와 2012년까지 재직한 한송이 그동안 펴낸 번역서는 중국 고전, 한국 문집·역사서 등 70여 종에 이른다.

1990년 <논어집주>를 사실상 국내에서 최초로 번역했고, 2013년에는 <부안설 논어집주(833쪽 분량)>를 다시 펴냈다. <논어집주>는 주자가 논어에 대한 각종 주석을 집대성하고 최종적으로 해석한 책이고, <부안설 논어집주>는 200여 쪽 분량의 <논어집주>에 다시 각 주를 달고 번역자의 평가와 해석을 가미한 것이다. 한송의 <부안설 논어집주>는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과 중국 최고의 주석(註釋)학자로 평가되는 양보쥔(楊伯峻) 등의 해석까지 덧붙였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이번에 나온 <부안설 대학·중용집주>에서는 조선 후기 성리학의 양대 학파인 호론(湖論)·낙론(洛論)의 대가인 호산(壺山) 박문호(朴文鎬)의 <대학·중용상설(詳說)>,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대학·중용기의(記疑)>를 중심으로 장절(章節)마다 중국·한국 학자들의 학설을 살핀 뒤 한송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평생을 한학에 바친 그의 아호(雅號) 한송은 <논어> ‘자한(子罕)편’에 나오는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야(歲寒然後知松栢之後凋也)’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공자는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시듦을 안다”고 했다. 어떤 역경 속에서도 지조를 굽히지 않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20대 이후 독학으로 일가(一家)를 이룬, 자신이 걸어온 길을 함축하는 말이기도 하다.

일흔을 넘긴 한송이 좌우명처럼 마음에 새기고 있는 구절은 <맹자>의 ‘이루장구(離婁章句)’에 나오는 ‘유불우지예 유구전지훼(有不虞之譽 有求全之毁)’. ‘살다 보면 생각지도 못했던 칭찬을 듣기도 하고, 완전을 기했지만 비방을 받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독학으로 일가를 이룬 만큼 찬사 못지않게 시기도 많았다고 한다. 젊은 시절에는 의욕이 앞서다 보니 종종 시시비비를 가리기도 했다. 하지만 한송은 종심(從心)을 넘기면서부터는 이런저런 평가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꿋꿋하게 자신만의 길을 가겠다고 다짐했다.

“퇴계를 비판하려거든 먼저 그의 저서를 읽어라”


▎요즘도 하루에 5~6시간은 번역작업에 전념하는 한송은 “계속 글을 쓰고 책을 펴내는 것이 소중한 목표”라고 했다.
칠순 노구(老軀)이지만 한송은 요즘에도 고전번역원 학생들을 위해 강단에 선다. 일주일에 서너 차례 수강생들을 만나는데 한 번 분필을 잡으면 강의는 3시간을 넘길 때도 있다. “조금이라도 더 건강했을 때 하나라도 더 가르쳐주고 싶다”는 게 그의 간절한 바람이다. 걸음조차 불편할 때가 있을 정도로 건강이 예전만 못하다. 그는 기자를 만나는 날 아침에도 병원에 들렀다 연구소로 나왔다고 했다.

한송은 “우리문화는 곧 한문문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처럼 한문교육을 소홀히 하면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는 멀지 않아 소멸되고야 말 것”이라며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비판하려거든 먼저 퇴계의 저서를 읽어야 하는데 요즘 학자들은 그 같은 기본과정조차 건너뛴다. 100년 전 우리 조상들이 쓴 책도 제대로 읽지 못하는 나라는 우리밖에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모내기도 전통방식이라면 국가가 나서서 보존하는 마당에 한문만은 소외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사서삼경을 제대로 성독(聲讀)하고 전통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는 한학자가 이 땅에 10명도 남지 않았다”며 “국가가 나서 상엿소리나 김매는 소리를 녹음하는 것처럼 한학자들의 글 읽는 소리를 녹화·녹음해서 전통문화 자료로 남길 필요가 있다. 전통이라는 것은 한 번 끊기면 다시 잇기 어렵다. 맥이 남아 있을 때 살려서 보존해야 한다”며 말끝에 힘을 실었다.

- 글·사진 최경호 기자 squeeze@joongang.co.kr

201608호 (2016.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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