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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인물] 30년 ‘최장수’ 이성열 수원유신고 야구감독 

“차선 지키듯 하면 남 탓할 일 없어요” 

글·사진 최경호 기자 squeeze@joongang.co.kr
1984년 덕수상고 감독으로 지도자 생활 시작, 광주진흥고 거쳐 95년부터 20년간 수원 야구의 터줏대감 “매년 한 층씩 건물 쌓아 올리다 보니 30층… 아마추어 지도자는 조금 손해 보듯 살아야 롱런합니다”

▎이성열 수원유신고 감독은 30년 경력을 자랑하는 아마야구의 산증인이다. 그는 “차선을 지키듯 살면 남 탓할 일이 없다”며 절제와 배려를 강조했다.
감독은 파리목숨이라는 말이 있다. 고교야구에서는 더 그렇다. 성적이 나지 않으면 언제든 옷 벗을 각오를 해야 한다. 학부모와 잡음 때문에 물러나는 경우도 많다. 이런저런 이유로 매년 감독이 바뀐 학교도 있다. 프로야구에서 이름을 날린 스타플레이어 출신이라도 예외는 없다. 이성열(61) 수원유신고 감독은 고교야구 감독직만 31년째 맡고 있다. 그의 장수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이성열 야구감독을 만나기 위해 9월 6일 서울 광진구 구의동에 있는 한 커피숍을 찾아갔다. 이 감독은 구의동에서만 30년을 넘게 살았다. “제1의 고향은 대구, 제2의 고향은 광주, 제3의 고향은 서울 구의동”이라고 그가 말하는 이유다.

이 감독은 8월 30일부터 9월 4일 대만에서 열린 아시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의 대표팀 사령탑을 맡았다. 그는 “대회 2연패에 실패했으니 감독으로서 할 말이 없다”며 말문을 열었다. 이 감독은 “태국 심판이 명백한 오심을 저지르자 나도 모르게 ‘야, 이놈아 그게 어떻게 세이프냐’라고 소리를 질렀다. 아이들이 너무 억울해서 우는 모습을 보면서 ‘퇴장이 대수냐’는 생각이 들었다”고 이 대회에 대한 아쉬움을 나타냈다.

한국은 9월 2일 대만 타이중에서 열린 대회 결선 라운드 1차전에서 연장 10회 승부치기 끝에 대만에 6-12로 패해 대회 2연패가 좌절됐다. 연장 10회초 수비 때 땅볼타구를 잡은 2루수 박성한의 약간 높은 송구를 받은 1루수 이정후가 대만 타자주자를 태그했다. 방송 화면으로 봐도 대만 타자주자의 몸에 이정후의 미트가 확실히 닿았다. 하지만 태국 1루심은 세이프 선언을 했다. 김선섭(광주일고 감독) 코치는 “다음날 태국 심판이 ‘TV 화면으로 다시 봤는데 미안하다’며 오심을 인정했다”고 밝혔다.

이 감독은 “한창 자라는 아이들이 마음에 상처를 입지나 않을까 걱정”이라며 “앞으로 20년 이상 야구를 해야 할 녀석들이니 다 잊고 다시 시작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감독을 30년 이상 하다 보니 이런 일도 겪는다”며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1무 16패 덕수상고, 부임 2년 뒤 전국대회 우승 일궈내


▎우수한 자원들이 서울로 몰리는 선수 수급 구조상 수원 유신고는 최강 전력을 갖추기 어렵다. 그럼에도 강인한 정신력으로 무장한 유신고는 주요 전국대회에서 강호들을 무너뜨리는 다크호스로 정평이 나 있다.
이 감독은 고교야구 감독 경력만 30년이 넘는다. 84년 덕수상고에서 감독으로 데뷔한 그는 광주진흥고(88~92년)를 거쳐 95년부터는 수원유신고에서 지휘봉을 잡고 있다. 93~94년에는 잠시 쉬면서 야구 공부도 더 할 겸 대한야구협회 심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야구의 견문을 넓히는 좋은 기회였다”고 이 감독은 그 시절을 돌이켰다.

대구가 고향인 이 감독은 대구달성초-대구경상중을 나와 배문고에 진학했다. 야구에 제법 소질이 있었던 이 감독은 대구지역 명문인 경북고나 대구상고(현 상원고) 대신 서울로 유학을 왔다. “초등학교 때 선생님 눈에 띄어 야구를 시작했어요. 축구나 육상도 있었지만 왠지 야구에 끌리더라고요. 기왕이면 서울에서 성공하고 싶었죠.”

그의 포지션은 포수였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은 아니다”는 명언을 남긴 메이저리그 전설의 포수 요기 베라나 일본프로야구의 ‘대표 포수’인 노무라 가쓰야(野村克也) 같은 선수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하지만 서울 생활은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야구뿐만 아니라 주먹에도 ‘소질’이 있었던 게 화근이었다. 힘깨나 쓰는 친구들과 어울리다 보니 자연스레 야구에서 멀어졌다. “만일 김인식 감독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뒷골목에서 주먹질하다가 인생을 망쳤을지도 모릅니다.” 김 감독은 이 감독의 배문고 9년 선배이자 고교 은사였다. 그런 인연 덕분에 지금도 이 감독은 어려운 일이 생기면 김 감독에게 가장 먼저 조언을 구한다. 은사님이 2004년 뇌줄중으로 쓰러져 병상에 누워 있을 때도 오랫동안 곁을 지켰던 것도 이 감독이었다.

고교 졸업 후에는 대학팀 대신 실업팀 한전을 선택했다. 가정형편상 대학졸업장보다는 돈이 먼저 필요했다. 그러나 선수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군 전역 후 부상이 발목을 잡았다. 갑자기 야구가 싫어졌다. 글러브를 내던지고 중견 건설회사에 취직했다. 회사 대표는 친구의 아버지였다. 사회에 막 발을 들여놓은 ‘청년 이성열’에게는 더없이 든든한 동아줄이었다. 제2의 인생이 열리는 듯했다. 70년대 후반 때마침 불어준 중동의 건설 붐 덕분이었다. 이 감독은 사우디아라비아로 날아가 돈을 벌 작정이었다. 하지만 운명이란 그런 것인가? 비행기 탈 날만 기다리던 그에게 가까운 선배로부터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성열아, 내 아들녀석이 야구를 하는데 네가 그 학교 코치를 맡아 줄 수는 없을까? 네 도움이 필요하다.”

친형제같이 지내는 선배의 부탁을 물리치기 어려웠다. 그런 인연으로 79년 서울이문초등학교 코치직을 맡아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애초에는 “새 코치를 구할 때까지만” 하겠다는 약속을 했단다. 6개월 뒤엔 사우디아라비아행 비행기에 올라야 했기 때문이다.

야구에 대한 염증 때문에 글러브를 벗은 그지만 오랜만에 유니폼을 입은 모습이 왠지 잘 어울려 보였다고 한다. 그때 ‘이런 게 운명인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갔다. 그의 마음속에 다시 야구가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그는 ‘야구인 이성열’로 돌아왔다.

82년에는 프로야구가 출범하면서 야구붐이 하늘을 찔렀다. 김우열·윤동균(이상 OB), 김봉연·김준환(이상 해태) 등 자신보다 선배였던 이들이 선수로 뛰고 있었다. 하지만 이 감독은 그럴 수 없었다. 다시 그라운드로 돌아가기에 공백이 너무 컸다. ‘선수가 아닌 지도자로 이겨보자’는 오기가 발동했던 시절이다.

84년에 덕수상고(현 덕수고) 감독을 맡은 것은 그의 지도자 생활에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막 창단한 탓에 야구팀이 제대로 정비되지 않았던 터라 모든 것이 시작이었다. 선수 대부분이 다른 학교에서 버림받은 오합지졸로 구성돼 있었다. 85년 1년간 성적은 1무 16패, 아예 한 번도 승리하지 못했다. 어쩌면 지는 것이 당연했다. “이렇게 죽나 저렇게 죽나 마찬가지니 차라리 운동장에 죽자고 했죠. 선수들과 함께 운동장을 뒹굴고 또 뒹굴었습니다.”

“배려하되 차별하지 않는다”


▎이성열 감독은 지난해 12월 4일 서울 양재동 L타워에서 열린 ‘2015 한국프로야구 은퇴선수의 날’에서 공로상을 받았다. 그가 가장 아끼는 제자인 유한준이 은사에게 꽃다발을 전달하고 있다. 가운데는 이순철 한국은퇴선수협회 회장.
만년 꼴찌인 팀이 2년 만에 확 달라졌다. 덕수상고는 86년 청룡기대회 결승에서 대전고를 4대 2로 누르고 창단 후 첫 우승을 차지하는 감격을 누렸다. “프로에서 잘나가는 선배들과 의 보이지 않는 경쟁에서 이겼다는 뿌듯함도 느꼈습니다.”

88년 광주진흥고로 자리를 옮긴 이 감독은 92년까지 팀을 이끌었다. 그는 “대구가 제1의 고향이라면 광주는 제2의 고향”이라고 말한다. 지금도 광주에 지인이 많다. 55년생 동갑내기인 강의원 광주진흥고 야구부장도 그중 한 사람이다. 둘은 언제든 부담 없이 소주잔을 부딪친다.

광주에서 지내는 동안 건강이 좀 나빠졌다. 아무래도 혼자서 객지 생활을 오래하다 보니 건강을 돌볼 틈이 없었다. 사람 좋아하는 성격이라 술도 많이 마셨다. 93년 서울로 올라온 이 감독은 94년까지 1년여 동안 대한야구협회 심판으로 활동했다. 감독을 맡기엔 건강이 너무 나빠졌고 좀 더 큰 눈으로 야구를 보고 싶다는 욕심에서 심판 마스크를 썼다.

그러던 차에 수원유신고에서 감독직 제의가 들어왔다. 약체팀이었지만 한 번 일으켜 세워보고 싶은 욕심이 들었다. 이 감독은 95년부터 지금까지 이 학교에서 지휘봉을 잡고 있다. 그의 뚝심과 성실성을 높이 산 유신고는 그를 행정실 소속 교직원으로 채용했다.

이 감독은 올해 2월 28일 만 61세로 정년퇴직을 했지만 감독직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이 감독과 유신고 사이엔 그만한 믿음이 있다. 다른 학교에서 몇 차례 스카우트 제의가 왔지만 그때마다 이 감독은 고사했다. 전두안 전 교장과의 신의를 져버릴 수 없었다고 한다.

이 감독은 “유신고로 옮겨온 지 얼마 안 됐을 때만 해도 월급봉투를 집에 가져다 준 적이 없을 정도로 사람들을 만나고 다녔다. 그런데 집사람과 친하게 지내던 교장선생님 사모님이 이 사실을 알게 됐고 결국 교장실로 불려갔다”며 “그 이후 월급은 아내 통장으로 입금됐고, 그 대신 교장선생님이 자신의 업무추진비 중 일부를 내게 용돈으로 줬다. 그때만 해도 한 달에 30만원이면 작은 돈이 아니었다. 바로 엊그제 일 같은데 벌써 20년이 훌쩍 지나갔다”고 했다.

이 감독의 선수 기용원칙은 단순하다. 모든 것이 실력 우선이다. 실력이 안 되면 3학년 졸업반이라고 해도 경기에 내보내지 않는다. 고교야구에서는 고학년 순으로 출전하는 것이 관례다. 이 감독은 그 관례를 깬 것이다. “물론 같은 실력이라면 3학년을 배려하겠지만 팀이 이기기 위해서는 잘하는 선수가 나가야죠. 1학년이라고 해서 무조건 벤치만 지킨다면 선수도 죽고 팀도 죽는 겁니다. 최정이나 유한준은 1학년 때부터 주전으로 뛰었던 아이들이에요.”

지금까지 이 감독이 길러낸 제자만 수백 명에 이른다. SK 간판타자 최정, kt 4번 타자 유한준, 지난해 한국시리즈 최우수선수(MVP)에 빛나는 정수빈(두산) 등이 눈에 띤다. 이 감독은 “지난해 우연히 프로야구 가이드북을 봤는데 내가 가르친 제자들 중 32명이 현역선수로 등록돼 있더라. 상무와 경찰청을 포함하더라도 한 팀에 두 명 이상 내 제자가 있는 셈”이라고 말했다.

유신고 출신 야구인들은 매년 연말 한자리에 모인다. 이 감독이 20년 넘게 팀을 이끌었으니 현역선수는 예외 없이 그의 제자다. 이 감독은 “현재 유신고 야구부장도 내 제자인 걸 보면 내가 오래 하기는 한 모양”이라며 “내가 떠나도 이 전통은 계속해서 이어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 감독은 자신이 가르친 많은 제자 가운데 유한준에게 ‘엄지손가락’을 세운다. 실력은 물론이고 인성도 최고라는 것이다. 지난해 자유계약선수(FA) 자격을 얻은 뒤 4년 최대 60억원의 대박을 터뜨린 유한준은 왜소한 체격 탓에 중학교 졸업 후 진학할 고등학교를 찾지 못했던 선수였다. 이때 그에게 손을 내민 이가 이 감독이다. 유한준은 평소 “너무 감사해서 가족 모두가 곧바로 수원으로 이사를 했다”며 “지금 이 자리까지 올 수 있던 것도 감독님 덕분이다. 내가 수원을 ‘고향’이라 부르는 이유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유한준의 고향은 전북 고창이다.

“나는 30층짜리 빌딩 주인… 부러운 거 없어”

이 감독은 “매년 한 층씩 쌓아 올리다 보니 어느덧 30층이 됐다. 나는 30층짜리 빌딩의 주인”이라며 껄껄 웃는다. “다른 분야는 돌아보지도 않고 야구만 보고 살아왔지만 후회는 없다. 내가 좋아하는 야구 가르치고, 편하게 막걸리 마실 수 있으니 누구도 부럽지 않다.”

이 감독의 말처럼 그는 30년 넘게 그라운드를 지키고 있다. 지도자로서 그의 장수비결은 무엇일까?

스카우트 경력 20년이 넘는 조찬관 프로야구 kt 스카우트 팀장은 “팀 성적보다 선수들 개인의 장래를 생각하는 배려와 진심이 이 감독 최고 장점”이라며 “후배 감독들은 부러워만 할 게 아니라 이 감독이 얼마나 자신에 대해서는 엄격하고 타인에 대해서는 배려를 아끼지 않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지훈 KIA 스카우트 팀장은 “길게 그리고 멀리 내다보는 분”이라며 “이 감독에게서 절제와 겸손을 배운다”고 평가했다.

이 감독은 요즘도 일주일에 2~3일은 야구부 숙소에서 잠을 잔다. 그는 “남편으로, 아버지로는 50점 이상 주기 어려운 사람”이라며 “언제까지 감독 생활을 이어갈지 모르겠지만 은퇴 후에는 가정에 충실하고 싶다”고 말했다. “슬하에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두고 있는데 나중에 손주를 낳으면 잘 봐줄 것”이라며 그가 웃었다.

경력을 기준삼을 때 국내 고교야구 감독 69명 중 최고참인 이 감독은 아마야구와 후배 감독들에 대한 고언(苦言)도 잊지 않았다.

“야구의 인기 덕분에 프로야구팀은 10개, 고교야구팀은 69개까지 늘었습니다. 그런데 지도자들은 기본기는 등한시한 채 기술만 강조하려 합니다. 투수는 공만 빨랐지 컨트롤이 떨어지고, 타자는 힘만 셌지 정교함이 부족한 이유도 여기에 있어요. 고교 때까지는 우리 선수들과 기량이 비슷한 일본 선수들이 프로에 들어가서 추월하는 이유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이 감독의 말끝에 힘이 실렸다. “프로에서 잘나가던 스타들이 아마야구 지도자로 와서 성공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어요. 저는 프로선수 생활을 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아마는 프로와 달라요. 지도자가 조금 손해 보는 듯 살아야 해가 미치지 않습니다.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는 겁니다. 수고 없는 영광도 없지요.” 그의 좌우명은 불로무영(不勞無榮)이다.

- 글·사진 최경호 기자 squeez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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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호 (2016.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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