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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 지독한 폭력과 야만성의 연대기 

역사의 하중에 무너진 슬픈 사나이들의 이야기… 언젠가 세월호 소재 소설도 집필할까? 

한기홍 월간중앙 선임기자 glutton4@joongang.co.kr

▎공터에서 / 김훈 지음 / 해냄 / 1만4000원
“이 소설은 제가 살아온 시대에 관한 소설입니다. 저는 1948년에 태어나 올해 70살이 됐습니다. 아버지는 1910년, 저는 정부 수립을 하던 해에 태어났습니다. 거기서부터 결코 도망갈 수 없고 피해서 달아날 수 없는 한 시대의 운명이 전개됐습니다.”

김훈 작가가 지난 2월 6일 새로 출간한 장편소설 <공터에서>를 기념해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한 말이다. 이 소설은 1910년생 나라가 망하던 해 태어나 만주에서 떠돌다 돌아온, 마장세와 마차세의 아버지 마동수의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마동수는 한국전쟁을 겪으며 흥남부두에 내려온 피란민이 되고, 이어 그가 낳은 마장세와 마차세 등 2세들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마장세는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이후 한반도에서의 지긋지긋한 삶을 감당할 수 없어 괌에 정착, 사업을 하며 생활하는 인물이다. 마차세는 한 주간 잡지사 기자로 취직했다가 1980년대 언론 통폐합으로 쫓겨난 이후 생활인으로 거듭 실패하며 살아간다. 역사의 하중을 견디지 못하고 애잔하게 또는 통렬하게 스러져간 한 세대의 이야기다.

김훈은 황석영이나 이문열처럼 거대한 전망이나 시대 전체의 구조를 말하는 통합적인 시야가 없다. 그는 말한다. “전체를 다 통괄할 수 없는 나로서 고심 끝에 도입한 것이 세부적인 것에 갑자기 달려들어 날카롭게 한 커트 찍어내는 기법”이라고 말이다.

제목이 왜 이렇게 평범한가. ‘공터에서’라니. 작가는 “주택과 주택들 사이에 있는 버려진 땅, 아무런 역사적인 구조물이나 시대가 안착될 만한 건물이 들어있지 않은 것”이라면서 “아버지가 살아왔던 시대를 공터라고 가정했다”고 밝혔다. “생활의 바탕 위에서 이념과 사상이 전개돼야 옳은 것”이란 김훈의 지론이 오롯이 배어 있는 소설 제목이다.

김훈은 달변으로 잘 알려진 작가다. 말과 글이 거의 일치하는, 어눌하지도 않고 불필요한 탄식이나 간투사가 거의 없는 언어를 말한다. 말로써 거짓 희망을 전파하거나 낙관적 전망에 기대 현실을 곡해하지도 않는다. 그런 달변으로 기자들에게 그는 이런 말을 들려줬다.

“희망이라는 것은 아주 조금밖에 말하지 못했습니다. 아주 사소한 것 속에 들어있는 희망을 아주 조심스럽게 말하다가, 희망을 말하다가 미수에 그친 것 같았어요. 그래서 미수에 그친 것이 너무나 사소하고, 또 무력하게 보이기도 했지만 저로서는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김훈은 “이 땅에서 70년을 살면서 내가 정말 소름끼치게 무서웠던 것은 우리들 시대의 야만성과 폭력”이었다고 고백한다. 한없는 폭력, 한없는 억압, 한없는 야만성, 그것은 김훈 같은 탁월한 작가조차 이루 다 말도 못하는 것들이리라. 탄핵 국면에서 광화문에 나가 촛불과 태극기 집회를 유심히 관찰하기도 하고, 세월호 사건에 대해서도 그는 깊은 관심을 갖게 된다.

“나는 그 세월호 참사 다음날 자살한 교감선생님을 생각했어요. 이 인간에 대해서 우리가 뭐라고 글을 써야 되나, 이 교감선생님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할 수가 있을까. 그런 것들은 글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죠. 그것은 그냥 종교의 영역으로 갈 수밖에 없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 한기홍 월간중앙 선임기자 glutton4@joongang.co.kr

201703호 (2017.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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