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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왜 지금, 다시 사임당인가 

세 얼굴의 워킹맘 우리가 몰랐던 신사임당 

배영대 문화선임기자 balance@joongang.co.kr
1930년대 일제강점기에 ‘현모양처’ 용어 처음 등장, 박정희 시대엔 육영수 여사 이미지와 겹쳐 재조명
어려서부터 유교 경전은 물론 불교와 도교를 넘나들던 자유로운 사상가 면모는 덜 알려져

드라마 속 사임당과 역사적으로 알려진 사임당, 그리고 우리가 잘 몰랐던 사임당. 5만원권 지폐 속 주인공으로 늘 우리 곁에 있지만 정작 그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은 별로 없다. 대부분 대학자 율곡의 어머니이자 글씨와 그림에 능했던 여류 예술가로 알고 있는데 실제는 그 이상이다. 아들인 율곡의 우상이었던 사임당의 정신세계를 되짚어본다.


▎5만원권 지폐 속 주인공인 신사임당의 초상(이종상 화백 그림)과 신사임당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초충도(草蟲圖) 팔곡병(八曲屛:머리 맡에 치는 작은 8폭 병풍)’ 중 일부. 왼쪽부터 ‘맨드라미와 쇠똥벌레’ ‘수박과 들쥐’ ‘산차조기와 사마귀’ ‘양귀비와 도마뱀’.
드라마는 짬뽕이다. 좀 고상하게 말하면 퓨전 예술. 역사 드라마는 특히 그렇다. ‘팩션(faction)’이라는 말이 거기서 나왔다. 팩트(fact·사실)+픽션(fiction·허구)의 합성어가 팩션이다. 역사 드라마를 역사적 사실로만 채울 수는 없다. 역사적 사실에 기반해야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상상력의 허구가 가미돼 있다. 상상력의 허구가 드라마의 재미를 생산해내는 요소다.

원조 한류 스타 이영애가 <대장금> 이후 13년 만에 TV에 출연해 화제를 모은 드라마 <사임당, 빛의 일기>도 당연히 예외가 아니다. <대장금>의 경우엔 <조선왕조실록>에 스치고 지나가듯 언급된 의녀의 기록에 기대어 그렇게 장대한 드라마를 엮어냈다. 그에 비하면 신사임당(1504~51, 연산군 10년~명종 6년)의 역사적 기록은 대단히 많은 편이다. 아들 율곡이 남긴 기록에서부터 조선 후기 사임당에 대한 평가, 일제강점기와 박정희 시대의 재조명 등이 계속 이어졌다.

아무리 기록이 많다 하더라도 그것이 드라마나 영화로 만들어질 때는 역사적 사실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이를 통해 새로운 역사가 또 생겨난다. 허구를 통해 새롭게 생산되는 이미지는 사임당의 또 다른 얼굴이 될 것이다. 역사수업을 통해 배우는 것보다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확산되는 역사의 범위가 더 광범위하다.

드라마 <사임당, 빛의 일기>에서 사실과 허구의 경계는 어디인가? 우선 사임당 자신을 비롯해 부모와 남편과 자녀들은 실존인물이다. 사임당의 친정인 강릉 오죽헌, 시댁이 있던 서울 청진동 일대 등은 실제로 사임당이 활동했던 역사적 무대다. 이를 제외한 나머지는 대부분 팩션(faction)으로 가공된 것들이다.

어떤 것들이 허구인가? 드라마 초반에 안견의 <금강산도>라는 회화작품이 나온다. 그림을 좋아하고 그림에 재능을 보이는 어린 사임당이 이 그림을 보려고 남의 집 담장을 뛰어넘기도 한다. 그 집에는 조선 왕실의 후예로 설정된 이겸이란 인물이 살고 있다. 안견의 <금강산도>를 매개로 사임당과 이겸의 로맨스가 형성되는데, 이는 드라마를 끌고 가기 위해 설정된 핵심 줄거리다.

드라마에는 어린 사임당이 안견의 <금강산도>를 열심히 베껴 그리는 장면이 나온다. 모사는 그림이나 글씨 공부의 기초다. 조선 초기를 대표하는 화가 안견은 실존인물이지만, 그가 그린 <금강산도>라는 그림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런 걸 그렸다는 기록도 없다. 단 사임당이 어려서부터 안견의 산수화를 좋아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사임당의 아들 율곡이 쓴 행장(行狀: 죽은 사람이 평생 살아온 일을 적은 글)에 나온다.

“워킹맘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드라마 <사임당, 빛의 일기>의 주연을 맡아 13년 만에 TV에 복귀한 원조 한류스타 이영애. 박은령 작가는 “워킹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율곡은 “어머니는 평소 글씨와 그림을 좋아하셨다. 7세 때 안견의 그림을 모방해 산수도를 그리셨는데 지극히 절묘했다”고 적어 놓았다. 이를 토대로 드라마 작가가 그럴듯한 상황을 만들어낸 것이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안견의 작품은 <몽유도원도>뿐이다. 1447년(세종 29년) 4월 20일 밤 세종대왕의 셋째 왕자인 안평대군이 꿈에 무릉도원을 봤다. 안평대군은 당대 최고의 화가 안견에게 꿈에 본 정경을 그리게 했는데, 그것이 바로 <몽유도원도>가 탄생한 배경이다.

드라마에 나오는 <금강산도>는 언뜻 <몽유도원도>를 연상시킨다. 드라마 제작팀의 주문을 받고 화가 장병언(39) 씨가 그렸다. “안견 풍의 그림을 그려달라”는 주문에 <몽유도원도>와 안견의 화풍에 영향을 준 중국 북송의 화가 곽희의 그림을 섞어 그렸다고 한다. 미술 작가나 드라마 작가나 모두 ‘융합의 천재’들이다. 드라마 속 이겸이란 인물도 가공인데 왕실의 후예에다 예술과 술을 좋아하는 호방한 매력의 이 캐릭터는 어디서 본 듯하다. 작가는 안견의 후견인이었던 안평대군을 모델로 하여 이겸이란 인물을 창작해냈다고 한다.

이렇게 드라마를 통해 만들어진 새로운 사임당은 ‘이영애의 사임당’이다. 박은령 작가는 “워킹맘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했다. 이영애가 분한 예쁜 워킹맘이다. 드라마는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전개되는 퓨전 사극 형식이다. 이영애는 1인2역을 연기한다. 조선시대의 사임당과 현대에서 한국미술사를 전공한 대학강사, 두 가지 역할을 소화해낸다. 남편의 도움을 거의 받지 못하고 스스로 생계를 책임져가며 일곱 명의 아이를 키운 역사적 사임당, 그리고 뛰어난 작품을 남긴 예술가로서의 사임당이 드라마를 통해 복합적으로 재현된다.

그런데 드라마의 초반 시청률은 기대했던 것만큼 높지 않다. PD와 작가가 한꺼번에 너무 많은 것을 보여주려 해서 그런 듯하다. 5만원권 지폐에 등장할 정도로 늘 우리 곁에 가까이 있는 사임당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 모두가 사임당을 잘 아는 것은 아니다. 드라마로도 처음 만들어졌다고 하니 더욱 그럴 것이다.

아직 드라마 초반이라 단정하긴 어렵지만, 이런 경우엔 기초 정보부터 먼저 충실히 전해주고 나서 간간이 해석의 묘미를 가미하는 게 좋지 않았을까? 역사적 사임당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의미가 있었을 것이란 말이다. 그럼에도 이 드라마에는 그동안 사임당에 대해 대중이 가지고 있던 막연한 통념을 흔들어놓는 요소가 있는 듯하다.

신사임당은 실제로 어떤 인물이었을까? 역사적 인물들이 대부분 그렇듯 신사임당도 어느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율곡 이이의 어머니이자 시·그림·글씨에 능한 여류 예술가라는 점은 팩트(fact)다. 여기에 시대마다 해석의 양념이 추가된다. ‘현모양처의 대명사’라는 시각조차 만들어진 이미지일 수 있다. 조선시대 여성의 호칭은 대부분 친정 집안의 성에 ‘씨’를 붙여 불렀다. 신사임당도 당대엔 ‘신씨’로 불렸다. 16세기에 ‘신씨’로 불리던 이가 사후 18세기 무렵 신사임당으로 격상되는 과정은 흥미롭다.

조선시대 대학자이자 정치가로 손꼽히는 율곡 이이가 사임당의 4남3녀 중 셋째 아들이다. 율곡을 서인 당파의 종장으로 추대하려는 노론 계열 인사들이 이를 주도했다. 앞장선이는 송시열(1607~89, 선조 40년~숙종 15년)이었다. 성리학적 세계관에 입각해 ‘율곡의 어머니’로서 사임당을 부각시켰다.


▎조선 전기의 화가 안견이 그린 산수화 ‘몽유도원도 (夢遊桃源圖)’. 1447년(세종 29) 작. 비단 바탕에 먹과 채색. 38.7×106.5㎝. 일본 덴리(天理) 대학 중앙도서관에 소장 돼 있다. 안평대군이 꿈속에서 여행한 복사꽃 마을의 광경을 안견에게 말하여 그리게 했다. 도연명(陶淵明)의 ‘도화원기(桃花 源記)’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신사임당의 작품마저 성리학적 시각으로 재단했다. 율곡은 어머니가 산수화를 좋아했다고 기록해놓았는데, 송시열의 성리학적 재단 이후 사임당은 ‘초충도(草蟲圖)의 화가’로만 주로 알려지게 되었다. ‘초충’은 작은 풀과 곤충이다. 성리학의 대학자를 낳고 기른 어머니, 거기에 초충 같은 미물에까지 관심을 가지고 사랑한다는 이미지가 조선 후기 성리학자들이 볼 때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화가 신씨가 사임당으로 재해석되는 시기는 국난의 시대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며 민심이 피폐할 대로 피폐해졌다. 이런 시대에 송시열과 노론은 민심을 추스르고 나라의 기강을 다시 바로 세울 가치를 성리학을 강화하는 데서 찾았다. 나아가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할 이상적 인물로 율곡을 내세우면서 동시에 사임당의 위상도 격상시켜 나갔던 것이다.

그런 영향을 받아 18세기 조선에서는 사임당을 본떠 초충도가 폭발적 인기를 끌었다. 오늘날 전해지는 수많은 초충도가 모두 신사임당의 작품이 아니라 그렇게 본떠 그린 그림들이 전해진 것이다.(고연희·이숙인 등 지음, <신사임당, 그녀를 위한 변명> 참조, 다산기획, 2016년)

5만원권 지폐의 도안인물로 신사임당을 선정할 당시 이를 반대하고 나선 것은 의외로 여성계였다. 왜 그랬을까? 신사임당 자체를 문제삼은 것은 아니었다. 그가 시대 시대마다 반복적으로 소환되는 배경에 대한 문제제기였다. 흔히 사임당을 현모양처의 상징으로 여기곤 하는데, 현모양처라는 말 자체가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도입된 용어다. 1930년대에 신사임당은 율곡뿐 아니라 4명의 아들을 모두 잘 교육한 ‘현모’, 부족한 남편을 현명한 길로 이끌며 내조를 잘하는 ‘양처’의 모습으로 재현되었다. 나아가 전쟁이 한창이던 1940년대 초반에 들어선 ‘군국의 어머니’로까지 포장되면서 전시체제에 동원되고 활용됐다.

힘겨웠던 인생살이 겪은 또 하나의 ‘여자의 일생’


▎드라마 <사임당, 빛의 일기>에서 주인공 이영애가 시·서·화에 모두 능한 예술가였던 신사임당의 그림 그리는 모습을 연기하고 있다.
홍양희 한양대 HK연구교수는 “국가·민족·사회가 여성이라는 성별을 가진 집단에 요구하는 방식에 따라 동일한 인물이 어떻게 다른 이미지로 형상화될 수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에서도 신사임당은 새롭게 해석된다. 1960년대 박정희 시대에도 사임당이 부각됐다. 역사와 현실이 오버랩됐다. 조국 근대화를 수행하는 완벽한 여성의 사표에 고결함의 미학까지 결합되면서 육영수 여사의 이미지와 겹쳐졌다.

정옥자 서울대 명예교수는 “(사임당은) 박정희 정권의 민족 주체성 확립을 위한 국가 영웅화 사업에 편입돼 전통적 현모양처이자 근대화를 수행하는 여성 주체의 사표로 자리 잡게 되었다”고 했다. 나아가 “전통의 근대화, 근대화한 현모양처, 국가에 충성하는 여성의 이미지에 고결함의 미학이 결합해, 그 이미지가 육영수 여사에게 안성맞춤으로 적용됐다. 적어도 1970년대에 육영수와 사임당은 ‘한국적 부덕의 사표’로서 상호 공명하고 있었다”고 밝혔다.(정옥자 지음, <사임당전> 참조, 민음사, 2016년)

드라마 <사임당, 빛의 일기>는 한국에서의 인기와 중국에서의 한류 바람을 동시에 기대하면서 3년 전부터 준비해왔다. 당초 지난해 10월께 방영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중국이 사드 배치 문제를 거론하며 한류를 봉쇄하면서 이런 계획에 차질이 생긴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에 또 최순실 사태가 터지면서 국내적으로도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박근혜 대통령의 인기가 바닥으로 추락하지 않았다면 드라마는 어떻게 됐을까? 육영수-사임당 이미지의 덕을 본 특수 호황을 맛보지 않았을까?

정옥자 교수는 사임당 영웅화 작업 같은 정치적 성격에는 관심이 없고 인간 사임당 자체만을 살펴보고 싶다면서, 그렇게 보니 힘겨웠던 인생살이를 겪은 또 하나의 ‘여자의 일생’이 있었다고 했다. 필자도 그런 인간적인 면을 찾아내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아무래도 사임당의 운명은 ‘여자의 일생’만으로는 재해석되기 힘들 듯하다.

사임당의 진면목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사임당을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사이에 놓치는 중요한 대목이 있다. 조선시대나 일제강점기나 박정희 시대나 모두 마찬가지다. 사임당은 1504년(연산군 10년) 강릉 북평촌에서 아버지 신명화(1476~1522)와 어머니 용인 이씨(1480~1569) 사이의 다섯 딸 중 둘째딸로 태어났고, 그곳에서 쭉 자랐으며, 결혼하고 나서도 상당기간 친정에서 생활했다. 19세(1522년) 때 남편 이원수와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삼년상을 치르며 강릉 오죽헌에서 계속 생활했다. 1524년에서야 상경해 시어머니 홍씨에게 신혼례를 올렸다.

그 후에도 1541년 38세에 맏며느리의 책임을 맡아 살림을 주관할 때까지 친정인 강릉과 서울 수진방(壽進坊: 지금의 청진동 종로구청 일대로, 사임당의 어머니 이씨가 외손자 율곡에게 상속한 집이 있었음), 시댁 본가가 있던 파주 등을 오가며 지내는데, 이 중 친정에 머무른 기간이 절반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적으로는 친정에 근거를 두고 다른 곳들은 잠시 다녀가는 식으로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혼자 된 친정어머니를 봉양하고 또 과거급제를 못한 남편에게 공부할 시간을 주고자 하는 배려 등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신사임당의 친정이자 조선시대의 대학자 율곡 이이가 태어나 자란 강원도 강릉의 오죽헌.
그런데 이 같은 결혼생활은 조선시대 시집살이에 대한 일반적 통념과 다르다. ‘호된 시집살이’는커녕 거의 친정에서 생활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닌 셈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사임당이 살았던 16세기에는 ‘처가살이’가 자유로웠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조선시대 하면 떠오르는 가부장제와는 전혀 딴판이다. 사임당에 대한 ‘성리학적 이상화‘와 함께 가부장 제도 역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의 사회적 현상임을 확인하게 한다.

오늘날 사임당의 산수화가 전해지긴 하는데, 아쉽게도 그림의 채색이 다 지워져 있다. 이 그림에는 다행히 조선 중기의 문신 소세양(1486∼1562)이 쓴 제화시가 남아 있어 어떤 산수화인지 알게 해준다. “(…) 해 지는데 나무다리로 도인(仙子)이 지나가고, 솔 아래 집에 바둑 두는 스님이 한가롭구나(…)”라는 내용이 나오는 시인데, 도인과 스님이라는 표현이 나오는 것에 주목하자. 성리학 이외의 학문은 이단으로 배척했던 시대에 도인과 스님의 그림을 그렸다면 사임당이 이단인가, 아니면 우리가 그 시대에 대해 잘못 이해하는 것인가?

이 산수화는 송시열에 의해 위작 판정을 받는다. 송시열이 밝힌 위작 이유로는 그림에 스님이 등장하고, 남성(소세양)이 여성 그림에 발을 쓴 상황 등이 거론됐다. 성리학의 대가 율곡의 모친이 그린 그림에 스님이 등장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송시열은 판단한 것이다. 고연희 서울대 규장각 연구 교수는 “송시열의 발언은 16세기에 인기가 높았던 신씨(사임당) 산수화의 존재를 무시하고 이를 칭송한 제화시의 내용을 부정하는 어이없는 발언”이라고 지적했다.



유·불·도를 자유자재로 왕래한 자유로운 영혼


▎조선시대 대학자이자 정치가였던 율곡 이이 초상. 신사임당의 4남 3녀 중 셋째아들이다.
율곡은 서울로 돌아온 이듬해 7세가 되면서 사임당으로부터 교육받기 시작해 사서(四書 : <논어> <맹자> <대학> <중용>)를 비롯한 유교 경전에 통달하게 되었다.(<율곡전서> 권33, 연보) 유교 경전을 어머니에게서 배우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사임당의 아버지 신명화는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기묘사림 개혁파의 일원으로 학문과 지조를 인정받는 인물이었다. 사임당이 시집오기 전에 이미 친정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수준 높은 교육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 중기 여성에 대한 교육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율곡에게 사임당은 단순한 어머니가 아니었다. 한마디로 우상이었다. 사임당이 세상을 떠나고 삼년상을 마친 율곡은 19세에 금강산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승려생활을 했는데, 어머니를 잃은 충격과 슬픔이 가장 큰 이유였다. 성리학 이외에는 이단으로 치던 시대에 세상의 놀림감이 될 것을 각오하고 출가한 것은 그만큼 우상을 잃은 충격이 컸기 때문이었을 것이다.(한영우 지음, <율곡 이이 평전> 참조, 민음사, 2013년)

그런데 한걸음 더 나아가 생각해볼 거리가 있다. 율곡이 출가를 생각할 정도였다면 그 이전에 이미 불교에 대한 사전정보가 입력돼 있어야 할 터인데, 그 불교에 대한 정보 또한 우상이었던 어머니 사임당으로부터 왔을 가능성이 높다고 봐야 할 것이다. 1년 후 환속한 율곡은 ‘자경문’을 지어 승려생활을 반성하고 유학으로 돌아올 것을 다짐했다.

율곡은 집에 불경이 있어 우연히 보았다고 한다. 집에 있는 불경은 누가 보기 위해 갖다 놓은 것일까? 소세양이 화제시를 쓴 사임당의 산수화에 등장하는 스님과 도인이 갑자기 혹은 우연히 나온 인물들은 아닐 것이다. 율곡이 10세 때 지었다는 ‘경포대부(鏡浦臺賦)’는 경포대의 절경을 노래했는데, 중국의 고사와 함께 유교·불교·도교 사상이 자유자재로 인용돼 주목된다.

“행장(行藏: 세상에 나가 도를 행하는 것과 물러나 은거하는 것. <논어> 술이편)은 운수에 달렸고 화복(禍福)은 시기가 있는 법, 구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버려도 버릴 수 없나니, 그만두자 마침내 인력(人力)으로 취할 수 없으니, 명(命)이라 마땅히 조화의 하는 대로 따를 뿐이네. 하물며 형상은 만가지로 나눠지지만 이치의 합하는 것은 하나임에랴. 죽고 사는 것도 분변하지 못하거늘 하물며 오래고 빠른 것을 논하겠는가. 장주(莊周)는 내가 아니고 나비는 실물이 아니니, 참으로 꿈도 없고 진실도 없으며, 보통사람이라 해서 없는 것도 아니고 성인이라 해서 있는 것도 아니거늘 마침내 누가 득이고 누가 실이겠는가. 그러므로 마음을 텅 비워 사물에 응하고 일에 부딪치는 대로 합당하게 하면 정신이 이지러지지 않아 안(內)이 지켜질 터인데, 뜻(志)이 어찌 흔들려 밖으로 달리겠는가. 달(達)하여도 기뻐하지 않고 궁(窮)하여도 슬퍼하지 않아야 출세와 은거의 도를 완전히 할 수 있으며, 위로도 부끄럽지 않고 아래로도 부끄럽지 않아야 하늘과 사람의 꾸지람을 면할 수 있다네. (…) 아! 인생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짧은 백 년이고, 실체는 넓은 바다의 한 좁쌀이라네. 여름벌레가 얼음을 의심하는 것이 가소롭고, 달인(達人)들의 독특한 식견을 사모하네. 풍경을 찾아 천지를 하나의 집으로 삼을 것이지….”(율곡 이이 지음, ‘경포대부/鏡浦臺賦’ 일부. 정옥자 지음, <사임당전>에서 재인용)

도연명·소동파·왕휘지의 고사를 먼저 인용하고 난 후 나그네의 이름을 빌어 자신의 소회를 털어놓고 있다. 율곡이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10세 소년 시절에 이 부를 지었다고 보기엔 너무도 장대하고 웅혼하며 자유자재한 사상이 돋보인다. <장자>를 인용하며 도가적 분위기로 끝맺는 대목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고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이를 자기 나름대로 풀어내는 면모는 어머니 사임당이 아니고 누가 대신할 수 있을까? 정옥자 교수는 사임당과 율곡의 합작일 것이라고 추정했는데, 사임당의 자유자재한 사상이 그대로 녹아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율곡이 어머니에 대해 “어렸을 때 경전을 통했고 글도 잘 지었으며 글씨도 잘 썼다”고 적어 놓은 의미는 단지 유교 경전만 본 것이 아니라 불경이나 도가 경전도 모두 섭렵한 것으로 이해해도 좋을 듯싶다.


▎몇 점 안 되는 신사임당의 진품에 가장 근접한 그림으로 여겨지는 ‘포도’. 비단에 수묵, 31.5×21.7㎝
율곡이 금강산에서 환속한 후 지은 ‘풍악산 작은 암자에서 노승에게 주다(楓嶽贈小庵老僧)’라는 글에서 보여주는 불교와 유교에 대한 높은 경지는 자신의 천재성과 노력으로만 생겨난 것이 아니라 어려서부터 어머니에게 훈습된 결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율곡이 <김시습전>을 지은 것도 우연이 아니다. 이뿐 아니다. 조선 최고의 유학자인 율곡은 또 <노자>에 대한 주석서도 남겼다. <노자>에 나오는 구절을 풀이하고 설명한 <순언(醇言)>이란 책이다. 율곡이 있었기에 신씨가 사임당으로 격상될 수 있었지만, 그 격상의 의미는 성리학 시대와 다른 의미에서 새롭게 생각해볼 수 있을 듯 싶다. 율곡의 어머니 사임당은 유·불·도를 자유자재하게 왕래한 자유로운 영혼의 사상가로 되돌아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다시 드라마로 돌아가 보자. 이런 사실을 알고 드라마를 보면 더 재미가 있을까? 모르고 보는 것보다 더 생각해볼 거리는 많겠지만, 드라마의 시청률이 꼭 그와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상상력의 허구를 최신 제작기법으로 표현해내는 PD의 능력과 주요 배우들의 연기력 등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어찌됐든 영상은 이미지다. 13년만의 TV 출연임에도 이영애의 미모는 여전하다.

사임당은 1551년(명종 6년) 생을 마감할 때의 나이가 48세였다. 지금 이영애의 나이와 비슷하다. 기획 단계에서부터 사임당의 여러 얼굴과 우리가 잘 몰랐던 실체를 좀 더 치밀하게 추적하면서 제작했더라면 새롭게 태어나는 사임당은 무언가 달라도 달랐을 것이다.

- 배영대 문화선임기자 balance@joongang.co.kr

*더 읽을만한 책: <신사임당, 그녀를 위한 변명> 연고희·이숙인·홍양희 등 지음, 다산기획, 2016 <사임당전> 정옥자 지음, 민음사, 2016 <율곡 이이 평전> 한영우 지음, 민음사, 2013

201703호 (2017.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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