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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철학자 신기율이 쓰는 ‘현대인의 풍수’] 공간의 감각과 궁합의 비밀 

‘센 캐릭터’ 공간은 억지로 누르지 말고 미련 없이 떠나라 

신기율 기율다원(己律茶院) 운영
모든 공간마다 자연의 DNA 존재해 고유한 파동으로 ‘공간의 성격’ 창조… 눈에 보이지 않는 ‘지세(地勢)’와 ‘체질(體質)’의 조화 이루는 곳이 적합

공간도 사람처럼 저마다 고유한 ‘성격’이 있다. 대부분은 무난하게 사람과 어울리지만 드물게 타고난 기질이 워낙 강해 끊임없이 충돌을 일으키는 곳도 있다. 이렇게 ‘센 캐릭터’의 집은 어떻게 알아보고 어떤 처방을 내려야 할까. 공간철학자 신기율이 제시하는 ‘공간성격론’과 공간의 균형을 맞추는 비보풍수의 실체를 알아본다.


▎오랫동안 사람과 어울려 살았던 전통적인 집터들은 대부분 무난한 성격을 지녔다. 사람에 따라 공간의 에너지가 바뀌는 ‘공간가소성’이 가능해진다. 여러 가구가 모인 주택가. / 사진·아이클릭아트
차창 밖으로 북악산의 바위 능선이 거친 곡선을 그리며 지나갔다. 모처럼 봄 향기 가득한 산길을 유유자적 달리다 보니 시간가는 줄 몰랐다. 어느덧 차는 높은 담장들을 지나 운치 있는 단독주택 앞에 멈춰섰다.

자주 오가던 길이지만 이곳 성북동 끝자락까지 와본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대문에 들어서자 고급스러운 석재와 목재로 단단하게 지어진 2층집과 잘 가꿔진 정원이 펼쳐졌다. 마침 야외 의자에 앉아있던 검은 낯빛의 남자가 반갑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지인의 소개로 이번에 알게 된 박모 회장이었다.


▎북악산이 둘러싼 변종하 미술관의 전경. / 사진·신기율
“이런 외진 곳까지 직접 발걸음을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보시다시피 제가 몸이 좀 불편해서 멀리 나가질 못해요…. 그리고 이 집에 대한 선생님의 의견을 듣고 싶기도 했고요. 보기에는 참 괜찮은 집인데, 막상 살아보니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더군요.”

얼굴이 야위고 병색이 짙어 보였지만 여전히 형형한 눈빛을 가진 그는 1년 전만 해도 건실한 중견기업의 오너였다. 맨손으로 시작해 업계 신화를 일군 자수성가형 인물로 잘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평생 일에만 빠져 살았던 그는 환갑을 넘자마자 생각지도 못한 삶의 변곡점을 맞았다. 갑작스레 간암이 찾아온 것이다. 수술과 동시에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요양을 위해 구한 집이 바로 이곳 성북동 저택이었다. 산이 가깝고 공기가 좋으니 조금씩 등산도 하면서 재활치료를 하기에 안성맞춤처럼 보였을 것이다.

“도심에서 요양하기에 이만한 곳도 없겠다 싶어서 반년 전에 덜컥 이사를 왔지요. 그런데 이상하게 여기서는 왠지 쉬어도 쉬는 것 같지가 않아요. 나름대로 운동도, 산책도 하는데 몸은 점점 무거워지는 것 같고 괜한 회사 걱정만 많아지고요…. 처음에는 그저 내가 몸에 병이 있어 그런가 보다 했는데 살면 살수록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아요.”

‘성격’이 분명한 집은 사람에게도 영향 미쳐


▎세련된 침실이 아늑해 보인다. 저마다의 캐릭터를 가진 무수한 공간 중에 나와 꼭 맞는 성격의 공간은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그런 공간은 언제나 기대 이상의 선물을 준다.
그의 얘기를 듣자 마음속에 짚이는 것이 있었다. 이 집을 둘러싼 ‘북악산(北岳山)’은 이름에서 드러나듯 단단한 화강암 바위로 이루어져 있다. 동양철학의 오행으로 말하자면 ‘금기(金氣)’가 유난히 강한 곳이다. 실제로 그의 집은 금기(金氣)의 공간적 특징을 모두 갖고 있었다.

집 안에 들어서자마자 느껴지는 서늘한 냉기. 그리고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 정원수들. 금기가 강한 곳에서는 나무가 제대로 크지 못한다. 지반의 밀도가 워낙 높기에 밑에서 잡아당기는 에너지 역시 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더 강한 중력으로 끌어당기는 셈이다.

사람은 이런 곳에서 본능적으로 강한 반발력을 일으키게 돼 있다. 물에 빠졌을 때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것처럼 무의식적으로 치고 올라가는 힘을 내는 것이다. 그것이 현실에서 발현되면 강한 의지와 열정 혹은 영감의 원천이 된다.

때문에 동서양을 막론하고 바위산 근처는 언제나 수행과 기도의 공간이었다. 깎아지른 바위산 위에 자리 잡은 스페인의 ‘몬세라트(Montserrat)’ 수도원, 공간 전체가 바위로 이뤄진 미국의 ‘세도나(Sedona)’ 같은 곳이 대표적이다. 세도나는 지금도 전 세계의 수행자와 예술가들이 모여드는 곳으로 유명하다.

금기가 강한 이 집 역시, 만약 그가 한창 회사를 키우던 시절에 들어왔다면 에너지와 영감을 증폭시키는데 도움을 줬을 것이다. 그러나 몸과 마음이 허약해진 상태라면 나를 지속적으로 자극시키는 에너지가 버겁고 힘겨울 수밖에 없다.

“집이 사람을 닮기도 하지만 사람이 집을 닮아가는 수도 있지요. 이 집처럼 자신만의 ‘성격’이 분명한 집이 특히 그렇습니다. 이런 집은 그곳에 사는 사람까지 자신의 에너지와 비슷하게 만들어버릴 정도로 힘이 강하죠. 그런데 하필 이 집은 사람으로 비유하자면 용맹정진밖에 모르는 엄격한 스승이었던 겁니다.”

몸이 안 좋아 누워 있는데 스님이 죽비로 때리며 ‘당장 일어나라’고 일갈하는 장면을 상상해보라. 하루이틀도 아니고 스님과 함께 사는 집 주인은 얼마나 부담스럽고 불안할까. 실제 몸은 무거운데 자꾸 회사 걱정을 하게 된다는 박 회장의 말은 이 공간이 가진 성격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었다. 단순한 기분 탓이 아니었던 것이다.

살다 보면 우리는 무수히 많은 캐릭터의 사람을 만난다. 저마다 성격은 다르지만 오랫동안 어울리다 보면 그럭저럭 맞춰가며 살아가기 마련이다. 그렇게 서로에게 익숙해진 이들은 평생의 배필이나 친구가 되면서 은은하게 닮아가기도 한다.

반면 성격이 너무 강하고 주관이 뚜렷해 도무지 적응이 안되는 이들도 분명히 있다. 끼가 흐르다 못해 자유분방한 전위 예술가, 뭔가에 빠지면 그것 밖에 모르는 ‘덕후’, 성격이 불 같은 다혈질 등은 코드가 맞는 소수의 사람만 감당할 수 있다.

공간도 마찬가지다. 오랫동안 사람과 어울려 살았던 전통적인 집터들은 대부분 무난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아무리 거칠고 뾰족한 공간이라도 긴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이 스쳐 지나가면 둥글둥글 다듬어지기 마련이다. 때문에 들어가는 사람에 따라 공간의 에너지가 바뀌는 ‘공간가소성’이 가능해진다. 내가 사는 집이 나를 닮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드물게 ‘센 캐릭터’를 가진 공간들도 분명히 존재한다. 경험적으로 봤을 때 전체의 3할 정도 되는 이런 집들은 한 사람이 들어가서 바꾸기가 쉽지 않다. 오히려 그 공간의 에너지가 내게 영향을 미치면서 충돌을 일으키는 일이 더 많다. 물론 그 공간을 감당할 수 있는 소수의 사람도 분명히 있고 그럴 때 생각지도 못한 시너지 효과가 나는 경우도 꽤 있다. 마치 나를 알아주는 연인을 만났을 때 잠재력이 폭발하는 것처럼.

우울증 있는 사람일수록 강물을 보면 안 된다


▎어느 논밭 옆으로 한 줄기 강물이 흘러가고 있다. 우울증을 앓는 사람들은 물가의 집을 피하는 게 좋다. 끊임없이 흘러가는 물결이 내 안의 정체된 마음을 더 선명하게 확인시켜 주기 때문이다.
‘센 캐릭터’의 공간은 성북동 집처럼 태생적인 원인에서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 모든 공간은 지구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공간의 DNA가 있다.

골짜기가 패여 바람이 드나드는 곳은 ‘바람의 DNA’가 심어져 있고, 비가 올 때마다 물이 잘 고이는 곳은 ‘고이는 DNA’가 있다. 우물이 생기는 곳은 물이 합쳐지는 ‘합수(合水)의 DNA’가, 지반 밑으로 강한 바위가 있는 공간은 ‘돌의 DNA’가 깃들게 된다.

이런 자연의 DNA는 넓고 강한 힘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고유의 파동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파동이 현실에서 발현됐을 때 ‘공간의 성격’이 되는 것이다. 과거에는 자연이 많이 훼손되지 않았기 때문에 주변 환경간의 관계를 분석해 공간의 성격을 알아내는 게 가능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전통 풍수도 바로 그런 과정을 통해 탄생했다. 그러나 산과 언덕 대신 고층 빌딩이 들어서고 우물을 막아버린 현대에 와서는 이마저도 알기가 쉽지 않게 됐다.

그러나 땅 위의 산을 깎았다고 해서 산을 만든 DNA마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물길이 사라져도 물을 흐르게 했던 본질적인 부분은 여전히 땅 속 깊은 곳에 뿌리박혀 공간 고유의 성격을 만든다. 때문에 우리는 공간을 볼 때,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판단해서는 안 된다.

사람을 겉모습만 보면 안 되듯이 공간도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박 회장도 그 부분을 놓치고 말았다. 산이 가깝고 공기가 좋다는 것은 단지 겉모습에 불과했다. 많은 사람이 몸이 아프거나 힘들면 도시를 떠나 산과 바다로 떠난다.

그러나 우리가 ‘자연’이라 뭉뚱그려 부르는 곳도 저마다 고유한 성격과 캐릭터를 갖고 있다. 만약 내가 가진 병이나 체질 등에 맞는 적합한 곳을 선택하지 않는다면 자칫 두통이 심한데 비뇨기과에 가는 식의 우를 범할 수도 있다.

동양의학의 바이블로 여겨지는 황제내경 ‘이법방의론’은 땅의 기운인 지세(地勢)에 따라 사람이 걸리는 병도 달라진다고 말한다. 양기가 생성되는 동방에서는 염증성 피부 질환인 옹창에 걸리기 쉽고 양기가 왕성한 남방에서는 관절염이나 근육통이, 기운이 수렴되는 서방에서는 내장질환과 같은 속병이 발병하기 쉽다는 것이다.

지세는 그 터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특이한 기후와 토양, 음식을 만드는데 그런 요소들이 모여 질병을 유발한다는 얘기다. 이런 관점은 현재에도 유효하다. 습도가 높고 더운 중국의 남방에 해당하는 내륙지역의 호수나 댐 근처에서는 관절염 환자가 많다.

또한 동방에 해당하는 국내의 해안지역인 강진은 피부암 발병률이 다른 지역에 비해 16배나 높다는 통계가 있다. 치유를 위해, 혹은 노후를 위해 전원생활을 준비한다면 눈에 보이는 환경뿐만이 아니라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공간의 성격까지 신중하게 살펴야 한다.

나는 우울증으로 힘들어하는 이에게는 물가는 피하는 게 좋다고 조언하곤 한다. 마음이 우울할 때 강물을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우울한 기분이 더 커진다. 끊임없이 흘러가는 물결이 내 안의 정체된 마음을 더 선명하게 확인시켜 주기 때문이다. 마치 가난한 이가 부자를 보면 박탈감을 느끼는 이치와 같다.

반대로 불안증세가 심한 사람은 조용한 숲 속 오두막이 더 힘들 수 있다. 마음이 쉬지 못하고 요동치고 있는데 너무나 정적인 곳에 들어오면 오히려 불안감이 더 선명해진다. 한가롭게 여기서 이래도 되나 싶은 마음이 불안을 더 자극시키는 경우가 적지 않다.

자연 속에서의 힐링이 무조건 능사가 아니라 나와 맞는 공간을 찾는 게 더 중요하다는 얘기다.

서울의 화기(火氣)와 뜨겁게 공명했던 광화문 촛불시위


▎제주도처럼 음기가 강한 땅에는 남성의 성기모양을 한 하루방이 자연스레 만들어진다. 강한 에너지를 누르고 중화시켜 균형을 맞추려는 비보풍수적 처방이다.
그날, 나는 고민하는 박 회장에게 가능하다면 요양할 거처를 옮기는 게 좋겠다고 조언했다. 이왕이면 양지바르면서도 강이 있어 기운이 머물지 않고 흐르는 양평이 괜찮을 것 같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본래 기질이 활동적이고 에너지가 넘치는 이들은 아파서 쉴 때도 어느 정도 자신의 성격을 닮은 공간으로 가는 것이 좋다. 또한 유유히 흐르는 강을 보면 두고 온 회사에 대한 번뇌도 같이 흘려보내 한결 마음이 편해질 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있었다.

그렇게 그날의 대화는 순조롭게 마무리 됐다. 그리고 일주일 정도 지났을까. 박 회장으로부터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뭔가 고민이 생긴 듯한 목소리였다.

“선생님을 만나고 양평으로 옮기는 쪽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주변의 아시는 분이 이사까지 갈 필요 없다고 자꾸 말리는 거예요. 터가 워낙 기운이 세니 석물을 몇 개 세워서 누르면 된다고 하는데…. 믿어야 될지 어째야 될지 몰라 전화 드렸습니다.”

그의 얘기를 듣자마자 어떤 상황인지 충분히 이해가 됐다. 아마 풍수를 잘 아는 누군가가 화기(火氣)를 상징하는 봉황이나 말, 뱀 모양의 석상을 가져다 놓으라고 훈수를 뒀던 모양이었다. ‘화기로 금기를 다스린다’는 오행의 전형적인 공식을 따른 셈이다.

“그분의 얘기도 틀린 건 아니지만 솔직히 말씀드리면 마음의 위안을 얻는 것 이상의 효과는 기대하기 힘들 겁니다. 성형수술을 해도 사람의 겉모습이 바뀔 뿐 성격은 그대로인 것처럼 기운이 강한 공간은 외형을 바꿔도 타고난 기질을 바꾸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지요. 비보풍수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풍수에서 말하는 비보(裨補)란 ‘더하고 채운다’는 뜻으로 바람이 강한 해안가에 방풍림을 만들어 바람을 막고 건조한 집 마당에 인공 못을 조성해 습기를 돌게 하는 처방 등을 말한다.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거북이나 두꺼비 모양의 바위나 조각은 홍수나 가뭄에 대한 비보처방이라 할 수 있다. 장승이나 솟대 돌탑 역시 마을의 부족한 형세나 기운을 메꾸기 위한 풍수적 조치였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풍수적 식견이 없을지라도 사람의 본능 속에는 부족한 곳을 채우고 틀린 것을 바로잡으려는 타고난 균형감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외나무다리 위에 서면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자연스레 양팔을 벌려 균형을 잡듯이 무의식적으로 기울어진 것에 반응하고 행동하는 감응센서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제주도처럼 음기가 강한 땅에는 남성의 성기모양을 한 하루방이 자연스레 만들어지고 서울의 진관동처럼 양기가 강한 땅에는 비구니 절이 자리를 잡으며 음양의 조화를 맞춰간다. 때문에 성북동 집처럼 캐릭터 강한 집과 사람이 부딪쳤을 때도 사람들은 자연스레 비보풍수적 처방을 떠올린다. 강한 에너지를 누르고 중화시켜 균형을 맞추려는 것이다.

그러나 공간에 대한 인간 편의적 사고를 지양하는 나의 관점은 조금 다르다. 일단 실효성도 문제이지만 조금 더 큰 그림을 보지 못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음기가 강하거나 지기(地氣)가 약한 곳은 분명 그런 모습으로 있어야 하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미시적으로는 부족하거나 넘쳐도 자연이라는 거시적 시각에서 보면 틀림없이 전체의 균형을 이루고 있을 것이다. 사람을 위한 풍수가 시각적 안정감과 안락함을 줄 수도 있겠지만 자칫 그 공간 특유의 힘을 발현하지 못하게 할 수도 있다.

이런 이유로 나는 개성을 없애는 것보다 공간이 가진 고유의 성격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 때 오히려 새로운 힘이 생길 수 있다고 믿는 편이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비보풍수 중에 광화문의 해태상과 남대문의 현판이 있다. 관악산의 화기가 강해 광화문 앞에 물을 다스리는 ‘해태’상을 세우고 남대문의 숭례문 현판을 세로로 걸어둔 것이다.

숭례문(崇禮門)의 예(禮)는 오행상 화(火)에 해당되고 이를 세로로 세워두면 큰 산을 의미하는 숭(崇)자에 불이 붙는 모양이 되어 글자의 화기로 불을 막는다는 ‘이열치열’의 의미가 된다. 한마디로 맞불을 놓은 것이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궁은 여러 차례 화마의 잿더미가 됐고 결국 숭례문마저 불길에 휩싸였다.

이 공간은 권력의 눈이 억지로 맞춰놓은 균형 속에 있을 때는 그리 빛나지 않았다. 그러나 시청앞 광장에서 붉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산불처럼 출렁이고 부정에 맞선 촛불이 들불처럼 일어났을 때는 전에 없던 놀라운 에너지를 보여줬다.

서울의 화기는 억지로 눌러야 할 힘이 아니라 함께 불처럼 타오르며 뜨겁게 달아올라야 하는 힘이었다. 어쩌면 서울이라는 공간은 그럴 수 있는 시대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와 성격이 맞지 않는 공간을 알아보는 법


▎우리가 잘 아는 비보풍수 중엔 광화문 해태상도 있다. 관악산의 화기가 강해 광화문 앞에 물을 다스리는 해태상을 세운 것이다.
박 회장의 성북동 집도 마찬가지다. 타이밍만 제대로 맞았다면 강하고 열정적인 기질의 공간은 그의 든든한 기반이 됐을 것이다.

그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 그의 집에서 멀지 않은 ‘석은 변종하 기념미술관’이다. 현대미술의 거장인 변종하 화백이 살았던 이 집은 공간의 성격을 그대로 인정하고 살려낸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원래 터의 자연미를 살리고자 했던 집주인의 요청에 따라 지어진 집은 언뜻 보면 거대한 돌탑처럼 보인다. 어른 머리만한 크기의 자연석으로 담을 올리고 집의 외벽은 돌을 붙여 만들었다. 정원은 북악산 바위를 그대로 노출시켰고 바위틈 사이로 흐르던 물길 역시 살려놓았다. 그 바위들 사이로 돌계단과 화백의 수집품인 석물들이 조화롭게 자리를 잡고 있다.

2층에 있는 그의 화실 또한 거대한 석굴을 연상시킨다. 층고가 6m에 이르는 실내는 바위의 서늘한 기운으로 가득 채워져 있고 공간에는 그 기운을 상쇄시키려는 어떤 시도도 보이지 않는다.

바위에 은거한다는 뜻의 석은(石隱)이라는 호처럼 화백은 이 터의 원형과 함께 동락(同樂)하며 자신의 영감과 재능을 증폭시켜 나갔다. 이곳에 거주하기 시작한 80년대부터 현실 비판적이었던 그의 작품이 시원(始原)을 추구하는 서정적 화풍으로 변모할 수 있었던 것도 동락의 결과물이었을 것이다.

개성과 독창성이 중시되는 현대 사회에서는 두루두루 무난한 사람보다 에너지가 한쪽으로 집중된 사람이 두각을 나타내는 경우가 적지 않다. 적당히 균형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있는 힘을 더 강하게 증폭시켜 새로운 결과물을 만들어 냈을 때 사람들이 더 열광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공간을 보는 시각도 이제는 좀 더 다양하고 풍부해질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강한 공간, 나와 맞지 않는 공간은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 가장 쉽게는 내 몸의 반응을 보면 알 수 있다.

박 회장처럼 몸과 마음이 노력해도 쉬지 못하고 불편해지는 경우나 내 몸이 평소의 기질과 다르게 움직인다면 의심해볼 만하다.

예를 들면 평소에는 집을 꾸미는데 큰 관심이 없었는데 이사한 뒤부터 자꾸 집을 꾸미거나 손을 대는 경우가 있다. 잠자리나 앉는 자리가 불편해 침대나 소파의 위치를 자주 바꾸고 필요이상의 기능성 제품을 사들인다. 패브릭이나 소품의 교환주기가 눈에 띄게 빨라지기도 한다.

그렇게 집을 들쑤시면서 정작 집에 머무는 시간은 점점 짧아지고 밖으로 겉돌게 된다면 이는 내가 집과 부딪치고 있다는 뜻이다. 반대로 평소에 그런 스타일이 아닌데 이사 온 집에서 자꾸 가구나 집기를 버리는 사람도 있다.

뭔가 그 공간에 두면 이상하게 좁아 보이고 답답한 마음이 든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요즘 비우는 인테리어가 유행이기 때문만은 아닐지 모른다. 강한 성격의 집과 균형을 맞추기 위해 외나무다리에서 본능적으로 팔을 벌리듯 내 몸의 센서가 무의식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런 노력도 열심히 하다 보면 어느 정도 균형이 맞춰질지 모른다. 그러나 공간의 성격에 맞추기 위해 본래의 내 기질과 안 맞는 피곤한 일을 계속 할 필요가 있을까. 가뜩이나 사람 때문에 스트레스가 적지 않은데 사는 집에서까지 계속 양팔 벌리기를 하며 살아가는 건 자신에게 너무 가혹한 일인지도 모른다.

공간 고유의 성격이 나와 도저히 맞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면 인정하고 과감히 떠날 줄도 알아야 한다. 박 회장도 몇 달 후 성북동 집을 정리하고 양평으로 떠났다. 많은 재벌 1세대들이 노년이 되어 성북동을 떠나는 것 역시 교통이나 투자가치의 탓도 있겠지만 공간과의 관계 속에서 스스로 물러날 때를 직감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평생 배필 만나듯, 나와 맞는 공간 찾아라


▎너른 마당에 옹기종기 모인 집들이 평화로워 보인다. 공간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놓았을 때 공간도 사람에게 말을 걸어온다. 퇴화돼버린 ‘공간 감각’이 조금씩 생기는 것이다. / 사진·아이클릭아트
나이가 들수록 나와 잘 맞는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실감할 때가 있다. 굳이 긴 얘기를 하지 않아도 곁에 있으면 몸과 마음이 저절로 편안해지는 휴식 같은 사람, 몇 마디 주고받을 때마다 예리한 통찰력으로 생각지도 못한 영감을 주는 스승, 또 같이 있는 것만으로 즐거워지고 오랜만에 크게 웃게 해주는 고마운 친구. 굳이 여러 명일 필요도 없이 단 한두 명 만이라도 곁에 있다면 삶은 놀라울 정도로 풍요로워진다.

공간도 마찬가지다. 저마다의 캐릭터를 가진 무수한 공간 중에 나와 꼭 맞는 성격의 공간은 반드시 있다. 그리고 그런 공간은 언제나 기대 이상의 선물을 준다. 마치 순애보를 간직한 연인처럼 늘 같은 자리에서 보이지 않게 나를 다독이고 다시 일어날 힘을 준다.

중요한 것은 마치 평생의 배필을 만나듯, 나에게도 그런 공간이 있음을 알고 찾으려 노력해보는 것이다. 물론, 이 대목에서 많은 이가 이런 질문을 한다. “그런 집은 비싸지 않나요?”

그러나 나랑 잘 맞는 친구가 꼭 부자일 필요는 없듯이 나와 잘 맞는 공간이 반드시 고급주택가에 있을 거라는 생각은 편견이다. 그리고 반드시 그 공간이 집일 필요도 없다. 많은 예술가는 저마다 자신만의 ‘아지트’를 갖고 있다. 곡을 쓸 때마다 바닷가 어촌마을을 찾는 작곡가도 있고, 특정한 카페에 가야만 글이 써진다는 작가들도 있다. 새벽마다 한강변을 뛰면서 아이디어를 떠올린다는 이도 봤다.

그렇게 공간에 대한 가능성을 활짝 열어놓았을 때 공간도 나에게 말을 걸어오기 시작한다. 오랫동안 도시에 살면서 퇴화해버렸던 ‘공간 감각’이 조금씩 생기는 것이다. 집과 땅의 기운을 예민하게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좋아하고 싫어하는 공간은 분명히 있다. 산이 좋은지 바다가 좋은지, 뜨거운 발리의 바닷가에서 휴양하는 게 좋은지, 노르웨이의 거대한 협곡을 감상하는 게 더 좋은지 정도는 답할 수 있다.

그것은 평범한 나에게도 나와 맞는 공간, 나를 닮은 공간을 찾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증거다. 그렇게 작은 것부터 공간에 대한 감각을 일깨우다 보면 반드시 기다려왔던 공간과 만나게 될 것이다. 마치 운명처럼.

신기율 - 과학·종교·철학 등 다양한 학문을 자유롭게 횡단하며 젊은 시절을 보냈다. 대학 졸업 후 약 15년간 철학자로서의 남다른 혜안으로 세상과 사람의 깊은 본질을 마주한 결과 국내 최초로 ‘직관’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현재 직관과 마음치유 그리고 차(茶)를 결합한 기율다원(己律茶院)을 운영하고 있다. 저서로는 2015년 베스트셀러 <직관하면 보인다>가 있다.

201706호 (2017.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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