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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현장] 타이거즈 부활시킨 김기태-조계현의 ‘同行’ 

“다들 두려워하고 부러워하는 KIA 만들겠다” 

글 정영재 스포츠 선임기자 jerry@joongang.co.kr / 사진 장정필 프리랜서 w2880@daum.net
호남 야구의 두 축 광주일고·군산상고 출신으로 삼성에서 한솥밥… 막강 투타 앞세워 NC·LG 등 강팀들과 선두 경쟁, ‘V 11’에도 눈독

▎프로야구 KIA 김기태 감독과 조계현 수석코치가 월간중앙과 인터뷰를 마친 뒤 손을 맞잡고 있다. 인하대 87학번인 김 감독이 연세대 84학번인 조 코치보다 후배이지만 LG 시절부터 감독과 수석코치로 호흡을 맞추고 있다.
지난 2월 15일 일본 오키나와(沖繩)에서 전지훈련 중이던 프로야구 KIA 타이거즈와 일본 명문구단 주니치 드래건스의 연습경기를 취재했다.

경기가 끝난 뒤 KIA 김기태(48) 감독, 조계현(53) 수석코치와 함께 저녁식사를 했다. 김 감독은 자신보다 다섯 살 많은 조계현 코치에게 사석에선 “형님”이라고 했다. 김 감독은 인하대 87학번, 조 코치는 연세대 84학번이다. 두 사람은 LG 트윈스 시절(2012~14년)부터 감독-수석코치로 끈끈한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김 감독은 보스기질이 강하지만 선배들을 깍듯이 모신다. 조 코치도 남다른 승부근성으로 현역 시절 ‘싸움닭’이라는 별명을 얻었지만 사석에서는 다정다감하고 농담도 잘한다. 쌍꺼풀 진 눈으로 생글생글 웃으면 귀엽다는 느낌도 든다. 야구인들은 두 사람을 ‘영혼이 통하는 콤비’라고 부른다.

조 코치는 군산상고-연세대를 거쳐 해태 타이거즈에서 선수생활을 했다. 김 감독은 광주일고-인하대를 나와 전북 연고인 쌍방울에서 뛰었다. 둘은 1999년 삼성에서 선수로 만나 한솥밥을 먹기도 했다.

조 코치가 해태 시절 쌍방울과 만나 김 감독에게 홈런 맞은 얘기를 꺼냈다. “시즌 초반이었는데 페이스가 좋았어요. 그날도 6회까지 2점 차로 이기고 있어서 선동열 선배한테 마운드 넘기면 1승 챙기겠구나 싶었어요. 그런데 김기태한테 스리런 홈런을 맞은 겁니다. 코너로 잘 던진 공이었는데 기가 막히게 받아 치더라고요. 그날 경기 지고, 그 후유증이 시즌 끝날 때까지 이어졌어요.”

그러자 김 감독이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따 형님, 그때 딱 한 번 친 거 가지고 그러시네. 통산타율을 봐요. 2할도 못 쳤을 것이요. 조계현, 정말 대단한 투수였죠.”

꿈나무들이 야구로 몰리는 빛고을


▎2008년 베이징올림픽 때 김기태 감독은 타격코치, 조계현 수석코치를 맡아 김경문 감독을 보좌했다. 왼쪽부터 조 코치, 김 감독, 김 코치.
오키나와에서 그날 이후 3개월이 흘렀다. 2017년 KBO리그가 개막했고, KIA는 시즌 초반부터 질주해 선두권에서 내려오지 않고 있다. 타이거즈 팬들은 2009년 이후 8년 만의 우승을 내심 기대하고 있다.

근성 있고 용맹한 ‘호남 야구’의 부활을 조심스레 점치기도 한다. 호남 야구의 두 축은 광주일고와 군산상고다. 김 감독은 광주일고, 조 코치는 군산상고를 나왔다. 두 사람과 주변 인물들을 취재해 호남 야구의 흐름을 읽어보기로 했다.

광주일고는 선동열-이종범과 ‘메이저리그 3인방’ 김병현-최희섭-서재응으로 이어지는 스타의 산실이다. 미국 메이저리그 관계자들도 놀랄 정도로 광주일고는 끊임없이 최고 선수를 배출하고 있다.

그 배경은 뭘까. 1992년부터 98년까지, 그리고 2002년부터 2010년까지 광주일고를 이끌었던 허세환 인하대 감독을 지난 5월 9일 만났다.

‘무등산 폭격기’ 선동열의 동기인 허세환은 공·수·주를 갖춘 유격수로 광주일고를 1980년 대통령배 우승으로 이끌고 자신은 개인상 5관왕을 달성했다. 하지만 인하대에 진학하면서 큰 부상을 당했고, 결국 프로로 가지 않고 실업팀에서 선수 경력을 마쳤다. 그리고는 30대 중반의 젊은 나이에 광주일고를 맡았다.

“호남 야구 하면 광주·군산이 대표적인 곳이죠. 호남 야구의 시발점은 군산상고로 봐야 하고, 광주일고는 클럽활동식으로 유지되다가 1973년부터 본격적으로 엘리트 야구를 시작했어요. 아마 72년 군산상고가 황금사자기 고교야구 결승에서 부산고를 5대 4로 누르고 우승하면서 ‘역전의 명수’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은 게 자극제가 되지 않았나 싶어요.”

허 감독의 말에 따르면 광주·전남 사람들이 특별히 야구를 좋아한 것 같다고 한다. 아이들한테 “축구 할래? 야구 할래?” 하면 대부분 야구를 하겠다고 손을 든다는 것이다. 논두렁에서 새끼를 뭉쳐서 축구공을 만들어 차는 게 아니라 비닐을 뭉쳐 야구공을 만들고 그걸 던지고 치면서 놀았다는 얘기다.

“광주는 야구만 바라보는 사람이 많아요. 자원이 축구·농구 등으로 흩어지지 않죠. 운동신경 있는 애들이 야구로 모이니까 좋은 인재들이 계속 나오는 겁니다. 선배들이 세계적인 스타가 되는 모습을 보고 ‘저렇게 되고 싶다’는 강력한 동기도 갖게 되죠. 명문인 광주일고를 목표로 야구를 시작한 애들도 있고요. 전통 있는 광주상고(현 광주동성고)와 진흥고도 라이벌 의식을 갖고 서로 경쟁하면서 발전하게 된 겁니다.”

광주에는 초등학교 7개, 중학교 4개, 고등학교 3개 야구팀이 있다. 탄탄한 저변을 바탕으로 피라미드 형태로 구축된 시스템을 따라 올라가면서 자연스럽게 우수한 선수들이 남게 된다. 광주에서 조금 부족하다 싶은 선수들이 서울로 올라가서 주전으로 뛰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앞에서 끄는 金, 뒤에서 미는 趙


▎김기태 감독은 2012년 LG 감독으로 발탁되자 조계현 코치를 수석코치로 불렀다. 두 사람은 2013년, 11년 만에 팀을 플레이오프에 진출시키며 LG의 암흑기 탈출을 알렸다. 글러브를 벗은 지 오래됐지만 오른손투수 출신답게 조 코치는 가방을 왼 어깨에 메고 있다.
광주일고 교정 안에는 1929년 광주고등보통학교(현 광주일고) 학생들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광주학생독립운동을 기념하는 기념탑과 기념관이 있다. 기념탑은 1954년 제막했다. 1990년대 초반에 학교를 시 외곽으로 옮기려고 했지만 동문들이 “광주학생의거의 성지를 옮기면 안 된다”고 반대해 이전 계획이 백지화됐다.

허 감독은 “전국대회 참가를 위해 상경하기 전에 선수단이 꼭 기념탑에 참배해 선배들의 얼을 받고 정신력을 다졌어요. 서울에 와서는 저녁마다 모여 교가를 부르면서 모교의 명예를 지키자고 다짐했죠”라며 광주일고만의 특별한 의식을 소개했다.

이같이 탄탄한 저변과 남다른 야구 사랑에 불을 붙인 게 1982년 프로야구 탄생이다. 당시 전두환 정권이 정치적인 목적으로 프로야구를 출범시켰다고 하지만 어쨌든 지역 연고를 기반으로 6개 팀이 만들어졌다.

허 감독은 “해태 타이거즈는 선수층은 얇았지만 개개인의 능력과 근성은 남달랐지요. 호남 사람들의 애틋하고 특별한 야구 사랑과 선수들의 근성이 모아져 강한 해태가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겠죠”라고 말했다.

해태는 1983년부터 97년까지 15년 동안 무려 9차례 한국시리즈를 제패할 정도로 절대 왕조를 구축했다. 그러자 한국야구위원회(KBO)는 ‘전력 평준화’를 이유로 지역 연고 지명 선수를 3명, 2명, 1명으로 계속 줄여나갔다.

우수한 선수들이 다른 팀으로 빠져나가고, 메이저리그로 진출했다. 여기에 모기업인 해태가 어려움을 겪으면서 2001년 해태 타이거즈는 KIA 타이거즈로 바뀌었다. 2009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하긴 했지만 절대 왕조의 명성에는 이미 균열이 간 상태였다.

허 감독은 “최근의 침체됐던 분위기를 살리는 데 김기태 감독이 적임자라고 봅니다. 자기주장이 강하지만 의리 있고 선배 후배들에게 모두 인정받고 존경받는 지도자입니다. 호남 야구의 역사와 전통을 체화한 김 감독이 와서 선수들을 융화시키고 KIA만의 색깔을 찾아나가고 있어요. 여기에 안치홍·김선빈 같은 선수들이 전역해서 합류하고, 호남 출신 강타자 최형우(전주고 졸업)가 이적해 와서 타선에 힘이 실렸습니다. 거기다가 조계현 수석코치가 돕고 있잖아요. 조 코치도 승부사 기질이 있고 지는 걸 싫어합니다. 둘이 합이 잘 맞는 것 같고, 2년간 바닥을 다진 뒤 올해 저력을 드러내는 것 같아요”라고 최근 KIA의 상승세를 분석했다.

5월 11일 광주기아챔피언스필드를 찾았다. kt 위즈와의 경기가 열리는 날이었다. 김 감독에게 오키나와에서 만났던 얘기를 하면서 ‘당시에 이 정도 잘나갈 거라 생각은 못했다’고 운을 뗐다.

그는 “하루하루가 조심스럽죠. 아직은 조금 일찍 먼저 나갔을 뿐이니까요. 코치들과 선수들이 한마음으로 서로 위로하고 공 하나하나에 집중한 게 좋은 성적으로 이어진 것 같습니다”라고 원론적인 대답을 했다.

철벽 마운드지뢰밭 타선=호랑이군단


▎1. 91년 쌍방울에서 데뷔한 김기태 감독은 98년 12월 삼성으로 트레이드됐다. 재정난에 시달리던 쌍방울은 김기태·조규제·박경완 등의 현금 트레이드를 통해 구단 운영자금을 마련했다. / 2. 89년 해태에서 데뷔한 조계현은 98년 삼성으로 이적했다. 두둑한 배짱이 돋보였던 조계현은 현역 시절 ‘싸움닭’이란 별명을 얻었다.
KIA는 왼손 에이스 양현종(광주 동성고 출신)이 시즌 개막 후 7연승(5월 17일 현재)을 달리며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다. 4번 타자 최형우도 고비 때마다 한방을 날리며 타선에 무게감을 실어주고 있다.

김 감독은 “현종이는 지난해 워낙 승운이 없었는데 올해는 템포가 빨라지고 볼넷을 줄이면서 페이스가 올라가고 있어요. 타자들도 작년에 미안했던지 잘 쳐주고 있고요. 형우는 워낙 성실한데다 큰 경기에 강해 승부처에서 분위기를 끌어올 수 있는 역할을 하고 있어요. 이런 선수와 함께 하고 있는 걸 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KIA는 시즌 초반 발 빠르게 트레이드로 영입한 이명기(우익수), 김민식(포수)의 활약이 더해지면서 전력이 더 탄탄해졌다. 일방적인 승리는 많지 않지만 1, 2점차 접전에서 승기를 틀어쥐는 경우가 많아졌다.

호남 야구의 색깔이 나타나고 있는지 묻자 김 감독은 “제가 부임하면서 ‘다시 무서운 호랑이가 돼보자’고 했는데 작년, 재작년은 조금 무섭지 않았던 것 같아요. 올해는 구단에서 좋은 선수도 뽑아주고, 그동안 다져온 것도 있으니 진짜 무서운 호랑이가 돼야죠”라고 답했다.

KIA는 올 시즌을 앞두고 유니폼 디자인을 싹 바꿨다. 밝고 세련된 이미지를 풍겨 반응이 좋다. ‘해태 시절 빨간색 상의에 검은색 하의 유니폼만 보면 상대팀이 지레 겁을 먹었다. 당시와 비교하면 좀 가벼워 보이지 않나’고 물었다.

김 감독은 “당시는 유니폼 디자인 때문이 아니라 해태가 워낙 강해서 상대가 겁을 먹은 겁니다. 디자인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유니폼을 입고 얼마나 야구를 잘하느냐가 중요하죠”라며 “야구만 잘하면 유니폼은 멋있게 보이는 거죠. 저도 이 유니폼을 입고 있는 게 영광이고, 선수들에게도 KIA 유니폼을 입고 어떤 경기를 하는 게 팬들에게 보답하는 길인지 잘 생각하라고 말합니다”고 답했다.

호남 야구의 또 다른 축은 군산상고다. 군산상고를 떠올리면 이 사람을 빼놓을 수 없다. ‘기록의 사나이’ 김성한(59)이다. 그는 ‘오리궁둥이’라고 불리는 독특한 타격자세로 3할을 밥 먹듯이 쳤고, 투수로 마운드에도 올랐다.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 기록한 ‘3할-10승’은 한국 야구에서 다시 나오기 힘든 진기록이다. 일본을 뒤흔들고 있는 투타 겸업 괴물 오타니(니혼햄)의 30여 년 전 버전이 바로 김성한이다.

5월 11일 광주기아챔피언스필드 중계석에서 그를 만났다. 현재는 광주 지역방송인 CMB에서 해설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전남 나주에서 중식당도 운영하고 있다.

김 위원은 “군산 야구는 KBO 총재 대행을 했던 이용일 씨를 빼놓고 얘기할 수 없어요. 군산 출신으로 육군 야구팀에서 뛰었던 이용일 선생이 군산에 경성고무라는 기업체를 운영하면서 초등학교 4개와 중학교 야구팀을 만들었어요. 그 선수들을 고스란히 흡수해 군산상고 야구팀이 출범했고, 다른 팀에서 뛰던 김봉연·김준환 등이 군산상고로 모이면서 팀이 강해졌죠”라고 말했다.

8년 만에 한국시리즈 정상 노크


▎지난해 8월 말 광주에서 열린 SK전에 앞서 국민의례를 하고 있는 김기태 감독과 조계현 수석코치. 포스트시즌 진출에 사활을 걸었던 김 감독은 선수들에게 ‘삭발 메시지’를 전했다.
72년 황금사자기 고교야구 결승전은 군산 야구, 나아가 호남 야구에 큰 획을 그은 사건이었다. 부산고에 9회말까지 1-4로 끌려가 패색이 짙었던 군산상고는 9회말에 김일권·김준환 등의 활약에 힘입어 4점을 내 대역전승을 거뒀다. ‘역전의 명수 군산상고’ 라는 영예로운 별칭이 이때 생겼고 군산이 뒤집어졌다. 선수들은 전주에서 이리(현재 익산)를 거쳐 군산까지 카퍼레이드를 했다.

김 위원은 “지금도 군산에는 초등학교 3개, 중학교 2개, 그리고 군산상고 야구팀이 있어요. 도시 공동화 현상으로 힘들지만 꾸준히 좋은 선수를 배출하고 있지요. 야구는 전체 군산 시민들의 자존심이 됐습니다. 군산상고 야구부를 동문들이 지원하고 있지만 일반 시민들도 꾸준히 후원하고 있어요. 시민들의 열정이 군산 야구를 키우는 원동력이죠”라고 말했다.

82년 해태가 창단될 당시는 김봉연·김준환·김일권·김성한 등 군산상고 출신들이 주축이었다. 초창기에 광주일고 출신은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럼에도 해태에는 파벌의식이 없었다. 김 위원은 “당시 해태 타이거즈 사장을 비롯한 경영진을 광주일고 출신이 장악하고 있었지만 군산 출신을 차별하지 않았어요. 그 후로 선동열·이종범(이상 광주일고), 이순철(광주상고) 등 광주 출신 스타들이 들어오면서 해태 야구가 전성기를 구가하게 됐습니다”고 술회했다.

프로야구가 출범한 지 35년이 지났다. 그동안 각 팀의 지역색은 많이 옅어졌다. KIA에는 호남 출신보다 타 지역 출신이 더 많고, 호남 출신 선수들도 팔도로 흩어져 각 팀의 주축을 이루고 있다.

허세환 감독은 “호남 사람들은 야구를 통해 어느 정도 한을 풀었다고 생각해 이제는 야구를 즐기는 쪽으로 가고 있어요. ‘뭐니뭐니해도 야구는 우리가 최고’라는 자부심이 여유를 갖게 만든 것 같기도 합니다. 올해 들어서는 KIA가 초반부터 치고 나가고 호남 출신 최형우 선수가 와서 잘해주니까 더 신나게 즐기는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김기태 감독도 비슷한 맥락의 말을 했다. “이젠 KIA 야구가 멋있다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상대를 배려하고, 거친 플레이를 할 때도 있겠지만 매너는 깨끗하게 가야죠. 9회 투아웃에 주자도 없는데 투수 바꾸면서 시간 끌고 이런 거 하지 말고. 저는 선수들에게 ‘질 때 지더라도 깔끔하게, 하지만 끝까지 최선을 다하라’고 말합니다.”

해태에서 KIA로 바뀌어도, 유니폼 디자인이 달라져도, 호랑이는 호랑이다. KIA 타이거즈가 용맹한 호랑이 기운으로 다시 정상에 우뚝 설 것인지 지켜봐야 할 시즌이다.

- 글 정영재 스포츠 선임기자 jerry@joongang.co.kr / 사진 장정필 프리랜서 w2880@daum.net

201706호 (2017.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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