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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의 시대, 시인에게 사랑을 묻다] 고은-사랑을 유지할 수 있는 세상을 향하여 

“지금은 정의와 진실에 눈 부릅떠야 할 시간 ” 

한경심 자유기고가 icecreamhan@empal.com
과거·현재·미래가 없음을 천명한 무시무종(無始無終)의 세계에 노니는 시인… 스스로 ‘시대에 갇히는 시를 떠난다’고 선언한 고은의 사랑 추구

▎고은 시인의 키워드는 ‘방랑’이다. 매우 사실적인 이야기를 하다가 또 시어처럼 훌쩍 상상의 공간으로 날아가는 언어를 구사한다.
고은 시인(83)의 집에 들어서니 뜰에 가지런히 서 있는 산수유는 가지마다 연노란 꽃망울을 매달고 있고, 어디선가 나타난 귀여운 검둥이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아는 체 멍멍 짖는다. 그리고 시인이 ‘어머니 자궁 속처럼 푸근하다’고 한 서재는 온통 책 천지다. 장광설의 시인 고은의 서재답다. 원고가 놓인 책상에 앉은 그의 목소리는 놀랍게도 부드럽고 힘이 하나도 안 들어가 있다. 1970년대와 1980년대, 민주화항쟁으로 뜨겁던 시절 그의 힘찬 시 낭송은 단박에 듣는 이의 귀와 눈과 가슴을 사로잡아 뛰게 했었는데.

“여기는 서재니까요. 서재에는 서재의 음성이 있고, 광장에는 광장의 음향이 있는 거지요. 누구나 목소리가 바뀌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빠로서 목소리, 그리고 남편·친구나 ‘새로운 사람’ 앞에서 내는 목소리는 다 다르지요.”

새소리도 한 목소리가 아니라고, 모든 살아 있는 것의 소리는 하나가 아니라며 그는 곧 이어 사자·생쥐·박쥐·갈매기, 수천 킬로미터를 횡단하는 철새의 소리, 그리고 달팽이처럼, 또 풀섶에서 나는 있는 듯 없는 듯한 소리까지, 세상의 온갖 소리를 열거한다. 듣다 보면 시 구절 같기도 하고, 수많은 중생과 하늘의 신들 이름을 낱낱이 불러내는 ‘화엄경’의 한 구절 같기도 하다.

“어떤 소리든 다 축복이지요. 침묵도…. 인류는 듣는 기관이 덜 진화됐어요. 시각은 …시각도 요즘은 어릴 때부터 안경을 쓰잖아요? 바라보았자 건너편 아파트만 겨우 보이니 시각이 퇴행해 안경을 쓰고… 시각의 타락입니다.”

말하는 사이사이 잠깐 멈춤, 숨쉬기. 나이 탓으로 숨이 차는 것인지 아니면 수행하는 선승들이 그렇듯 단어와 단어 사이 휴지(休止)를 두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강연이나 대담에서도 그는 수줍은 듯 조곤조곤 말하다 어느 순간 무슨 말이 그의 가슴에 불을 댕긴 것인지 벌떡 일어나 화산처럼 큰소리로 외치는 사람이니 두고볼 일이다.

“우리 조상은 멀리까지 보았어요. 무엇이 움직이는지 탐지하기 위해, 방랑하기 위해.”

매우 사실적인 이야기를 하다 또 시어처럼 훌쩍 상상의 공간으로 가 닿는 말. 아, 방랑! 방랑은 그의 전문 분야였지.

“2500년 전 석가모니는 우주에 직접 가보지 않고도 우주를 파악했지요. 우리도 그럴 수 있는 자질이 다 들어있어요.”

‘리얼리즘’과 ‘비(非)리얼리즘’을 아우르는 시


▎1984년 무렵의 고은 시인. 전태일의 죽음과 1980년의 내란음모죄를 거치면서 4001편의 시가 담긴 시집 <만인보>의 씨앗이 뿌려졌다.
그의 시는 넓고 장구하기로 유명하다. 시간으로는 과거 현재 미래를 아우르고, 공간으로는 이 행성 너머까지 날아간다. 그러나 광복 후 비로소 우리말과 글을 되찾은 우등생 고은태(고은의 본명)가 이태 뒤 군산중학교에 들어가 처음 접한 근대시 이육사의 ‘광야’를 읽다 ‘닭 우는 소리’도 없이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다시 千古의 뒤에/ 白馬 타고 오는 초인’을 만나는 순간, ‘시는 무서운 것이로구나!’라며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그가 감수성 예민한 섬약한 소년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보면 까마득한 옛날인 천고의 시간이 미래에 다시 온다는 데에서 시간의 순차성이 허물어지고, 산맥도 범하지 못한 광야의 무한성 속을 말 달리는 초인의 모습에서 ‘시공간의 초월’을 직감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자신이 말하는 ‘비리얼리즘’의 큰 축을 이루는 초월성은 이렇게 어린 시절에 조짐을 보였다. 더 거슬러 올라가 생애 최초의 기억이라는 병약한 고모의 등에 업혀 엄마를 기다리다 바라본 저녁 놀, 붉게 물든 하늘에 울어버린 것도 지상의 시간과 공간을 잊게 하는 노을의 위력에 매혹되고 압도당했기 때문이 아닐까.

물론 ‘리얼리즘’의 싹도 일찌감치 보였다. 광복을 맞던 해 열네 살로 초등학교 4학년이던(열 살에 입학하여 월반을 했다.) 그는 친일파 교장을 내쫓으려고 동맥휴학을 주동했고, 그 뒤로도 반탁과 단독정부 반대를 내걸고 동맹휴학을 ‘즐기며’ 벽보를 붙이곤 했으니 말이다.

지금 6할 정도 작업했다는 ‘긴-, 긴-’ 서사시(아마도 거대한 서사시 ‘춘향’이 아닐까?)도 시공간을 넘나드는 것 같다.

“‘백두산’보다 더 긴 시가 될 겁니다. 어떤 시대를 노래했느냐고요? 모르겠네요. 호주 원주민에게 전해 내려오는 ‘꿈의 시간(dream time, 몽환시夢幻時)’처럼 과거·현재·미래가 하나인 지점, 어느 시대라는 게 없는 그런 시간이 내 문학에 들어오기도 합니다.”

그리고 혼잣말처럼 “아직 오지 않은 시대인지, 지나간 시대인지, 지금 여기인지…”라고 중얼거린다. 자주 말을 멈추는 사이 그는 방금까지 작업하던 자신의 시 속으로, 알 수 없는 그 시공간으로 떠나버린 것 같기도 하다. 다행히도 그는 곧 돌아와 말을 이어주었다.

“임의의 경계가 완전 무효인, 발 디딜 데 없는 공간의 무모성, 잡을 수 없는, 쥘 수 없는 그런 것들이 엉겨서 죽은 뒤의 어떤 이가 쓰는 것 같은 미래의 시간일지도 모르고 300년 전도 좋고 3만 년 전도 좋고. 시에는 고대나 현대가 본질적으로 구분될 수가 없지요. 내가 지금 ‘길가메쉬’를 읽고 있다면, 그것은 5000년 전 메소포타미아의 시가 아니라 오늘의 시인 것이지요. 동시에 저의 시도 5000년 전의 시로 소급될 수 있지요. 시에서 ‘간다’라는 표현은 ‘갔다’이기도 하고 ‘갈 것이다’ 이기도 합니다.”

시공간이 본래 없다는 과학적 사실을 굳이 들지 않아도 그는 과거·현재·미래가 없음을 천명한 불교의 무시무종(無始無終)의 세계에 익숙하게 노닐고 있는 듯하다. 그는 스스로 ‘시대에 갇히는 시를 떠난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자신의 시에서 시대는 부차적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하는 고은은 시대의 전사였다.

“우리 모두 화살이 되어/ 온몸으로 가자/…(중략)… 저 캄캄한 대낮의 과녁이 달려온다/ 이윽고 과녁이 피 뿜으며 쓰러질 때/ 단 한 번/ 우리 모두 화살로 피를 흘리자// 돌아오지 말자// 오 화살 정의의 병사여 영령이여”(‘화살’ 중에서)

이런 시가 그의 떨리는 목소리를 타고 울려 퍼질 때 사람들 역시 전율했다. 요컨대 당대 나왔던 수많은 참여시 가운데 그의 시만큼 공감의 환호와 환영을 받은 시가 있었던가. 그는 1970년대부터 시대의 최전선에서 목이 터져라 외친 시인이었으니 그가 말하는 ‘꿈의 시간’ 또는 시작도 끝도 없는 시간은 ‘이 나라의 시간’이라는 시공간을 만나 지상의 세상을 노래해야 했다.

죽음의 병에 사로잡히다


▎책과 필기구, 메모용지가 놓인 시인의 책상. 광활한 고은 시 세계가 탄생하는 산실이다.
“내가 살아온 시대의 시련이 저를 가만히 내버려두지는 않았지요. 누가 태풍 속에서 태풍을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저는 1930년대 식민지에서 태어나 만주사변에 따른 중일전쟁,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의 전시체제에서 전쟁도구, 식민지 예비 구성원으로 자라났습니다.”

그리고 1950년, 고향 군산(당시 전북 옥구)에 불어닥친 전쟁의 광기는 시인과 화가를 꿈꾸던 10대 소년 ‘고은태’(고은의 본명)에게 치명상을 입혔다. 김일성 사진이 걸리는 인공 치하 석 달 사이 인민재판에서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수복이 되자 이번에는 우익의 탄압이 시작되었다.

“그 가운데 개인적인 보복까지 더해졌습니다. 한 마을에서 형님동생 하던 사이, 심지어 아버지나 형제도 서로 죽이는 걸 보게 된 것이지요.”

전쟁이 터지기 전 그는 시인이나 화가가 되기를 꿈꾸던 소년이었다. 미술반에서 늦도록 그림을 그리곤 하던 그는 어느 날 귀가 길에서 누군가 떨구고 간 ‘한하운 시초’를 줍게 된다. 마치 그를 기다린 듯 어둑한 길에서 빛나 보였던 그 시집을 밤새도록 읽고 찢어지는 가슴으로 결심을 한다. 그도 문둥병에 걸려 이런 시를 써보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휩쓴 세상에서 꿈은 부질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대신 죽음이 눈앞에 있었다. 그가 목도한 숱한 죽음 가운데 그의 친한 동무 김봉태의 죽음도 있다.

“두메산골에서 루소의 <에밀>을 읽는 아비를 둔 부잣집 아이였죠. 국민학교 때 저와 1, 2등을 다투던 사이였어요. 그의 집 논 하나가 우리 집의 하나밖에 없는 논과 맞닿아 있었어요. ‘너 논, 우리 논 같이 있다’고 좋아했었지요.”

땅의 연결로 ‘우리가 연결돼 있음’을 기뻐하는 것이 농촌 소년의 영혼이고 우정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지식인이 그렇듯 사회주의 사상을 가진 봉태의 아버지와 그 형제들은 수복 직후 우익의 학살을 피하지 못한다. 그 아버지는 동네 치안대에 붙들려 어느 집 헛간에 갇혀 있다 치욕감에 못 이겨 깊은 우물에 몸을 던졌고, 봉태는 ‘빨갱이 집안’ 아들로 산으로 끌려갔다.

“사람들과 함께 끌려가며 저를 보고 ‘살려달라’고 하는데, 제가 무슨 힘으로 살리겠습니까. 눈물만 흘릴 뿐이었지요.”

훗날 <만인보>에 실린 ‘봉태’라는 제목의 시에는 그날 밤의 광경이 여실히 그려진다.

“(전략) 수복 직후 아버지 죽은 뒤/ 동네사람에게 끌려가/ 할미산 굴 속에서 죽었지/ 유엔군 흑인 총 맞아 죽었지/ 그 달밤에/ 그 캄캄한 굴 속에서 죽었지/ 봉태야/ 나는 너 하나 살려 낼 수 없었다/ 네 열일곱 살은 내 열일곱 살이었다”

“저에게는 죽음의 주기율이 작용했습니다”


▎고은 시인은 시 낭송과 강연 등을 통해 독자들과 만난다. 민주화 항쟁으로 뜨겁던 시절 그의 시 낭송은 단박에 듣는 이의 마음을 뛰게 했다.
고은의 집안 역시 우익과 좌익이 섞여 있었다. 고흐의 화집을 처음 보게 된 외가의 외삼촌과 당숙은 좌익이었고, 그의 아버지는 마을의 반장이었다. 그와 아버지도 죽어야 할 형편인데 마을 인민위원장을 지낸 당숙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했다. 하지만 형세가 바뀌었을 때 당숙의 집안 식구들은 죽음을 면치 못했다.

“죽은 시신을 아버지와 함께 수습했습니다. 우익 좌익의 시신 모두 다. 살아남은 자가 수습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맨 위에 처녀의 시신이 나옵니다. 능욕당한 후 마지막으로 죽게 되니까요. 그리고 어린애들, 부인들, 남자들 순이죠.”

엊그제까지 얼굴을 보던 사람의 시신을 거두고 나면 그 어떤 동물의 시체보다 독한 사람 송장 냄새가 몸에 배어 씻어도 씻어도 사라지지가 않았다. 아니 시간이 지나 냄새는 사라졌겠지만 죽음이 그에게 들러붙었다.

“죽음을 등에 지고 다니고, 그게 내재화되어 허무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의 허무주의는 불교나 노자, 니체의 허무주의 사상 같은 것이 아니라 현장의 현실이었지요.”

살아남은 자는 비겁한 자가 되고, 죄의식이 원죄의식이 되어버렸다. 죽음의 기억이 본병(本病)이 되어 도사리고 있다가 주기적으로 도지면 자살 시도로 나타났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때마다 “귀신이 돕는지 살아났다.” 1·4후퇴로 아버지와 함께 선유도에 피난했다가 돌아온 그는 군산의 미 항만사령부 운수과의 검수원이 되었는데, 마음이 약한 사람이 그렇듯이 시절 그는 화장도 하고 다녔고 자살도 두 번 시도한다.

“약국 하던 친구 집에 머물던 중 약방에서 몰래 가져온 극약으로 쓰러졌는데, 평소 방에 얼씬도 하지 않던 친구 어머니가 이상하게 여겨 방문을 열고 발견해서 살아났지요.”

또 한번은 근무하던 부두에서 물에 빠져 죽는 시도였다.

“자정이 지나면 부대 직원들이 야식을 먹으러 밖으로 나가고 헌병만 지프차를 타고 부두를 왔다갔다할 뿐입니다. 그때를 기다려 부두와 배 사이의 바닷물로 뛰어들었죠. 정박한 배에도 터번은 돌아가는데, 터번에 빨려 들어가기를 노린 거죠. 마침 그때 석탄을 싣고 온 일본 배가 있었는데 하필 이등항해사가 처자가 그리워 해치 밖으로 나와 있었답니다.”

일본 항해사 하시다 고징은 부두에서 누군가 걸어와 빠지는 걸 목격하고 즉시 밧줄을 던졌다.

“물에 빠져 의식적으로 물을 먹었지요. 두 번 먹고 의식을 잃었는데 본능적으로 허우적대다 밧줄에 걸렸던가 봐요. 그가 내려와 건져냈지요.”

하시다는 자신의 선실로 고은을 데려가 누이고 의무관을 깨워 물을 토하게 했다. 그리고 깨어난 그에게 메테를링크의 ‘파랑새’ 이야기까지 하며 “부디 인생을 실패로 끝내지 말고 성공하라”고 격려했다. 감동을 받은 그는 한동안 죽음 생각이 없어졌는데, 정작 그 배는 일본으로 돌아가는 길에 시코구와 혼슈 사이의 내해에서 침몰해 하시다 고징은 죽었다고 한다.

“일본 신문과 인터뷰할 때면 이 이야기를 꼭 합니다. 식민시대 전시교육을 받고 일본을 민족의 원수로 알고 살지만 일본인이 저를 살렸다고요.”

그의 죽음의 병은 1951년 출가하고 잠시 휴지기를 맞는다. 그 사이 등단하고 1962년 환속하자 다시 자살병은 도졌다.

“여자의 주기에 달이 영향을 주듯이 저에게는 죽음의 주기율이 작용했습니다. 한 번 자살 시도 후 다시 시도할 때 금방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한참 다져져야 해요.”

1963년 제주도 가는 배에서 자살을 시도하다 술에 너무 취해 미수에 그쳤고, “못 죽어 입원하는 신세가 되지 않기 위해” 1970년 겨울 정릉 계곡에 들어가 술과 치사량의 수면제를 먹었지만 예비군 특훈 중에 발견되어 극적으로 구조되었다.

전태일의 죽음은 ‘우리의 시작이었다’


▎고은 시인이 키우는 애견 검둥이. 시인은 “유기견의 행복한 삶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성숙한 공동체에 다다를 수 있다”고 말했다.
독주로도 치유되지 않던 불면증과 죽음에 이끌리는 병은 1970년 11월 전태일의 죽음으로 사라졌다. 마치 기한이 다한 것처럼. 무교동 술집에 취해 잠들었다 깨어나 바닥에 떨어진 신문에서 전태일의 죽음을 읽게 된 그는 자신의 죽음과 다른 죽음을 알게 된 것이다.

“전태일의 죽음은 나뿐만 아니라 당시 대학생과 지식인에게 시대의 진실을 만나게 해준 겁니다.”

“그의 죽음은/ 너의 시작이었다/ 나의 시작이었다/ 하나 둘 모여들어/ 희뿌옇게/ 아침바다의 시작이었다// 그는 한밤중에도 우리들의 시작이었다”(<만인보> 중 ‘전태일’)

이후 ‘허무주의자’라는 딱지를 떼고 현실에 뛰어든 그는 우리가 아는 고은이 되어갔다. 20년간 치열하게 진행된 그의 실천만큼 줄기차게 써 내려간 시와 소설, 평전, 번역 등은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1980년 내란음모, 계엄법 위반, 계엄교사 등의 죄목으로 육군교도소 특별감방에 ‘처넣어졌을’ 때, 그 어두운 감방에서 장차 25년 세월에 걸쳐 완성될 <만인보>의 씨앗이 처음 뿌려졌다.

“특별감방 7호방은 김재규가 사형되기 전까지 머물던, 창도 없는 관 같은 작은 감방이었습니다. 죽음 직전의 극한 환경에서 현재가 박탈당한 공백에 과거가 들어와 현재를 대행한 것이지요.”

그동안 ‘광장의 시’를 써야 했던 그는 감방에서 새로운 예술적 충동을 느꼈다. 그가 진저리 치며 떠나왔던 고향의 옛 얼굴들이 떠오르고, 비록 종이와 펜은 없었지만 만약 나갈 수 있다면 그 얼굴들을 살려보고 싶었다. 이생에서 못 살리면 다음 생에서라도 써보고 싶었다. 그가 만난 사람, 못 만난 사람, 과거의 역사적인 인물까지 무려 5600명이 등장하는 4001편의 시가 담긴 <만인보>는 서른 권으로 마무리됐지만, 사실 그의 마음속에는 100권으로도 모자랄 또 다른 ‘만인보’가 들어 있다고 한다. 최근 최순실 국정농단에 관심인물로 떠오른 고영태가 만인보에 등장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는데, 정작 시인 자신은 기억을 하지 못했다.

“저도 그 사실을 들어서 알게 됐어요. 광주항쟁 때 죽은 사람을 취재해서 쓴 것 가운데 들어갔던 모양입니다. 엄마와 아이 이야기를 많이 썼는데, 그의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 혼자 리어카 끌며 어렵게 자식을 키웠고, 그 아들이 부자가 하는 운동이라는 펜싱을 해서 아시안게임에서 은메달까지 탔으니 특이했던 거지요.”

박근혜 사태의 무한 책임은 국민 몫


▎서울 청계천 버들다리 위의 전태일 열사 동상. 전태일의 분신은 고은 시인의 삶과 시세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일대 사건으로 기록된다.
그에게 사랑을 물으니 “지금 정의와 진실이 필요한데 무슨 사랑이냐?”는 반문이 돌아온다.

“세월호의 진실, 박근혜의 거짓말을 파헤쳐야 하는데 사랑이라는 커다란 보자기를 씌우면 뭐가 됩니까? 귀 활짝 열고, 눈 부릅뜨고 폭포처럼 큰 소리를 내야지요. 그런 관심 없이 어떻게 내 진실과 정의가 허용되겠습니까?”

그러다 바깥으로 눈길을 주더니 “그렇다고 꽃에 등 돌리는 것은 아니”라고 덧붙인다.

“꽃 이야기 하지 않는다고 꽃이 핀 것을 모릅니까? 사랑이 없어서 사랑을 얘기하지 않는 게 아니지요. … 그 많은 유기견, 개 한 마리 제대로 못 거두고 쓰레기도 제대로 버리지 못하는 세상에서 어떻게 사랑을 얘기합니까? 사랑이라고 몸짓 몇 번 하다 끝나버리는 게 무슨 사랑입니까?”

‘가족이 해체되고 내일도 없는’ 젊은이들이 사랑도 결혼도 포기하고 혼자 먹고 마시고 자는 이 시대야말로 사랑이 필요한 것을 알지만 사랑이 그냥 와주는 것은 아니라는 걸 그는 안다.

“사랑을 유지할 수 있는 조건은 우리가 만들어야 합니다. 정치경제 모든 데서 사랑과 인간, 생태의 자연스러움이 살아나야 해요.”

예전에는 못살아도 이웃 굴뚝에 연기가 나지 않으면 우리집 굴뚝에도 연기 나지 않는 자연스러운 연대감이 있었지만 그런 사랑은 사라지고, 친구도 떨어뜨려야 할 경쟁자나 적이 되어버린, 가치가 실종된 이 시대에 절망한다고 했다.

“박근혜를 보십시오. 잘못했다고 반성할 수 있는 기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반성하고 읍소하고 성실히 조사받았다면 사람들은 그에게 연민도 가졌을 겁니다. 탄핵도 기각됐을 것이고요. 그러나 한마디 변명도 없이 쇳덩어리같이 굴어 몰락을 자초했습니다. 더 이상 망할 수 없을 정도로, 연민조차 다 발라먹고 깎아먹고 퍼부을 건 저주밖에 안 남았지 않습니까? 그런 무자격자 어린애를 포장하여 수장으로 세웠으니, 결국 무한책임은 국민이 져야지요.”

그의 목소리는 내내 차분했지만 그의 말은 칼날처럼 예리하다는 것을 알겠다.

“그럼에도 실망과 상처를 딛고 ‘촛불명예혁명’으로 가장 수치스러운 정권 ‘꼭두각시’를 내쫓은 데서 커다란 희망을 찾습니다.”

고은에게는 불가사의한 점이 둘 있다. 바로 장수와 다작이다. 젊은 시절 귀에 청산가리를 넣어 고막이 녹은 것부터 시작하여 투옥 당시 청각을 잃어 수술을 받았고, 전쟁 때 시작한 담배와 폭음은 긴 세월 지속됐었다. 연 사흘 폭음하고 무덤가에 자는가 하면, 하루 두 갑을 태울 정도로 담배를 피웠던 적이 있다. 승려 시절의 단식과 상기병(上氣病)은 그렇다 쳐도 감옥에서도 단식하고, 한때 행상과 걸식 등 아무데서 자고 몸을 굴렸는데 그는 올해 우리 나이로 여든다섯! 더구나 아직도 원고를 손으로 쓰고 있다.

“나중에 힘 빠지면 컴퓨터로 쓸지 모르겠지만 아직은 펜글씨가 좋습니다. 제 다친 속과 독한 약의 흔적은 술로 치유했지요. 술을 마실 때도 무엇을 할 때도 언제나 처음처럼 합니다.”

그러니 중독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또 어느 자리에선가, 음식을 씹을 때나 무얼 하든 사랑과 치유의 믿음으로 하면 음식도 사랑을 되돌려준다고 했다. 준 것보다 더 많은 사랑과 치유를. 특히 그는 책이 주는 사랑의 선물을 듬뿍 누리고 있다.

펼치면 화엄, 모으면 선이 되는 불이(不二)의 세계


그가 아무리 건강하다 해도, 시집 78권 소설 15권, 산문집 34권, 여행서 5권에 평론이나 연구서, 전기, 동화와 동시집까지 그의 작품 편수를 이루 헤아리기 힘들다. 그의 말마따나 괴테나 위고와 겨룰 만하다. 숱한 방황과 그 많은 활동 속에서 쏟아낸 작품. 해외에서 번역되고 상을 받으며 만년에 누린 영광 역시 우리나라 시인 중 으뜸이다. 그는 비록 ‘내 지긋지긋한/ 말의 과잉과/ 욕망의 과잉을 때려부수고 가리’(‘알타이에 가리’ 중)라고 했지만 그 알타이에서 며칠씩 불리는 긴 서사시를 듣고 후계자임을 자처하며 지금 긴 서사시를 쓰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동시에 다른 작품도 쓰느라 서재의 두 책상을 오가며 쓰고 있다. 고려의 이규보처럼 술을 사랑하고 시의 귀신이 붙어 안 쓰곤 못 배기는 건지, 아니면 두두물물(頭頭物物)에서 시를 발견하여 상즉상입(相卽相入)하는 화엄의 조화를 부리는 것인지 모르겠다.

“한 줄이나 몇 줄에 불과한 선시도 있어요. 언어와 문자를 부정하는 직관의 시지요. 그러나 언어는 침묵의 쓰레기가 아니고, 침묵은 언어의 묘지가 아니에요. 화엄과 선은 이질(異質)의 동질(同質)이죠.”

펼치면 화엄이요, 모으면 선이 되는 불이(不二)의 세계다.

인터뷰가 끝나고 검둥이와 함께 바래다주러 마당으로 나온 그는 인사를 마치고 나무와 풀 사이로 들어갔다.

“친구와 헤어졌다 멀어져가는 그의 잔기침 소리를 등져/ 나는 허구들을 두고 숲으로 갔다 11월이다/ 숲은 어떤 모독도 알지 못한다/ (중략) 나는 하고많은 미련이 좋았다/ 마을로 간 친구 쪽을 한두 번 더 돌아다본 뒤/ 벌써 어둑어둑한 숲 안으로 들어섰다/ 아무런 명예도 없이/ 길은 누구의 길인지 몰랐다”(‘숲의 노래’ 중)

한경심 - 이화여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동아일보> 출판국에서 기자로 15년간 일했다. 이후 자유기고가로 <월간중앙> <이코노미스트> <신동아> <여성동아> 등에 문화와 관련한 글을 썼다. 저서로 전통공예 장인들을 소개한 <우리는 어떻게 옷을 짓고 밥을 짓고 집을 짓는가>, 한식의 철학을 담은 우< 리는 왜 쌈 싸먹고 비벼먹고 말아 먹는가>등이 있고 번역서로 <글렌 굴드, 피아니즘의 황홀경>, 김병연의 한시를 소개한 (공역)이 있다.

201705호 (2017.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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