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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의 시대, 시인에게 사랑을 묻다] 박형준 - 산책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노래하다 

“나의 날개는 은밀한 세계에 바쳐졌다” 

글 한경심 자유기고가 icecreamhan@empal.com / 사진 김상선 기자 kim.sangseon@joongang.co.kr
누군가를 연민하기 위해서는 자신부터 연민할 줄 알아야…서울 변두리 풍경과 고향의 기억 어우러지는 속 깊은 시심(詩心) 보여줘

박형준 시인은 사람은 자기가 사는 환경에 봉사할 의무가 있다고 믿는다. 나만의 꿈과 이상을 가졌다 해도 사는 곳에 대한 성찰 없이는 허상이 될 것이란 신념이다. 그래서 그는 산동네 사람들, 홍수의 흔적, 지저분한 시장통, 새가 죽고 개가 차에 치여 목련꽃 아래 죽어가는 도시의 삶에 주목한다. 구해낼 능력이 없어도, 그는 여전히 착한 마음으로 그 현장과 그곳에 거하는 생명을 바라본다.


▎박형준 시인은 다사로운 추억으로 채색된 쓸쓸한 음조의 시를 쓴다. 그 시에는 사람 사는 세상을 굳게 껴안고 보듬는 도덕적 감수성이 충만하다.
박형준은 걷기를 좋아한다. 어린 시절부터 돌아다니길 좋아했던 그는 아마 랭보처럼 세상 끝까지 가보고 싶었겠지만, 먼 나라를 떠돌며 끝내 한쪽 다리를 잃은 랭보와 달리 그의 걷기는 신작로 끝까지 가보거나 철길을 따라 바닷가까지 가보는 짧은 여정이었다. 비록 한나절을 넘지 않는 시간이지만 알 수 없는 슬픔에 사로잡힌 소년이 걸어가 맞닥뜨린 곳은 어쩌면 세상의 끝이었을는지도 모르겠다.

집에서 출발하여 집으로 돌아오는 여정. 방랑이라고 하기엔 짧고, 긴 산책이라고 해야 맞을 것 같다. 길을 걸으며 과거를 추억하고 미래를 떠올리는 긴 산책. 그 자신 “관찰자, 좀 멋있게 말하자면 산책자의 시선이 내성화된 것 같다”고 고백했듯이 그는 유목민이라기보다는 산책자에 가깝다. 애초에 그에겐 유목민의 유전자는 없었다. 농촌 출신답게 유난히 정착과 안정에 대한 염원이 강했다. 그러나 초등학교 5학년 때 고향을 떠난 뒤로 긴 세월 정착하지 못하고 도시의 변두리를 떠돌아야 했다. 그래서 그의 시는 정착을 원하는 떠돌이의 노래처럼 들린다. 떠도는 길에서 만난 사물과 풍광을 묘사한 그의 시는 과거의 기억이 다사로운 추억으로 채색될 때조차도 어딘가 쓸쓸한 음조를 띤다.

‘서울서 출세해 논을 사야지’ 결심하고 인천으로 올라와

김제평야 한 자락이 닿는 정읍군 정우면에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 시절 꿈이 농장 주인이었다.

“동네 윗산이 정토산이었는데 정토사라는 오래된 절이 있었습니다. 거기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보면 전부 논이었어요. 끝이 안 보일 정도로 펼쳐진 호남 들녘, 그 넓은 평야에 우리 논은 없었지요. 밭은 있었지만. 서울 올라가 출세해서 논을 사 동네사람들에게 나눠줘야겠다고 결심했지요.”

그곳에서는 한 칸짜리 초가인 그의 집도 눈에 들어왔다. 부모님과 여덟 형제, 치매에 걸린 할머니까지 열한 명이 단칸방에 팔을 꼭 붙이고 자야 했던 오막살이였다. 정토산에서 내려온 개울이 집 옆으로 흘러가는 소리가 들리는 집이었다.

‘직녀가 오작교에 빨래를 널다가 그만 손에서 미끄러져 내린 것이 별똥별일 게야 어둠 속에 눈부시게 떠서 찰랑거리는 빛들 지붕에 와서 잠 못 들게 하는 게야// 이엉으로 새어 들어오는 별을 보며/ 노망든 할머니는 강물에 놓쳐버린 빨래 한자락을 쫓아 언덕을 달리고/ 애타게 희게희게 별이/ 밥그릇 같은 앞산 너머로 사라지면/ 벽에 칠해놓은 변자국 냄새가 잠을 깨우던/ 오막살이 집 한 채’(‘새벽’의 일부)

벽에 똥칠하는 할머니는 어린 시절 그의 다정한 동무이자 2남6녀의 막내인 그가 돌보아야 할 어린애였고, 더러는 할머니로 돌아오기도 했다. 새마을운동에 떠밀려 기와집으로 이사 간 어느 날 할머니와 그는 콩나물을 시루 채 가마솥에 삶아 서로 한 가닥씩 입에 넣어주며 놀았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이었던 것 같은데, 기와집도 할머니도 모두 환하게만 기억됩니다.”

그러나 그의 기억은 흔들리며 엇나가고 있다. 기와집으로 이사 간 것이 초등학교 2, 3학년 무렵이라고 했다. 본래 인간의 기억력이란 믿을 만한 것이 못 되지만 그는 자주 흐릿한 기억과, 기억이 채색된 추억 사이를 구별해내지 못한다. 그러나 철모르는 손자와 할머니로 아름답게 채색된 추억은 시에서는 진실하게 빛나고 있다.

‘냇물에 발을 씻으며/ 메밀꽃밭 저녁해에 붉게 피어난다// 어린 나만 놔두고 할머니는/ 메밀꽃밭을 이고 저승으로 가시었으나/ 낮아지는 저녁해를 타고/ 다 커서도 혼자 놀고 있는 나를 찾아/ 저렇게 냇물에 발을 씻으신다’(‘해가 질 때’ 일부)

할머니는 죽어 동구 밖 그의 집 밭 가장자리 할아버지 곁에 잠들었다.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아버지는 새벽이면 일어나 마당을 깨끗이 쓸고 묵묵하게 일하는 농부였고, 대신 어머니가 가장 노릇을 했다. 고추를 수확하면 마을사람들과 함께 고춧가루를 내어 서해 섬으로 팔러 다녔고, 늘 고생과 기도를 달고 살았다. 어린 그는 누나와 부모님이 일하는 밭에 나가 작은 배가 열리는 아그배나무 아래 앉아 있거나 신작로를 걷기도 했다. 철교에서 자주 사람이 죽는 사고가 났지만 철로 침목에서 향내 나는 껌 종이를 줍고, 기차가 지나가는 소리를 들으며 이상향처럼 서울을 꿈꾸던 그는 초등학교 2학년에 겨우 글을 깨치고 5학년 땐 상장이 수두룩한 우등생이 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이상향을 향해 떠나게 된다.

“넷째 누나와 형이 인천에서 일하고 있어서 인천으로 오게 됐지요. 겨울방학 전 전학을 가게 됐는데, 담임선생님과 반 아이들이 모두 교문까지 나와 저를 배웅해주었습니다. 히말라야 시다가 늘어선 길을 걸어 나오는데 고독했어요. 출세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나 도회지에 올라오자마자 그 결심은 한낱 물거품이 되었다. 웅장한 건물이 서있는 서울역에서 인천행 전철을 타고 가는 동안 그는 서울에서 하향(下向)한다는 착각에 빠지며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예감은 현실이 되었다.

“막연하게 꿈꾸던 도시와는 다른, 시골만도 못한 곳이었어요. 문화충격이었죠. 시골에서도 우리가 가난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도회지는 그 가난을 현실로 보여주는 것 같았습니다. 꿈을 펼치는 것은 꿈도 못 꿀 일이라는 걸 알게 됐지요.”

초등학교 5학년에 만난 도시 변두리의 충격


▎시인에게 떠도는 도시의 삶과 고향에 대한 추억은 중첩되어 있다. 둘은 데칼코마니처럼 서로 채색하며 새로운 그림을 만들어낸다.
미싱공장 다니는 누나와 대우중공업에 다니는 형과 함께 살던 송현동 산동네는 수문통시장 가까운 곳으로 바닷물을 메운 곳이어서 큰비만 내리면 하수구가 역류해 바닷물을 퍼내야 했다. 등굣길에 지나는 담벼락엔 물이 차올랐던 자국이 남아있었고, ‘똥바다’로 불리는 바다 위에 판자 마루바닥을 깔고 세운 수문통시장이 있었다. 갯벌에 처박힌 돛이 부러진 배가 보이는 둑방도 있었다. 대우중공업 담벼락을 따라 철길을 걸어가면 부둣가가 나왔다. 그런 동네에서 누나와 형이 돌아오길 기다리며 아버지가 해주시던 밀가루떡을 몇십 개씩 빚었다.

“시골에서도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았지요. 시골에서는 쓸쓸하긴 해도 생각은 평온했는데, 도시는 고독하고 불안하지요. 그 고독을 받아줄 존재가 없으면 미아가 될 것 같은 불안을 안고 있는 거지요.”

실제로 그는 산동네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집을 찾지 못해 헤맸던 적이 있다.

“또 한 번은 어머니가 올라오셔서 다 같이 외식하고 돌아오다 제가 무엇엔가 토라져 밤거리를 돌아다녔는데, 부동산 간판이 너무 많은 거리가 나왔어요. 저는 부동산이라는 의미를 몰라 ‘동산(東山)이 없다’는 뜻으로 이해하고 이곳은 동산이 없다는 사실을 이렇게 계속 보여주는가 싶었지요.”

동산이 없는 그곳에서 그의 꿈은 동산과 같다고, 그래서 꿈을 펼치는 것은 자꾸 멀어져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20대 누나와 형은 어린 동생을 위해 50권짜리 동화집 전집을 사주고 한두 달 과외까지 시켜주었다. 한 달에 한 번씩 어머니가 올라오셨고, 방학 때는 고향으로 내려가 친구들의 부러움을 받기도 했다.

“저의 유년과 고향은 언제나 시골 정우로 남아 있지만, 이미 고향에서 저는 손님이었습니다. 정착하러 올라온 도회지에서 봉변을 당하고 고향에서는 손님이 되었고요.”

‘어머니는 겨울밤이면 무덤 같은/ 밥그릇을 아랫목에 파묻어두었습니다/ 내 어린 발은 따뜻한 무덤을 향해/ 자꾸만 뻗어나가곤 하였습니다…(중략)… 나는 밥그릇이 내 차지가 될 줄 알았습니다/ 쫓길 데가 없어진 밥그릇은/ 그런데 어느 날부터 보이지 않았습니다// 봄이 되자 밥그릇에 대한 미련이 사라졌습니다…(중략)… 나는 이미 어른이 되어 있었습니다/ 밥그릇의 따뜻한 온기보다 더한 여름이 내 앞에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쉽게 시골 소년에게 열리지 않았습니다/ 사나운 잠에 떠밀리다/ 문지방에 어른거리는 것이 있어/ 방문을 여니,/ 해당화꽃 그늘이었습니다 …(중략)… 저녁 바람에 달그락거리는 밥그릇처럼/ 해당화꽃 그늘 속에서 계신/ 어머니는 허리가 굽은 노인이 되어 있었습니다…(중략)… 사라졌던 밥그릇은 어머니의 가슴속에 묻혀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늙은 어머니의 손에서 떠난 그 작은 무덤들이/ 붉디붉은 꽃으로/ 환하게 피어나고 있었던 것입니다’(‘해당화’ 중 일부)

철없던 시골소년은 한순간에 어른이 되었고, 성격마저 바뀌었다. 어려서는 어머니도 말릴 수 없는 고집을 피울 줄 알았고, 우등생에 반장으로 급우들을 이끄는 리더였지만 이제는 위축되고 꺾여서 사소한 것도 몇 번씩 헤아려보고 되돌아보는 사람이 되었다. 다만 어린 시절의 고집은 문득문득 나타나 그가 아주 비겁해지지 않게 자존심을 지켜주었다.

“나이 들어갈수록 아버지를 닮아가는 것 같습니다. 소극적이고 나서길 꺼려하며 판단하려 하지 않는…. 세상 무서운 걸 아니까요.”

그러나 아버지가 많이 배우고 부자였다면 과연 소극적이었을까? 그렇진 않았을 거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그도 판단은 빠르지만 그 판단을 내색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의 목소리는 조용하고 나긋하며, 부드럽고 느린 전라북도 사투리의 음조가 살짝 배어 있다. 날카로운 기지를 내보이지 않고 조심스러운 듯 말하지만 대화를 하면 할수록 재미나게 이야기를 풀어내는 솜씨가 있고, 일상어조차 시어처럼 아름답게 구사했다.

보들레르를 만나고 도시 변두리를 노래하다

제물포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그는 문예반에 들었다. 우등생이 들어가는 도서반 대신 복도 끝에 자리한 문예반은 쉬는 시간 담배 피우기 좋은 데다 무엇보다 ‘여학생과 미팅을 주선하겠다’는 문예반 선배의 꾐이 매력적이었다.

“미팅 주선은 안 해주더라고요. 하하. 사실 미팅은 ‘나 같은 사람이 글 쓸 수 있겠나?’ 하고 의기소침해 있는 내가 문예반에 들어갈 수 있게 해준 좋은 핑계였지요.”

어릴 때부터 읽고 쓰길 좋아하는 그였지만 문예반에는 장석남 시인이 1년 선배로 있을 만큼 잘 쓰는 친구들이 많았다고 한다. 문예반에서 작품을 발표하고 합평도 하면서 그는 시에 대해 크게 인식을 바꾸는 계기를 맞았다.

“이전까지 제게 시나 시인이라는 것은 이육사나 윤동주처럼 밝고 맑은 마음으로 세상을 앓고, 세상의 폭력을 견디다 못해 요절하거나 발 디딜 곳이라곤 허공의 한줌 얼음산 같은 곳이어도 끝내 올라가 강철무지개를 꿈꿀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왔어요. 그런데 한 친구가 우리가 힘들게 사는 모습을 시로 쓴 겁니다.”

‘이 비루한 삶도 시가 된다고?’ 신선함과 호기심을 느낀 그는 그 친구 집에 직접 놀러 가보았다. 그와 같이 산동네에 할머니와 사는 친구는 사는 모습도 비슷했다. 그 친구 집에서 대학생 형이 썼다는 김득구를 주제로 한 시를 읽고 그는 ‘뭔가 알 것 같았다.’

“시는 자기가 사는 모습을 감춰서는 안 되고, 자기가 사는 모습을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비로소 생각하게 된 것이지요. 이육사가 엄한 모습으로 깊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좀 편해졌다고 할까요? 이육사가 하려고 했던 말을 친구한테 들려주듯이 말해주면 된다고 생각하게 됐지요.”

그러자 그때까지 가난과 결핍의 흔적으로만 보였던 산동네의 삶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화장실도 없이 마루바닥을 열어 볼일을 보는 수문통시장도, 홍수에 물을 퍼내는 동네사람도, 그리고 아버지의 삶도 다 새롭게 보였다.

“시는 상처를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쓴다고 생각해요. 누군가를 연민하기 위해서는 자신부터 연민할 줄 알고 관찰할 수 있어야겠지요. 그리고 내 이야기를 쓰려면 남의 이야기가 필요하고요. 부모 형제, 가난한 이웃, 자연, 기억의 도움 없이 어떻게 쓸 수 있겠습니까?”

그 시절 접한 보들레르의 시를 읽으며 변두리 풍경을 어떻게 신비롭게 묘사할 수 있을지 그는 큰 힌트를 얻었다.

“‘악의 꽃’보다 소산문시집 ‘파리의 우울’을 좋아했는데, 도시 변두리를 환상이 달라붙는 곳으로, 매혹적인 시의 주제로 삼는 법을 훔쳐본 것 같습니다. 또 로트레아몽의 ‘말도로르의 노래’는 반항과 공격성이 매력적이었고요. 그를 발견하고 젊은 사람이 쓸 수 있는 시를 알게 됐다고 할까요?”

그 덕분일까, 고등학교 시절 상도 많이 받았고 서울예전에도 거뜬히 합격했다. 당시 서울예전에는 오규원과 최하림, 이근배가 시를 가르치고, 최인훈과 최창학, 박기동이 소설을, 그리고 희곡은 윤대성이 가르치고 있었다. 그는 최고의 교수진 아래 지도를 받은 셈이다. 특히 빨간 줄을 치며 “이게 시가 된다고 생각해?”라고 되묻던 오규원의 엄격과 엄정함은 지금까지 시를 쓰면서 “오 선생님이 보시면 ‘해탈하셨네!’ 하고 꼬집으시겠지?” 하며 자가 검열을 할 정도로 영향을 받았고, 최하림에게는 군림하지 않고 선비처럼 사랑하고 연민하는 법을 배웠다.

이창기·황인숙·함민복·장석남·이원·이병률 같은 선후배 역시 그에겐 좋은 자극이 됐을 터였다. 이런 쟁쟁한 문우들 사이에서 그는 칭찬과 인정까지 받으며 시인으로 성장해갔다.

어머니의 푸념 속에 쓴 시로 등단


▎2014년 11월 국화꽃이 절정일 때 서정주 시인의 묘소를 찾은 문학인들. 사진 왼쪽부터 박형준·이경철·윤재웅·송하선·신경림·나희덕 씨. / 사진:프리랜서 오종찬
학교를 졸업하고 군대에서 ‘고문관’으로 찍혀서 운전병이 된 그는 전역한 뒤 충무로 작은 기획실에서 일을 시작했다. 명함이나 전단지를 만드는 디자인 사무실이었다. 젊은 실장과 그, 두 사람이 일하는 그곳에서 박형준이 하는 일은 소량의 인쇄물을 제작하고 인쇄하기 위해 직접 종이를 사다가 인쇄소에 맡기고 찾아오는 일이었다.

“워낙 적게 찍으니 종이도 배달을 안 해주어 제가 직접 갖다 주어야 했어요. 실장님이 스쿠터를 사주더라고요. 그 스쿠터를 타고 충무로 인쇄골목을 누비고 다니는 것이 좋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그 스쿠터를 도둑맞고 나니 더 이상 일하기가 싫어졌다. 신춘문예 마감이 다가오는 가을날이었다. 서너 달 집에서 시만 쓰자고 작정하고 밤에는 쓰고 낮에 자는 생활을 이어갔다.

“저 자신을 벼랑으로 몰기 위해서 형이 가져다준 대우중공업 지게차 운전자로 입사할 원서를 한 손에 쥐고 시를 썼지요. 어느 날 어머니가 올라오셔서 고구마 순을 벗기며 밤과 낮을 거꾸로 사는 저와 친척 아들을 비교하며 안타까워하는 소리를 듣게 됐어요.”

당시 그는 동국제강에 다니는 매형이 가져다준 도트프린터 용지에 정성 들여 신춘문예 응모용 시를 쓰고 있는 중이었다. 어머니의 잔소리에 방문을 닫고 싶었지만 차마 미안해서 반쯤만 닫고 어머니의 푸념과 하소연을 종이 귀퉁이에 낙서했다.

“워낙 시에 열중해 있던 때라 낙서도 시처럼 썼더라고요. 그렇게 쓰고 보니 이것도 시가 되겠다 싶어 내게 되었고, 당선이 된 것이지요.”

‘얼마 전에 졸부가 된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나의 외삼촌이다/ …(중략)…어머니는 방마다 사각 브라운관 TV들이 한 대씩 놓여 있는 것이/ 여간 부러운 게 아닌지 다녀오신 얘기를 하며/ 시장에서 사온 고구마순을 뚝뚝 끊어 벗겨내실 때마다/ 무능한 나의 살갗도 아팠지만/ 나는 그 집이 뭐 여관인가/ 빈방에도 TV가 있게 하고 한마디 해주었다 …(중략)… 家具란 그런 것이 아니지/ 서랍을 열 때마다 몹쓸 기억이건 좋았던 시절들이/ 하얀 벌레가 기어나오는 오래 된 책처럼 펼칠 때마다/ 항상 떠올라야 하거든// 나는 여러 번 이사를 갔었지만/ 그때마다 장롱에 생채기가 새로 하나씩은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집의 기억을 그 생채기가 끌고 왔던 것이다/…(중략)…어머니의 밥 먹고 자야지 하는 음성이 좀 누그러져 들려왔다/ 너무 조용해서 상심한 나머지 내가 잠든 걸로 오해하셨나/ 나는 갑자기 억지로라도 생각을 막바지로 몰고 싶어져서/ 어머니의 오해를 따뜻한 이해로 받아들이며/ 깨우러 올 때까지 서글픈 家具論을 펼쳤다’(‘家具의 힘’)

스물여섯 나이로 등단한 그는 3년 뒤 ‘문학과지성사’에서 첫 시집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를 내고 몇몇 출판사를 거쳐 <독서신문> 기자로 일했다. 두 번째 시집을 준비했을 무렵 그는 ‘문학과지성사’에서 연락오길 기다렸지만 소식이 없어 의기소침하고 있던 차에 <독서신문> 가까이 있는 ‘창비’를 드나들며 알게 된 고형렬 시인의 권유로 창비에서 두 번째 시집 <빵냄새를 풍기는 거울>을 펴냈다.

‘내가 갖고 있는 날개는/ 은밀한 세계에 바쳐졌다/ 어느 날 스크랩해둔 세계가/ 얼마나 작은지 깨우치고/ 어른이 된 아이들은/ 거추장스러운 날개를 떼어버렸지만, …(중략)… 지금 나는 검은 도랑물이 흘러가는/ 공장지대의 아파트에 혼자 산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도/ 그들이 나의 날개를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그들이 금기한 세계에/ 갇혀 살기 때문이다’(‘노역에 처해진 날개’ 중 일부)

시집으로 기린 어머니와 아버지의 삶


▎시인의 고향이 가까운 김제평야의 광활한 모습. 그러나 시인은 11명의 가족이 단칸짜리 초가집에서 살았던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창비와 맺은 인연은 그 뒤 시집과 산문집 출간으로 이어지며 한때 창비에 몸담기도 했다. 그 사이 서정주의 마법 같은 언어에 새삼 주목하게 되었고, 도시 변두리(이제는 서울 변두리) 풍경과 고향의 기억이 어우러지는 작품을 써냈다. 종종 지하층에 사는 집과 물 웅덩이진 거리, 버려진 의자가 등장하는 시는 산책자가 바라본 변두리의 삶과 기억이 뒤섞였다. 그 가운데 기억은 채색되고 변형되기 일쑤고.

“시를 쓰게 되면서 울분에 차있거나 체념하며 사는 사람들이 보이게 됩니다. 그런데 그 울분도 되새김질하듯 곱씹고 생각하면 편안해지며 상처가 소멸해가지요. 시는 그런 과정을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어 좋아요. 어떤 상처나 울분도 시로 쓸 수 있고, 잘 쓰면, 성스럽고 아름다워지는, 연애 같은 그 느낌이 좋았지요.”

도시 변두리를 떠도는 현실과 허망한 삶을 채워주는 것이 시 쓰기요, 산책인 셈이다. 지하방의 창문을 가리고 있는 사과나무는 시에서 아름답게 묘사되고, 쓸쓸하고 을씨년스러운 도시 풍경과 고향의 이미지가 겹치면서 척박한 도시 변두리 풍경은 순간 반짝이며 빛을 발한다. 떠도는 도시의 삶과 고향에 대한 추억은 그에겐 데칼코마니처럼 서로 채색하며 새로운 그림을 만들어낸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쓴 시가 문학과지성사에서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로 나왔을 때, 그의 시가 감상적이고 새로운 게 없다는 평도 들었지만 그는 개인적으로 가장 행복하게 썼다고 한다. 이제 그는 다른 사람의 평가에 휘둘리지 않는 사람이 된 것 같다.

“아버지 돌아가시면 훨훨 날아다니겠다고 하시던 어머니는 아버지 돌아가시자마자 기력이 쇠해져서 요양원에 계시다 6년 만에 돌아가셨어요. 워낙 무뚝뚝하고 말이 없는 아들이라 장례식에서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가 하관할 때 정말 많이 울었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시를 모은 <불탄 집>은 심화(心火)로 애면글 면하며 한평생 당나귀처럼 수고로운 삶을 살다간 어머니를 기리는 시집이다. 그 시집의 원고를 인도여행 중에 정리하면서 어머니의 애끓는 심화가 불에 정화되고 다시 물에 정화되어 바다에 닿아 하늘로 오르기를 기원했다. “타고르의 서정시집 <기탄잘리>처럼 쓰고 싶었지만 시간에 쫓겨 포기했다”고 했지만 ‘불탄 집’은 뜨겁고 아름답다. 생전에 어머니가 그토록 원했던 그의 정착과 결혼은 어머니가 죽고 나서 이루어졌다. 3년 전 동국대 교수가 되었고 작년에는 결혼도 했다.

“청개구리처럼 어머니가 돌아가시고서야 현실적인 노력을 쏟은 것 같습니다. 이제 보여줄 관객이 없는 스크린이 되었지만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그는 누구한테 기대거나 핑계대지 않고 살기로 작정하고 어머니에 대한 시도 더 이상 쓰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도회지의 시를 힘들게 쓰다 지치면 어머니와 고향에 대한 시가 저절로 나오곤 한다.

“한때는 최고의 시인이 되고 싶었고, 한국 문단도 바꿔보고 싶었지요. 누군들 그런 꿈을 꾸지 않았겠습니까. 이제는 제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더 소극적인 사람이 되었네요.”

소극적이지만 단단해지고 진짜 어른이 된 것 같다. 나이 들수록 세계도 좁아져서, 언젠가는 오두막집에서 살며 들었던 정토산의 시냇가로 돌아갈 것 같다고 한다. 불교에서 정토(淨土)는 이상향을 말하니, 예토(穢土)에서 떠돌던 그는 언젠가 정토로 돌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참, 정토와 예토는 본래 하나였다고 했던가.

박형준(朴瑩浚) 시인 - 1966년 전북 정읍에서 태어나 인천에서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예전 문예창작학과에 진학하여 시를 전공했다. 199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家具의 힘>으로 등단한 뒤 시집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 <빵냄새를 풍기는 거울>을 펴내며 젊은 시인의 치열함을 보여주었다. 그는 <물속까지 잎사귀가 피어 있다> <춤>을 거치며 도시와 고향의 서정을 교차 편집하 듯 직조해냈다. 아버지가 세상을 뜬 후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는 <불탄 집>을 출간하여 부모의 생을 시로 기록했다. 섬세하고 정갈한 필치로 평론집 <침묵의 음>과 산문집 <저녁의 무늬> <아름다움에 허기지다>도 발표했다. 동서문학상, 현대시학 작품상, 소월시문학상, 육사시문학상을 받은 박형준은 대중적 인기나 지명도와는 별개로 시인들의 사랑을 받고 문단에서 큰 인정을 얻은 시인이기도 하다. 명지대 문창과에서 다시 수학해 박사학위까지 받은 그는 현재 동국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하며 그의 성품대로 묵묵하고 성실하게 시를 써오고 있다.

한경심 - 이화여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동아일보> 출판국에서 기자로 15년간 일했다. 이후 자유기고가로 <월간중앙> <이코노미스트> <신동아> <여성동아> 등에 문화와 관련한 글을 썼다. 저서로 전통공예 장인들을 소개한 <우리는 어떻게 옷을 짓고 밥을 짓고 집을 짓는가>, 한식의 철학을 담은 <우리는 왜 쌈 싸먹고 비벼 먹고 말아 먹는가>등이 있고 번역서로 <글렌 굴드, 피아니즘의 황홀경> 등이 있다.

201707호 (2017.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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