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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경세유표>로 읽은 새로운 조선-리셋 코리아의 역사적 책무 

공직자의 양심이 국가를 복원한다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
“나라 전체가 털끝 하나인들 병들지 않은 부분이 없다…지금 당장 개혁하지 않는다면 나라는 필망할 것”

새 정부가 들어서 적폐청산을 부르짖고 국가를 새롭게 개혁하자는 ‘리셋코리아’의 목소리가 온 세상에 가득하다. 200년 전 <경세유표> 저술을 통해 국가를 리셋하자던 다산의 목소리가 오늘처럼 크게 들리는 때가 없다. 국가 개혁을 위해서는 공직자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다산은 판단했다. 문재인 대통령과 새 정부에 참여한 공직자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메시지다.


▎다산은 당시 조선 사회가 개혁하지 않으면 붕괴의 위험을 맞을 것으로 생각했다.
1817년. 다산 정약용이 전라도 강진에서 귀양살이 한 지 17년째였고, 그의 나이 56세였다. 다산은 <방례초본> 48권의 저술을 마치고도 계획했던 대로의 내용을 완성하지 못하고 손을 떼면서 ‘미졸업(未卒業)’ 즉 모두 끝마친 책이 아님을 기록해 놓았다. 그 책이 다름 아닌 <경세유표>다.


▎다산의 <경세유표>는 저작 200년을 맞아 새 정부 신임 관료에게 공직자의 정신을 일깨우는 소중한 유산으로 부각되고 있다.
<경세유표>라는 책의 이름을 설명해보면 책 내용을 대체로 파악할 수 있고, 책을 저술한 정약용의 의도가 어디에 있었던 것인가도 알게 된다. ‘표(表)’라는 글자 풀이부터 해보자, ‘표’는 한문 문장의 장르로서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정책건의서의 뜻을 지닌다. 동양에서의 ‘표’로서의 대표적인 글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제갈공명의 <출사표(出師表)>가 있다. 그렇다면 다산의 ‘유표(遺表)’는 또 어떤 의미인가. 신하가 임금에게 정책건의서로 올리는 글인 ‘표’는 맞지만 바로 임금에게 올릴 수 없는 유배인이자 역적죄인의 신분이기 때문에 글을 쓰던 당시에는 올리지 못하고, 뒷날에라도 임금에게 올려지기를 바라며 유언으로 저술한 정책건의서라는 뜻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유표’라는 두 글자에는 중죄를 짓고 귀양살이하는 유배객의 한과 서러움이 담겨 있다. 한편으로는 다산의 뜨거운 애국심과 국가의 미래에 대한 무한한 염려를 담고 있기도 했다. 당시 다산은 국민의 자격도 없어 기본권을 행사할 수도 없는 불행하기 짝이 없는 처지에 처해 있었다. 그럼에도 망해가는 나라의 실정을 그냥 두고만 볼 수 없었다. 애끓는 가슴을 부여잡고 어떻게 해서라도 나라다운 나라가 될 수 있는 온갖 방법을 정리해두고, 언젠가는 훌륭한 나라의 지도자들이 나와 자신이 마련해 놓은 정책을 현실정치에 활용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그렇게 해야만 자신이 희망했던 대로 부국강병의 꿈을 이룰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이점에서 다산의 한없는 애국심을 알아낼 수 있으니 ‘유표’라는 두 글자에서도 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경세유표>의 처음 이름은 <방례초본>


▎다산이 전남 강진 유배시절 태어난 딸을 생각하며 그린 매조도(梅鳥圖).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림에 붙인 시의 내용이 애잔하다.
“이 책에서 논하는 것은 법이다. 법이면서도 명칭을 예(禮)라고 한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옛날 성인 임금들은 예로써 나라를 다스리고 예로써 백성을 인도하였다. 그런데 예가 쇠퇴해지자 법이라는 명칭이 나왔다. 헤아려보건대 온갖 천리(天理)의 법칙에 합당하고 모든 인정(人情)에 화합하는 것을 예라 하며, 두렵고 참혹한 것으로 협박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벌벌 떨며 감히 죄를 범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을 법이라고 한다. 고대의 성인 임금들은 예로 법을 삼았고, 후대의 제왕은 법으로써 법을 삼았으니, 이것이 고대와 후대가 같지 않은 것이다”(<경세유표> 서문)

방법(邦法), 바로 나라의 법제에 대한 정책건의서인 <경세유표>를 <방법초본>이라 하지 않고 방법 대신 <방례초본>이라 명명한 이유를 설명한 다산의 기술이다. <논어> ‘위정편(爲政編)’에서 공자는 “정치와 형벌로 백성들을 인도하면 백성들은 형벌에서만 빠져나가면 부끄러움을 모르지만 덕(德)과 예(禮)로 백성들을 인도해주면 부끄러움을 알면서 감화되어 좋은 나라가 된다(道之以政 齊之以刑 民免而無恥 道之以德 齊之以禮 有恥且格)”고 말했다. 법과 형벌로 백성들을 통제하는 것보다는 덕과 예로 인도해줄 때에 예의를 알고 인격을 갖춘 백성들이 살아가는 세상이 온다는 주장이다. 바로 다산은 이런 공자의 덕치주의(德治主義) 정신에 따라 법제 대신, 덕례를 통한 세상을 꿈꾸고 있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다산은 주공(周公)이 주(周)나라의 법제를 정해놓은 책을 주법(周法)이라고 칭하지 않고 <주례(周禮)>라고 칭했다고 했다. 유배지에서 <방례초본>이라던 책 제목은 해배 뒤 고향에 돌아와 다시 정리하면서 책 제목을 <경세유표>로 바꾸고 ‘방례초본인’이라던 책의 서문도 ‘경세유표인(經世遺表引)’으로 바뀌어 현재에 전해지고 있다.

다산은 “조용히 생각해보건대 나라 전체가 털끝 하나인들 병들지 않은 부분이 없다. 지금 당장 개혁하지 않는다면 나라는 반드시 망하고 말 뿐이다.(一毛一髮 無非病耳 及今不改 其必亡國而後已)”라고 당시의 나라 현실을 진단했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임진왜란 이후로 온갖 법제가 무너지고 모든 일이 어수선해졌다. 군문(軍門)은 자꾸 증설되어 국가 재정이 탕진되고 전제(田制)가 문란해져서 부세(賦稅)의 징수가 편중되었다. 재물이 생산되는 근원은 힘껏 막아버리고 재물이 소비되는 길은 마음대로 터놓았다. 따라서 오직 관서(官署)를 혁파하고 관원(官員)을 줄이는 것을, 급한 것을 구하는 것으로 삼았다. 모든 관직까지 정비되지 않아 정규 관원조차 녹봉이 없고 탐학질하고 더러운 짓 하는 풍습만 크게 일어나 백성들은 초췌해져버린 상태다”라고 말하여 개혁의 당위성을 자세하게 열거했다.


▎정다산의 친필 서적. 다산은 전라도 강진 유배 기간 중 한국 사상사에 유례없는 방대한 저작을 남겼다.
1. 벼슬의 숫자를 126으로 한정하여 육조(이·호·예·병·형·공)로 하여 각 조마다 20명의 관료를 거느리게 하자.

2. 관제를 개혁하여 18품의 계급을 9품으로 줄여서 정(正)·종(從)의 품계를 없애자. 단 정1품, 종1품, 정2품, 종2품만은 그대로 두고 나머지 품계는 모두 줄이자고 했다.

3. 호조(戶曹)는 교관(敎官)으로 바꾸어 교육정책을 주관하게 하고, 6부(六部)의 지방교육제를 6향(六鄕)으로 바꾸어 지방교육의 활성화를 주장했다.

4. 고적제(考績制), 즉 공직자의 업적을 평가하는 제도를 엄정하게 정하고 그 평가방법을 세밀하게 세분하여 엄격하게 심사하는 제도를 수립해야 한다.

5. 3관(三館: 교서관·예문관·홍문관)의 세 차례 추천법을 바꾸어 귀족자제가 아닌 일반 가정의 출신이라도 3관의 관원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자고 했다.

6. 처음 벼슬하는 사람에게 수릉관(守陵官)의 임명을 배제하여 귀족자제의 요행스런 벼슬길을 막아야 한다.

7. 과거제도를 혁신하여 대과(大科)·소과(小科)를 합하여 하나의 과거로 시행하며, 33명이던 대과 급제자를 36인으로 늘리고 3년에 한 차례 시행하는 정규시험만 시행하고 임시 과거인 증광이나 절제(節制)의 과거는 모두 폐지한다.

8. 문과·무과는 비중을 같이하고 합격자는 차별 없이 관직에 등용케 한다.

9. 10결(結)의 전지(田地)에는 반드시 1결의 공전(公田)을 두어 농부들이 힘을 모아 경작하여 세금으로 충당하고 다른 세금은 물리지 않는다.

10. 군포세(軍布稅)를 폐지하고 구부제(九賦制)를 개정하여 모든 국민이 부역을 균등하게 부담하게 한다.

11. 둔전(屯田)제도로 왕성(王城)을 보위할 군대를 기르고 아병지전(牙兵之田) 제도를 세워 현성(縣城)을 보위할 군대를 양성하게 하자고 했다.

12. 사칭(社倉)제도와 상평법(常平法)을 정비하여 농간을 막아야 한다.

13. 화폐제도인 주전(鑄錢)을 제대로 하여 그 폐단을 막자.

14. 고을 아전 등의 숫자를 확정하고 그들의 세습제를 막아 간리(奸吏)의 횡포를 막자.

15. 이용감(利用監)이라는 새로운 관청을 신설하여 기술개발과 도입을 전담케 하고, 북학(北學)의 법제를 의논하여 부국강병의 국가를 도모하자(<경세유표> 서문)

“지도자는 부지런하고 치밀해야 한다”


▎정약용이 설계했다고 알려진 수원 화성 축조에 사용된 거중기. 그는 성리학뿐 아니라 기술·과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위와 같이 다산은 최소한의 개혁과제를 제시하고 그 세부 시행 계획과 실천방안을 면밀하게 제시했다. 그러면서 현행법에 있는 부분은 개혁으로, 현행법에 없는 부분은 신설하는 법제임을 설명하여 어떤 제한 없이(不拘時用) 개혁의 과제로 제시한다고 주장했다. 15개 개혁과제 이외에도 많은 개혁 과제가 있었던 것은 다산의 문집에 열거된 논(論)·설(說)·의(議)·책(策) 등의 글에도 상세하게 나열되어 있으나, 국가적 큰 과제로 최소한 15개 개혁과제는 반드시 실행되어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으로 주장했다.

<경세유표> 서문에서 다산은 바람직한 지도자상을 제시하고 있다. 지도자라면 부지런하고 정밀해야 한다고 다산은 생각했다. 그리하여 요순의 정치를 이른바 무위(無爲)의 정치라 하며 높게 보고 따르는 풍토를 개탄했다.

“세속에서 요순(堯舜) 시대의 훌륭한 정치를 말하는 자는 ‘요(堯)와 순(舜)은 모두 팔짱을 끼고 공손한 모습으로 아무 말 없이 띠집에 단정히 앉아 있어도, 그 덕화(德化)를 전파하는 것이 마치 향기로운 바람이 사람을 감싸는 것과 같았다’고 한다. 이리하여 화락한 것을 순박하다고 하고 만족한 것을 만족하게 여긴다 하고, 무릇 베풀어 실천하는 것이 있으면 곧 요순시대의 다스림을 가지고 윽박지른다. 그러면서 ‘한비(韓非)·상앙(商鞅)의 술법(術法)이 각박하고 정심(精深)한 것은 실로 말세(末世)의 풍속을 다스릴 만하다고 하면서, 별도로 요순(堯舜)은 어질고 진시황은 포악하였으므로, 엉성하고 느슨한 것을 옳게 여기고 정밀하고 각박한 것을 그르게 여기지 않을 수 없다’고 일컫는다.” 다산이 보기에 요순처럼 부지런하고 정밀한 사람이 없었다. “마음을 분발하고 일을 일으켜서 천하 사람을 바쁘고 시끄럽게 노역(勞役)시키면서, 일찍이 한번 숨 쉴 틈에도 안일하지 못하도록 한 이는 요순이요, 또한 정밀하고 각박하여 천하 사람으로 하여금 조심하고 송구하여 털끝만큼이라도 감히 거짓을 꾸미지 못하도록 한 이도 요순이었다. 천하에 요순보다 더 부지런한 사람이 없었건만 하는 일이 없었다고 속이고, 천하에 요순보다 더 정밀한 사람이 없었건만 엉성하고 오활하다고 속인다. 그래서 임금이 언제나 일을 하고자 하면 반드시 요순을 생각하여 스스로 중지하도록 한다. 이것이 천하가 나날이 부패해져서 새로워지지 못하는 까닭이다. 공자(孔子)가 ‘순(舜)은 하는 일이 없었다’고 말한 것은, 순에게 현명하고 성스러운 신하가 22인이나 되었으니, 또 무슨 할 일이 있었겠느냐는 뜻이다. 그 말뜻은 참으로 넘쳐 흐르고 억양이 있어 말 밖의 기풍과 정신을 얻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오로지 이 한마디 말을 가지고서, 순은 팔짱 끼고 말없이 단정히 앉은 채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았어도 천하가 순순히 다스려졌다 하고는, 요전(堯典)과 고요모(皐陶謨)는 모두 까마득히 잊어버리니, 어찌 답답하지 않겠는가.”

다산이 보기에 요순은 총명하면서도 쉴 틈 없이 일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신하들 또한 맹렬히 분발하여 요순 임금을 보좌했다. 지금이라고 다를 것이 없다. 오히려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 지도자란 사람이 하는 일 없이 대접만 받으려 하거나, 지도자를 보좌하는 사람이 해야 할 일보다는 의전 문제로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든다면, 다산이 제시한 지도자상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모습이다.

<주례(周禮)>에서 통치체제의 모델을 찾아내


▎추사 김정희가 쓴 전남 강진의 다산 초당 현판. 24세 연하인 추사는 평소 다산을 스승으로 깊이 존경했다.
본디 유학은 공자의 사상과 철학에서 발전해온 학문이다. 유학이 노리는 최종의 목표는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을 통해 천하를 태평한 시대로 만드는 데 있었다. 큰 틀에서 유학자였던 다산 또한 수기치인(修己治人)을 학문의 목표로 여기고 육경사서(六經四書)로 수기의 도를 닦고 일표이서(一表二書:<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로 천하국가를 태평한 시대로 이끌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오랜 유배생활 동안 다산은 육경사서의 연구를 통해 수기의 길을 열게 하고, 경학의 공부를 마치자 바로 경세학인 일표이서의 저작에 착수했다. 부란(腐爛: 썩어 문드러짐)한 당시의 조선을 새로운 나라로 만들어야겠다는 뜻, 신아구방(新我舊邦)의 생각으로 전면적 법제의 개혁에서 새나라 건설의 방법을 찾아냈다.

<경세유표>야말로 다산 경세철학의 핵심으로 중국 요순시대의 법전(法典)이라고 말할 수 있는 주공(周公)의 <주례(周禮)>에서 통치체제의 모델을 찾아냈다. 조선이라는 당대의 현실에 부합하는 법체제를 설계하였으니 바로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위대한 학문적 업적이었다. 경세학의 3대 저서 중에서 역시 <경세유표>가 통치체제의 본론이라면 <목민심서>와 <흠흠신서>는 각론 격이라 할 수 있다. 각 저서의 제도와 실천방안이 동시에 실행될 때에만 조선이 나라다운 나라가 되리라고 믿었던 사람이 다산이었다.

근세에 다산을 가장 깊이 연구하여 다산학의 전모를 가장 소상하게 밝힌 학자는 위당 정인보였다. 그는 다산 서세 100주년을 맞는 1936년 전후에 최초로 다산의 모든 저작을 합해서 편찬한 <여유당전서>를 활자로 인쇄하고 간행하여 다산학의 가치를 세상에 드러낸 학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정인보는 <담원국학산고>(1955, 文敎社)라는 저서에서 “다산 선생의 평생 대저는 <방례초본> 하나의 책이다”라고 말하여 500권이 넘는 다산 저서에서 <경세유표>가 대표적인 저서라고 명확히 밝혔다.


▎다산이 1801년 신유사옥에 연루돼 강진으로 귀양 와 머물면서 10여 년간 생활한 다산초당. 다산은 이곳에서 <목민심서> 등을 저술했다.
정인보가 평가한 내용을 간추려보자. “이 책은 법도(法度)에 대한 초본인데, 방법(邦法)이라 하지 않고 방례(邦禮)라고 함이 벌써 깊은 뜻이 있다. 학문과 정치가 분립(分立)한 지 오래라, 학문이 정치를 버렸으니 그 학문이 실(實)을 거론하지 못하고 정치는 학문에 의(依)하지 않으니 그 정치는 언제나 치도(治道)의 본(本)을 얻지 못했으므로 이에 도(道)와 정(政)이 일치(一致)임을 밖으로 거론하였으니 이것만으로도 세상에 없는 고독한 학문적 결단임을 짐작할 수 있다”라고 말하여 학문하면 성리학(性理學)이어서 정치와는 오불관언을 표방하던 당시 학계의 잘못된 경향을 바로잡은 다산의 입장을 설명하고 있다. 학문이 제대로 익지 않은 정치인과 관료가 정치에만 골몰하여 학문에 의거하지 못하는 당시의 세속에 대한 비판까지가 다산의 경세철학에 담겨 있다고 주장하는 내용이기도 했다.

일본인 아사미린다로(淺見倫太郞)는 1922년에 간행한 <조선법제사고(朝鮮法制史稿)> 라는 저술로 동경대학교 법학과 교수회의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아사미린다로는 외국인으로는 최초로 <경세유표>를 연구했던 학자였다. “조선의 법제를 생각함에 있어 정약용의 책이 가장 완전한 것이라 하겠다”라면서 <경세유표>가 조선 법제에 대한 연구서라고 평가했다. “육전(六典) 폐해의 비판 및 개혁으로 <주례(周禮)>로 돌아가기를 주장한 점은 복고적인 정신이라 하겠으나, 당시의 현상을 서술한 것으로는 조선인의 저작 가운데 보다 나은 것은 없다”라고 주장했다. 법고창신의 개혁은 말하지 않고 다만 옛것을 따름을 복고적이라고 평함은 온당한 평가는 아니었다. 그러면서 “국가의 쇠망에 당하여 왕왕 한두 명의 비상한 선비가 나온다”라면서 다산이 바로 그런 사람이라고 했다. 조선왕조의 부패상과 나라의 타락을 가혹하게 비판했던 이유 때문인지 “정약용의 탄생은 조선이라는 나라로서는 행운이었지만, 왕국(왕조)으로서는 불행한 일이었다”라는 의미심장한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다산 자신은 책에 대하여 어떻게 평가했을까? ‘초본(艸本)’이라는 제목에서 암시했음을 말하며 미완(未完)의 책이라고 전제했다. 그러면서도 “이런 내용의 법제들이 진실로 결단하여 행해지기를 바란다”고 말하고 간단한 조례나 자잘한 명분이나 숫자는 고집하지 않겠으니 변경하여 실행해도 좋다고 했다. 수십 년 동안 시행해보고 수정된 뒤에는 금석 같은 불변의 법전으로 만들어 후세에 혜택을 끼쳐줄 수 있다면 그것 또한 지극한 소원이자 큰 즐거움이 되리라고 자신의 희망을 말하기로 했다.

<경세유표> 저술 200주년의 역사적 의미


▎매년 경기도 남양주시 실학 박물관 옆 다산 묘역에서 봉행되는 다산 정약용 선생 묘제.
뒤에 <방례초본>을 <경세유표>로 제목을 변경했음을 보면, 유언으로 남기는 정책건의서임을 분명히 밝힌 셈이다. 큰 잘못이 없으리라 믿고 그러한 법과 제도가 실천되고 실행될 수 있기만을 소원했으니, 불변의 법전이라는 자신감을 은근히 내비쳤다고 볼 수 있다. 다산은 ‘자찬묘지명’이라는 자신의 일대기에서 <경세유표>에 대한 설명을 간략하게 기록했다.

“<경세유표>는 어떤 내용인가. 관제(官制)·군현제(郡縣制)·전제(田制)·부역(賦役)·공시(貢市)·창저(倉儲)·군제(軍制)·과제(科制)·해세(海稅)·상세(商稅)·마정(馬政)·선법(船法) 등 나라를 경영하는 제반 제도에 대해서 현재의 실행여부에 구애받지 않고 경(經)을 세우고 기(紀)를 나열하여 우리의 오래된 나라를 새롭게 개혁해보려는(新我之舊邦) 생각에서 저술한 책이다”라는 설명을 해놓았다. 시스템을 통한 개혁과 변혁의 청사진이었음을 다산 스스로 확인해주고 있다.

올해는 다산이 <경세유표>를 저작한 지 200주년이 되는 해다. 유언으로 남기는 정책건의서이자, 국가 개혁의 마스터플랜인 다산의 뜻이 얼마나 실행되고 실천되었을까. 부모가 죽음에 임해서 남겨준 유언의 실천은 자식들의 최대 의무다. 우리 민족에게 남겨준 다산의 유언을 실천함은 민족의 과제이자 의무다. 과연 얼마나 실현되었을까? 세상이 바뀌고 시대가 변하여 당시의 다산이 제시한 15개 개혁과제가 오늘 우리들의 시대에 완전히 합치될 수는 없다. 법제가 다르고 사회와 세상이 다른 오늘, 그렇지만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옳고 바른 나라를 새롭게 만들자는 다산의 뜻은 오늘에도 분명히 유효하다. 다산이 나라를 새롭게 개혁할 수밖에 없던 이유로 열거했던 당시의 사회와 오늘의 사회는 큰 변함이 없다.

공직자는 공(公)과 염(廉)의 가치 가슴에 새겨야


▎1812년 초의선사가 다산초당을 방문한 뒤 그린 <다산초당도>. 당시에는 초가집 주변에 흙담이 둘러져 있다. 현재는 연못이 하나 있지만, 그림 속에는 두 개의 연못이 그려져 있다.
모든 관료제도는 정비되지 못하고, 정직한 선비들은 국록의 혜택을 받을 수 없고 탐학하여 착취만 일삼은 부패한 관료들이 판을 치고, 일반 백성들은 삶의 의욕을 잃고 수척해져버린 상태라는 다산의 진단과 오늘의 현실에 어떤 큰 차이가 있는가? 관제의 개혁, 교육개혁, 과거제도의 개혁, 공무원 고과평가제도의 개혁, 내부자 고발법의 정비, 언론의 활성화를 위한 언관(言官)제도의 개혁, 전제(田制), 즉 토지제도의 개혁으로 집값과 토지 가격의 재정비, 세금제도의 개혁으로 공평한 세금부과, 군제의 개혁으로 군인들의 복지향상, 애민(愛民) 정책의 확대로 사회적 약자를 보호할 복지제도의 새로운 개혁, 과학기술의 개발로 4차 산업혁명에 대한 대비 등 다산의 개혁과제는 오늘의 우리들의 과제와 큰 차이가 없다.

새 정부가 들어서 적폐청산을 부르짖고 국가를 새롭게 개혁하자는 ‘리셋코리아’의 목소리가 온 세상에 가득하다. 200년 전에 국가를 리셋하자던 다산의 목소리가 오늘처럼 크게 들리는 때가 없다. 참으로 더디고 너무 오래되었다. 이제는 다산의 유언이 실현되는 때가 오는 듯하다. 촛불을 밝혀 구체제를 무너뜨린 대한민국 국민의 힘은 대단하다. 그런 큰 힘을 모아 이제 다산의 개혁과제를 21세기의 개혁과제로 수정 보완하여 실행하고 실천하자.

개혁을 완수한다는 것은 200년 전이나 지금이나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과제다. 그만큼 기득권층의 저항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다산이 왜 <경세유표>를 미완인 상태로 둔 채 <목민심서>를 저술했는지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국가 개혁을 위해서 공직자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다산은 판단한 것이다. 즉, 공직자는 국가와 국민을 연결해주는 소통의 창구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을 개혁에 동참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최근 대통령이 탄핵되었다. 탄핵 사유의 하나가 헌법 제7조이다. 헌법 제7조는 ‘공무원은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라고 규정하고 있다. 다산은 ‘牧爲民有也’라고 했는데, 이는 헌법 제7조와 같은 뜻이다. 어느 때보다 공직자의 역할이 중요한 시기다.

새 정부에 감히 권하고자 한다. <경세유표>를 통해 새로운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개혁의 방향을 참고하고, 동시에 <목민심서>를 통해 공직자들을 개혁에 동참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공직자뿐 아니라 공공 영역에서 복무하고 있는 모든 사람이 다산이 강조했던 공(公)과 염(廉)을 가슴 깊이 새기도록 하자.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정부에만 맡길 일이 아니다. 우리 국민 모두가 눈을 뜨고 감시하면서 직접 국민주권의 논리를 발현하여 참여하는 논리로 개혁에 앞장서야 한다. 그것만이 <경세유표> 저작 200주년을 맞는 현명한 우리 국민이 해야 할 몫이다.

[박스기사] <경세유표>와 ‘일표이서(一表二書)’ - 3대 저서로 경세학(經世學)의 대업 이뤘다


▎근본적인 국가 개혁의 마스터플랜을 집약한 <경세유표>.
다산의 ‘일표이서(一表二書)’란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를 가리킨다. 다산의 대표 저서로 <경세유표>와 <목민심서>를 꼽고, <흠흠신서>는 조금 덜 알려져 있지만, 이 세 경세서 내지 정법서로써, 세상을 경영하고 다스리기 위한 다산의 방책이 체계화되었다. “육경사서(六經四書)로는 수기(修己)하도록 하고 일표이서(一表二書)로는 천하국가를 다스릴 수 있게 한다”(六經四書 以之修己 一表二書 以之爲天下國家: 자찬묘지명)라고 했듯이, 다산의 학문은 크게 두 분야로 나뉜다. 유학경전을 해석하는 방대한 경학 연구를 일단락짓고, 일표이서로써 경세학을 완성시켰다. 다산은 6경4서는 본(本)이고 경세학인 1표2서는 말(末)이라 설명하여 본(本)과 말(末)을 모두 갖추었다고 했는데, 경세학을 낮춰보는 의미는 아니었다.

전라도 강진에서 유배 17년째이던 1817년 56세의 다산은 <방례초본> 48권의 저술을 마쳤다. 나중에 이름을 <경세유표>로 바꾸었다. 국가의 법제를 통째로 개혁하자던 거대담론인 <경세유표>를 저작하느라 심혈을 기울이던 다산은 단시일에 실천과 실행이 어려운 거대담론에 마음을 기울였다. 그럼에도 눈앞에 벌어지는 백성들이 당하는 비참한 현실에 눈을 감을 수 없었다. 거대담론에 앞서 미세담론에 마음을 기울여야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나왔을 것이다. 그래서 다 마치지 못한 대로 남겨두고 손을 댄 것이 바로 그 다음해인 1818년에 저작된 <목민심서> 48권이었다.


▎<목민심서>는 지방관의 역할과 임무를 기술한 책으로 개혁 이전의 현실적 국가정책을 기술했다.
나라를 온통 새로운 법제체계로 개혁해 보려던 다산은 그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몰랐을 리 없다. <경세유표>의 저작 목적은 ‘신아지구방(新我之舊邦)’ 즉 우리의 오래된 나라를 새로운 나라로 개혁해 보자는 뜻이었다. 법제의 개혁이 혁명이 아닌 이상,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다산은 법제의 개혁은 조금 뒤로 미루고 현행법의 테두리 안에서라도 우리 백성들을 한 번 살려내 보자는 생각에 이르렀다. 완전한 개혁에서 현행 법제를 조금씩 손질하고 고치기 쉬운 관행이나 악습들을 뜯어고쳐 백성을 도탄에서 구해내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래서 목민심서의 저작 목적을 ‘현행법의 테두리 안에서라도 우리 백성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보살펴주자(因今之法而牧吾民也)’라고 정리했다. <경세유표>가 근본적인 국가개혁의 마스터플랜이라면 <목민심서>는 국가개혁의 완성 이전이라도 백성들이 숨을 쉬고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현실적인 국가정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 때문에 두 저술은 함께 병행해서 실행될 내용임이 분명하다.


▎<흠흠신서>는 범죄의 조사 과정이나 재판 과정에서 백성의 억울함이 없도록 하자는 취지에서 저술됐다.
다산은 18년 동안의 강진 유배생활을 끝내고 돌아온 이듬해(1819)에 고향집에서 <흠흠신서> 30권 10책의 편찬 저술을 끝마쳤다. 저서의 내용에 대한 구상과 설계는 대체로 유배지에서 정리했던 것인데, 해배 명령이 내려 귀향하는 바람에 끝마치지 못하고 그때서야 완료했을 것이다. 다산은 그 책의 저작 목적으로 ‘기기무원왕’(冀其無寃枉)이라고 하여 검찰조사나 재판과정에서 억울한 사람이 없기를 바라서 그 책을 저술했다고 했다. “사람의 목숨은 하늘에 매여 있다. 사목(司牧: 국왕이나 목민관)은 또 그 사이에서 선량한 사람은 보호해주고 죄지은 사람은 붙잡아 죽이니, 이는 명백한 하늘의 권한이다.” 그런 큰 권한이 올바르게 행사되어 억울한 백성이 없도록 하려고 책을 지었다는 것이다. 이 <흠흠신서>의 완성으로 이른바 ‘일표이서(一表二書)’라는 3대 저서가 탄생했다. <경세유표> <목민심서>와 함께 자신의 말대로 세상을 다스릴 방책이 담긴 경세학(經世學)의 대업을 이룩했던 것이다.

박석무 - 1942년 전남 무안에서 태어나 4대째 한학을 공부해온 집안에서 자랐다. 전남대 법과대학 시절, 실학에 빠져 유형원과 정약용 등의 저서를 탐독하다가 평생 다산을 연구하기에 이르렀다. 재학 중 1964년 한일회담 반대시위로 구속되는 등 민주화운동에 투신, 4차례 옥고를 치렀다. 14대 국회의원 시절에도 국회 내에 ‘다산사상연구회’를 조직해 다산 연구의 차원을 제고했다. <다산 평전> 등 다산의 삶과 사상을 조명한 다수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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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호 (2017.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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