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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럴 아츠의 심연을 찾아서] 뉴욕 타임스스퀘어 무념무상의 축제 

착한 ‘천동설’의 수호신 요가 

글·사진 유민호 월간중앙 객원기자, ‘퍼시픽21’ 디렉터
인기·돈·명예보다 정신적 자유와 여유로 충만한 세계관의 최정점… 요가는 시대정신인 동시에 돈으로 연결되는 21세기 자본주의의 총아(寵兒)

▎뉴욕 타임스 스퀘어 거리를 뒤덮은 집단 요가 인파.
이미 3년째지만, 여름철에 접어들 때면 반드시 등장하는 글로벌 소프트 뉴스가 하나 있다. ‘세계 요가의 날’이다. 정확히 말해 매년 6월 21일 벌어지는 행사로, 2015년 이래 지구촌 이벤트로 정착되고 있다. 짧은 역사에 불과하지만 열기가 대단하다. 마치 신년 축하 페스티벌처럼, 전 세계 주요 도시를 무대로 한 초대형 집단 요가가 순차적으로 벌어진다. 런던·파리를 시작으로 아프리카·중동·아시아·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어진다. 파리 에펠탑이나 상하이 동방명주(東方明珠), 샌프란시스코 금문교와 같은 상징물을 배경으로 한 집단 요가 사진이나 영상물도 신문·방송을 통해 쏟아진다.

6월 21일은 연중 해가 가장 긴 날에 해당된다. 밤이 짧고 뜨거운 태양이 작열하기 시작하는 초여름 대낮이 세계 요가 기념일이다. 흥미로운 것은 세계 요가의 날을 창조해내고 주관하는 기관에 관한 부분이다. 글로벌 이벤트의 출발점은 바로 유엔이다. 20세기 냉전 종언과 함께, 뭐 하나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는 비능률, 무능 조직의 대명사가 유엔이다. 유엔은 과연 무슨 근거와 입장에서 세계 요가의 날을 만들어냈을까?

명상과 체력단련을 통한 글로벌 평화가 세계 요가의 날 제정의 취지라고 한다. 간단히 말해 ‘요가=평화’라는 말이다. 요가에 빠진 적이 없는 필자로서는 조금 의아스럽다. 요가를 하는 동안은 전쟁도 폭력도 없다는 의미 정도로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요가=평화’로 단정한다는 것은 지나치지 않을까 싶다. 사실 마라톤·태권도·배드민턴 같은 스포츠 조차도 굳이 의미를 부여하자면 평화라는 대의(大義)를 붙일 수는 있다. 그러나 유엔은 특별히 요가만을 지정해 평화의 상징으로 공표한다. 왜일까?

유엔의 지지와 후원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요가는 어느새 생활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일상적 풍경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유기견에 대한 남다른 관심이나 올가닉 제품에 대한 집착 나아가 그린(Green)정책에 동조하는 글로벌 자전거 열풍 정도에 비견된다고 할까? 세계 요가의 날이 아니더라도, 신문·방송·모바일 어디서든지 쉽게 만날 수 있는 것이 요가다.

슈퍼모델 바 라파엘리(Bar Rafaeli)를 앞세운 뷰익(Buick) 자동차 텔레비전 광고는 최근 가장 인상 깊게 본 요가 관련 영상물이다. 빨리 달리는 멋진 모습에 주목하기보다, 뭔가 명상적이면서도 평화적 이미지로 굴러가는 ‘선(禪)’ 광고다. 군살 하나 없는 슈퍼모델 라파엘리는 자동차에 몸을 기댄 채 고난도의 요가 동작을 선보인다. 기존의 광고가 양적·형이하학적 관점에 섰다고 할 때 라파엘리의 요가광고는 질적 형이상학적 가치에 주목했다고 볼 수 있다.

미국인 10명 중 한 명이 요가 수련생


▎요가를 영국을 통해 전 세계에 확산시킨 스와미 비베카난다는 현대 요가의 대부 격이다.
전 세상을 주름 잡는다는 한류 아이돌이 갑자기 아이폰 요가 전도사로 나서거나, 임신한 부인과 함께 하는 남성용 요가 같은 것은 질적·형이상학적 관점의 가치를 반영하는 증거로 와닿는다. 명상과 평화로 어필하는 자동차, 인기·돈·명예보다도 정신적 자유와 여유로 충만한 세계관이 21세기 대세다. 요가는 바로 그 최중심에 서 있다.

요가가 글로벌 차원의 열풍이란 사실을 알게 된 것은 6년 전으로 되돌아간다. 장소는 베니스다. 알고 지내던 이탈리아인 친구가 여동생과 함께 나타났다. 여동생은 그 유명한 베니스 대학 동방학과(Oriental Studies) 대학원에 다닌다고 한다. 인도의 산스크리트어가 전공이다.

장래 희망을 물어보니 뜻밖의 답이 던져졌다. 요가 박사라는 것이다. 요가 선생은 들어봤지만, 요가 박사는 금시초문이다. 선생과 박사가 어떻게 다른지 물어봤다. “요가 선생은 스튜디오에서 요가 실습에 주력하는 사람이고, 요가 박사는 책상에서 요가를 학문적으로 연구하고 풀이하는 사람이다.” 농담을 섞은 너무도 원론적인 답이지만, 과연 이탈리아에 요가 박사가 필요한지 궁금했다.

“베니스는 물론이고 이탈리아 전체가 요가붐이다. 선생은 이미 넘치고 넘친다. 베니스 작은 섬에만도 30여 개의 요가 스튜디오가 있다. 대부분 인도에 직접 가서 배워온 유학파 요가 선생들이다. 밀라노에 가보면 거의 100m마다 요가 스튜디오가 하나씩 들어서 있다. 축구와 더불어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21세기 첨단 문화의 대명사가 바로 요가다. 따라서 학문적 연구를 통한 요가의 의미와 가치 확산이 앞으로의 과제다.”

나중에 자세히 알아봤지만, 베니스 대학 동방학과는 유럽에서 처음으로 요가 박사과정을 도입한 곳이다. 인도 자매대학에서 요가 교수를 초빙해 박사과정을 신설했다고 한다. 그러나 박사과정의 대부분은 산스크리트어를 기초로 한다. 요가 관련 고전의 대부분이 산스크리트어로 구성돼 있기 때문이다.

글로벌 열풍으로서의 요가 파워는 유럽보다 미국을 통해 한층 더 기세를 더해가고 있다. 전적으로 양적 기준에 입각한 것이지만, 미국만큼 요가에 열심인 나라도 없다. 지난해 초 미국 요가연합회(yogaalliance.org)가 발표한 객관적 통계를 보면 미국 내 요가 열풍이 어느 정도인지 충분히 실감할 수 있다. 먼저 2015년을 기준으로 요가 수련생은 3670만에 달한다. 미국 인구를 3억 명으로 잡을 경우, 10% 이상이 요가 수련생이다. 2012년의 2000만 명에 비해 불과 3년 만에 80% 정도 늘어났다. 가까운 시일 내에 새로 요가클럽에 가겠다고 공언한 사람도 8000만 명에 달한다. 현재 상황을 본다면, 10년 내로 미국인 3명 중 1명이 요가에 나설 듯하다. 동네 스포츠 클럽에 등록만 해놓고 이런저런 이유로 빠지는 것이 대부분이다. 요가도 비슷하다고 볼지 모르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요가인구의 74%가 요가 입문 5년 정도이기 때문이다. 다른 운동과 달리, 요가는 도구나 장소에 구애를 받지 않는다. 의향만 있다면 집 안에서 간단히 행할 수 있다. 한번 요가는 영원한 요가라는 의미다.

살도 빼고 잘하면 득도 수준까지 간다


▎베니스는 유럽에서 처음으로 요가 박사과정을 도입한 도시다.
당연한 결과지만, 요가 인구의 폭발적 증가는 요가산업의 중흥으로 연결된다. 간단한 운동이라고 해서 돈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다. 거꾸로 간단한 만큼 다른 사람들과 차별화하려는 사람도 많다. 미국에서 판매되는 운동복 가운데 가장 비싼 것은 골프·테니스가 아닌, 몸에 딱 달라붙는 요가복이다. 각종 이유를 붙여 100달러가 넘어가는 것은 보통이다. 요가 체형이나 명상 관련 책, 요가체험기, 요가 다이어트에 관한 비즈니스가 줄을 잇는다.

결국 2015년 미국 내 요가산업의 규모는 무려 168억 달러로 상승한다. 2012년 61억 달러에 비해 250% 이상이 증가했다. 2016년도 삼성전자의 총영업이익은 29조2000억원이라고 한다. 달러로 환산하면 약 250억 달러다. 요가 비즈니스는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몸 하나로 시작한다. 요가가 미국만이 아닌 글로벌 열풍이란 점을 감안한다면, 5년 내로 삼성전자 총영업이익보다 더 큰 수익을 낼 것이라 전망해볼 수 있다. 요가는 시대정신인 동시에, 곧바로 돈으로 연결되는 21세기 자본주의의 총아다.

“다섯 살짜리 어린아이도 이해할 수 있고, 화면을 통해 흐름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자주 가는 스포츠 바에서 만난 중동계 30대 남성이 전해준 명료한 답이다. 왜 축구가 세계 최고 인기의 스포츠가 됐는지를 묻는 필자를 질문에 대한 반응이다. 미국 스포츠바에서 야구·농구·미식축구는 더 이상 주류가 아니다. 비율을 축구 7 정도로 할 때, 나머지 1씩 나눠먹는 것이 야구·농구·미식축구의 현실이다. 스포츠바 어디를 가도 축구중계 시간이 입구에 붙어 있다. 축구 생중계는 손님이 가장 들끓는 시간이다. 유럽의 프로축구는 실시간 미국에 중계된다.

흥미롭게도 이 중동계 청년은 스스로를 요가 10년째 수련생이라 소개한다. 중동에서도 상류층을 중심으로 한 요가붐이 대단하다고 한다. 요가가 왜 중동에서도 인기를 끄는지 물어봤다. “쉽고 간단하다. 특별한 룰이 있는 것도 아니고, 언제 어디서든 곧바로 시행할 수 있고 누구 하나 간섭하는 사람도 없다. 하루 얼마 이상과 같은 목표량도 없다. 살도 빼고 잘하면 득도 수준까지 갈 수 있다는데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는가?”

요가가 왜 세계적 히트상품으로 부상했는지에 관한 얘기는 분분하다. 인도가 내세우는 소프트파워로 모디 총리가 나서면서 글로벌 브랜드가 됐다는 분석도 있지만, 필자는 조금 다르게 본다. 1990년대 미 클린턴 대통령 때부터 시작된, 세계화에 편승해 나타난 현상이 바로 요가 열풍의 배경에 해당된다. 중국의 ‘메이드 인 차이나’ 상품이 그러했듯이, 인도의 요가는 글로벌 열기에 편승해 세계로 확산된다. 사실, 글로벌 스포츠의 대명사가 된 축구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중동계 청년의 분석처럼 글로벌 시대의 사람들은 복잡한 것을 싫어한다. 역사·인종·지역·이념에 관계없이 ‘좋은 게 좋은 것’이 21세기 냉전 이후의 논리이자 이념이다. 글로벌 시대의 주된 관심사는 당장의 평화와 생활이다. 옳은지 틀린지가 아니라, 마찰 없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 시리아의 이슬람국(IS) 테러리스트들은 그 같은 생각의 정반대에 선 사람들일 듯하다.

태권도와 요가가 겨루면 누가 이길까?


▎요가는 힌두교의 우주관에 기초한 정신·육체 수양법이다.
밀레니얼 세대의 세계관이지만, ‘박정희 신화와 논리’는 옳고 그른 것이 아닌, 현재의 평화 생활과 동떨어져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잊혀지기에 충분하다. 평화와 생활만 보장된다면 악마와도 손을 잡을 수 있다. 선진국일수록 그 같은 생각에 대한 신념과 확신이 한층 더 강하다. 물질적으로 풍족해진 상태에서, 굳이 싸우면서까지 이해관계를 명확히 나눌 필요성을 못 느낀다. 승부를 내는 태권도보다, 승자도 패자도 없는 평화의 상징 요가는 그 같은 글로벌 가치관에 잘 어울린다. 요가가 선진국으로 갈수록 인기를 끄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뉴욕은 2017년 요가의 파워를 절감할 수 있는 최적의 도시다. 미국 전체를 통틀어 본격적 차원의, 요가 스튜디오가 처음 들어선 것은 1971년이다. 베트남 반전운동이 한창이던 시기로, 장소는 뉴욕 브룩클린이다. 요가 강습소가 1960년대부터 존재하기는 했지만, 인도인의 사교클럽 같은 성격에 그쳤다. 브룩클린의 스튜디오는 인도인이 아닌 백인을 대상으로 한 첫 번째 실험에 해당된다.


▎요가는 모디 총리가 등장하면서 국가적 차원의 정책으로 진화되고 있다.
한국전쟁을 통해 태권도가 미국인에게 선보인 지 20여 년이 지난 시점에 출발한 것이 바로 요가다. 1970년대 태권도의 열풍은 동양의 신비로 통했다. 록의 황제 엘비스 프레슬리도 태권도 수련생이다. 그러나 21세기 들어 상황은 역전된다. 브룩클린의 요가 스튜디오는 뉴욕을 통해 미국 전역으로 확산된다. 태권도는 도심부 주변에 남은, 어린이를 위한 스포츠 센터로 남아 있을 뿐이다.

태권도는 백인 중심을 파고드는 데 실패했다. 동양의 신비함에 대한 관심이나 어린아이의 호신용 무술 정도에 그친다. 이견도 있겠지만, 형이상학 차원으로 어필하지 못한 채 끝난 형이하학적 차원의 스포츠가 태권도다. 사실, ‘태권도=평화’라 생각하는 사람은 극히 적을 듯하다. 요가는 힘만이 아닌 정신을 지배하는 심신훈련으로 승격된다. 뉴욕은 ‘요가=평화’라는 이미지를 창조해낸 세계 요가의 전초기지에 해당된다.

지난해 6월 21일 열린 제 2회 세계 요가의 날은 필자가 처음으로 경험한 글로벌 요가열풍의 현장이다. 장소는 뉴욕 한복판 타임스스퀘어다. 뉴욕에 들르는 관광객이라면 가장 먼저 찾는, 송년 신년 행사가 열리는 뉴욕의 핵(核)에 해당된다. 가로세로 10m 이상의 디지털 전광판들로 가득 메워진 테크놀로지 테마파크와 같은 곳이 타임스스퀘어의 외관이다. 언제부턴가 ‘우주의 중심(The Center of the Universe)’이라고까지 불린다. 미국 내 세계 요가의 날 행사는 타임스스퀘어만이 아닌 도심지 곳곳에서 열린다. 뉴욕이 갖는 상징성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타임스스퀘어는 6월 21일 행사의 하이라이트에 해당된다.

맨해튼 42번가에서 47번가까지 무려 5개 블록을 오픈한, 도심 내 초대형 공간이 타임스스퀘어다. 관광객과 요가가 아니더라도 ‘이민대국’ 미국이란 나라의 모습을 한눈에 읽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중국인이 지배하는 맨해튼 관광버스, 네이키드 카우보이(Naked Cowboy)에 맞서 등장한 카리브해 여성들의 네이키드 카우걸즈(Cowgirls)·미키마우스·슈퍼맨·포켓몬으로 분장해 유료 기념사진에 응하는 히스패닉 캐릭터, 힙합과 스트리트댄싱으로 무장한 흑인 청년, 서울역 주변의 모습을 그대로 옮긴 천당-지옥 간판을 든 한국인 선교사. 타임스스퀘어를 우주의 중심이라 가정할 경우, 아마도 우주는 카오스(Chaos)에서 출발되는 요란한 드럼통 같은 존재일지 모르겠다.

가톨릭이 아닌 프로테스탄트 스타일의 조직 체계


▎미국 도심부 청년의 문화적 수준을 가늠하는 척도로 떠오른 요가.
평화의 상징이라는 요가가 그 같은 장소에서 치러진다는 것은 카오스에 맞서는 코스모스(Cosmos)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라고나 할까?

타임스스퀘어 안은 이미 수백여 명의 요가 수련생으로 가득 차 있다. 대형 무대 위에 선 요가선생의 구령에 맞춰 갖가지 요가 동작을 선보인다. 가슴을 펴고, 어깨에 힘을 뺀 채 몸을 똑바로 세운다. 팔과 다리를 힘껏 뻗고 시선은 코 바로 앞으로 떨어뜨린다. 요가는 특별히 왕도(王道) 수련법이 따로 없다. 일본의 차도(茶道)처럼 특별히 무슨 계파에 따른 정형화된 요가법도 따로 없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직접 나서서 만들어내 포교만 잘하면 나만의 계파로 독립해서 운영될 수 있다. 권위를 위에서 물려받는 수직 구도의 가톨릭이 아닌, 수평으로 이뤄진 제자백가(諸子百家)형 프로테스탄트 스타일의 조직 체계다.


▎요가는 힌두교 여신 요기니(Yogini)를 어원으로 한다. 요기니는 두 손가락을 입에 넣어 휘파람을 부는 여신이다.
인도를 중국과 구별, 구분할 때 가장 먼저 언급되는 것은 두 가지다. 돼지고기를 먹지 않고 민주주의 체제의 나라라는 점이다. 전체주의나 권위주의에 익숙한 사람들이 보면 인도는 민주주의를 넘어서 카오스의 국가로 비쳐질 듯하다. 인도를 경험한 한국인이라면 거리에 넘치는 거지들을 보면서 ‘인도=카오스’라는 이미지가 강할 것이다. 그러나 인도인이 보면 거꾸로 ‘한국=카오스’로 비칠 수 있다. 세계 1, 2위를 다투는 한국인의 자살률을 보면서 홈리스로 들끓는 나라는 과연 어떤 생각을 할까? 극빈층이 대부분인 인도의 자살률은 10만 명 당 10.3명(2007년 기준)이다. 한류와 IT강국이란 한국은 10만 명 당 27.3명(2013년 기준)에 달한다. 소득 3만 달러 나라에서 벌어지는 빈곤 노인, 입시에 시달린 청소년들의 자살을 인도인들은 과연 정상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카오스처럼 보이는 나라지만, 코스모스가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창조해낼 수 있는 나라가 인도다. 인도인의 세계관에서 탄생된 ‘제로’의 개념이 바로 그것이다. 세계 문명, 문화의 출발지인 고대 그리스인조차 손대지 못했던 형이하학적, 나아가 형이상학적 차원의 개념으로서의 제로의 의미를 정의, 확립한 곳이 바로 인도다. 더불어 불교를 통해 유심론적 관점의 무위(無爲)로서의 ‘제로(空)’의 의미를 발굴해낸 곳도 인도다. 카오스의 나라이기에 코스모스의 요가를 만들어낼 수 있고, 요가 계파 간의 권위나 정통성도 백인백색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계파를 무시하고 누구나 창조자로 나설 수 있는 세계가 요가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큰 틀은 갖추고 있다. 구체적인 요가 동작에서부터 요가의 의미·목적·방향에 관한 기본체계로, 크게 두 가지로 나눠진다. 하타(Hatha) 요가와, 라자(Raja) 요가다. 하타는 한자의 일월(日月), 음양(陰陽)을 의미한다. 라자는 최고, 왕이란 의미로 통한다. 요가는 전부 힌두교를 원류로 한 심신수련법이다. 보통 요가 스튜디오 입구에 부처상이 들어서 불교가 원조인 듯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잘못된 것이다. 힌두교는 불교를 자신의 아류 정도로 취급한다. 불교를 힌두교의 한 계파 정도로 생각한다. 명상에 든 부처는 불교에 기초한 것이 아닌, 힌두교 수련법에 따른 것이다. 시각적으로 부처가 요가 스튜디오의 상징으로 자리잡고 있지만, 불교보다 힌두교가 요가의 원조다.

로마 가톨릭이 요가를 부정하는 이유


▎요가의 확산은 불교를 비롯한 인도종교의 확산에도 기여한다.
하타 라자, 모두 30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장구한 수련법이지만, 크게 볼 때 심(心)과 신(身), 육신과 정신 어디에 방점을 두는가에 따라 이분된다. 하타는 명상 나아가 득도로 나아가기 위한 최적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조건으로서의 요가에 주목한다. 목적은 명상과 득도다. 그 같은 상태에 오르기 위해 하타 요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다양한 요가동작이 개발돼 있다. 현재 전 세계의 요가의 대부분은 하타 요가를 근간으로 한다. 머리를 땅에 박은 채 거꾸로 서는 것과 같은, 고난도 동작으로 올라갈수록 참다운 명상 나아가 득도 수준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하타 요가의 동작 하나하나가 전부 인도에서 창조된 것은 아니다. 요가가 서구에 알려지는 과정에서 인도 밖에서 조금씩 변형되고 개량된 것도 많다.

라자 요가는 19세기 들어 본격화된 것으로 다양한 요가 동작이 아닌, 명상을 위한 요가라는 측면이 강하다. 하타가 보여주는 고난도의 다양한 동작보다, 눈을 감고 똑바로 앉아있는 무위의 자세가 라자 요가의 핵심이다. 흥미롭게도 라자 요가는 당시 인도를 통치한 영국을 통해 세계에 확산된다. 라자 요가의 창시자격인 스와미 비베카난다(Swami Vivekananda)를 세계에 데뷔시킨 공헌은 당시 인도의 식민지종주국인 영국에 있다. 스와미 비베카난다의 탁월한 능력과 카리스마도 작용했지만, 영국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라자 요가가 미국을 비롯한 앵글로섹슨계 영역권으로 급속히 확산된다.

음모론으로 보자면, 명상을 통한 수련은 영국의 식민지 통치에 결코 불리하지 않다. 간디에서 보듯, 비폭력운동도 영국의 식민지 통치에 긍정적이다. 인도인의 자존심도 세워주고, 통치에 긍정적이란 점에서 인도의 신비가 한순간에 전 세계로 퍼져나간다. 필자의 판단이지만, 인도인의 경우 라자 요가에 한층 더 빠질 듯하다. 반대로 인도 밖의 사람들은 하타 요가를 한층 더 지지할 것이다.

하타와 라자는 닭과 달걀의 관계로 비쳐진다. 육신과 정신, 어느 것을 더 강조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육신과 정신을 하나로 연결해 설명한다는 점이다. 요가에서 말하는 정신은 인내·극기·희생과 같은 인간세계에서 접하는 가치에 국한되지 않는다. 희로애락, 길흉화복과 같은 인간적 상황과 한계를 전부 넘어선, 모든 것을 초월한 신과 동일한 선상에서의 정신이다. 로마 가톨릭이 요가를 부정하고 반대하는 이유는 바로 ‘신의 수준에 오를 수 있는 인간’이란 부분에서 비롯된다. 가톨릭은 신과 인간을 확실히 구별, 구분한다. 아무리 위대한 인간이라도, 마더 테레사와 같은 성인 수준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가톨릭이다. 요가는 다르다. 신과 인간을 구별하지 않는다.

필자가 생각하는 득도는, 신을 생각하고 천벌을 무서워한다는 점에서부터 출발한다. 고대 그리스 올림픽 경기장은 바로 득도의 현장이었을지 모르겠다. 원반던지기 하나에도 아폴로신에 대한 존경과 영광이 드리워져 있다. 신을 ‘염두’에 두는 것이 득도의 출발점이다.

요가 수련자들의 득도론은 필자와 정반대편에 선 듯하다. 천벌이나 신에 관한 생각 자체를 부정하는, 무념무상의 명상이 득도의 출발점이다. 무위를 통한 득도가 바로 요가의 핵심이다. 처음부터 신을 염두에 두면서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제로 상태에서 출발해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결과적으로 신을 만나는 식이다. 인간과 신을 이원화하지 않는다.

떼로 뭉쳐진 집단으로서의 요가


▎타임스스퀘어에서 만난 28세의 뉴요커 실비아는 요가야말로 심플 라이프의 상징이라고 말한다.
필자는 요가가 펼치는 득도론에 결코 반대하지 않는다. 신이 되려고 요가를 배우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지 의문이지만, 신이 갖고 있는 완벽함을 배우려는 자세를 교만하다고 비난할 수는 없다. 프로테스탄트 목사들은 예수를 닮고, 예수처럼 사는 것이 예수를 믿는 최고의 증거라고 말한다. 예수를 따를 뿐이지, 내가 예수가 되겠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사무라이론(論)에 따르면 진짜 칼잡이는 상대를 칼로 베는 바로 그 순간 힘을 뺀다고 한다. 손목 나아가 팔에서 나오는 파워를 상쇄하면서 칼의 흐름에 모든 것을 맡긴다. 칼잡이의 힘이 아니라, 힘이 들어간 칼이 상대를 베도록 그냥 맡긴다는 의미다. 살상력이 한층 강하다고 한다. 칼의 마모도 한층 더 감소시킬 수 있다. 더불어 내가 상대의 목숨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정의의 칼이 상대를 쓰러뜨린다는 명분도 얻어낼 수 있다. 올림퍼스 경기장에서 매번 신을 생각하는 고대 그리스인이 과연 얼마나 될까? 뭔가를 의도하거나, 강제로 힘을 넣은 상태가 아닌 제로의 상태에서 하나씩 쌓아가는 것이 한층 더 현명한 세계관일지 모르겠다. 신이 되기 위한 수련이 아니라, 신을 닮으려는 과정으로서의 요가다.

타임스스퀘어 집단 요가를 보면서 느낀 것은, 집단과 요가라는 두 단어 사이의 모순된 관계다. 왜 개인이나 소규모가 아닌, 떼로 뭉쳐진 집단으로 거리에 나와서 요가를 하는가라는 부분이다. 보통 득도와 명상은 고독한 상황과 환경을 기반으로 한다. 보리수 아래에서 행한 부처의 득도, 올리브 동산에서 행한 예수의 마지막 기도에서 보듯 고독한 시간과 시련이 득도와 명상의 기본 전제다.

집단 요가는 다르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다양한 인종과 배경의 사람들로 채워져 있다. 고독이 아닌 축제로서의 수련이다. 타임스스퀘어까지 직접 나와 1~2시간 남짓한 집단 요가 이벤트에 참가하는 정력과 정열이 대단하다. 필자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모습이지만, 셀피 카메라 하나만으로도 하루 종일 만족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밀레니얼 세대의 상식을 고려한다면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다. 원래 30대, 40대가 밀레니얼 세대로 규정되지만, 지구촌 모든 사람이 밀레니얼 세대 영역권인 듯하다. 70대 노인 부부의 연속 셀피도 전혀 낯설지 않은 것이 2017년 타임스스퀘어의 모습이다.

사실 집단 요가라고 하지만, 자세히 보면 참가자 한 명, 한 명 모두가 차별화돼 있다. 집단이란 단어에서 풍기는 획일, 단순화, 일사불란과 거리가 멀다. 모두가 개성적이다. 요가 옷차림만으로 자신을 차별화하는 것이 아니다. 어린아이를 등에 업은 30대 여성, 무려 세 마리 개와 함께 나선 50대 남성, 3대 모두가 출동한 아시아계 가족 군단, 체중이 150㎏은 될법한 뚱보 흑인여성 등등.

21세기를 살아가는 상식으로서의 ‘천동설’


▎미국 내 요가 인구가 3000만 명을 넘는다는 통계도 있다.
타임스스퀘어 집단 요가에 참가한 사람들의 모습과 생각은 필자가 매일 아침 접하는 페이스북 메시지의 업그레이드 버전처럼 느껴진다. ‘스스로에 대한 확신과 자부심’은 페이스북 메시지 가운데 절반은 차지할 듯하다. ‘지구의 중심은 바로 나 스스로’라고 믿는 천동설 세계관이다. 어디에 갔다, 뭘 했다, 뭘 먹었다, 누굴 만났다… 그런 메시지가 스스로의 커다란 셀피 얼굴과 함께 매일 아침 페이스북 화면을 점령한다. 좀 극단적으로 얘기하자면, 디지털 코스프레 현장으로서의 페이스북이라고 할까? 북한산에 다녀온, 수많은 주머니가 달린 등산복 차림의 50대 남성 메시지에 흥미를 갖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그 같은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 사람의 심리와, 사진을 올리고 텍스트 문장을 가다듬는 정력과 노력이 놀랍기도 하고 부럽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등산복 50대의 확신과 자부심 메시지는 ‘좋아요’ 엄지 손가락을 이미 수십 통확보한 상태다. 이쯤 되면 필자의 생각이 이상한 것이다.

타임스스퀘어 집단 요가는 ‘시대착오적 상식’으로 살아가는 필자와 같은 사람들을 위한 날카로운 자극이 될 수 있다. 지동설에 맡기는 수동적 인생이 아니라, 비록 천동설이라고 해도 자신을 확신하면서 능동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21세기 상식이다. 어두운 방안에 모여 앉아 논의하던 폐쇄형이 아니라, 환한 밖에 나와서 거리 전체를 무대로 한 개방형 세계관이 타임스스퀘어 집단 요가의 파워이자 능력이다. 머리 염색, 문신조차 비밀로 하던 때가 있었지만, 지금은 성형수술 내역과 수술비용도 모두에게 공개할 정도다. 옳고 그르고가 아니라, 시대의 흐름이다. 빠르게 변할수록 시대의 흐름은 내심 불안하고 불쾌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21세기 천동설은 결코 폭력적이 않다. 명상적이고도 평화적이며, 반항아 갈릴레오의 생각도 인정하는 착한 천동설이 이 시대의 논리다. 요가는 바로 착한 천동설 신자들을 위한 글로벌 수호신이다. 소셜 네트워킹을 통한 셀피 얼굴 메시지가 늘어날수록, 요가를 통한 나만의 확신과 자부심은 한층 더 확대, 확장될 것이다. 집단 요가에서 보듯, 천동설 신자들간의 굳건한 연대를 통해 세상에 대한 확신과 자부심을 한층 더 드높일 것이다. 유엔이 말했듯이, ‘요가=평화’라는 사실은 결코 틀리지 않은 듯하다.

유민호 - 미국 워싱턴에 있는 에너지·IT 컨설팅 회사 ‘퍼시픽21’의 디렉터. ‘딕 모리스 선거컨설턴트’ 아시아 담당.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방송(SBS) 기자로 일하다가 1994년 일본 마쓰시타정경숙 15기로 입숙해 5년 과정을 마치는 동안 125개 나라를 순회했다. 조지워싱턴 대학 E-Politics 프로젝트 디렉터, 일본경제산업성 연구소(RIETI) 연구원을 지냈다. <백악관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국 소프트파워> <미슐랭을 탐하다> <일본직설>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201707호 (2017.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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