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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 사악한 전쟁, 탁월한 통찰 

 

한기홍 월간중앙 선임기자 glutton4@joongang.co.kr
20세기의 모든 것을 빨아들인 블랙홀의 잔영… 인간과 역사를 결합한 스토리텔링 방식의 2차대전사

▎제2차 세계대전 / 앤터니 비버 지음┃김규태·박리라 옮김┃ 글항아리┃2만4900원
전쟁의 기록을 읽는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전쟁 자체가 참혹한 것이기도 하고, 그 기록은 종종 전쟁을 미화하는 데 동원되기 때문이다. 전쟁을 가장 사악하게 미화하는 것은 전우애를 강조하고, 전쟁 영웅을 드라마처럼 그리는 것이다. 전쟁이 아무리 끔찍한들 언어나 영상을 통해 그 참화를 온전히 드러낼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전쟁물은 어느 정도는 전쟁을 긍정하는 바탕 위에 성립한다. 좋은 전쟁과 나쁜 전쟁을 구분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히틀러와 맞선 정의로운 군대(연합군)의 역할에 우리는 대체로 긍정하지만, 그들 역시 전쟁 그 자체의 잔인성은 조금도 줄이지 못했다. 전쟁의 고통을 기록한 다큐멘터리의 백미(白眉)가 있다. 2차대전 때 독일군으로 동부전선에 복무했던 기 사예르의 기록 <잊혀진 병사>(2007, 루비박스)가 그것이다. 주인공은 1942년부터 1945년 봄까지 ‘대독일 사단’의 보병으로 소련군과 맞서 싸웠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적을 죽일 수밖에 없었고, 살인자라는 번민 속에서 괴로워했다. 이 책은 하나의 거대한 고문서(拷問書)라 할 수 있다. 735쪽을 완독하는 동안 수면 중에 여러 차례 가위에 짓눌렸다. 주인공이 겪었던 극한의 고통과 공포가 흑백영상처럼 꿈속에 재현됐기 때문이다.

<잊혀진 병사>가 ‘전쟁은 절대악’이란 신념을 선언했다면, 앤터니 비버의 <제2차 세계대전>은 전쟁에 대한 구조적 이해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번역의 질이나 읽는 재미에서 탁월한 수준을 보여주는 책이다. 예컨대 1939년 8월 전쟁의 발화점이 된 독일의 폴란드 침공 당시의 역사복원은 단연 생생하다. 히틀러는 이 거대한 전쟁을 시작하며 어떤 외교적 계산과 강박적 심리에 빠져 있었던가. 인간의 사악한 본성이 역사 흐름에 교묘하게 탑승하는 명장면이 그려진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견지된 앤터니 비버의 관점은 <잊혀진 병사>의 전쟁 고발과 상통하는 측면이 있다. 엄청난 규모의 학살에 따르는 광기와 공포, 피도 눈물도 없는 군인들의 괴이한 모습, 극심한 기아를 이기지 못하고 자신의 아이를 잡아먹은 레닌그라드 시민의 이야기, 베를린을 ‘해방’한 후 거의 모든 여자를 강간한 러시아 군인의 만행이 그려진다. 묵시록과 같은 전장에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이타적인 행동을 보여주는 진짜 인간의 이야기도 있다.

저자는 한 사건의 다양한 측면을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배열하는 데 능하다. 학자인 동시에 탁월한 작가이기 때문이다. 최신 학술 자료를 활용해 북대서양과 남태평양 전역(戰域), 북아프리카 사막과 미얀마 밀림에서 벌어진 전투를 열정적으로 탐구했다. 국경선의 SS 절멸부대, 처벌대대에 징집된 굴라크 죄수들, 중일전쟁에서 보여준 일본군의 극악무도함도 파노라마처럼 엮었다. 총론을 읽었다면 각론에 들어가도 좋겠다. 저자가 쓴 <피의 기록, 스탈린그라드 전투>나 <디데이:1944년 6월 6일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이에 해당된다. 둘 다 2차대전사의 클래식으로 일독할 가치가 있다.

- 한기홍 월간중앙 선임기자 glutton4@joongang.co.kr

201709호 (2017.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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