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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밀분석] '악마의 해결사’ 키신저의 한반도 위기 해법은? 

“고통, 불이익 수반하는 타협 될 것” 

유민호 월간중앙 객원기자, ‘퍼시픽21’ 디렉터
키신저, 트럼프에게 중국 중심의 北 핵·미사일 해결방안 제시한 듯...영국 항공모함에 이어 호주와 NATO 군사력도 한반도 전개 가능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오른쪽)이 10월 10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우리가 주도적으로 어떻게 할 여건이 못 된다.”

“우리에게 해결할 힘도 있지 않고, 우리에게 합의를 이끌어낼 만한 힘도 없다.”

문재인 대통령이 10월 초와 7월에 스스로 밝힌 북핵 관련 심정이다. 무능한 대통령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문 대통령 지지자는 ‘그렇다면’ 대안을 제시해보라고 말한다. 누가 옳고 그른지는 중요하지 않다. 국내에서나 통하는 우물 안 논리일 뿐, 피해는 결국 한반도로 집약된다.

이미 상식화돼서 ‘감’이나 ‘거리’도 안 되겠지만 한국 밖으로 나가는 순간, 서울의 운명을 한순간에 결정할 얘기들이 난무한다. 악의 공격을 깔끔하게 처리해 줄 수퍼맨을 기다리는 심정이겠지만 북의 핵공격이란 최악의 가정도 염두에 둬야 한다. 1990년대 터진 앙숙 인도·파키스탄 사이의 핵개발과는 차원이 다르다. 한반도는 물론 일본·미국 나아가 자유진영 전체를 볼모로 한 인질 협박이 북핵 문제의 본질이다.

한반도 핵 시뮬레이션은 십만, 백만 단위 피해자가 생길 것으로 전망한다. 핵문제는 그날 그 순간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당장 닥칠 엄청난 사상자도 공포로 와 닿지만 방사능 낙진으로 인한 피해는 대대손손 지속된다. 육체적 피해만이 아닌 심리적·사회적 문제도 발생된다. 히로시마·나가사키 출신자를 자식의 배우자로 받아들이는 데 부정적인 것이 21세기 보통 일본 부모들의 심정이다.

운전석에 앉아 직접 방향을 결정하지 않을 경우 ‘역할 제로’라 믿는 것이 한국 정치가의 고질적 습성인 듯하다. 국내 정치가 그러하듯이 국제 정치도 ‘전부 아니면 전무(All or Nothing)’식 제로섬으로 이해한다. 해결할 힘이 없다는 한국 대통령의 고백은 그 같은 자세의 연장선에서 해석될 수 있다. 조수석 아니 짐칸에 앉아서도 운전의 방향에 영향을 줄 수 있다. 적어도 운전대를 잡은 주도권자의 졸음운전을 막는 역할은 할 수 있을 것이다. 뒤에서 달려오는 과속 오토바이에 대한 경계심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얘기는 ‘할 수 없다’는 얘기로 집약된다. 한국보다 한층 더 운전석에서 밀려난 일본의 대응이나 움직임에 비해 너무도 소극적이고 자포자기에 가깝다. 화합·민족·통일과 같은 거대 담론에 대한 통 큰 열정과 달리 당장 눈앞에 닥친 십만, 백만 단위 목숨에 대한 얘기는 ‘역부족’ 문제로 밀려날 뿐이다.

2017년 가을의 워싱턴은 언제나 그러하듯 바쁘고 역동적으로 돌아간다. 트럼프에 대한 비난과 욕설로 낮과 밤을 새는 듯하지만 사실 언제부턴가 트럼프 탄핵이란 단어도 사라졌다. 흔히 트럼프는 역대 대통령 가운데 최악의 국민 지지율에 기초한 지도자로 평가된다. 페이크(Fake) 뉴스에 불과하다. 미군철수 문제를 공론화한 지미 카터 대통령은 28%, 원자폭탄 투하를 결정한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22%, 베트남전쟁을 일으킨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24%대의 지지율로 국정을 이끌었다. 빌 클린턴,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같은 50%대의 지지율이 비정상적일 뿐, 40%에 가까운 트럼프에 대한 지지율은 결코 낮은 수치가 아니다.

클린턴과 오바마에 익숙하기 때문이겠지만 미국 대통령사로 보면 ‘트럼프=미친 대통령’으로 판단하기 어렵다. 그러나 트럼프는 한국에서조차 맛이 간 인물로 처리된다. 항상 강조하지만 리버럴 미디어가 가장 큰 이유다. 신문·방송·SNS를 포함한 미국 미디어의 80% 이상은 반(反)트럼프, 리버럴 정서의 화신이다. 미식축구 선수들의 국기에 대한 비례(非禮)에는 눈을 감는다. 대신 트럼프를 흑인 선수들에 대한 인종차별주의자로 매도하는 것이 미국 미디어의 대세다. 미국 국민은 그 같은 리버럴 미디어의 편견에 익숙해 있다. 트럼프의 트위터는 그 같은 편견에 대한 반발이자 대응책이다. 리버럴 미디어의 길고 긴 심층기사보다 트럼프가 보내는 100단어 트위터 하나가 더 큰 의미와 가치로 와 닿는다. 한국은 그 같은 미국의 상황에 무지하고 보통 미국인의 내면(內面) 읽기에도 무심하다.

94세 키신저의 예언 ‘강대국만의 평화’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왼쪽)이 지난해 12월 중국 인민대회당에서 시진핑 국가주석을 만났다.
역부족·고립론·자포자기론이 지배하던 10월 초 워싱턴과 런던에서는 의미심장한 뉴스가 터져 나온다. 전쟁과 평화 사이를 오가는 한반도의 현실을 반영하듯 극(極)과 극(劇)의 뉴스가 대서양을 마주보며 동시에 등장했다. 뉴스메이커를 보면 워싱턴은 헨리 키신저 전(前) 국무장관, 런던은 항공모함 퀸엘리자베스호(號)다. 글로벌 장수만세 사전에 오를 만한 국제외교의 거두(巨頭) 키신저와 무려 68척의 호위함을 거느린 최신예 영국 항공모함이 필자가 주목한 뉴스의 하이라이트다.

10월 10일 터진 워싱턴 상황부터 보자. 트럼프가 11월 한·중·일 방문에 앞서 연 기자회견장에 자문 역할을 한 키신저가 나타났다.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존경과 감사의 인사를 교환했다. 키신저의 집과 연구소는 뉴욕에 있다. 넓다고 생각되지만 지극히 좁은 곳이 뉴욕이다. 부동산 경영자 트럼프가 뉴욕에서 수많은 파티를 통해 키신저와 알고 지내던 사이였으리란 추론이 가능하다. 회견장에서 트럼프는 키신저가 자신의 친구이기도 하다고 밝힌다.

황당한 생각이지만 키신저는 인간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든다. 불로장생 유령 같은 존재다. 키신저는 1923년 5월 27일생으로 현재 94세다. 155㎝ 단신의 노인이지만 병원 생활과 무관한 것은 물론 부인과 함께 턱시도 차림으로 명사들의 파티에도 등장한다. 잊을 만하면 신문·방송을 통해 국제정치에 관한 고견(高見)을 전 세상에 알린다. ‘키신저가 말했다…’는 옳고 그르고의 문제가 아니라 곧 그렇게 될 것이란 예언서로 통한다.

트럼프·키신저 만남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얘기가 오갔는지에 대한 뉴스는 보도되지 않았다. 언젠가 밝혀지겠지만 회견장에서 키신저는 두 마디 인사말로 만남에 대한 분위기를 전달했다. “건설적이고도 평화로운 세계를 만들 수 있는 이 순간, 백악관에 초대된 것은 특히 의미 깊다. 대통령은 곧 아시아로 떠날 것이다. 거기서 대통령은 평화와 번영을 위한 큰 공헌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외교의 본질 ‘강한 나라를 약하게 만든다’


▎지난 9월 3박5일간 미국 순방을 마치고 경기도 성남 서울공항을 통해 귀국하는 문재인 대통령과 부인 김정숙 여사.
‘평화’는 키신저 메시지의 키워드다. 전쟁이 아닌 평화가 아시아로 향하는 트럼프에게 내던져진 조언의 핵심으로 느껴졌다.

필자는 키신저에 관한 소중한 기억을 하나 갖고 있다. 3년 전인 2014년 9월 워싱턴이다. 17권에 달하는 키신저의 저서 중 마지막에 해당되는 <세계질서(World Order)> 출간에 맞춰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가 출판 기념식을 개최했다. 책 사인회와 함께 키신저가 국제정세에 관한 얘기를 전했다. 운 좋게 표를 얻어 참가했지만 당시 CSIS에서의 기억은 키신저, 나아가 미국의 대외정책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근거로 자리 잡았다. 건방진 얘기지만 필자는 키신저가 트럼프에게 무슨 말을 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근거는 3년 전에 발간된 책 <세계질서>에 있다. <세계질서>는 무려 70년간 외교무대에서 활약한 키신저의 평소 생각을 종합한 것이다. <세계질서>는 2011년 중국 문제에 집중한 <중국론(On China)> 이후 출간된 키신저의 최근작이다. 전 세계를 범주로 한 정치·외교 역사서가 <세계질서>다. 420쪽의 두꺼운 책으로 9개 장과 결론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지금 당장 미국이 어떤 외교를 하는 것이 좋은가라는 정답을 구하는 책이 아니다. 역사를 통해 본 교훈, 그리고 외교 현황을 키신저 나름의 분석 프레임으로 설명한다.

책의 핵심은 제1장 ‘30년전쟁’에 관한 부분이다. 30년전쟁은 1618~1648년 유럽에서 벌어진 최후의 종교전쟁이자 최초의 국제전쟁에 해당된다. 레알폴리티크(Realpolitik), 데탕트(Detente), 라프로쉬망(Rapprochement)은 키신저를 상징하는 중심 키워드다. 현실정치, 화해, 친선이란 의미다. 레알폴리티크는 독일어, 데탕트와 라프로쉬망은 프랑스어다.

키신저는 유럽 외교를 본격적으로 미국 정치무대에 소개하고 실천한 인물이다. 종교·정치·인종과 같은 이념이나 가치가 아니라 현실에 기초해 어떤 파워를 만들어 나갈지를 보여준 것이 30년전쟁의 교훈이라는 것이다. 한 번 적은 영원한 적이 아니다. 적이라 해도 언젠가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레알폴리티크의 정의다. 이념이나 원칙론에 사로잡혀 스스로의 목을 죄는 국제 정치나 외교가 아니다. 원칙과 이념보다 장·단기적인 국가이익을 우선하라는 현대판 마키아벨리즘이 핵심이다.

30년전쟁 당시 프랑스가 구교를 배신하고 신교를 지원한 이유는 너무 커진 신성로마제국이 프랑스의 번영을 위협하는 존재가 됐기 때문이다. 신교를 지원할 경우 작은 제후국 수준에 머물러 있던 독일계 연방 국가들이 합스부르크계 신성로마제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있다. 가톨릭세계의 힘이 빠지기도 하지만 프랑스에 대한 강국의 위협이 감소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 같은 프랑스의 생각은 전쟁이 끝난 뒤 사실로 나타난다. 영국은 이 같은 유럽 대륙의 흐름을 지켜보면서 ‘강한 나라를 약하게 만드는 외교’에 주력한다. 상대가 이교도든 친구든 상관없다. 강해지면 적이 될 수 있기에, 강한 상대를 약하게 만드는 일이라면 유럽 열강 모두가 발벗고 나선다. 그 같은 열강의 외교 방침은 21세기인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원래 현실과 생존에 목을 매는 레알폴리티크는 약소국의 외교 행태 중 하나다. 경우에 따라서는 간도 쓸개도 다 내주는 식의 외교다. 반대로 대국은 그냥 일방적으로 선언한 뒤 “나를 따르라!”는 식의 원웨이(Oneway) 외교에 익숙하다. 키신저는 대국 미국도 레알폴리티크의 길에 들어서야 한다고 주장한 미국 역사상 최초의 외교수장이다. 실리를 위해서라면 모두에게 맞추면서 얼굴색도 바꾸라는 것이다.

21세기 관점에서 보면 키신저의 생각은 너무도 당연하다. 종교·정치·이념이 아닌 현실과 생존이 우선이란 것은 삼척동자도 이해할 만한 상식이다. 그러나 선진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그 같은 상식이 비상식으로 받아들여진다. 소국의 경우 한층 더 탈레반 스타일 이념형 일방외교에 매달린다.

레알폴리티크의 정반대편에 선 한국


▎서울 명동의 한 사설환전소에서 외국인 관광객들이 환전을 하고 있다. 한·중은 560억 달러 수준의 통화스와프를 3년 연장했다.
560억 달러 수준의 한·중 통화스와프 3년 연장 뉴스가 들려왔다. 일본 신문·방송은 더 많은 중국발 통화스와프가 제공될 가능성도 높다고 보도한다. 지난 10월 초, 한·중 통화스와프 연장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 한국에 금융위기가 닥칠 수 있다는 분석이 제기됐다. 북핵 리스크가 가장 큰 이유지만 중국발 통화스와프 중단이 불에 기름을 부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시중 금융위기 루머 중에 흥미로웠던 건 한·일 통화스와프에 대한 한국 정부의 무관심이다. 원래 700억 달러 수준이었지만 2015년 2월 중단된 협정이다. 종군위안부 소녀상, 역사 문제와 관련된 양국 간의 이견 때문이다. 키신저에 따르면 역사나 소녀상은 종교나 이념에 해당되는 장애물에 해당된다. 한·일 두 나라가 서로를 비난하는 과정에서 700억 달러 한·일 통화스와프가 희생양이 된 것이다. 중국의 위안(元)은 아직 국지적 통화에 그친다. 일본의 엔(円)은 달러 수준은 아니더라도 기축통화에 끼인다. 세계경제가 출렁거리거나 한반도 위기설이 보도될 때 일본 엔화 가치는 반드시 급상승한다. 영향력은 달러보다 약하지만 안정성이란 측면에서 보면 일본 엔화가 세계 최고다.

잘 알려져 있듯이 중국·일본의 통화스와프는 자국 통화인 위안과 엔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 금융위기가 닥칠 경우 위안과 엔에 대한 국제적 대응은 전혀 다르다. 중국 위안이 아니라 일본 엔에 대한 수요가 더 많다. 같은 통화스와프라도 전혀 다른 가치로 받아들여진다.

금융위기를 맞을지도 모를 나라가 보여주는 굳건한 역사의식을 키신저는 어떻게 해석할까? 반대로 560억 달러 규모의 통화스와프에 목을 매는 중국에 대한 한국의 저자세는 어떻게 볼까? 일본이 자세를 바꿔 700억 달러를 풀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듯하다. 일본은 700억 달러를 한국에 지원하면서까지 매달릴 만한 현실적·생존적 차원의 위기감이 없다. 한국은 다르다. 물론 현실이나 생존이 아니라 역사와 민족을 앞세울 경우 대응할 만한 논리를 찾기 어려워진다. 이성이 아니라 감정의 문제로 접어들기 때문이다. 키신저에게는 상식이지만 선진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비상식으로 통용되는 것이 레알폴리티크다. 문자 그대로 레알폴리티크는 감정이 아닌 현실과 이성에 기초한 명분이자 논리다. 한국은 레알폴리티크의 정반대편에 선 좋은 예일 듯하다.

트럼프의 11월 아시아 방문은 북핵 문제에 관한 최후통첩 투어라는 성격이 강하다. 전쟁이 될지, 키신저가 말하는 평화가 될지 어떤 식으로든 결론이 날 것으로 전망된다. 북핵문제와 연결해 볼 때 키신저의 트럼프에 대한 조언은 간단하다. 북한·한국·일본이 아닌 키신저의 전문 영역인 중국을 염두에 둔 외교적 해결법이 핵심이다. 사실 키신저는 저서 <세계질서>의 절반 정도를 중국과 연결해 분석한다. 서방의 역사를 설명하지만 현실정치라는 측면에서 중국을 어떻게 다루고, 다뤄왔으며, 다뤄야 할지에 대한 얘기로 채워져 있다.

7쪽에 불과한 한국 관련 지면에서도 한국이 아닌 중국이란 거울을 통해 본 에피소드로 처리한다. 한국전쟁은 미국이 중국과 처음으로 무력으로 대응한 역사적 교훈이다. 한국전쟁 부분에서 키신저는 말한다. “1950년 말 미군의 북진(北進) 당시 원산에서 마지막 전선을 구축했다면 중공군의 참전도 막아내면서 결국 한국이 통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중국을 자극하지 않았더라면) 미군의 피해도 줄이고, 압록강 근처까지 쫓겨 갔던 김일성 공산정권도 주민 이탈과 함께 붕괴됐을 것이다”

한국전쟁을 예로 본다면 키신저의 조언은 명확하다. 중국과는 적당한 선에서 타협해 북핵 해결에 나서야 한다는 논리다. 북한의 핵 보유,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개발, 주한미군 철수, 북·미 평화협정 체결 등 모든 문제가 미·중 간 거래로 해결하라는 게 키신저의 주문일 것이다.

키신저의 조언을 염두에 둘 경우 ‘역부족 능력 밖’이란 자포자기 외교논리에 빠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할 듯하다. 미·중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판에 직접 나서서 뭘 할 수 있을까라고 항변할 수도 있다. ‘우는 아이에게 떡 하나 더 준다’는 말을 기억하는 것이 좋다. 필자의 주관적 판단이지만 울기는커녕 여유, 나아가 허세를 부리는 것이 밖에서 본 서울의 모습이다. 남으로 향해 터질 북핵 문제조차도 키신저 스타일 레알폴리티크의 대상으로 간주하는 곳이 바로 한국이다.

미·중 거래의 산물 ‘북·미 평화협정’


▎영국이 사상 최대 규모로 건조한 항공모함 퀸엘리자베스호가 첫 시험 항해에 나서는 모습.
간단히 말해 적·우방·동맹국이 누구인지조차 헷갈리는 곳이 2017년 가을의 한반도다. 키신저가 말하는 레알폴리티크, 데탕트, 라프로쉬망은 소국의 희생을 전제로 한 대국 간 논리다. 중국이 세계의 경제대국·군사대국으로 커가는 상황에서 한국은 물론 일본도 세력균형을 위한 카드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것이 키신저 국제정치론의 이면이다.

공화당·민주당 지지자 모두가 싫어하는 인물이지만 위기시에는 모두가 찾는 ‘악마의 해결사’가 바로 키신저의 진짜 모습이다. 미국과 중국은 웃는 얼굴로 끝나겠지만 딜(deal)의 대상이 될 나라는 피눈물을 흘리며 고통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전쟁을 통한 거래만이 아닌 평화라는 이름 속에서 이뤄지는 딜도 결코 달콤하지 않을 것이다. 그 같은 상황에 대한 전조(前兆)가 바로 11월 트럼프의 한·중·일 방문에서 나타날 전망이다.

워싱턴발 키신저 관련 뉴스의 핵심을 ‘평화에 기초한 딜’이라고 할 때, 런던발 항공모함 퀸엘리자베스는 무력에 기초한 일방통행으로 해석할 수 있다. 지난 10월 9일 영국 신문·방송은 최신식 전투기 F35B만도 36기를 탑재하고 있는 퀸엘리자베스가 북한 유사시 미군과 함께 작전에 들어갈 것이라고 보도했다. 원래 퀸엘리자베스는 2020년부터 실전에 배치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북핵과 관련해 위기가 점증하면서 곧바로 한반도 주변에 급파될 수 있도록 실전배치를 서두르고 있다고 한다. 트럼프의 ‘북한 초토화, 태풍 직전의 고요’ 발언에 맞춘 방침이라는 것이다.

영국 국방장관 마이클 팰런은 북핵이 영국에도 실질적인 위협이라고 강조한다. 런던은 북핵 도달 가능 지역인 로스앤젤레스보다 더 근접한 거리에 있다고 영국 국민에게 알린다. 북핵은 미국만이 아닌 영국, 나아가 유럽 전체의 위협이 된다는 의미다. 한반도 유사시 퀸엘리자베스 파견은 그 같은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정당방위이자 자위책에 해당된다.

퀸엘리자베스의 한반도 파견 소식은 20세기 이래 지속된 미·영 동맹의 일면을 보여주는 증거다. 일찍이 기고한 글에서 강조해왔지만 항공모함의 수를 통해 전쟁 발발이나 발생 시기에 관한 예측이 가능하다. 전선에 따라 다르지만 미국의 경우 최소 3대의 항공모함이 모일 경우 전쟁이 임박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미국의 전력은 눈에 보이는 것만이 아닌 후방 지원업무를 통해 한층 강화된다. 영국은 전방은 물론 후방 업무를 지지·지원하는 미국의 동맹국이다. 간단히 말해 미군이 가는 곳이라면 그 어디라도 영국군을 볼 수 있다. 21세기 전쟁터인 아프가니스탄·이라크·리비아·시리아 그 어디에서도 일심동체다. 영국만이 아닌 세계 전역에 흩어져 있는 영연방 동맹국도 포함된다.

영국 항공모함이 움직일 경우 호주·뉴질랜드 군대의 한반도 투입도 기정사실이다. 미군은 영국 항공모함을 통해 전력뿐만 아니라 전쟁의 명분과 정당성을 갖게 된다. 영국 항공모함의 한반도 투입은 전쟁 준비 막바지 단계에 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퀸엘리자베스가 영국을 떠나 한반도까지 오려면 나흘 정도 걸린다. 각종 변수들을 고려한다고 해도 맘만 먹으면 1주일 내에 전쟁을 시작할 수 있는 체계가 이미 정비된 셈이다. 현재 막바지 단계에 들어서 있지만 영국에 이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한반도 투입도 가시화될 것이다.

필자의 집 주변에는 교회 공동묘지가 있다. 작지도 크지도 않은 아담한 규모로, 묘비가 200여 개다. 미국의 묘비명은 대부분 극히 짧은 단문이다. 단문의 묘비명도 음미할 겸 공동묘지를 자주 들른다. 갈 때마다 항상 찾아 인사를 올리는 묘비가 하나, 아니 둘 있다.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얼굴도 모르는 관계지만 공동묘지에 가면 반드시 찾는다. 펄설(Persall)이란 이름의 부자(父子) 묘지다. 부인이나 다른 피붙이도 없이 두 사람만 달랑 들어선 무덤이다.

키신저는 당근, 퀸엘리자베스호는 채찍


▎1953년 24세 나이로 한국전쟁에서 전사한 미군 펄설 주니어와 아버지 펄설의 무덤. / 사진· 유민호
아버지 펄설은 1905년에 태어나 1957년 세상을 떠났다. 아들 펄설 주니어(Jr.)는 1929년에 태어나 1953년 7월 4일 저세상으로 갔다. 미국 독립기념일에 2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아버지보다 4년 먼저 뜬 ‘불효자’인 셈이다. 추측컨대 아들의 죽음은 52세로 마감된 아버지 펄설의 단명(短命)과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 아들의 죽음과 더불어 고독하고도 슬픈 시간이 아버지에게 밀어닥친 것 같다.

아들 펄설 주니어 무덤 앞에는 작은 성조기가 하나 있다. 미국 공동묘지의 특성이지만 국기는 전사하거나 퇴역한 군인 무덤의 상징이다. 군 복무 경력은 묘비명 대부분을 차지한다. 백만장자나 세상을 움직인 파워맨에 관한 화려한 경력과 달리 군대 경력이 묘비명에서 가장 중요하다. ‘대통령’이 아니라 ‘제1차 세계대전 참전용사’라는 묘비명이 대리석에 새겨진다. 짧지만 펄설 주니어 묘비명도 군대 경력만으로 채워져 있다. ‘한국전쟁 당시 미 육군 제48보병 상사로 근무 중 전사’. 펄설 부자의 무덤에 갈 때마다 느끼지만 또 한반도에서 전쟁이 터질 경우 펄설 주니어 같은 전사자를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교회 공동묘지에 있는 전사자 무덤은 한국전쟁 참전자가 마지막이다. 제1차, 제2차 세계대전 참전자는 많지만 한국전쟁 이후 전사자는 더 이상 없다. 물론 아프가니스탄·이라크 전사자도 전혀 없다. 추세로 보면 북핵문제는 한반도 내국지적 차원의 문제로 제한될 것이다. 키신저가 당근이라고 할 때 항공모함을 앞세운 미국과 영국의 움직임은 채찍에 해당한다. 당근과 채찍, 어디로 향할지는 이른 시일 내 판명될 것이다. 전쟁과 평화, 어디로 가든 전후(戰後) 굳어진 70여 년 한반도체제의 격변이 점쳐진다. 한국전쟁 휴전을 눈앞에 두고 세상을 떠난 펄설 상사의 죽음이 헛되지 않길 바랄 뿐이다.

- 유민호 월간중앙 객원기자, ‘퍼시픽21’ 디렉터

201711호 (2017.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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