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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인터뷰] 복서→사업가→가수 ‘카멜레온 인생’ 황충재 

“노목에 꽃이 피니 마음은 늙지 않았더라” 

최경호 월간중앙 기자
절친 설운도의 곡 ‘뻥이야’로 가수 데뷔 후 왕성한 활동…“자만은 곧 나락, 꿈 위해 노력하는 데는 나이 제한 없어”

▎황충재가 인터뷰 후 카메라 앞에서 익살스러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작은 사진은 20대 젊은 시절의 황충재.
연보라색 머리는 올백으로 가지런히 빗어 넘겨 한데 묶었다. 왼쪽 귓불에는 은색 귀걸이를 달았다. 턱수염은 흰색으로 염색했다. 황금색 자수(刺繡)가 놓인 검은색 의상은 그 자체로 무대복(服)이었다.


▎권투선수 출신 가수 황충재가 월간중앙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걸어온 길과 앞으로 걸어갈 길에 대해 담담히 말했다.
1980년대 초 아시아를 주름잡던 철권(鐵拳) 황충재(60). 황충재가 글러브를 벗은 지 30여 년이 흐른 지난해 뜻밖에도 가수로 변신했다. 황충재가 ‘형님’으로 모시는 남진의 권유, 그리고 절친한 벗 설운도의 도움이 컸다. 설운도는 황충재에게 데뷔곡 ‘뻥이야’(작사 이수진, 작곡 설운도)를 선물했다.

이순(耳順) 나이에 새로운 일에 도전한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을 터이다. 월간중앙과 만난 자리에서 황충재는 “진부하게 들릴지 몰라도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데 나이는 걸림돌이 될 수 없다. 많은 분에게 권투선수 황충재가 가수가 됐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다”면서 환한 웃음을 지었다.

복서와 가수, 잘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데 어떻게 가수가 될 생각을 하셨나요?

“전혀 계획에 없던 일이었죠. 작년 초 어느 날 술 한잔하고 노래를 흥얼거리는데 남진 형님이 ‘충재야 너 노래 한번 해보면 어떻겠냐. 네 친구 (설)운도가 작사·작곡을 잘하니 부탁해 봐라. (이)동준이도 운도한테 곡 받았잖아?’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옆에 있던 친구 (이)효필이가 씩 웃으면서 거들고 나서는 겁니다. ‘충재야, 이런 노래를 불러봐. 여자친구한테 밴틀리 사준다고? 뻥이야, 뻥이야’.”

이효필은 박종팔과 함께 80년대 한국복싱을 대표하는 중량급 강자였다. 그는 10여 년 전에는 ‘핵주먹’ 마이크 타이슨과의 대결을 추진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황충재·박종팔·이효필은 58년생 개띠 동갑내기이자 흉금(胸襟)을 터놓고 지내는 친구 사이다(황충재는 호적상 59년생).

‘김두한’ 되려고 배운 복싱


▎아시아의 복싱 영웅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왼쪽부터 황충재, 매니 파퀴아오(필리핀), 전 라이트플라이급 세계챔피언 장정구.
그렇다 하더라도 가수가 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셨을 텐데요.

“남진 형님이 가수로 변신을 권하시면서도 ‘권투선수 시절보다 더 노력할 각오가 돼 있으면 (가수를) 하라’고 하셨죠. 처음에는 가수와 복싱을 비교한다는 게 이해가 안 됐습니다. 그런데 막상 가수가 되고 보니 그 말 뜻을 이해하게 됐어요. 남진 형님은 지금 그 나이(72세)에도 하루에 8시간씩 노래 연습을 합니다. 그러니 저렇게 신곡을 쏟아내는 겁니다. 무대에 올라간다는 것은, 팬들이 듣고 싶은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계획 없이 가수를 시작했지만 다시 각오를 다지고 있습니다.”

본인에게 가수의 기질, 연예인의 끼가 있다고 확신하셨나요?

“원래 음치였어요. 1978년 방콕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 따고 돌아와서 뒤풀이로 선배들과 나이트클럽에 간 적이 있어요. 형들이 자꾸 시키길래 장욱조 선배의 ‘고목나무’라는 노래를 불렀는데 음정·박자 모두 엉망이었죠. 은퇴 후 한동안 술을 자주 마시게 됐고 또 그럴 때마다 노래도 불렀습니다. 노래도 자주 부르다 보니 늘더라고요.(웃음) 권투를 해서 그런지 몰라도 원래 몸놀림은 가볍고 유연합니다. 그래도 제대로 해야 하니까 요즘 ‘춤선생님’한테 마이클 잭슨의 문워크(moon walk)를 배우고 있습니다.”

연예계에 인맥이 넓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권투선수) 은퇴하고 나서 탤런트 송기윤 형님의 서울 송파 집에서 2년 정도 같이 산 적이 있어요. 당시에는 기윤이 형님도 총각이었으니까요. 그때 송경철·이계인·유인촌 형님, 친구 김흥국, 최수종·허준호·최재성·윤다훈 아우 등과 많이 가까워졌습니다. 태권도선수 출신 탤런트 겸 가수인 (이)동준이와는 객지에서 만났지만 친구가 된 지 30년이 더 됐고요. 그 시절에는 술도 많이 마셨고, 노는 것도 좋아했잖아요?(웃음)”

한국을 대표하는 복서였습니다. 그 시절을 회고하신다면?

“사실 저는 어린 시절 부유하게 자랐지만 김두한 같은 ‘주먹’이 되려고 복싱을 배웠어요. 고등학교 때 사고도 크게 친 적이 있고요. 78년 방콕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 따고 나서 80년 모스크바올림픽을 겨냥했는데, 한국이 그 대회에 불참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냉전시대였으니까요. 마냥 (국제대회만) 기다릴 수 없어서 얼마 뒤 프로에 데뷔했고, 웰터급 동양챔피언에 올라 13차 방어전까지 성공했습니다. 그러다 신예 황준석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했고, 재기를 노렸지만 뜻대로 안돼서 84년 링을 떠났습니다.”

끝내 무산된 ‘지존’ 레너드와의 대결


▎황충재와 그를 가수의 길로 이끈 ‘영원한 오빠’ 남진. / 사진:황충재
59년 전남 광양 태생인 황충재는 74년 고교 입학과 동시에 광주에 있는 호남복싱체육관에 입문했다. ‘제2의 김두한’을 꿈꾸던 황충재는 75년 대형사고를 치고 4개월간이나 감옥을 다녀와야 했다.

깊은 뉘우침 끝에 황충재는 복서로 거듭났다. 고교 ‘4학년’이던 77년 광주에서 벌어진 국가대표 평가전에서 74년 테헤란아시안게임 웰터급 금메달리스트이자 76년 몬트리올올림픽에도 출전했던 부동의 국가대표 김주석(중앙대)과 만났다.

황충재는 이 경기에서 김주석을 꺾고 일약 스타덤에 오른다. 이후 거칠 것 없는 기세를 탄 황충재는 78년 아시안게임 국가대표로 발탁돼 금메달까지 목에 걸었다. 준결승에서 말레이시아의 마심을 상대로 공이 울린 후 3초 만에 KO승을 거둔 덕은 비공인 세계기록으로 남아 있다.

프로 전향 후엔 무난히 동양챔피언에 오른 황충재는 ‘복싱 아티스트’ 슈거레이 레너드(미국)와의 대결을 추진했다. 레너드와의 승부에 앞서 황충재는 피피노 쿠에바스(멕시코)와 도전자 결정전을 치르기로 했다. 황충재는 WBC 세계 1위, WBA 2위였고, 쿠에바스는 WBC 2위, WBA 1위였다. 그런데 쿠에바스 측에서 무려 7차례나 일정을 연기하는 식으로 황충재와의 대결을 피했다. 그러나 협상의 귀재인 전호연 극동체육관 회장이 직접 나서 레너드와의 대결을 성사시켰다. 황충재에게 파이트 머니만 총 7억원을 주기로 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전호연 회장의 사위인 김종수 극동체육관 사장이 김현치 동아체육관 회장과 만나 황충재 대 황준석 대결을 결정했다. “동양챔피언을 반납하더라도 레너드와의 대결 전에는 충재를 절대 링에 올리지 마라”는 전 회장의 지시를 어긴 것이다. 황준석은 15전 전승(6KO승)의 신예, 황충재는 22전 전승(19KO승)의 동양챔피언이었다.

레너드와의 대결에 모든 일정을 맞췄던 황충재로서는 너무 갑작스러운 대결이었다. 준비가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황충재는 82년 4월 18일 전주에서 벌어진 황준석과의 대결에서 8회 KO패로 무릎을 꿇었고, 그의 복싱 인생도 이 갑작스런 패배로 사실상 막을 내렸다. 황충재는 “상대를 너무 얕잡아봤다. 방심과 자만 때문에 졌다”며 “나중에 우리 측에서 재대결을 추진했지만 황준석 측에서 피했고, 결국 나는 글러브를 벗게 됐다”고 회고했다.

은퇴 뒤 황충재는 10여 년 동안 맞춤 전문 양복점을 운영하며 모델도 했다. 97년 IMF 외환위기 이후로는 식당·술집 등을 열어 사업을 번창시켰다. 한때 방송 해설위원으로 활동했던 그다. 그런 그가 지난해에는 음반을 내고 가수로 데뷔했다.

올해 60세가 되셨습니다. 비슷한 연령대에 새로운 일에 도전하려는 사람들에게 어떤 조언을 해주고 싶으신가요?

“나이 60에 새로운 일에 도전한다는 것이 전혀 두렵지 않다는 말은 거짓이겠죠? 그래도 저는 지인들에게 ‘지금 같은 백세시대에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할 일이 많으니 건강을 잘 챙기라’고 강조합니다. 60세, 70세라도 건강하면 젊은이들과 함께할 수도, 경쟁할 수도 있습니다. 돈보다, 명예보다 건강입니다. 꿈을 꼭 이루지 못하더라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것 자체가 큰 보람 아닐까요?”

좌우명이나 신조가 있다면?

“자만하지 말고 긍정적인 마인드로 살자. 그리고 주위 사람들을 사랑하라.”

복싱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체중감량일 겁니다. 가수에게는 어떤 일이 가장 어려운 일인가요?

“시청자들에게 늘 뭔가를 어필해야 하는 직업이 가수인 것 같아요. 타고난 성량(聲量)이나 무대 매너를 가진 사람도 있겠지만, 노력하면 누구나 어느 정도는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은 노력이죠.”

“모든 게 내 탓… 반성하고 감사하며 살아”


▎동양챔피언 시절의 황충재. 스피드·기교·파워를 겸비한 황충재는 한국 복싱을 대표하는 간판 스타 중 한 명이었다.
개인적으로 풍파(風波)도 많으셨잖아요? 주변에 감사할 분들도 많을 것 같습니다.

“연예계나 복싱계에서는 이루 다 언급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분이 저를 아끼고 도와 주셨어요. 저 역시 이혼의 아픔이 있는데, 돌아보면 다 제 잘못이었던 것 같습니다. 남들에게 나쁜 짓은 하지 않고 살았지만, 도리를 못했으니 결과적으로 제 잘못인 거죠. 잘못을 반성하고 또 감사하며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황충재는 수십 년 동안 가족보다 더 살뜰하게 자신을 보살펴준 ‘의제(義弟)’ 윤영석에 대한 감사를 잊지 못한다. 황충재는 “정말 내가 어려울 때 아무런 조건 없이 자기가 입고 있던 옷까지 벗어준 아우”라고 했다.

복서와 가수, 어느 쪽이 힘드세요?

“가수가 이렇게 어려울 줄 몰랐습니다. 노래를 좋아하긴 했지만 사실 유흥업소 다니면서 배운 노래죠.(웃음) 유흥업소 노래나 무대 매너는 직업 가수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하지만 나름대로 발버둥치며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어떤 가수가 되고 싶으세요?

“(방송 환경이) 예전과는 모든 면에서 많이 달라졌습니다. 방송국도 굉장히 많아져서 한두 군데 나간다고 잘 알려지지 않더라고요. 팬들에게 ‘동양챔피언 황충재가 가수가 됐다고 하더라’는 정도만 알려져도 영광이라 생각합니다.”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황충재는 시 한 수를 읊조렸다. 시 열댓 편은 외고 있다는 그는 생육신 중 한 명인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의 시를 특히 좋아한다고 했다.

“인생 백 년이 한 판의 바둑 같고, 모든 기약이 눈 깜작 할 사이로다. 두 귀가 빨개지도록, 크게 한 번 취해 보는 게 어떨까. 산골 아이가 일찍 가자고 하네, 내가 돌아가면 응당 조용하겠지.”

‘탄력 받은’ 황충재에게 마무리로 시 한 수를 더 부탁했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 목청을 가다듬었다. “허조(조선 전기의 명재상)가 신동(神童)이라고 소문난 김시습에게 늙을 노(老)를 두 번 넣어서 시구(詩句)를 지어보라고 했답니다. 김시습은 즉시 ‘노목개화심불로(老木開花心不老)’라고 읊었죠. ‘노목에 꽃이 피니 마음은 늙지 않았다’는 뜻이죠. 제가 좌우명처럼 가슴에 깊이 새기는 시구입니다.”

- 글 최경호 월간중앙 기자 squeeze@joongang.co.kr / 사진 박종근 기자 jokepark@joongang.co.kr

201812호 (2018.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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