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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정신의 미학(35)] 24살 임진왜란 의병장 월곡(月谷) 우배선 

“충의에는 귀천의 차이가 없다” 

왜군 고니시 침공에 맞서 대구 지키고자 창의, 도체찰부와 합동 작전도
관직에서 10년 간 민생 돌본 뒤 은거, 평생 불의의 권력과 타협 안 해


▎단양우씨 열락당 종중 우신남 대표가 월곡역사공원 ‘우배선 선생 창의유적비’ 앞에 섰다.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동에는 아파트 단지 가운데 월곡역사공원이 있다. 대나무 길을 따라 들어서면 맨 먼저 민족정기탑이 나타난다.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가 배경이다. 분단 극복과 평화통일 염원을 담아 육각 첨탑이 세워져 있다. 공원을 가로지르는 반대편에는 일제강점기 유림의 독립운동인 파리장서의 내력을 새긴 비(碑)가 서 있다.


마지막으로 대나무길 뒤 북쪽으로 들어서면 427년 전 이 땅을 피로 물들인 임진왜란 시기 활동한 의병장의 동상이 나타난다. 백성을 규합해 지역을 지킨 약관(弱冠)의 서생(書生)이다. 누구일까. 대구 일원에서 활약한 월곡(月谷) 우배선(禹拜善, 1569∼1621) 선생이다. 아직 그 이름이 익숙지는 않다. 그래서 알리고 싶은 인물이다. 처절했던 당시로 돌아가 보자.

1591년 8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조선 침략을 계획한다. 100년 일본 내전을 종식시킨 뒤다. 그는 수륙 30만 군대를 편성한 뒤 ‘명나라를 치러 가니 길을 비키라’는 이른바 ‘정명가도(征明假道)’를 내세워 1592년(선조 25) 4월 13일 조선을 침략한다. 선봉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등이 이끄는 3개 부대 5만2500명이었다. 전황은 파죽지세. 왜군 상륙과 함께 부산포가 점령되고 일주일 만인 21일에는 내륙 대구성이 고니시 부대에 함락된다.

대구는 졸지에 왜군 고니시 부대의 통로와 경비부대 주둔지로 전락한다. 1590년 임진왜란 직전 축성된 대구읍성은 파괴된다. 대구지역에는 왜군 1500여 명이 배치됐다. 고니시 등은 여세를 몰아 5월 2일 한성을 점령한다. 부산을 침공한지 불과 19일 만이다.

나라의 운명은 백척간두인데 지킬 사람은 적었다. 속수무책. 그때 대구의 한 청년이 팔을 걷으며 분개한다.

“우리 집이 대대로 나라의 은혜를 입었으니… 비록 지금 관직은 없으나 이런 위급한 때 왜적 토벌하는 의리를 어찌 잊을 것인가?”

당시 나이 스물넷 우배선의 거의(擧義, 의병을 일으킴)는 이렇게 시작된다. [월곡실기(月谷實記)]에 대강이 전한다. 임진왜란 발발 300년 뒤 후손 우성규가 조상의 행적을 전하려고 남은 편지 등과 다른 집안의 관련 기록을 모아 엮은 글이다.

자기 곡식을 써가면서 활을 만들다


▎월곡역사박물관 전경.
임진년 우배선은 가묘(家廟, 사당)에 뜻을 알리고 가족과 함께 비슬산 장수동으로 들어간다. [월곡실기] 연보에는 이후 “말타기와 활쏘기를 익히고 혹 창법과 검술을 썼다”고 돼 있다. 그는 비슬산에서 먼저 무예를 익힌 듯하다. ‘도언수(都彦守) 등이 초유사에 올린 글’에는 우배선의 창의(倡義) 과정이 잘 나타나 있다. 도언수는 우배선 의병진의 선봉장이다. 당시 전공 등을 조정에 보고하는 초유사는 학봉 김성일이다. 이 글은 20대 청년이 어떻게 나이 많은 사람까지 포함된 부대를 지휘하는 의병장 역할을 할 수 있었는지 보여 준다.

“가장(假將, 우배선)은 나이가 스물넷인데 날로 책 읽기를 일삼고 문밖으로 나가지 않아 군려(軍旅)의 일은 일찍이 배우지 않았으며 병과(兵戈)의 일 또한 본 적이 없습니다. 난리가 난 처음 창의할 뜻을 세워 궁장(弓匠)·시장(矢匠)·야장(冶匠) 등을 산막에 데려다 놓고 자기 곡식을 써가면서 활을 만들고 한편으로 화살을 제조했습니다. 그리고는 활 쏘는 사람을 모아 귀천을 따지지 않고 술잔을 권하고 같이 밥을 먹으면서 왜적 토벌을 맹세했습니다. 처음에는 마을의 노소(老少)와 이웃이 ‘우모(禹某)가 화를 길러 무고한 사람을 헛된 죽음에 빠지게 한다’고 흉흉한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의병을 일으킨 뒤 여러 차례 적을 베고 한 번도 패하지 않자 원근에서 소문을 듣고 모이니 아이와 노인이라도 감격하지 않음이 없어 모두 의지하기를 바랐습니다.

군졸의 처자들이 헤어졌다가 점차 모이자 진중에 남은 양식이 없고 관가에서 곡식을 지급하지 못하자 목숨을 보존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가장은 입었던 옷을 벗어 이들을 구휼할 곡식을 사서 모으고 날마다 눈물 흘리며 말하기를 ‘오늘이 어떤 때인가… 충의의 본성은 귀천이 차이가 없을 것이다. 군왕께서 지금 어디에 계시는데 그대들이 집을 돌볼 겨를이 있겠는가’ 하니 군졸이 그 말을 듣고 느낀 바 있어 모두 죽음을 각오했습니다….”

우배선은 백면서생(白面書生)이었지만 국난을 당해 충의를 바탕으로 전투에 필요한 게 무엇인지 알았고 자기 것을 베풀어 모여든 사람을 끌어안는 포용력을 발휘했다. 장수의 자질이었다.

지난해 12월 22일 우배선의 흔적을 찾아 월곡역사공원을 방문했다. 동상 왼쪽으로 단양 우씨 문중이 운영하는 월곡역사박물관이 있다. 그곳에서 열락당 종중 대표인 우신남(77) 월곡역사박물관장을 만났다. 일대는 대구 상인동이다. 임진왜란 당시는 성주목 화원현 월촌리다. 현재 월배로도 불리는 전 지역이 월촌이다. 월촌은 이제 지하철역 이름으로 남아 있다.

박물관 2층 유장각(遺章閣)에 임진왜란 유물이 다수 보였다. 우배선이 비슬산으로 들어가 전투에 쓸 활과 화살, 쇠를 불에 달궈 칼 등을 만드는 모습이 그림으로 복원돼 있다. 그림 아래 당시 쓰던 실제 칼과 화살 등에 왜군의 조총도 두 자루 진열돼 있었다. 우 대표는 “후손들이 내놓은 것”이라고 소개했다. 전시 유물이 여느 국립박물관과 견줘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숭조(崇祖)의 정성이 예사롭지 않다.

1592년 4월 비슬산에서 50여 명 의병진을 편성한 우배선은 훈련을 거쳐 5월 23일 화원현에 처음 진을 친다. 6월에는 비슬산 요로에 복병(伏兵)을 배치해 적 20여 명의 목을 베는 전과를 올리면서 의병 활동을 본격화한다. 7월에는 낙동강에서, 8월에는 원월산 아래에서 적과 싸워 다수를 죽이고 우마를 노획하는 전과를 거둔다. 순찰사가 사실을 보고하자 패전 소식만 듣던 선조 임금은 그 이름을 벽 위에 쓰고 특별히 예빈시 참봉에 제수한다. 그러나 부임하지 않았다.

노비가 향교 점거 왜군을 술을 먹여 물리치다


▎활 등을 만든 비슬산 산막의 복원도와 사용된 병기. 가운데가 노획된 조총이다.
경상도 순찰사 한효순의 ‘계문초(啓聞草)’에 따르면 우배선은 이어 9월에는 초유사 김성일을 만나 화원현 가장(임시 무관)으로 임명된다. 또 형식상 합천·성주 지역 의병장 정인홍의 지휘를 받는다. 우배선의 전투 기록은 이후 12월까지 연보에 수시로 등장한다. 그 가운데는 도체찰부 영장 강덕룡과 합동작전을 펼친 기록도 나온다.

1593년 1월께 우배선은 화원으로 가 현풍 의병장 곽재우를 만난다. 곽재우는 크게 기뻐하며 갑옷인 전포(戰袍)와 투구 하나를 선물하고 전략을 수의한다. 박물관에는 당시 갑옷과 투구가 온전히 전시돼 있었다.

그해 2월 할머니 정씨가 세상을 떠난다. 조실부모한 우배선을 키운 조모다. 연보에는 전쟁 통에 유월장(踰月葬)을 행하지 못하고 곧바로 선영에 안장했다고 돼 있다. 상주(喪主) 우배선은 군병과 무기를 별장에게 맡기고 산 아래서 빈소를 받들었다. 문제가 생겼다. 군무를 막료에게 맡기면서 사졸이 흩어진 것이다.

소식을 듣고 경상좌도 감사 김성일과 고령 의병장 김면 등이 나서 위로하고 권면해 의병 활동을 재개시킨다. 직후 우배선은 달성에서 왜군을 대파한 뒤 대구를 공격해 향교 대성전에 주둔해 있던 적을 쫓아낸다. 그 과정이 극적이다.

우배선의 노비 필금(必今)과 만애(萬愛)가 당시 적진에 한 달여 잡혀 있다가 탈출했다. 적진의 상황이 낱낱이 보고됐다. 전염병으로 누운 자도 많다는 것이다. 우배선은 공격 작전을 세운다. 술과 떡을 준비해 두 노비를 적진으로 다시 보낸다. 처음에 적은 둘을 의심해 목을 베려 했다. 한 늙은 왜적이 나서 막았다. 그때부터 노비들은 적진을 들락거리며 술과 안주를 날랐다. 두 노비는 이번에는 술을 빚어 밤중에 들이니 적장과 부하들이 무리지어 마시고 취했다. 독약도 넣었다. 이때였다. 우배선은 진천뢰(震天雷)를 쏘아 적진을 불태우고 술상 앞에 쓰러진 적 등 수백 명을 사살하니 왜군은 군량과 목초, 병기 등을 버리고 달아났다.

이 작전은 박물관에 세 토막 디오라마(축소 모형)로 재현돼 있다. 술 취한 적을 제압하는 대구 향교 왜군 본부 습격 장면은 엽서로도 만들어졌다. 지하철 월촌역에도 작은 기념관이 만들어져 있다. 우배선 의병진의 대표 일화다.

그해 6월 왜군이 퇴각하면서 우배선의 의병 활동은 1차 마무리된다. 1597년(정유) 왜군이 다시 침입하자 9월 월곡 우배선은 달성에서 적을 격퇴하고 이듬해 간헐적으로 전투를 벌인다. 1598년 11월 왜군이 마침내 조선에서 완전 철수한다. 그때서야 월곡은 사졸이 생업에 복귀토록 귀향시킨다. 우배선은 전쟁 발발로부터 15개월에 걸쳐 총 40여 회 출전했다. 그는 전란 중 공적을 군졸의 이름으로 일일이 남겼다. ‘군공책(軍功冊)’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이름만 100여 명. 전투에 승리한 공을 언제나 군사에게 돌릴 만큼 그는 그릇이 컸다. 열락당 종중 우 대표는 “우리 선조(先祖)는 정말 운이 좋았다”며 “전투에서 여러 차례 생사의 갈림길에 놓였지만 그때마다 살아남으셨다”고 말했다.

월곡이 임란에서 공을 세우자 초유사 김성일은 여러 차례 계(啓)를 올려 관직을 내릴 것을 상주한다. 1592년 12월 예빈시 참봉을 시작으로 군기시 주부 등에 제수됐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595년 합천군수에 제수돼 비로소 부임한다. 벼슬살이의 시작이다. 그는 흩어진 백성을 불러 모으고 고락을 함께해 고을이 평안해졌다.

그러나 이듬해 관직을 버린다. 1600년에는 금산군수로 부임한다. 전란 뒤라 고을에는 굶어 죽은 시체가 즐비했다. 월곡은 이에 자신의 사유곡(私有穀)을 운반해와 굶주린 백성에게 나눠줬다. 군민이 공덕비를 세운다. 그러나 2년 뒤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아 파직된다. 모함 때문이었다. 1603년 다시 낙안군수가 되었다가 이듬해 그만둔다. 그해 월곡은 조정이 임란의 전공을 평가해 내린 ‘선무원종공신일등(宣武原從功臣一等)’의 녹권(錄券)을 받았다.

1609년에는 경상도 좌수영 우후로 좌천된다. 월곡은 그래도 2년 임기를 채운 뒤 이후 벼슬을 단념한다. 나라 일이 갈수록 잘못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덕동산 아래 월곡정사(月谷精舍)를 짓는다. 43세, 만년이 시작된다. 월곡은 사우(士友)들과 학문을 강론하고 “선비가 나가고 물러서는 이치는 모두 [주역(周易)] 속에 있다”고 역학(易學)을 강조했다. 종중 이름이 된 열락당(悅樂堂)이란 편액도 붙인다. 선비의 삶이다.

‘북풍가’ 지어 북인 정인홍과 절교


▎1. 우배선 의병장의 동상. / 2. [월곡우공창의유록] 표지. / 3. 의병 활동을 기록한 [창의유록].
월곡정사는 보존돼 있었다. 월곡역사공원에서 500m쯤 떨어져 발길이 뜸한 곳이다. 거기서 다시 50m쯤 떨어진 곳에 월곡 선생 등을 배향하다 훼철된 덕동서원(德洞書院) 자리가 남아있었다. 우 대표는 “일대가 대부분 500년이 넘는 우리 종중의 세거지”라고 설명했다.

당시 지기는 서사원(徐思遠)·손처눌(孫處訥) 등이었다. 월곡은 초야에 묻혀 지내면서도 의리에 어긋나는 일은 용납하지 않았다. 광해군 시기 권력을 쥔 정인홍이 회재 이언적과 퇴계 이황을 문묘(文廟)에서 내몰려 했을 때다. 손처눌이 통문을 돌리며 두 선생을 옹호하자 월곡도 적극 협조하고 나섰다.

월곡은 정인홍과는 뜻이 맞지 않았다. 의병장 시절 두 사람은 부하 한 사람을 놓고 틈이 벌어졌다. 정인홍은 이후 대북파의 영수가 되면서 전횡과 보복을 일삼는다. 어느 날 정인홍의 아들이 성주 목사가 돼 찾아오자 월곡은 ‘북풍가(北風歌)’를 지어 절교의 뜻을 나타낸다. 북인의 행태를 빗댄 것이다.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영남대 이완재(88) 명예교수는 “정인홍의 횡포는 이후에도 심해져 인목대비가 폐위되자 선생은 분을 참지 못하고 병이 돼 그로 인해 5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고 분석했다. 월곡의 단명이 불의(不義)를 미워한 것과 무관치 않다는 것이다.

선생은 1569년(선조 2) 대구 월곡정사 자리에서 태어났다. 학문과 절의로 사림의 존중을 받는 역동(易東) 우탁은 9대조다. 가문은 고려 시기 벌족이었다. 조선에 들어와 가문은 사양길을 걷는다. 개국공신 정도전에 쫓기면서 가문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월곡의 조상도 피난해 성주를 거쳐 고조가 대구에 정착했다.

월곡은 태어난 이듬해 아버지를 여의고 두 달 뒤 다시 어머니를 잃었다. 할머니가 혼자 남은 손자를 거두었다. 성균관 대사성 김복한이 쓴 신도비에는 선생이 어렸을 적부터 남달랐다는 기록이 나온다. “… 이를 갈 나이에 배우기 시작했는데 능히 글 뜻을 이해했으며 눈으로 한 번 보기만 하면 문득 외웠다. 나이 열대여섯이 되지 않아 문사(文辭)가 넉넉히 이루어졌다. 그러나 과거 공부를 달갑게 생각지 않고 오로지 인격 향상 공부에 뜻을 두었다.”

그는 청년 선비였다. 스물네 살 이후는 살펴본 대로다. 만년의 행적에 의문을 제기하는 시각이 있다. 낙향 이후 행적이 연보에는 기재돼 있으나 사실을 뒷받침할 관련 인사의 문집에 이름을 찾기가 어렵다는 지적이다. 이와 관련 영남대 국사학과 교수를 지낸 고 이수건은 “그의 후손들이 18세기 이래 노론 편에 적극 서게 된 것과 연관이 있을 수 있다”고 추정했다.

월곡은 53년 길지 않은 일생을 의(義)로 일관했다. 청년 시절엔 임진왜란을 만나 문무를 겸비한 의병장으로 활약했다. 또 관직에 몸담은 10년은 민생을 돌보며 직(職)을 걸고 조정의 부패를 묵인하지 않았다. 대구로 낙향한 뒤에는 학문을 하면서 조정의 안위를 걱정하고 불의를 미워했다. 월곡역사공원 동쪽에 세워진 ‘창의 유적비’ 그대로 의를 추구하고 의를 실천한 선비에 다름 아니었다.

[박스기사] 월곡의 정신, 독립운동으로 계승되다 - 단양 우씨, 대구 상인동에 월곡역사박물관 건립


“우리 문중에서 착한 일을 한 자가 있으면 반드시 권해 장려하고 나쁜 짓을 한 자는 못하게 하고 벌을 줄 수 있다.”

‘단양 우씨 월촌종중 완의(完議·사진)’의 첫 번째 항목이다. 완의란 종중이 의논하고 합의된 내용을 적어 서로 지킬 것을 약속한 문서다. 모두 8가지 행동지침이 적혀 있다.

완의에서 느껴지듯 이 종중은 결속력이 남다르다. 월촌종중은 우배선의 고조가 지금의 대구 상인동에 정착한 이래 이곳에서 세거해 왔다.

종중 우신남 대표는 “제가 어렸을 때는 이 주변에 우리 일가가 600여 호쯤 됐다”며 “지금도 300여 호의 집성촌”이라고 말했다.

1970년대 지역이 아파트단지로 개발되면서 일대 문중 땅은 보상을 받는다. 그 재력을 바탕으로 종중은 2002년 우배선 선조를 기리는 월곡역사박물관을 만들었다. 그때까지 여러 집안에 내려오던 유품(500여 점)과 관련자료(15점)·장서(7000여 권)는 물론 농기구(700여 점)까지 한데 모았다. 그래서 1층 농경시대생활관의 농기구와 생활용품은 모두 한 문중이 사용하던 물건으로 전시돼 있다.

2층 월곡 자료실에는 ‘우배선 의병진 군공책’(보물 제1334호)과 서간문·창의유록 등이 전시돼 있다. 2018년 종중이 국립대구박물관에 원본을 기탁하면서 현재는 사본이 진열돼 있다. 또 종중이 소장한 교지·과지·분재기·간찰 등 역대 선조의 유품 400여 점도 전시돼 있다.

집안에 내려온 각종 고서적을 보관한 장서실도 독특하다. 종중 박물관이지만 자료의 규모와 전시의 수준 등이 국립에 못하지 않다. 종중은 해마다 두 차례 이곳에서 고등학생·대학생 후손을 모아 뿌리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박물관 오른쪽 뒤에는 낙동서원(洛東書院)이 자리해 있다. 1965년 훼철된 덕동서원을 문중이 다시 이은 것이다. 이곳에는 역동 우탁과 월곡 우배선 등 5위가 배향돼 있다. 역동 선생은 [주역(周易)]의 정전(程傳)이 이 땅에 처음 들어왔을 때 그 뜻을 처음 알아낸 학자다. 당시 사람들이 역(易)을 동방에 처음 전파시켰다 해서 ‘역동(易東)’ 선생으로 불렀다.

일대 3만5000㎡(1만여 평)은 월곡역사공원으로 불린다. 문중은 이 가운데 7할을 소유하고, 나머지는 시민에게 내놓았다. 그곳에서 동쪽으로 500m쯤 가면 월곡정사와 건너편에 덕동서원 자리가 남아 있다.

월곡의 충의 정신은 이어지고 있다. 근래엔 독립유공자가 많이 배출됐다. 공원 파리장서비에만 우성동·우찬기·우하삼·우경동·우승기 등 5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월촌의 완의 뜻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 글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yeeho1219@naver.com / 사진 백종하 객원기자

201902호 (2019.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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