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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 인터뷰] 이유성 대한항공 전무가 말하는 조양호 회장의 마지막 100일 

“은퇴 후 손자와 여행하는 것이 꿈이셨는데…” 

글 김영준 월간중앙 기자 kim.youngjoon1@joongang.co.kr / 사진 신인섭 기자 shinis@joongang.co.kr
엄살 부린다 할까봐 서울의 유력 병원 못 가… 폐 치료 골든타임 놓쳐
완벽 지향하는 CEO로서 임·직원들과 거리 두는 외길 인생으로 일관


▎이유성 대한항공 스포츠단 단장은 고독 속에서 마모돼 갔던 조양호 회장의 파란만장한 삶을 안타까워했다.
고(故)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1949~2019)의 거의 유일했던 취미는 사진이었다. 한진 산하 일우재단에서 ‘재능과 열정을 갖춘 사진가를 발굴해 세계적 작가로 육성하는’ 일우사진상을 제정할 만큼 애정이 깊었다. 어느 해 보도사진 대상작은 아프리카의 참상을 담았다. 시상식에 참석한 조 회장의 표정이 약간 어두워 보였다. 상을 받은 기자는 “제 사진이 마음에 안 드십니까?”라고 조심스레 물었다. 사진에 조예가 깊은 조 회장은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 사진은 아주 훌륭해. 그래도 난 밝은 사진이 좋더라. 세상이 밝게 비춰졌으면 좋겠어.”

2019년 4월 8일, 미국 LA에서 70세의 나이로 별세한 조양호 회장은 ‘하얀 어둠’을 걸어온 삶으로 일관했다. 절대 군주에 버금갈 부(富)와 권력을 지닌 재벌총수로서 항공·물류업계에서 범접할 수 없는 성(城)을 쌓았다. 그러나 그의 내면은 늘 고독했다. 남 앞에서 마음껏 웃어본 적이 없었다. 생(生)의 후반기에는 더욱 그랬다. 말할 수 없음으로만 말해야 할 상황들이 포개어졌다.

사람에 대한 평판은 늘 다면적이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 [라쇼몽]처럼 인간은 자기가 보고 싶은 단면만으로 그 사람을 평가한다. 월간중앙은 세상에 드러난 공과를 떠나서, 인간 조양호의 심연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지 못했고, 굳이 조 회장도 드러내려 하지 않았던 이야기다. 오직 이해와 관용을 통해서 오해의 간극은 메워질 수 있다.

15년 동안 지근거리에서 조 회장을 보좌한 이유성(62) 대한항공 스포츠단 단장(전무)은 그런 이야기를 증언할 적임자들 중 한 사람이다. 1982년 3월 대한항공 탁구단 코치로 입사한 이 단장은 체육인 출신으론 이례적으로 2004년 12월 임원으로 발탁됐다. “대한항공에서 영어 못하는데도 임원이 된 전례 없는 케이스”라고 할 정도로 이 단장을 향한 조 회장의 신뢰는 각별했다.

2012년 런던올림픽 기간 중 열린 국제행사에서의 일화다. 어떤 착오로 통역이 조 회장을 수행하지 않은 돌발사태가 벌어졌다. 당시 조 회장 곁에는 이 단장밖에 없었다. 외국인들은 당연히 통역이라 여기고 그에게 영어를 퍼부었다. 알아듣지 못해 땀을 뻘뻘 흘린 이 단장을 위해 조 회장이 거꾸로 통역을 해줬다. 그만큼 조 회장은 이 전무를 인간적으로 좋아했다.

이런 이 단장이지만 “상중(喪中)”이라고 인터뷰를 거듭 고사했다. ‘세상이 모르는 조양호 회장의 면모를 알리는 것 또한 보은’이라는 기자의 문자를 받은 뒤 며칠이 지나서야 마음을 바꿨다. 그렇게 4월 11일 서울 서소문 한진 본사에서 이 단장을 만났다. 조 회장의 유해가 한국으로 들어오기 바로 전날이었다.

“엄살 부린다고 할까봐 치료시기 놓쳤다”


▎조양호 회장은 그토록 고대했던 대한항공 창립 50주년 행사에 나타나지 않았다. / 사진 : 대한항공
돌아가셨다는 급보를 접했을 때 만감이 교차했겠다.

“아무 생각도 안 나더라. 눈물도 안 났다. 회복될 줄만 알고 있었다. 지난해 11월 7일 뵌 게 마지막이었다. 탁구 국제회의 참석차 12월 8일에 온다고 하셨다. 그런데 못 오는 것으로 바뀌었다. 아파서가 아니라 LA에 행사가 있어서 못 온다는 메일이 왔다. 얼마 지나니까 ‘회장님한테 보고를 당분간 중지하라’는 지시가 임원들에게 떨어졌다. ‘안 좋아지셨구나’했지만 이렇게 돌아가실 줄은 몰랐다.”

사인이 폐 질환이라고 들었다. 치료가 어려운 상태였나?

“회장님 건강상태는 직원들도 몰랐다. 폐가 안 좋아서 기침을 많이 하셨다. 한진그룹 계열의 인하대병원에 입원도 했었다. 서울대나 연세대 등 큰 병원도 생각했지만 검찰에 출두하는 그런 상황에서 아프다고 하면 핑계 댄다고 할까봐 안 가셨다. 엄살을 부린다고 할까봐…. 회장님의 판단이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갔다. 그때 큰 병원을 찾아가 제때 치료를 못 받은 게 너무 안타깝다.”

생애 마지막 몇 년 동안 조 회장의 심경을 가늠하기 힘들다.

“모든 자신감을 다 잃으신 것 같았다. 기가 빠졌다고 할까? 2014년부터 마음 아픈 일이 이어졌다. 회사 이미지가 타격 받고, 한진해운을 뺏기고, 평창올림픽 조직위원장에서 나가게 됐고….”

2009년 평창 겨울올림픽 유치위원장에 위촉된 뒤, 1년10개월 동안 조 회장은 64만㎞를 이동했다. 이어 2014년 조직위원장직을 맡았다. 그러나 2016년 5월 조직위에서 갑자기 나가게 돼 허탈감이 컸을 것 같다.

“김종덕 당시 문체부 장관이 만나자고 요청해 회장님과 독대한 것으로 알고 있다. 식사도 하지 않고 금방 돌아오셨다. 우리는 그날까지도 몰랐다. 다음 날 조직위원장 사퇴가 발표됐다. 그때 조직위에 대한항공에서 선발한 직원 50명이 파견돼 있었다. 회장님은 ‘나만 나가면 되니, 다른 직원들은 철수시키지 말라’고 했다.”

한진해운을 잃은 것은 조 회장 일생에서 가장 가슴 아픈 순간 중 하나일 것 같다.

“회장님이 가장 소중히 여긴 것이 조중훈 선대회장의 유훈이었다. ‘육해공(陸海空) 수송업’이라는 아버님의 유산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사로잡혔다. 당시 (평창올림픽 개·폐회식장 공사를 유럽의 한 기업에 맡기고 싶어 했다는) 최순실의 요구를 회장님이 들어주지 않은 게 (괘씸죄의) 이유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장남인 조 회장은 형제들 중 셋째인 고(故) 조수호 한진해운 회장과 우애가 각별했다. 가장 친한 동생이 세상을 떠났을 때 우리가 에스오일 2대 주주였다. 그 지분(1조원)을 팔아서 한진해운을 지원할 정도였는데 결국 날아갔다.”

한진해운은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경영 위기에 빠졌다. 조 회장은 한진해운을 회생시키고자 2014년 회장직에 올랐고, 2년간 2조원을 투입했다. 그러나 2016년 법정관리에 이어 2017년 파산했다.

이 전무는 조 회장 가족에 관한 이야기는 말을 삼갔다. 반평생 그룹에서 녹을 받은 임원의 처신이자 도리인 셈이다. 그는 “여러 일들이 누적되면 사람이 감당하지 못하는 순간이 오게 마련”이라고만 답했다.

“대한항공 주총 이후 자존심에 내상 입었을 것”


▎조양호 회장은 강원도 최전방과 베트남에서 군 복무를 했다. / 사진 : 대한항공
조 회장이 힘들다는 내색은 안 했나?

“내가 아는 한, 누구한테도 ‘힘들다, 아프다’는 말을 안 했다. ‘소환을 기피한다’는 소리를 듣기 싫어했다. 건강 상태를 익히 아는 임원들이 응하면 안 된다고 만류했건만 경찰, 검찰이 부를 때마다 다 나갔다. 다른 총수들처럼 휠체어 타지 않고, 서서 들어갔다.”

재벌 총수가 건강이 좋지 않았으니 관리도 각별했을 텐데.

“회장님은 술, 골프 아무것도 안 좋아했다. 그나마 사진 찍는 게 낙이다. 그래서 내가 운동하시라고 권했는데 내키지 않는 듯했다. 회장님이 미국에서 폐 수술을 받았다. 보통 5~6개월은 푹 쉬어야 되는데 경과가 좋았나 보더라. 조금 괜찮아지니까 LA 집으로 퇴원했다. (대한항공 대표이사직 연임에 실패한) 주주총회 보고도 간접적으로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자존심이 얼마나 강하신 분인데,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짐작도 못하겠다.”

그래도 요즘 100세 시대에 너무 갑작스럽다.

“죽을 사람도 고비만 넘기면 사는데…. 내가 현장에서 모신 것이 아니니 뭐라 말하기 조심스럽다. 아드님인 조원태 사장도 KOVO(한국배구연맹) 총재 업무차 태국에 갔다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접했다. 나도 그냥 아득해지더라. 평소 안 가던 명동성당도 갔다.”

유서 내용이 궁금하다.

“가족들이 곁에서 임종을 지켜봤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모른다.”

조 회장의 인간적 면모는 노출이 거의 안 됐다. 어떤 성격이었나?

“회장님은 낯을 가린다. 처음 보는 사람은 ‘왜 저렇게 뻣뻣해’라고 할 것이다. 사람 얼굴 기억도 잘 못한다. 수줍어하지만 한번 믿음을 주면 오래간다. 대한항공 직원들과도 오래 같이 가는 것이 경영철칙이었다.”

경영자로서 IMF 외환위기, 9·11테러 등 숱한 고비를 넘겼다.

“IMF 때에도 직원을 안 잘랐다. 그런데 그런 미담을 외부에 알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외부에 알리지 말고, 2억원을 마련해서 시골 운동선수들 장학금 주라’가 나한테 내린 마지막 지시였다.”

IMF 당시 조 회장은 자체 소유 항공기를 매각한 뒤, 다시 빌려 쓰는 묘안으로 유동성을 확보했다. 1998년과 2003년에는 보잉737기와 A380기를 구매하는 역발상으로 위기를 돌파했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덮친 2008년에는 저비용항공사(LCC) 진에어를 설립해 새로운 수요를 창출했다.

조 회장이 대한탁구협회장을 맡으며 이 단장과 인연이 깊어졌다.

“‘지원은 얼마든 해줄 테니 파벌싸움은 하지 말라’고 하셨다. 마지막으로 뵌 것도 11월 7일 탁구인들과 만나는 자리였다. 아픈 티를 전혀 안 내더라. 현정화한테 자기 관리를 잘하라고 당부하고 유승민(IOC선수위원)과 관련해서는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은 임기가 금방 끝난다. 유승민이 체육계에서 입지를 다지도록 탁구인들이 도와야 한다’는 뜻을 내비치기도 했다. 그것이 마지막이 됐다. 이후 이메일 보고는 드렸는데 3월 8일 ‘읽음’을 끝으로 답장이 오지 않았다.”

조 회장이 자랑했던 지갑 속 군대사진


▎A380기에 탑승한 조양호 회장. 미국 유학 시절 조종사 면허증을 땄다. / 사진:연합뉴스
완벽주의 성향이라서 본인도, 임직원들도 다 힘들었을 것 같다.

“모시는 사람들은 힘들었지만 대한항공을 오늘날 글로벌기업으로 우뚝 서게 한 동력은 주인의식이었다. ‘내가 직원들보다 더 많이 알아야 한다. 그래야 직원들이 뭘 필요로 하는지 안다’고 회장님은 생각했다. 비행기 조종사 면허증도 미국에서 땄다. (1974년 대한항공 입사 이래 45년간) 정비·자재·영업 등 항공업에 필요한 것이라면 죄다 꿰뚫었다. 전 세계의 에어라인 회장 중 비행기에 관한 한 우리 회장님보다 더 정통한 전문가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회사가 이렇게 큰 거다.”

그래도 일만 했겠나?

“평생 일만 하다가 돌아가셨다. 하나부터 열까지 보고를 받았다. 시간 나면 공부만 했다. 내가 기억하는 조 회장의 이미지는 컴퓨터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무언가 문서 작업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다른 거 할 여력도 없었다. 휴가 가면 사진 찍는 것이 유일한 취미였다. 우리 임원들 중에서 회장님만큼 아는 이가 없었다. 샤이(shy)한 분인데 아주 드물게 화가 나면 불같았다. 임원들이 어려워 할 수밖에 없었다. 회장님은 나한테도 ‘목소리만 크게 하지 말고, 공부해야 세상을 알고, 사람에게 당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조중훈 선대회장에게 엄격한 경영수업을 받은 영향인가?

“회장님 옷 입은 모습을 보면, 어느 재벌 회장이 그렇게 입나? 옷, 구두 다 낡은 거만 취했다. 사치를 모르는 분이다. 선대회장 때의 교육이 몸에 배어서 함부로 안 산다. 음식도 햄버거나 짜장면을 좋아했다. 조 회장이 지갑 속에 넣어가지고 다니는 사진이 하나 있다. 어쩌다 친한 사람들 만나면 그 사진을 꺼내 자랑을 하셨다. 군대 생활하는 사진이었다. 미국 유학 중 선대회장님의 지시로 최전방에서 복무했다. 월남전까지 파병을 갔다. (조 회장은 강원도 화천 소재 육군에 입대했고, 11개월간 베트남 퀴논에서 근무했다. 다시 강원도로 돌아가 복무기간 36개월을 채운 뒤 1973년 7월 육군병장으로 만기 제대했다.) 그때 웬만한 있는 집안 자식은 군 면제를 받던 시절이었다.”

조 회장의 꿈은 우주로 가는 길을 여는 것이었다.

“1990년대 말 외환위기 이후 매물로 나온 KAI(한국항공우주산업) 매입을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뜻을 접었다. 그 뒤로도 매입 의사를 매번 타진했지만 결실을 맺지 못했는데 나중에도 엄청 아쉬워하셨다. 지금은 부산에 있는 대한항공 항공 우주사업부에 고인의 못다 이룬 꿈이 서려 있다고 하겠다.”

조중훈 선대회장은 스킨십에 능했는데 조 회장은 그렇지 않았다.

“회장님이 정치인을 따로 만나는 걸 본 사람이 있나? 이번에 바흐 IOC 위원장이 추모 메시지를 보냈다. IOC도 회장님의 원칙을 인정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면초가에 몰렸을 땐 감옥 갈 각오도 했을 것 같다.

“내 생각에는 당신께서 ‘다 안고 가려 하신 거 아닌가’ 짐작할 뿐이다. 가족이 조사 받으러 갈 때마다 자신을 자책했다.”

전용기 아니었던 조 회장의 마지막 비행


▎조양호 회장은 운동선수를 만날 때는 표정부터 달라졌다. 사진 맨 왼쪽은 탁구 국가대표 시절의 유승민 IOC 위원. / 사진 : 대한항공
조원태 사장에게 경영권 승계가 이뤄질 시간이 충분해 보이지 않는데.

“아들인 조 사장에게 유독 엄했다. 후계자로 염두에 둔 것이다. 임원이 된 뒤에도 한동안 운전기사 없이 다니도록 했다. 아들에게 ‘네 주변에서 호가호위하려는 사람들을 경계하라’고 당부했다. 2018년 3월 대한항공 배구단이 V리그 우승을 안았다. 이때 내가 헹가래 받으러 나오시라고 권했다. 그러나 끝내 손사래를 치더라. 다음 날 뵈었더니 ‘수고했어’ 한마디만 하셨다. 그분한테 들은 마지막 칭찬이었다. 왜 안 오셨냐고 했더니 ‘내가 가면 (현 대한항공 배구단 구단주이기도 한) 원태가 빛이 안 나잖아’라고 했다. ”

플랜이 있었나?

“말씀은 자세히 안 하셨지만 큰 그림이 있었지 싶다. ‘나는 2~3년쯤 더 하고 일에서 손 뗀다’고 하셨다. 그런데 갑자기 돌아가신 거다.”

은퇴하면 어떻게 지낼 생각이었을까?

“그동안 일만 했으니…. 당신은 ‘이제 손주들 좋은 데 같이 데리고 다니며 세상을 알려주고 싶다’고 하셨다. 손주들 방학 때면 세계여행을 하고 싶다고, 75세쯤 되면 어디든 다닐 거라고 생각하셨는데….”

조 회장과 몇 년을 같이 보낸 것인가?

“대한항공이 2005년 3월 스포츠단을 별도로 만들었다. 나한테 ‘단장을 맡아 운영하라’고 했다. 내가 ‘행정을 모른다’니까 2006년 3월부터 서울대학교 경영대학원에 가서 교육을 받으라고 지시하셨다. 그리고 2006년 6월 단장이 됐다. 회장님 지시로 태릉 국가대표 선수촌을 벤치마킹해서 용인에 배구 전용 체육관과 숙소를 지었다. 2008년 회장님이 대한탁구협회장을 맡으면서 더 가까이 모시게 됐다.”

조 회장의 어떤 점에 감화됐나?

“원칙과 기준. 그 틀 안에서만 사신 것 같아 아쉽기도 하다. 큰일이 없는 한, 매일 새벽 6시면 늘 출근해 계셨다.”

왜 그렇게 살았을까?

“항공산업은 1%만 길에서 벗어나도 큰일이 나니까. 조금이라도 어기면 용서를 못하는 거다. 본인부터 그렇게 행동했다. 그래야 사고가 안 난다고 믿었다. 그러니까 얼마나 힘들었겠나? 대한항공의 서비스가 완벽에 가까운 것도 회장님의 영향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기내 화장실 휴지의 품질부터 음식의 신선도까지 일일이 다 체크했다. 직원들은 힘들었을 것이다.”

조 회장이 탑승하면 비상이 걸렸다고 하던데?

“조그만 거라도 걸리면 용서가 안 됐다. 모든 사고는 ‘이 정도면 됐다’라고 방심한 순간, 터진다고 생각했다. 예전에 나한테도 ‘운동도 이 정도면 됐다 하는 순간, 지는 것이 아니냐? 타협하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임원들이 직언하기가 어려웠겠다.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회장님은 올림픽 조직위원장이나 탁구협회장으로서 체육인들 만나는 걸 좋아했다. 거기는 경직된 관계가 아니니까. 한참 어린 유승민도 편하게 대했다.”

원래 성격이 그런 것 아닐까?

“그럴 수도 있겠다. 회사를 생각해서 틈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너무 외롭게 사셨다. 말씀도 없었고…. 세상은 조양호 회장을 오해하고 있다.”

그런가?

“김경아라고 여자탁구 국가대표 선수가 있었다. 원래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끝으로 은퇴하고 지도자 수업을 받으려 했다. 그런데 회장님의 권유로 은퇴를 미뤘다. 2012년 런던올림픽까지 갔다. 그리고 어떤 행사에서 우연히 회장님과 만났다. 회장님이 안부를 묻다가 당시 김경아 부부가 아이가 없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됐다. 본인이 은퇴를 미루게 한 점이 내내 마음에 걸렸던지 임신 클리닉 상담을 권유하면서 비용을 지원해준 적도 있다. 한번 정(情)을 준 사람은 끝까지 마음을 쓰셨다. 그렇다고 티 나게 하는 것은 무척 싫어했다.”

유족들이 장례식을 검소하게 치를 것이라고 했다.

“조용히 했으면 좋겠다는 회장님 유지가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회장님은 개인 비행기가 있다. 거기에 (유해를) 태우고 와도 되는데 ‘그러지 말라’고 했다더라. 일반적으로 한국인이 외국에서 세상을 떠났을 때와 똑같이 하라는 당부였다.”

“가족들끼리 잘 협력해서 이끌어가라”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조양호 회장 빈소. / 사진 : 대한항공
조양호 회장은 12일 새벽 ‘마지막 비행’을 마쳤다. 미국 LA 발 인천행 대한항공 KE012 정기편이었다.

한진그룹은 조 회장의 장례를 4월 12일부터 16일까지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회사장으로 치르기로 결정했다. 석태수 한진칼 대표를 위원장으로 하는 장례위원회가 구성됐다. 조문은 4월 12일 낮부터 받았다. 문재인 대통령과 이낙연 국무총리가 조화를 보냈다. 문희상 국회의장,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 박용만 대한상의 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최태원 SK 회장, 김승연 한화 회장, 이재현 CJ 회장 등이 고인을 추모했다. 조 회장의 동생인 조남호 전 한진중공업 회장과 조정호 메리츠금융지주 회장도 빈소를 찾았다.

국제항공운송협회(IATA)는 “조 회장은 지난 20년간 항공업계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데 있어 큰 공헌을 했다”고 발표했다. 조 회장의 주도로 설립된 항공 동맹체 스카이팀(SkyTeam)도 “조 회장은 스카이팀 창립 멤버로 20년 동안 열정적으로 공헌했다”라고 애도했다.

그가 1999년 대한항공 회장에 오른 뒤 20년이 흐른 지금, 대한항공은 재계 순위 14위, 자산 규모 30조5000억원의 글로벌 항공·물류 회사로 성장했다. 1969년 8대의 비행기로 시작한 대한항공은 창립 50주년인 2019년 들어 166대의 항공기를 보유하는 등 세계적 항공사로서의 위상을 굳혔다. 현재 43개국 111개 도시에 취항하고 있다. 정작 본인은 3월 4일 강서구 공항동 대한항공 본사에서 열린 창립 5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그로부터 한 달여 뒤, 생전 가장 좋아했던 하늘로 돌아간 조 회장은 선친 조중훈 선대회장이 잠든 경기도 용인시 하갈동 신갈 선영에 안장됐다.

인터뷰 끝머리에 이 단장에게 대한항공 경영권의 미래에 관해 어떻게 바라보는지 물었다. 그는 “세간의 우려에 관해선 듣고 있다. 조원태 사장을 중심으로 남은 가족들끼리 뭉쳐서 잘 해나가지 않겠느냐?”고 조심스레 전망했다. 실제 그다음 날 새벽, 인천공항에 들어온 조원태 사장이 세상에 알린 조양호 회장의 유훈은 “가족들끼리 잘 협력해서 사이좋게 이끌어 나가라”였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이제부턴 슬픔을 짊어지고도 어떻게든 살아가야 할 남은 자들의 몫이다.

201905호 (2019.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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