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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호의 한국사 대전환기 영웅들(제1부)] 진흥왕, 한강 유역을 점령하다(5) 성왕 참수 사건 

승리를 눈앞에 두고 매복에 걸린 백제 왕의 최후 

신라, 백제·가야·일본 연합군 정보망 통해 무력화
진흥왕은 고구려와 백제 번갈아 이용하면서 삼국통일 기반 다져


▎백제시대 재현 행사에서 장수들이 적군과 맞서 싸우려고 말을 몰아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551년(백제 성왕 29, 신라 진흥왕 12, 고구려 양원왕 7, 일본 긴메이 천황 12) 9월 백제는 신라·가야와 함께 고구려를 공격해 한강 하류를 점령했다. 475년 9월 백제가 고구려에 패해 한강 하류를 상실한 지 77년 만이었다. 백제는 한강 하류의 6군(郡)을 회복함으로써 한반도의 주도권도 장악했다.

당시 고구려 주력군은 만주에서 돌궐과 전투 중이라 한강 방면을 방어할 겨를이 없었다. 백제 성왕은 그 기회를 이용해 아예 고구려를 멸망시키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라 도움이 필요했고, 진흥왕에게 연합 공격을 제안했다.

[삼국유사]에는 “백제가 신라와 병력을 합해 고구려를 공격하고자 했다. 그런데 진흥왕은 ‘나라의 흥망은 하늘에 달렸는데 하늘이 고구려를 내치지 않는다면 내 어찌 그 멸망을 바라겠는가’라며 이 말을 고구려에 통보했다. 고구려는 진흥왕의 말에 감동해 신라와 우호관계를 맺었고 백제는 원망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 본다면 진흥왕은 성왕의 제안을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그 제안을 고구려에 통보까지 한 것이 분명했다. 진흥왕은 무슨 생각에서 그렇게 했을까?

우선적으로 백제의 주도권을 막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77년 만에 한강 하류를 회복하고 한반도의 주도권을 장악한 백제 성왕은 당연히 그 주도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 아예 고구려를 멸망시키고자 했다. 그 다음으로 신라와 가야를 멸망시키려 할 것임은 불문가지였다. 이런 판단에서 진흥왕은 성왕의 제안을 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다음이 문제였다. 거절할 경우 성왕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었다. 성왕이 진흥왕에게 고구려 공격을 제안했을 때는 거절할 경우 어떻게 할지 전략도 마련했다는 의미나 같았다. 당시 성왕은 단독으로라도 고구려를 공격할 계획이었을 것이다.

그럴 경우 가장 우려되는 것은 신라의 기습이었다. 백제 주력군이 고구려 쪽으로 향했을 때 진흥왕이 무방비 상태의 사비를 공격한다면 대책이 없었다. 그것을 막을 수 있는 최선의 전략은 신라와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성왕이 진흥왕에게 연합 공격을 제안했을 때는 상당한 대가를 미끼로 던졌다고 봐야 한다. 당연히 그 미끼는 고구려 영토 분할이었을 것이다.

고립무원이던 고구려에 군사동맹 제안


▎백제의 중흥을 이끌었던 성왕의 초상.
그럼에도 진흥왕이 거절하는 경우에 대비해 성왕은 이런 전략을 세웠을 듯하다. 우선 백제 단독으로 고구려를 공격해 최대한 영역을 확장한다. 그때 신라의 기습을 막고자 가야 병력과 일본 병력을 동원해 대비한다. 백제 주력군이 고구려 병력을 괴멸시킨 후에 가능하면 고구려를 멸망시키거나 아니면 유리한 조건으로 휴전한다.

그 이후 가야와 일본에 신라 영토의 분할 점령을 미끼로 연합 공격을 제안한다. 예컨대 낙동강 하구는 가야가, 경주 지역은 일본이 그 외 지역은 백제가 분할 점령하는 방식이다. 이렇게 된다면 백제는 한반도에서 압도적인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진흥왕은 성왕의 이런 심산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성왕의 제안을 수용하기도 곤란했고 거절하기도 곤란했을 듯하다. 고심 끝에 진흥왕이 내린 결론이 바로 거절과 동시에 성왕의 제안을 고구려에 통보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성왕의 제안을 고구려에 통보한다는 것은 백제와의 군사동맹을 파기하겠다는 결심이 서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무 대책 없이 군사동맹을 파기한다면 신라가 제일 불리했다. 무엇보다도 가야와 일본이 백제 동맹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백제가 가야·일본과 더불어 신라를 공격한다면 살아남기 어려웠다. 그러므로 진흥왕이 백제와의 군사동맹을 파기하고도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사실상 고구려와의 군사동맹뿐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신라와 고구려가 오랫동안 적대국이었다는 사실이었다.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 개로왕을 죽이고 한강 하류를 점령한 때로부터 장장 77년간 신라는 백제와 군사동맹이었던 반면 고구려와는 적대관계였다. 따라서 진흥왕은 이렇게 오랜 세월 적대관계를 유지해온 고구려와 군사동맹이 가능할지 장담하지 못했을 듯하다.

그런 진흥왕에게 확신을 심어준 인물은 아무래도 거칠부였을 것이다. 당시 고구려는 북쪽의 돌궐, 남쪽의 백제·신라·가야·일본 모두와 적대관계였고 그래서 고립무원이었다. 거칠부는 고구려의 형편상 신라가 군사동맹을 제안할 경우 쌍수를 들어 환영하리라 확신했을 것이다. 게다가 거칠부는 고구려 출신의 혜량 법사를 확보하고 있었다. 혜량 법사를 통해 고구려 지배층에게 적당한 대가를 미끼로 군사동맹을 제안할 경우 성사될 가능성이 아주 높았다.

예컨대 신라와 고구려가 군사동맹을 맺고 백제와 가야를 멸망시킨 후 신라는 가야와 백제 영토를 점령하고, 고구려는 강원도와 충청북도 지역을 양보 받는다면 고구려 입장에서는 불리할 것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백제와 신라의 군사동맹을 파기할 수 있어서 이롭고, 나아가 숙적 백제를 멸망시킬 수 있어서 유리했으며, 강원도와 충청북도를 확보할 수 있어서 좋았다.

이 같은 거칠부의 판단을 진흥왕이 수용함으로써 성왕의 제안을 거부하고 그 제안을 고구려에 통보하면서 군사동맹을 제안했을 것이다. 거칠부의 예상대로 고구려가 수용함으로써 신라와 고구려의 군사동맹은 전격적으로 성사됐다. 이와 관련해 [일본서기]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전한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552년 5월 8일 백제·대가야·안라가야의 사신이 일본에 도착했다. 그들이 전달한 국서에는 “고구려와 신라가 화친하고 세력을 합쳐 백제와 가야를 멸망시키려 합니다. 삼가 원병을 요청해 먼저 불시에 공격하고자 합니다”는 내용이 있다. 신라와 고구려의 군사동맹을 확인한 백제 성왕 그리고 대가야와 안라가야의 지도층은 일본까지 끌어들여 신라와 고구려를 선제공격하기로 작전을 짰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그 작전은 백제 성왕이 주도했을 것이다.

상대의 오판 유도한 진흥왕의 ‘위장’ 공언(公言)


▎백제 말 세 충신 성충·흥수·계백(왼쪽부터)을 모신 사당.
그런데 당시 백제 수도 사비에서 일본 나라 지역까지 가는데 대략 한 달 걸렸다. 따라서 5월 8일 일본에 도착한 백제·대가야·안라가야 사신은 늦어도 4월 초순에는 한반도를 출발했다고 봐야 한다. 게다가 백제·대가야·안라가야 3국에서 서로 공조해 사신을 보냈으므로 실제 백제 성왕이 신라와 고구려의 군사동맹을 확인한 시점은 552년 연초였을 듯하다. 그렇다면 신라와 고구려의 군사동맹은 551년 연말쯤 성사됐고, 그 직후인 552년 연초에 백제 성왕이 그 사실을 확인했다고 짐작할 수 있다.

성왕은 진흥왕이 자신의 제안을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와 군사동맹을 맺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크게 놀랐을 것이다. 성왕은 혹시 진흥왕이 거절하리라 예상했을지는 몰라도 고구려와 군사동맹을 맺으리라고는 예상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라가 고구려와 전격적으로 군사동맹을 맺은 이상 성왕의 선택은 가야 그리고 일본과의 연대를 강화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성왕은 대가야·아라가야 등 당시 가야 연맹의 대표 국가들과 협의해 일본에 사신을 보냈을 것이다. 대가야·아라가야 등이 성왕에게 적극 협조한 이유는 물론 신라와 고구려의 군사동맹 목적이 궁극적으로 백제와 가야 멸망이라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일본의 긴메이(欽明) 천황은 “백제와 가야가 마음과 힘을 하나로 하면 반드시 하늘이 지켜주는 복을 받을 것”이라는 애매한 반응을 보였다. 당시까지만 해도 긴메이 천황은 군사 파병을 주저했던 것이다.

이에 성왕은 552년 연말에 또다시 군사 파병을 재촉하는 사신을 파견했고, 그 사신이 553년 1월 12일 일본에 도착했다. 덕솔(德率) 과야차주(科野次酒)를 대표로 하는 백제 사신은 끈질기게 군사 파병을 협상했다. 그 결과 6월에 마침내 긴메이 천황은 군사 파병을 결심했고, “요청한 군대는 왕이 바라는 바에 따르겠다”는 국서를 전하기 위해 백제로 사신을 파견했다. 그 일본 사신은 553년 7월쯤 사비에 도착해 국서를 전달했을 것이다.

이렇게 성왕이 일본에 자주 사신을 파견하자 신라에서도 알게 됐다. 당연히 진흥왕은 그냥 당할 수 없었다. 진흥왕 입장에서는 성왕이 가야와 일본의 병력을 이용해 신라를 공격하기 전에 선수를 치는 것이 상책이었다. 이와 관련해 [일본서기]에는 “신라가 고구려와 함께 모의하기를 ‘백제와 가야가 자주 일본에 가니 분명 군사를 빌려 신라를 치려는 것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신라의 패망은 발꿈치를 들고 기다리는 것과 같을 것이니 일본 군대가 출동하기 전에 안라가야를 공격해 빼앗아 일본의 통로를 끊자’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으로 본다면 백제와 가야 그리고 일본의 밀착을 눈치 챈 진흥왕은 안라가야를 선제 공격해 일본과의 연결통로를 차단하겠다고 공언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 공언은 성왕을 오판케 하는 위장 공언이었다. 진흥왕의 위장 공언에 현혹된 성왕은 안라가야에 집중하면서 한강 하류 방어를 소홀히 했다. 그 기회를 이용해 진흥왕은 553년 7월 한강 하류의 6군을 기습 공격했다. 안라가야에 집중하며 일본 파병을 기다리던 성왕은 대응하지 않고 후퇴했다.

만약 한강 하류를 지키고자 대규모 병력을 보내면 신라군이 안라가야를 공격할까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일본서기]에서는 “백제가 6군을 포기했다”고 했는데, 대응하지 않고 후퇴한 상황을 그렇게 설명했을 것이다. 즉 당시 성왕은 신라의 한강 하류 공격을 위장 공격으로 오판했던 것이다.

일본·가야 끌어들여 전면전 준비한 백제


▎경북(김천시), 충북(영동군), 전북(무주군) 등 3개 도가 만나는 나제통문(羅濟通門), 무주구천동의 33경 중 제1경으로 꼽힌다.
그러나 그것은 위장 공격이 아니라 실제 공격이었다. 결국 성왕은 진흥왕의 위장 공언에 현혹돼 한강 하류를 그냥 내준 셈이 되고 말았다. 그 결과 진흥왕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한강 하류의 6군까지 장악했다. 당시 신라 상황으로 볼 때 이 같은 위장 전략은 거칠부가 입안했을 가능성이 크다. 한강 하류가 신라에 넘어감으로써 이제 한반도 주도권은 백제 성왕에게서 다시 신라 진흥왕에게로 넘어갔다.

진흥왕은 신라 역사상 최초로 장악한 한강 하류 지역을 방어하기 위해 신주(新州)를 설치했다. 신주의 책임자로는 아찬 김무력(金武力)을 임명했다. 김무력은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의 둘째 아들이었다. 즉 김무력은 금관가야의 망명객이었는데 훗날 삼국통일의 주역이 되는 김유신 장군의 할아버지이기도 했다.

금관가야를 정복한 법흥왕은 항복한 왕족들을 우대해 진골로 편입했다. 정복군주를 지향하던 법흥왕으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정복이란 것이 무력으로만 이뤄지는 게 아니기에 자발적인 항복을 유도하기 위해서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비록 적국의 왕족이라고 해도 항복하면 특별 우대할 필요가 있었다. 그 결과 금관가야 왕족들은 신라 진골로 편입될 수 있었는데 그 정도로 법흥왕이 개방적이기도 했다.

항복한 금관가야 왕족 중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 김무력이었다. 김무력은 이사부에 의해 중용됐으며, 553년 7월 한강 하류 공격에도 참여해 전공을 세웠다. 그 점을 높이 사서 진흥왕은 김무력을 신주 책임자로 임명했던 것이다. 따라서 김무력은 거칠부와 함께 친정 직후 진흥왕이 중용한 핵심 인재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아울러 김무력은 비록 적국의 왕족이라도 신라에 충성하면 김무력처럼 중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상징 인물이나 같았다.

한편 한강 하류까지 빼앗겨 더욱 다급해진 성왕은 553년 7월에 군사 파병을 재촉하는 사신을 또 일본에 파견했다. 8월 7일 일본에 도착한 백제 사신은 “일본 병력이 백제에 도착하면 옷과 식량은 백제에서 공급할 것이고, 가야에 도착하면 가야에서 공급할 것이며, 만약 가야가 감당하지 못한다면 백제가 도와 부족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국서를 전달하고 신속한 파병을 요청했다.

이에 긴메이 천황은 파병 병력을 규슈 후쿠오카 지역에 집결하게 했는데, 일단 준비를 마치고 554년 1월쯤 1000명을 먼저 파병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실제 파병은 그보다 5개월 후인 554년 6월에야 성사됐다.

당시 성왕은 하루가 급한 상황이었다. 만약 일본 병력이 도착하기 전에 신라가 고구려와 연합해 공격하면 백제는 협공 당하는 형세가 돼 아주 곤란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성왕은 어떻게 해서든지 일본 병력이 도착하기 전까지는 신라와의 전쟁을 회피하고자 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 553년 10월 성왕은 자신의 딸을 진흥왕에게 출가시켰다. 겉으로 보면 진흥왕이 성왕의 사위가 됨으로써 양국은 아주 가까운 우호국이 됐지만 실상은 전쟁 직전이었다. 당시 진흥왕이 왜 성왕의 딸을 소비(小妃)로 맞이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 또한 어부지리 전략의 연장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신라와의 혼인을 통해 시간을 번 성왕은 553년 12월에 또 사신을 규슈 지역에 파견해 파병 병력이 얼마나 되는지, 언제 파병할지를 확인했다. 일본군 사령관은 “병력 1000명, 말 100필, 전함 40척을 우선 보내겠다”고 대답했다. 그 선발 병력이 554년 6월이 돼서야 사비에 도착했다. 일본의 지원 병력이 도착하자 성왕은 그동안 미뤄왔던 신라와의 전면전을 준비했다.

그 전면전을 위해 백제 병력 1만, 가야 병력 2만이 동원됐다. 백제 병력보다 가야 병력이 더 많은 이유는 그 전면전의 목적이 가야 방어였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성왕이 동원한 병력은 백제 병력 1만, 가야 병력 2만 그리고 일본 병력 1000 등 총 3만여 명이었다.

백제 태자, 속전속결을 추진하다


▎삼국시대 세 나라의 치열한 전투를 묘사한 전쟁기록화.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 소장돼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554년 7월 신라는 명활산성을 수리했다는 기록이 있다. 명활산성은 경주 동쪽의 토함산에 자리한 산성이었다. 진흥왕이 554년 7월에 명활산성을 수리한 이유는 백제와의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성왕이 가야·일본과 더불어 신라를 침공하려 준비 중이라는 사실을 몰랐을 리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진흥왕은 백제의 침공에 대비하려고 먼저 고구려에 병력 파병을 요청했을 듯하다.

하지만 고구려는 파병 대신 관망만 했던 것으로 보인다. 비록 신라와 군사동맹을 맺기는 했지만 속셈은 신라와 백제의 양패구상(兩敗具傷)을 원했기 때문이다. 신라와 백제가 전면전을 벌여 둘 다 기진맥진해진다면 그것이 고구려에 제일 유리했다.

따라서 진흥왕은 고구려 파병을 기대할 수 없었고, 독자적으로 백제와의 전면전을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성왕이 가야와 일본 병력까지 끌어들인 상황이라 신라가 불리한 상황이었다. 자칫 경주를 함락당할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그래서 최악의 경우 경주 월성을 버릴 심산으로 진흥왕은 명활산성을 수리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일본서기]에 의하면 당시 백제에서 신라 침공을 가장 강력하게 주장한 인물은 성왕의 태자였다. 반면 원로대신들은 “하늘이 아직 우리와 함께하지 않으니, 재앙이 미칠까 두렵습니다”며 반대했다. 원로대신들의 주장은 전쟁준비가 충분하지 못하다는 의미이자, 승리 요건이 충분하지 못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당시 백제의 신라 침공이 성공할지 아니면 실패할지는 사실 고구려에 달려 있었다. 고구려가 신라 편을 든다면 백제는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반면 고구려가 백제 편을 든다면 백제는 승리를 자신할 수 있었다. 당시 고구려는 신라에 파병 대신 관망 중이었으므로, 고구려와 외교 협상을 벌여 완전하게 신라를 버리게 만든다면 승리는 확실했다.

따라서 원로대신들의 주장은 고구려와의 외교 협상을 통해 완전하게 신라를 버리게 한 다음에 침공해야 한다는 주장이었을 것이다. 아울러 일본에서 파병한 병력 역시 1000명에 불과하므로 좀 더 많은 병력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개전하자는 주장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성왕의 태자는 “그대들은 늙었습니다. 무엇이 겁난단 말입니까? 우리에게는 일본 병력이 있는데 어찌 두려울 것이 있습니까”라며 즉각적인 침공을 주장했다. 성왕의 태자는 백제가 신라를 침공하는 데 굳이 고구려를 끌어들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만약 원로대신들의 주장대로 고구려로 하여금 완전하게 신라를 버리게 만들려면 엄청난 미끼를 던져야 가능했다. 예컨대 신라가 장악한 한강 하류의 6군을 비롯해 경기도·강원도 등지를 고구려에 양보하겠다는 미끼를 던진다면 가능할지 몰랐다. 그런 미끼를 걸고 백제가 신라를 침공할 때 고구려 군은 한강 유역의 신라군을 공격해 점령하는 것으로 협상한다면 성사될 가능성은 있었다.

하지만 성왕의 태자는 그렇게 하기 싫었던 것이다. 우선 고구려가 싫었고, 경기도와 강원도 영토도 아까웠던 것이다. 또한 일본의 추가 파병을 기다리다 보면 백제의 병력이 증강되는 장점이 있지만 신라의 대비도 그만큼 강해질 것이 분명했다. 따라서 속전속결이 유리하다는 것이 태자의 의견이었을 것이다.

성왕은 원로대신과 태자의 의견 가운데 태자의 의견에 동조했다. 그래서 태자를 신라 침공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554년 12월 초에 성왕의 태자는 백제·가야·일본 연합군을 거느리고 사비를 출발해 신라 관산성으로 향했다. 일본 병력이 사비에 도착한 6월부터 대략 6개월 후였다. 그 6개월 동안 성왕은 작전을 짜고 필요한 병력과 무기를 동원했을 것이다.

신라 관산성은 현재의 옥천에 자리한 성으로서 충청도에서 추풍령을 넘어 대구를 거쳐 경주로 가는 길목에 있었다. 성왕의 태자가 관산성으로 진군한 이유는 그의 최종 목표가 경주였기 때문이었다. 즉 당시 성왕의 태자는 신라 멸망을 최종 목표로 관산성을 향해 진군했던 것이다. 신라 멸망 이후에는 백제·가야·일본 간에 신라 영토 분할이 합의돼 있었을 듯하다.

성왕의 태자는 관산성 주변에 군영을 세우고 총공격을 준비했다. 드디어 12월 9일 오전 태자는 관산성을 향해 총공격을 개시했다. 신라의 군주(軍主)인 각간 우덕(于德)과 이찬 탐지(耽知) 등이 맞서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했다. 12월 9일 오후 6시쯤 성왕의 태자는 관산성을 함락시키고 불태워버렸다. 대승이었다.

왕 전사 소식에 연합군은 전의 상실

성왕은 즉시 일본에 사신을 파견해 승전을 알리면서 “만약 신라뿐이라면 이미 파병된 1000명으로 충분하지만 고구려가 신라와 마음을 함께하고 힘을 합했으므로 성공하기 어려우니 규슈에 있는 병력을 빨리 보내 돕게 한다면 성공할 것”라며 추가 파병을 요청했다. 이 요청으로 본다면 사태를 관망 중이던 고구려가 신라를 돕고자 참전하려 하는 움직임이 포착된 듯하다.

관산성 패전으로 신라가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판단에서 고구려는 참전하려 했을 것이다. 그런 상황을 탐지한 성왕은 백제 주력군으로 고구려 병력을 막고 추가 파병된 일본 병력으로 신라를 공격하고자 일본에 추가 파병을 요청했을 듯하다. 하지만 일본의 추가 파병이 이뤄지기 전에 성왕이 신라군에게 참수당하는 급변이 발생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성왕은 태자가 계속된 전쟁에 오랫동안 쉬지도 먹지도 못하며 고생하는 것을 걱정했다고 한다. 게다가 오랫동안 태자를 보지 못해 보고 싶기도 했다. 그래서 직접 관산성까지 가서 태자의 노고를 위로하고자 했다. 아마도 당시 성왕은 고구려의 참전 가능성에 대비 중이었을 텐데 잠깐 관산성으로 가서 태자도 만나고 승전도 축하하면서 전황도 확인할 겸 해서 사비를 떠났을 것이다. 그래서 최소한의 호위 병력만 대동했다. 백제 주력군은 고구려 참전에 대비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이 신라 정보망에 걸려 누설됐다. 진흥왕은 신주의 군주 김무력으로 하여금 병력을 동원해 관산성으로 출동하게 했다. 당시 신라의 최전방을 방어하던 김무력이 관산성으로 출동한 것은 고구려와의 협조로 가능했을 것이다. 김무력은 비장(裨將)인 삼년산군의 고간(高干) 도도(都刀)를 성왕이 지나는 길목에 매복하게 했다. 이 매복병에 걸려 성왕은 참수 당했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도도가 성왕을 사로잡아 두 번 절하고 “왕의 머리를 베도록 해주십시오” 하자, 성왕은 하늘을 우러러 크게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며 “과인이 생각할 때마다 늘 고통이 골수에까지 사무쳤다. 돌이켜 헤아려 봐도 구차하게 살 수는 없다” 하면서 머리를 내밀어 베도록 했다고 한다. 신라는 성왕의 머리를 남겨 매장하고 나머지 뼈는 예를 갖춰 백제에 보냈다.

성왕의 전사가 알려지자 백제·가야·일본의 연합군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김무력이 승승장구해 좌평 4명과 적군 2만9600명의 목을 벴다고 한다. 3만여 명이 참전했던 백제·가야·일본의 연합군은 거의 전멸당했던 것이다. 성왕의 태자와 일부 병력만 간신히 탈출했다.

이로써 신라는 한반도 주도권을 확실히 장악하게 됐다. 백제는 신라와 도저히 화해할 수 없는 철천지원수가 됐다. 하지만 정복군주로서 진흥왕의 이름은 역사에 길이길이 남게 됐다.

※ 신명호 - 강원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201905호 (2019.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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