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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호의 서양사 현장르포 | 승자의 조건, 패자의 교훈(6)] 아테네 몰락 전주곡, 소크라테스 독배 

‘친(親) 스파르타 단죄’, 마녀사냥이 부른 사법살인 

패전(敗戰) 콤플렉스 ‘내부의 적’ 색출로 풀려던 선동가들
사법 포퓰리즘 앞세운 2019년 한국의 친일(親日)청산과 닮아


▎아테네에서 가장 높은 언덕 리키비토스 너머로 에게 해가 내려다보인다.
4월 말 로마에 들렀다. 기차를 타고 나폴리에서 베네치아에 올라가는 도중 충동적으로 로마 테르미니(Termini) 중앙역에 내렸다. 18시간 정도 머물렀지만, 대낮 6시간 정도를 한군데에서 보냈다. 로마 한가운데 서 있는 카피톨리니(Capitolini) 박물관이다.

고대 로마는 7개 언덕을 중심으로 한 도시다. 박물관이 들어선 카피톨리니는 7개 언덕의 맏형에 해당한다. 고대도시 로마의 핵(核)이라 볼 수 있다. 고대 로마정부의 건물과 신전, 권력자들의 주택, 초대형 시장이 얽혀진 곳으로, 그 유명한 ‘로만 포럼(Roman Forum)’이 바로 앞에 펼쳐져 있다. 박물관 정면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기마상에 주목하기 쉽지만, 필자에게는 뒤쪽에 위치한 로만 포럼 전망대가 더 중요하다. 언덕 위에 들어서 있는 만큼, 로만 포럼을 아래로 내려다보는 구도다. 콜로세움도 눈에 들어온다. 따라서 고대 로마를 입체적으로 이해하고 싶다면 카피톨리니가 필수다.

대학 입학 당시 기억이지만, 선배로부터 필독 100권 리스트를 받은 적 있다. 열심히 읽었지만, 현재 머릿속에 남은 것은 대략의 스토리와 타이틀 정도에 불과하다. 30여 년이 지난 지금 필자의 독서법은 크게 바뀌었다. 100권을 전부 읽기보다 인생에서 진짜 중요한 책 1권을 100번 읽는 식이다. 양보다 질이다. 심플 라이프는 집·자동차·옷·가구 같은 물질적 차원에 그치지 않는다. 인생이 유한한 이상, 진짜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해 대응해야 한다. 로마 내 볼거리는 수없이 많다. 진짜 중요한, 반복해서 보고 느끼고 상상할 곳은 몇 군데로 압축된다. 카피톨리니는 그중 하나다.

카피톨리니는 온종일 둘러봐도 끝이 없는 영원의 세계다. 주관적 판단이지만, 파리 루브르 박물관을 팔방미인 초대형 백화점이라고 할 때, 카피톨리니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상품을 앞세운 마니아 전문가게라 볼 수 있다.

카피톨리니에서 보낸 6시간의 화두는 소크라테스였다. 기원전 4세기 고대 그리스에서 만들어진 소크라테스 두상을 보기 위해 카피톨리니에 들렀다. 소크라테스 두상은 유럽 유명 박물관 어디에 가도 쉽게 볼 수 있다. 몽골인 얼굴을 방불케 하는, 펑퍼짐하고 둥근 얼굴 덕이다. 흔히들 추남의 대명사로 부르지만, 필자의 눈에는 심술쟁이 얼굴로 느껴진다.

로마 카피톨리니에서 만난 ‘진짜’ 소크라테스

그러나 카피톨리니의 소크라테스는 다르다. 다른 곳의 두상은 고대 그리스 작품을 흉내 낸 고대 로마나, 15세기 르네상스 제조된 ‘짝퉁’에 불과하다. 소크라테스가 세상을 떠난 때는 기원전 399년이다. 카피톨리니 소크라테스 두상이야말로 고대 그리스인이 알고 있던 진짜 인물의 모습이다. 추남이나 남을 못살게 구는 모습이 아닌, 깊고도 넓은 지성과 지혜가 번뜩인다. 100권 통독보다, 1권의 100번 열독이다. 전 세계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수많은 짝퉁이 아닌, 진짜 소크라테스를 만나고 싶었다. 갑자기 로마에 내린 이유다.

소크라테스 두상은 카피톨리니 박물관을 구성하는 세 동 가운데 하나인 ‘팔라초 누오보(Palazzo Nuovo)’에 들어서 있다. 카피톨리니 박물관이 처음 문을 연 것은 1471년이다. 교황 식스투스(Sixtus) 4세가 고대 그리스 로마의 유물을 일반인에게 보여주고자 만든 전시장이다. 팔라초 누오보는 1603년부터 확장에 들어간 새로운 공간이다. 미켈란젤로가 직접 도안한 조감도에 의해 131년에 걸친 공사 끝에 1743년 문을 연 곳이다.

소크라테스는 당시 이래 지금까지 똑같은 장소에 들어서 있다. 전부 중요하겠지만, 필자가 볼 때 팔라초 누오보에서의 핵심 전시장은 두 군데다. 황제(Sala degli Imperatori)와 철학자(Sala dei Filosofi) 전시장이다. 각각 100여점이 전시된 공간으로, 묘하게도 서로 인접해 있다. 고대 로마를 창조해낸 이탈리아인답다고 할까? 대제국의 영광을 창출해 낸 수많은 황제와, 인간 개개인의 품과 격을 높이는데 평생을 보낸 철학자들을 동일 선상에서 다룬다.

이탈리아 청년과의 대화를 통해 알았지만, 철학은 고등학교 필수과목 중 하나다. 소크라테스가 던진 질문에 답하는 식의 토론을 10대 때 경험한다. 한국은 철학자가 드문, 아니 아예 없다고 봐도 무방할 듯하다. 설령 갑자기 수많은 철학자가 탄생한다 해도, 역대 대통령 초상화 전시실 바로 옆에 ‘감히’ 들어설 수 있을지 의문이다. 한국의 역사 상식과 전혀 무관한 세계가 바로 팔라초 누오보다.

로마에서의 하루를 소크라테스에 주목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고대 그리스 철학자가 남긴 역사적 메시지에 관한 부분이다. 그의 삶과 죽음이 어떤 의미와 가치로 인류 역사에 남아있을까? 둘째는 소크라테스 활동 시기의 고대 그리스와 2019년 한국의 오늘을 비교 분석하기 위해서다. 2400여 년 전 그리스를 통해, 한국이 배우고 익힐 교훈은 과연 무엇일까?

거창한 주제로 와 닿을지 모르겠다. 필자가 생각하는 두 가지 이유는 사실, 그렇게 심오하지도 않은 일상적 관심에 불과하다. 21세기 상황을 2400여 년 전과 비교한다는 데 대해 부정적일 수도 있겠다. 고대 그리스 역사와 교훈은 선진 문명국 대부분이 수백 년간 활용 차용해온 지혜의 보고(寶庫)다. 근본과 원리가 통하면 현상을 보는 눈과 머리도 정확해질 수 있다. 고대 그리스, 그중에서도 소크라테스가 남긴 행적과 교훈은 인류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계속될 스토리다.

소크라테스라고 하면 두 가지 말이 가장 먼저 떠오를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스스로 책을 남긴 적이 없는, ‘인용 철학자’로 유명하다. 소크라테스의 직계제자인 플라톤이 일등 공신이다. 소크라테스에 관한 수많은 얘기는 플라톤이 남긴 저서 [소크라테스의 변명]과 [대화]를 통해 전해지고 있다. ‘너 자신 알라’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도 플라톤의 인용을 통해 알려졌다.

소크라테스 명언 가운데 필자의 관심을 끄는 것은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이다. 사실,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은 소크라테스의 작품이 아니다. 델피의 신탁이 있는, 아폴로 신전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걸린 경구(警句)가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이다. 미래를 예시할 신의 목소리보다, ‘너 자신을 솔직히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라는 의미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이 가진 무식함을 이해하는 데서부터 세상을 이해할 수 있다’라는 말로 진화시킨다. 나를 알면 알수록 세상사에 무식한 스스로 모습이 부끄러워진다는 의미다. 무식은 지식만이 아닌, 지혜와 경험도 포괄하는 말이다. 지식과 지혜를 통해 선(善)과 덕(德)에 이를 수 있다고 믿은 인물이 소크라테스다.

‘악법도 법이다’에 담긴 두 가지 의미


▎카피톨리니 박물관 뒤에서 바라본 로만 포럼. 로마 국가기관 건물과 권력자들의 집, 시장이 밀집한 로마의 핵에 해당되는 공간이다.
‘악법도 법이다’는 말은 여러 측면에서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명언이다. 독재자가 만든 법도 따라야만 한다는 식의 논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스탈린이 만든 독재자의 법도 지켜야만 하는가? 과연 어떤 상황에서 소크라테스의 발언이 이뤄졌을까? 소크라테스는 최후의 독배로 유명하다. 독배를 든 채 ‘악법도 법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사법체계 무질서와 불신은 나라가 엉망이 될 경우 가장 먼저 나타나는 증거 중 하나다. 법 적용 해석도 엉망이 되지만, 법 집행도 갈팡질팡한다. 소크라테스 최후의 날의 아테네의 일상적 풍경이기도 하다. 사형이라도 돈만 주면 적당히 풀려나 도망갈 수 있었다.

필자의 판단이지만, 소크라테스 최후의 상황을 보면 ‘악법도 법이다=스탈린 법도 지켜야 한다’는 의미와 무관할 듯하다. ‘아무리 악법이라도 법을 어기면서까지 돈을 주고 도망갈 정도로 비굴한 소크라테스가 아니다’라는 점에 무게중심을 둔, 확신범·양심범으로서의 자세가 ‘악법도 법’이란 말로 결론지어진 것이 아닐까 판단된다.

더불어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법은 ‘법치국가에 근거한 통치수단으로서의’ 법을 의미한다. 잘 알려져 있듯이, 폴리스(Polis) 국가 아테네는 성인 남성 모두가 참석해 법을 제정·실천하는, 직접민주주의체제다. 나 스스로가 참가해 만든 법이 나의 이해나 상식에 안 맞는다고 피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직접민주주의에 의한 법치국가일 경우’라는 것이 전제조건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직접민주주의의 원조 아테네가 소크라테스를 사형장으로 몰아세웠을까? 이성이라 보기 힘든, 감정적 차원의 법 적용이 어떤 배경 하에서 이뤄질 수 있었을까?

2차례에 걸친 펠로폰네소스전쟁에서의 패인이 가장 큰 이유다. 기원전 431년과 404년 벌어진 전쟁으로, 아테네의 모든 영광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 계기이기도 하다. 100여 년 간 하늘을 찔렀던 아테네의 직접민주주의와 경제적 번영이 한순간 사라진다. 기원전 404년 아테네가 스파르타에게 완전히 항복한 뒤, 내부의 공포정치로 혼미를 겪다가 결국 지중해와 에게 해 그리스 전체가 마케도니아에 의해 점령된다.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같은 그리스 문화권의 형제국이다.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가 쳐들어올 때는 함께 맞서 싸운 동맹국이기도 하다. 왜 같은 형제끼리 두 번이나 전쟁에 돌입했을까? 당시의 상황을 보면, 자유민주주의에 기초한 폴리스 체제가 낳은 필연적인 결과라 볼 수 있다. 폴리스에 가장 중요한 것은 주권과 자유다. 문화·피·이념·종교조차도 주권과 자유 이후의 문제다. 따라서 적인 페르시아와의 협력도 마다치 않았다. ‘만인 대 만인의 투쟁’에 익숙한 지역이 그리스 문화권의 폴리스 체제다.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 연합군이 페르시아를 몰아내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문제는 그 이후다. 전리품을 나누는 과정에서 씻을 수 없는 간극이 생긴다. 페르시아를 누른 뒤,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Delian League)을, 스파르타는 펠로폰네소스 동맹(Peloponnesian League)을 통해 자신의 영역과 영향력을 확장해나간다.

그러나 지리적·지정학적으로 볼 때 펠로폰네소스 동맹은 델로스 동맹에 비교될 수가 없었다. 한때 200여 폴리스로까지 확장됐던 델로스 동맹국의 경제적 풍요가 원인이다. 스파르타의 펠로폰네소스 동맹국들은 기본적으로 가난한 폴리스들이다. 승자로 패권을 잡게 되지만, 달라진 게 없다. 불만에 차게 된 것은 당연하다.

펠로폰네소스전쟁으로 쇠락한 아테네


▎카피톨리니 박물관 광장 한가운데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청동상이 들어섰다. / 사진:유민호 객원기자
반대로 아테네는 부자 폴리스 델로스 동맹권에 대한 경제적 착취와 간섭에 들어간다. 페르시아 재침에 대비하자는 것이 명분이다.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은 당시 델로스 동맹국으로부터의 세금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계속된 세금 징수로 인해 델로스 동맹권 내 불만도 점증한다. 스파르타는 델로스 동맹권의 불만과 이탈을 이용해 반(反) 아테네 전선에 나선다. 바로 아테네를 쇠락의 길로 몰아간, 두 차례에 걸친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배경이다.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신 것은 아테네 항복 5년 뒤다. 델로스 동맹이 궤멸하고, 아테네의 번영이 땅에 떨어지면서 내부 갈등과 분열로 인해 사회 전체가 카오스 상태이던 시기다.

당시 소크라테스에게 떨어진 죄명은 유언비어 유포, 청소년 상대 미풍양속 저해로 압축될 수 있다. 소크라테스를 따르던 그리스의 젊은 정치인이 적대국이던 스파르타에 망명, 반역자로 변신하자 소크라테스에게 책임을 묻게 된다. 아테네의 무지와 왜곡을 비판하는 소크라테스의 왜곡된 세계관 때문에 청년들이 반역자로 변신했다면서 사형을 요구한다.

아테네 항복 후 들어선 친(親) 스파르타계 과두정치 30인 정치체제 속에 소크라테스 제자가 들어가 있었다는 점도 사형의 근거 중 하나다. 배가 침몰하고 있지만, 과거사 규명을 통한 소위 ‘내부의 적’ 소탕 작전이 이뤄진 셈이다. 스파르타에 왜 졌는가를 따지기보다, 내부의 마녀사냥에 총 매진한 것이다. 책임을 피하려는 포퓰리즘 정치가들이 앞장선 것은 물론이다.

학교 교가는 물론, 임진왜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2019년 한국의 반일(反日) 활동이 2400여 년 전 아테네에서 벌어졌다고 보면 된다. 소크라테스를 통해 스파르타에 대한 열등감을 해소하고, 반(反) 소크라테스 주창자들을 애국자로 승격시키는 광기의 인민재판이다.

아테네는 직접 참여를 통한 민주주의의 발명국이다. 개인의 자유로운 발언이나 생각은 기본적 권리다. 남에게 나쁜 영향을 줬다는 이유로 사형에 처한다는 것은 전례가 없는 상황이었다. 최악이라도 국외 추방이 최고형이다. 스파르타에 몰리면서 피를 부르는 선동형 중우정치가 아테네로 밀려든 것이다. 직접민주주의 국가가 그러하듯, 아테네 사법체계는 철저히 시민 중심이다. 워낙 어불성설의 죄명이었기에 처음에는 유죄라 선고한 사람이 많지 않았다.

사법 무대 위에 벌어진 ‘바보들의 칼춤’


▎1. 기원전 3세기 도시국가 아모스(Amos)에서 내려다 본 에게 해. 고대 그리스 역사는 지중해가 아닌 에게 해의 제해권을 둘러싼 전쟁사다. / 2. 지혜의 여신 아테네는 도시국가 아테네의 수호신이다. 그러나 중우정치에 좌우된 아테네의 사법체계는 지혜의 여신조차 손볼 수 없었다. / 사진:유민호 객원기자
그러나 다시 한 번 재판을 벌여 상황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상황은 반전된다. 죽음 앞에도 너무도 당당하게 대처하는 소크라테스의 자세에 대한 반감도 생기면서, 결국 압도적 표 차이로 사형선고가 내려진다. 그러나 정작 소크라테스가 독배로 사라진 뒤, 아테네 시민들은 후회한다. “소크라테스 이상의 현자는 단 한 명도 없다”고 단언한 아폴로 신탁을 무너뜨린, 자신들의 무지와 광기를 스스로 혐오하게 된다.

아테네의 추락은 여러 측면에서 분석해 볼 수 있다. 서구의 유명대학 역사 시간에 논의되는 중요 테마이기도 하다. 단편적으로는 스파르타와의 전쟁에서의 패배가 이유일 것이다. 델로스 동맹국에 대한 착취와 오만도 이유다. 아테네 번성기의 대명사 페리클레스를 비롯한 아테네 시민 3할 이상의 목숨을 앗아간 전염병도 빼놓을 수 없다.

필자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직접민주주의라는 이름 하에 펼쳐진, 기존 사법체계의 파괴가 아테네 멸망의 큰 이유 중 하나라 판단한다. 직접민주주의의 장점이자 단점이지만, 시류와 흐름, 대세에 민감하게 된다. 좋게 말하면 정확한 반영이 될 수 있지만, 말 잘하는 몇몇 소수의 생각을 대세라 잘못 판단할 경우 어떻게 될까? 사법권을 무대로 한 중우정치다. 이미 닦아놓은 예상 가능한 절차와 법이 아니라, 사람 수에 근거한 중우정치가 사법체계를 좌지우지하게 된다. 혁명일 경우 아예 법체계 자체를 부인할 수 있다. 그러나 중우정치가 사법권을 오염시킬 경우 희한한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 법 자체를 그대로 두고 정통성도 인정하는 과정에서 인민재판이 이뤄질 수 있다. 소크라테스의 사형은 대표적인 예다.

개개인의 건강 문제에서처럼, 큰 병이 오기 전 구체적인 전조(前兆)가 반드시 나타난다. 모르고 지나가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예민한 사람이라면 미리 준비하게 된다. 불치의 중병은 아무리 큰 전조가 와도 ‘설마’라 생각하는 사람에게 닥친다. 아테네 사법체계 중우화는 소크라테스 독배 이전에 이미 만연한 상태였다. 기원전 406년 벌어진 아르기누세(Arginusae) 재판은 기원전 4세기 들어 아테네가 맞이할 비극적 역사의 복선(伏線)처럼 느껴진다. 스파르타와의 해전 도중에 벌어진 사건을 다룬 재판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기간 중, 스파르타가 120척 배를 몰고와 에게 해 레스보스(Lesbos) 섬에 포진한다. 아테네는 155척의 배로 대응한다. 유명한 아르기누세 해전이다. 예상외로 아테네의 대승리다. 아테네 장군 8명은 승전보를 올리며 귀환한다.

그러나 영광과 기쁨은 한순간 끝난다. 전투 중 바다에 빠진 수백 명의 아테네 전사를 방관, 결국 모두 익사하게 만들었다는 책임이 기다리고 있었다. 장군 8명에 대한 비난이 들끓는다. 익사한 전사들의 가족과 8명 장군의 무공을 시기한 정치인들이 만들어낸 비난이었다. 8명 장군 중에는 아테네 영광의 상징인 페리클레스의 아들도 들어가 있다. 비난에 직면한 장군 8명은 “눈앞의 스파르타와 싸우느라 구조할 시간이 없었다”고 애원하듯 말한다.

살인자 낙인찍힌 마지막 영웅들

그러나 정치가들의 그럴듯한 말재주와 함께 장군 8명 모두를 재판장에 내세운다. 익사한 가족들의 통곡을 통해 장군 8명에 대한 돌팔매질이 당연시된다. 곧바로 장군의 지위도 박탈된다. 시민국가답게 장군이든 전사든 모두 평등하다. 시민을 죽인 살인죄가 적용된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이런저런 과정을 거쳐 결국 마지막으로 유죄판결이 내려진다. 사형이다. 사형 직전 지지자의 도움을 통해, 장군 8명 모두가 감옥에서 탈출해 망명에 나선다. 8명 중 1명은 나중에 체포돼, 감옥에서 굶어 죽는다.

흥미로운 것은 아르기누세 재판에 관한 소크라테스 일화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시민전사로 참가한 퇴역군인 출신이다. 그리스 군인 특유의 긴 창을 들고 일렬로 돌진하는 식의 전투에도 수차례 참전했다. 우연이겠지만, 추첨에 의해 1일 재판관으로 선정돼 아르기누세 장군 8명에 대한 판결재판에 참여한다. 군인을 제외할 경우, 71세에 걸친 소크라테스 인생을 통틀어 ‘유일하게’ 행한 공적 활동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판결 자체를 거부한다. 스스로가 ‘법에 어긋날 그 어떤 것도 하지 않겠다(do nothing that was contrary to the law)’는 말을 남기고, 판결투표 자체에 불참한다. 장군 8명의 행적에 대한 유죄 판단 여부 이전에, 판결 자체에 참가하는 것이 죄라 볼 수 있다고 판단했을 듯하다. 중우정치에 휘둘린 사법체계에 동참한다는 것 자체가, 진정한 법의 정신에 어긋난다고 본 것일지도 모른다. ‘악법도 법’의 전제는 자신이 참가한 법체계라는 데 있다. 판결투표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것은, 법 자체에 대한 신뢰성·정통성을 부정한다는 의미다. 악법·선법 이전에, 법이란 영역 밖의 무법·불법으로서의 아르기누세 재판이라 해석했을 듯하다.

지난해 말 아르기누세 해전의 현장인 레스보스 섬 주변에 들렀다. 터키 땅에서 불과 15㎞ 정도 떨어진 그리스 영토다. 터키 이즈미르(Izmir)에서 배로 1시간 정도면 갈 수 있다. 여성 동성애 레즈비언(Lesbian)의 어원이 된 섬으로, 나무와 동물들도 감동하게 했다는 신화 속의 음악가 오르페우스의 시신이 떠내려간 곳이기도 하다.

아르기누세 해전은 좁은 해협에서 벌어진 대살상전이다. 스파르타는 해전에서는 졌지만 이후 육전에서 대승을 하게 된다. 전쟁 중 벌어진 피치 못할 문제에 대한 법적 책임을 묻는 상황에서, 아테네 장군들 모두가 뒤로 빠진다. 중우정치에 휘둘린 사법 무대는 2400여 년 전 고대사에 그치지 않는다. 글을 쓰는 도중 함께 얘기를 나눈 이탈리아 여성은 ‘소크라테스가 남긴 교훈은, 어제가 아닌 오늘과 내일에도 통용될 역사’라고 말한다.

아테네가 궤변이었다면, 2019년 한국은 명분일 듯하다. 감히 따라갈 수도 없는, 크게 높은 명분이 넘치고 넘친다. 더불어 중우정치의 흔적과 냄새는 이미 곳곳에서 탐지된다. 사법을 통한 중우정치는 아테네 멸망 직전에 나타난 현상이다. 한국의 오늘과 내일에 대한 역사적 교훈을 알고 싶다면 카피톨리니에 들리길 권한다. 소크라테스가 2400년 전 자신의 얘기를 들려줄 것이다.

※ 유민호 - 미국 워싱턴에 있는 에너지·IT 컨설팅 회사 ‘퍼시픽21’의 디렉터. ‘딕 모리스 선거컨설턴트’ 아시아 담당.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방송(SBS) 기자로 일하다가 1994년 일본 마쓰시타정경숙 15기로 입숙해 5년 과정을 마치는 동안 125개 나라를 순회했다. 조지워싱턴 대학 E-Politics 프로젝트 디렉터, 일본경제산업성 연구소(RIETI) 연구원을 지냈다. [백악관에서 일하는 사람들] [중국 소프트파워] [미슐랭을 탐하다]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201906호 (2019.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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