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영수의 조선왕조 창업 秘錄(19)] 1391년, 조선 건국 1년 전의 합종연횡 

착할 뿐 무능한 왕을 부정하다 

공양왕과 정몽주 손잡고 반격하자 이성계는 낙향시위로 맞불
정도전은 상소로 공양왕과 스승 이색 공개 저격


▎전북 전주의 오목대. 태조 이성계가 조선 건국의 뜻을 암시했던 곳이다.
1391년은 자연재해가 유난히 심한 해였다. 가뭄이 들었고, 봄과 가을에 우박이 많이 내렸다. 3월에는 일식이 있었고, 7월에는 큰 지진이 발생했다. 4월에는 송충이가 개성 송악산의 소나무를 갉아먹었다. 5월에는 “객성(客星)이 자미(紫微)에서 폭발하고 화요(火曜)가 여귀(輿鬼)로 들어가서, 변이가 매우 크다”고 일관이 보고했다. 객성은 꼬리가 없는 혜성이고, 자미는 북두칠성의 북쪽 별자리로서 천제에 비유된다. 화요는 화성이고, 여귀는 남방의 7개 별자리 중 두 번째로 현재의 게자리 일부이다. 여귀는 사망과 질병, 제사를 주관한다. 9월에는 호랑이가 개성 시내에 들어왔다.

9월, 허응 등 간관의 상소를 보자.

“올해는 홍수와 가뭄·서리와 우박의 재변과 기근과 전염병의 근심이 함께 일어났으며, 또 말 1만 필을 바치라는 명이 있어서 중외가 시끄러웠는데, 여기에 더하여 성을 쌓고 개천을 파는 공역까지 있었으니, 백성들이 초췌해진 것이 오늘만큼 심했던 적이 없습니다. 하물며 가을에 연일 장맛비가 내리며 하늘이 견책하시니 감당하기가 어렵습니다. 가을 장맛비가 일단 개고 나면 서리와 눈이 이어 내릴 것이니, 얼고 굶주리는 무리들이 길에 가득할까 신 등은 두렵습니다.”([고려사] 공양왕 3년 9월 20일) 이런 와중에 명나라는 말 1만 필과 환관 200명을 요구했다.

[고려사]는 이 모든 자연현상이 왕조교체의 징후라고 해석했다. “지난번처럼 3일 동안 된서리가 나무에 하얗게 얼어붙었다. 의주(宜州)에 있는 큰 나무가 말라 썩은 지 여러 해가 되었는데, 이 해에 다시 가지가 뻗고 잎이 무성해지니 당시 사람들이 개국(開國)의 징조라고 여겼다.”([고려사] 공양왕 3년 12월 27일)

자연재해는 왕조교체의 징후

지진은 아래에서 위를 흔드는 것이니, 하극상의 징조이다. 객성이 자미를 범한 것도 신하가 제왕을 해치는 것이다. 일식도 그렇다. 태양은 제왕의 상징으로서, 태양이 빛을 잃는 것은 큰 변괴다. 송악산이 푸른빛을 잃는 것도 왕조의 쇠락을 상징한다. 송악산은 단순한 산이 아니다. 풍수지리에서 볼 때, 송악산은 고려왕조를 탄생시키고 지켜온 산이다. 이산 아래에 왕건의 아버지 용건의 집터가 있었다. 도선은 백두산으로부터 뻗어 내려온 지기(地氣)가 이곳에 응축됐으며, 그 지기를 받고 장차 삼한을 통일할 성스러운 아들이 태어날 것을 예언했다.

이런 모든 설명은 자연 현상을 하늘의 뜻으로 해석한다. 천인상관설 또는 천인감응설이다. 또한 인간 행위의 선악에 따라 자연현상의 순역이 결정된다고 보는 재이론(災異論)이기도 하다. 정도전도 그렇게 보았다. 1391년 5월, 정도전의 상소를 보자.

“하늘과 사람의 관계는 매우 밀접하여 길흉과 재상(災祥)이 각기 그 유(類)로서 응하게 됩니다. … 참소하는 사람이 아래에서 서로 이간하면 근심스러운 상(象)이 하늘에 나타나게 되는데 객성이 자미성을 범하였으니 신은 무삼사와 같은 자가 왕의 곁에 있는가 두려우며, 화요가 여귀에 들어갔으니 신은 마침내 무삼사의 화가 있을까 염려됩니다.”([고려사절요] 공양왕 3년 5월) 무삼사는 당 태종의 후궁이자 당 고종의 황후인 측천무후의 조카이다. 그는 야심을 품고 황제의 암살을 도모했다.

천인감응설은 한나라 초기 동중서가 [춘추번로]에서 체계화시켰다. 그는 자연철학을 정치철학으로 변환시켰다. 그 논리를 정도전은 이렇게 설명한다. “삼가 바라옵건대, 주상께서는 마땅히 사람을 쓰고 사람을 형벌할 때에는 그 친근하고 소원함과 귀하고 천한 사람임을 논하지 마시고, 공과 죄가 있고 없는 것만 보아서 이를 처리하기를 각기 적당하게 하여 서로 문란함이 없게 한다면, 임용이 공평하고 상벌이 바르며, 인사가 잘 되어 천도가 순응할 것입니다.”([고려사절요] 공양왕 3년 5월) 요컨대 왕이나 국가의 불합리한 권력 행사를 제어할 수 있는 논리인 것이다.

1년여 뒤 정도전의 말은 사실이 됐다. 그러나 왕조 교체의 해석과 달리, 1391년말 쯤 이성계의 권력은 매우 위태로워졌다. 윤소종·정도전·남은·조반·유원정 등 주요 인물이 유배되거나 물러났다. 정몽주와 공양왕의 공격이 주효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성계는 이런 사태를 수수방관했다. 견디다 못한 자포자기의 심정일 수도 있고, 정몽주와 함께 갈 수 있을 걸로 생각했을 수 있다. 1390년부터 이성계는 장래의 거취를 놓고 고심을 거듭했다.

1390년말부터 1391년초에 이성계는 은퇴를 진지하게 고려했다. 단순한 은퇴가 아니라 동북면으로 낙향하는 것이었다. 1391년 6월경, 이성계는 정도전·남은·조인옥 등 측근들에게 “내가 경들과 함께 왕실에 힘껏 협력하였는 데도 참소하는 말이 자주 일어나니, 우리들이 용납되지 않을까 염려된다. 내가 마땅히 동쪽으로 돌아가서 이를 피하겠다”고 말하고, 실제로 가솔들에게 짐을 꾸리게 했다.

이성계의 낙향 선언


▎중국 한나라의 동중서는 자연현상을 정치철학으로 변환시켰다.
이성계에 대한 반대파의 비판은 크게 세 가지였다. 그 내용이 1391년 3월 이성계의 사직상소에 잘 나와 있다.

“무진(1388) 연간에 가성(假姓, 우왕)이 군대를 내어 중국을 어지럽히는데, 감히 간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사직이 거꾸러질 지경이었습니다. 신이 대의를 수창하여 회군의 거사를 행하여, 다시 종사를 안정시켰으나 이것을 다른 사람들은 병사를 제멋대로 움직인 것으로 여겼습니다. 후에 기사년(1389) 11월에 공경히 교지를 받들어, 가짜를 없애고 부흥시켜 종실의 제사를 바로잡았으나 이것을 사람들은 권력을 잡은 것이라 여겼습니다. 이제 제군사(諸軍事)를 맡아 병사를 양성하고 정밀히 지키며 간웅들을 진압하고 외적을 약화시켰으나 이것을 또한 군자(軍資)를 소모한다고 여기는데, 물의가 분분하여 변명하기가 어렵습니다.”([고려사] 공양왕 3년 3월 17일)

첫째, 1388년 우왕이 요동공벌에 나서 사직이 무너질 위기에 처했을 때, 이성계는 대의를 부르짖고 위화도회군을 통해 종사를 안정시켰다. 그러나 반대파는 이를 천병(擅兵), 즉 왕명 없이 군대를 멋대로 움직였다고 주장한다. 쿠데타라는 것이다. 둘째, 1389년 11월, 정비의 교지를 받들어 가짜 왕씨인 우왕·창왕을 멸하고 부흥을 통해 국가의 제사를 바로잡았다. 그러나 반대파는 이를 ‘집권’이라고 주장한다. 셋째, 3군을 통솔하는 제군사(諸軍事)가 돼 군대를 기르고 조용히 지켜 간웅을 누르고 외적을 없앴다. 그러나 반대파는 이것이 군사물자를 소모하는 것이라고 물의가 분분해서 변명이 어렵다.

당시의 반(反)이성계파는 회군 뒤 이성계의 집권을 제2의 무신 난으로 인식했다. 1391년 7월, 순녕군 왕담과 성균사예 유백순이 나눈 이야기가 그렇다.

“여러 장군들이 명을 받아 요동을 칠 때, 머물러 있다가 군사를 돌렸으니 마땅히 공이 없을 것 같은데 지금 도리어 포상을 받았다. 회군 당시 왕씨가 아들 창을 세우는 것을 막은 것도 역시 사세가 그러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신이 이 때문에 옥에 갇혔으니, 옛 의종 때 무신의 난을 마땅히 거울삼아야 한다. 지금 유자 정도전 등이 국가권력을 모독하고 장난치고 있으니, 만약 전일의 난(무신 난)이 있으면 우리들이 그 화에 빠질까 두렵다.”([고려사] 열전 현종부 평양공 왕기·왕담) 그러나 아직 혁성혁명까지 우려한 것은 아니었다.

이성계는 이들의 인식이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반대파의 입장에서 보면 당연한 것이고, 조선 건국에 의해 결과적으로 사실임이 입증됐다. 다만 회군파의 행위가 의종대의 무신 난과 달랐던 것은, 새로운 역사적 비전과 결합돼 국가 개조를 추진했기 때문이었다.

동북면으로 낙향하겠다는 이성계의 선언에 놀란 정도전은 “지금 만약 한 모퉁이에 물러가 있게 된다면, 참소하는 말이 더욱 불처럼 일어나서 재화(災禍)가 반드시 헤아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라고 설득했다. 그러나 이성계는 “옛날에 장자방이 적송자(赤松子)를 따르겠다고 하니, 한고조가 이를 죄주지 않았는데, 나의 마음은 다른 뜻이 없으니, 왕이 어찌 나에게 죄주겠는가?”라고 반박했다. 이 말만 놓고 보면, 이성계는 단순하기 짝이 없는 인물이다. 사실 정몽주를 죽여 할 시기에도 이성계는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이방원이 정몽주를 죽이자 대노하여 이방원을 질책했다.

1391년 1월 고려 군대 전체의 통솔권은 이성계파에 완전히 넘어갔다. 이성계가 도총제사였고 배극렴·조준·정도전이 중군·좌군·우군총제사였다. 또한 삼군총제부를 사열하고 토지를 받은 품관은 모두 3군에 통속시켰다. 이성계는 어떤 상황에서도 군권을 놓지 않았다. 왕과 왕조 전체가 이성계의 무력 하에 놓였던 것이다. 그것은 이성계가 권력의 본질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성계는 순진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성계의 낙향 시위나 이방원에 대한 질책은 다소 부산스런 연극일 수 있다.

反이성계파의 협공, 정도전의 실각

반이성계파는 착실하게 힘을 모아가고 있었다. 1391년 반이성계파의 목표는 첫째, 간관·사헌부·형조 등 탄핵과 처벌을 담당한 부서에서 자파의 힘을 강화시키고 이성계파를 제거할 것. 둘째, 김저사건 이래 윤이·이초사건, 김종연사건을 매듭지어 이성계파의 공격을 차단할 것. 셋째, 중국으로부터 세자의 후계권을 보장받을 것이었다.

첫째 조치를 보자. 1391년 1월, 공양왕은 경연관에게 “지금 사람이 중국의 고사만 알고 본조의 일을 몰라서야 되겠는가”라고 말했다. 그러자 시중 정몽주는 “근대의 역사도 모두 편수하지 못하였고, 선대의 실록 또한 자세히 알지 못하니, 편수관을 두어 [통감강목]을 모방해서 역사를 편찬, 전하의 살펴보심에 대비하소서”라고 답했다. 공양왕은 이색과 이숭인의 직첩을 돌려주고 실록을 편수하고자 했다.([고려사절요] 공양왕 3년 1월)

이것이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이색과 이숭인을 복권시키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모색했던 것으로 알 수 있다. 2월에는 1390년 11월 윤귀택의 고변에 의해 12월 3일 유배된 심덕부가 청성군총의백으로 다시 봉해져 복권됐다. 4월 13일에는 정몽주파인 허응·전오륜이 간관에 임명됐다. 6월 17일에는 반이성계파인 최함과 김묘가 사헌장령, 안노생이 간관인 문하사인에 임명됐다.

9월에는 사헌부의 주도권을 놓고 양파가 대립했다. 정도전을 지지하는 사헌규정 박자량은 상관인 사헌집의 우홍득을 영접하지 않고, 또한 직무를 행하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우홍득은 우현보의 아들이다. 박자량에 따르면, 김저사건에서 이색과 우현보는 모두 우왕을 옹립하려고 했는데, 사헌부에서는 이색만 논하고 우현보는 탄핵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이유가 우홍득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홍득이 이색의 죄를 논핵한다면 이는 곧 그 아버지를 논핵하는 것입니다. 동료들과 함께 아버지의 당을 논핵하고, 즉시 사직하고 가지 않으니 이것은 그 아버지를 무시하는 것이며, 그 아버지가 왕씨를 끊으려고 하는데 이를 알고도 간하지 않으니, 이것은 왕씨를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는 아버지를 무시하고 임금을 무시하는 사람이니, 어찌 영접하겠습니까.”([고려사절요] 공양왕 3년 9월) 우홍득 때문에 사헌부와 형조가 우현보를 가볍게 처리하고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정몽주의 주도로 복권된 反이성계파


▎배우 유아인은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 이방원을 연기했다. 이방원은 정몽주를 제거해 조선 건국의 길을 열었다. / 사진:SBS
그런데 문제가 엉뚱한 곳으로 번졌다. 만호 유만수가 박자량을 심문했다. 사헌부와 형조의 탄핵 상소는 밀봉돼 왕에게 올려졌다. 그런데 박자량이 그 내용을 어떻게 알았을까? 박자량은 사헌규정 안승경에게 들었다고 말했다. 안승경을 국문하자, 그는 정도전에게 들었다고 실토했다. 그는 정도전에게 “요사이 성헌과 형조에서 우·창과 윤이·이초의 당을 논핵하면서 밀봉하여 아뢰었는데, 선생이 이를 보았습니까, 보지 않았습니까?”라고 묻자, 정도전은 “너희들이 우·창과 윤이·이초의 당을 대악(大惡)이라고 하나 그 일은 끝난 것이다”라고 답했다. 그동안 정도전이 사헌부와 형조를 배후에서 조종한 사실이 마침내 드러났다. 사헌부와 형조는 “정도전이 규정을 몰래 꾀어서 대간을 비방한 것을 논핵하여 극형에 처하기를 청하였고”, 또 다시 상소하여 “정도전이 외람히 공신의 반열에 있으면서, 속으로는 간악한 마음을 품고, 겉으로는 충직한 척하여 국정을 더럽혔으니, 죄를 주기를 청합니다”라고 논핵했다. 정도전은 본향인 봉화현(奉化縣)으로 귀향 조치됐다. 반이성계파의 숙원이 마침내 이루어진 순간이었다. 이성계파로서는 시련의 시작이었다. 이후 정도전은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까지 갔다.

10월에는 대사헌이 조반을 공전 점탈죄로 논핵해 유배시켰다. 조반은 조선 개국공신 2등공신이다. 그는 1388년 최영과 협력해 염흥방을 격발시킴으로써 무진정변의 불씨를 만든 인물이다. 회군 뒤 조반은 대명 외교를 담당해 이성계파의 외교 문제를 원만하게 처리했다. 그러나 그의 결정적인 공은 윤이·이초사건을 고려 조정에 알림으로써 반이성계파를 일망타진할 계기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사헌부가 적시한 조반의 죄는 공전 점탈죄에 일종의 파렴치한 죄였다. “조반이 중로에서 관청에 소속된 기생을 빼앗았으며, 또 가노가 죄를 범하여 옥에 갇히자 몰래 도망시켜 숨기기까지 하였습니다. 그가 대악을 저지르고도 깨닫지 않고, 국법을 크게 훼손하고 관청을 능멸하였으니, 진실로 사형으로도 용서받을 수 없는 죄입니다. 이제 전금(田禁)으로, 토지 2결만 은닉한 자도 사형에 처하는데, 하물며 한 주(州) 안에서 제멋대로 공전 수십 결을 빼앗았으니, 그 죄를 가벼이 용서할 수 없음이 명백합니다.”([고려사] 공양왕 3년 10월 22일) [고려사]에 따르면, 윤이·이초사건에 원한을 품은 사람들이 사주한 것이라고 한다.

10월 23일, 정도전의 직첩과 녹권이 박탈되고 나주에 유배됐다. 아들 정진과 정담의 관직이 삭탈됐다. 밀직부사 남은은 칭병 사직했다. 12월에는 이성계파인 한양부윤 유원정이 유배됐다. 죄목은 아들의 배필과 결혼하고, 중국 사행 때 매매를 자행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원정은 아들이 없었다. 이성계파에 대한 공격이 바야흐로 인신공격으로 확대되고 있었다. 1392년 1월에는 이성계파의 무장 동지밀직 장사길이 사임했다.

11월 1일(계미), 정지와 함께 윤이·이초사건에 연루돼 처벌된 권중화가 삼사좌사로 복직했다. 삼사우사는 성석린이었다. 허응이 우부대언, 전오륜, 김진양이 좌산기상시, 우산기상시에 각각 임명됐다. 반이성계파의 맹장들이 간관을 장악한 것이다. 11월 17일, 마침내 이색과 이숭인이 소환됐다. 12월 24일에 반이성계파의 인사조치가 완성됐다. 이색을 한산부원군 영예문춘추관사, 우현보를 단산부원군으로, 강회백을 정당문학 겸 사헌부대사헌에 임명했다. 강회백의 막내 동생 강회계는 공양왕의 사위이다. 우홍수를 동지밀직사사, 이첨을 지신사, 이사영을 우부대언, 김진양·이확을 좌산기상시·우산기상시, 이래를 우사의, 서견을 사헌장령, 이감·권홍을 좌헌납·우헌납, 이신을 지평으로 임명했다. 이들은 정몽주와 연대해 1392년 이성계파와 최후의 결전을 벌였고, 조선 건국 10여 일 뒤 발표된 이성계의 즉위교서에서 처벌 대상자로 공표됐다.

불교 행사와 풍수도참에 빠진 공양왕


▎정도전은 생사를 건 정치투쟁을 불사하며 이성계를 엄호했다.
한편 1391년 1월 이색과 이숭인을 복권시키려고 시도했던 공양왕은 4월까지 별다른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그 사이 종교적인 행사와 세자의 결혼에 관심을 쏟았다. 2월에 왕은 한양 천도를 단행했다. 물론 완전히 수도를 옮기는 것은 아니고 일종의 순행이었다. 개성의 왕기가 쇠하고 한양에 새로운 왕조가 탄생한다는 풍수도참에 대해서는 앞서 살펴보았다. 순행길에 그는 양주의 명찰 회암사에서 생일을 맞은 그는 대규모 불교 행사를 거행했다. 1000명의 승려에게 식사를 제공하고 베 1200필을 시주했으며 왕비와 함께 철야 예불을 올렸다. 3월에는 포 2000필을 하사해 연복사 탑을 중수하도록 했다. 연복사는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고 국가와 왕조를 지키기 위해 만든 10대 사찰의 하나다. 연복사 탑은 신라의 황룡사 9층탑과 같은 의미를 지녔다. 공양왕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연복사 탑의 중수에 집착했다. 뿐만 아니라 각종 제사를 드렸다. 그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1391년 5월 성균관대사성 김자수의 지적을 보자.

“불교의 설도 오히려 믿을 수 없는데, 하물며 괴이하고 허탄하며 황당한 무당에 있어서이겠습니까. 나라 안에 무당집을 설립하는 것도 이미 정도에 어긋나는 것인데, 이른바 별기은(別祈恩)이란 곳이 10여 곳이나 되며, 사시의 제사로부터 무시로 지내는 별제에 이르기까지 1년에 허비하는 것을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습니다. 제사 지낼 때는, 비록 금주령이 한창 엄하더라도, 여러 무당은 떼를 지어 나라에서 하는 일이라고 핑계하니, 유사가 감히 힐책하지 못합니다. 그 때문에 태연히 한껏 마시고, 서울의 큰 거리에서 북 치고 피리 불며 노래 부르고 춤을 추면서 온갖 짓을 다하니, 이것이 가장 심하게 아름답지 못한 풍속입니다.”([고려사절요] 공양왕 3년 5월)

공양왕은 다소 자신감을 얻은 듯하다. 1391년 4월, 그는 미행(微行)하여 마암에서 활 쏘는 것을 구경했다. 왕의 위의를 갖추지 않고 몰래 간 것이다. 사헌부는 지신사 성석용이 왕의 이런 돌발 행동을 방치했다고 탄핵했다. 그러나 공양왕은 사헌부의 탄핵에 노해 성석용에게 그대로 정무를 보게 하고 오히려 사헌 집의 강회중과 지평 이감을 좌천시켰다. 물론 이들은 모두 반이성계파 인물들이다. 그리고 4월 26일, 왕은 갑자기 구언을 하는 교지를 내렸다. 구언 교지는 정치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 때 왕이 반성의 뜻을 표하고, 널리 의견을 듣겠다는 의사를 공표하는 것이다. 교지에는 별자리의 변괴에 대한 일관의 보고가 들어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공양왕이 왕다운 왕 모습을 연출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재앙을 그치게 하는 방법은 덕을 닦는 것만 같은 것이 없고, 정사를 하는 요체는 오직 직언을 구하는 데 있다. … 이제 정치와 교화를 함께 새롭게 하여, 하늘의 마음에 우러러 보답하고자 한다. 아아, 상벌이 분명하여야 예악이 일어나고, 음양이 조화되어야 바람과 비가 제때에 내리며, 관리가 그 직위에 적합하여야 백성이 그 생활을 즐겁게 여길 것이니, 그 요령은 어디 있는가.”([고려사] 공양왕 3년 4월 26일)

공양왕의 무능 겨냥한 정도전의 반격


▎조선의 왕이 된 이성계가 결재서류에 사용했던 금보(金寶).
그런데 이 교서가 이성계파의 강력한 반격을 초래하는 계기가 됐다. 1391년(공양왕 3) 5월, 정도전은 소강상태의 국면을 깨고 갑자기 장문의 격렬한 상소를 올렸다. 그는 김저사건 이래 사건 관련자 모두를 극형에 처하라고 요구했다. 먼저 그는 공양왕이 왕으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공공연히 비판했다.

“전하께서는 큰 도량이 넓고 천성이 인자한 것은, 천품을 타고난 처음에 얻어서 그런 것입니다. 전하께서 평소에 일찍이 글을 읽어서 성현이 이룩한 법을 상고한 적이 없으며, 일을 처리하여 당세의 통무(通務)를 안 적이 없으니, 어찌 감히 덕이 반드시 닦아지고 정사가 잘못된 것이 없다고 보장하겠습니까. 한의 성제(成帝)는 조회에 나와서 침착하고 말이 적어서 임금의 도량은 있었으나 한이 망하는 데에는 소용이 없었으며, 양무제는 사형하는 데 나가서 울며 먹지 않았으므로 인자하다는 평판이 있었으나 강남의 난을 구원하지는 못하였으니, 한갓 타고난 자질의 아름다움만 있고 덕정(德政)을 닦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고려사절요] 공양왕 3년 5월)

이러한 언사는 왕정 체제 하의 신하로서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정도전은 최후의 결심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도전은 다음으로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우유부단한 처벌을 비판하고, 이것이 결국 왕의 시해로까지 이어질지 모른다고 경고했다.

“우와 창이 우리 왕씨의 왕위를 도적질하였으니, 실로 조종의 죄인이며 왕씨의 자손과 신민들의 공동의 원수입니다. … 지난번 대간이 아뢰어 이들을 밖으로 내쫓았으니, 비록 역적에 대한 처단을 명백히 하지는 못했지만, 조종과 신민의 분을 조금 풀었습니다. 그러나 두서너 달이 못 되어서 모두 은총으로 불려 와서 서울에 모여서 마음대로 출입하니, 지금 비록 간관의 말로 그 두세 사람을 내쫓았으나 전하께서 마지못하여 그 말을 따랐으며, 오래도록 주저하고 아까워하는 뜻이 있으니 이 일은 과연 무슨 의리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 형법은 난을 금하는 것이며 이를 믿고 임금이 편안하게 보존되는 것이니, 형법이 한 번 흔들리면 난을 금하는 기구가 먼저 허물어져서 은혜받은 자의 힘을 얻기 전에 화란이 먼저 이르게 될 것이며, 인심이 편안하지 못하고 난이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이성계와 공양왕의 일시적 타협, 그러나…

그 사례로 정도전은 당나라 중종과 무삼사를 들고 있다. 중종은 어머니의 조카인 무삼사의 죄를 용서했으나 결국 자신이 시해당했다. 그런데 정도전은 잇달아 도당에 올린 상소에서 이색과 우현보를 참형에 처할 것을 요구했다. 이색은 정도전의 스승이었고, 당대 고려의 유종이었다. 이색의 아버지 이곡과 정도전의 아버지 정운경은 절친한 망년지우이기도 했다. 당시의 윤리에서 스승을 죽이라는 것은 패륜이었다. 공양왕에 대한 거친 비판에 이어 스승에 대한 한계도 넘어선 것이다.

정도전이 상소에 이어 남은, 정총, 사헌부도 동일한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이성계파가 총동원된 것이다. 밀직부사 남은도 공개적으로 공양왕의 무능을 비판했다.

“요사이 주상께서 정전에 앉아 백관을 불러 보시고 하늘의 재변에 대하여 여덟 가지 일의 폐단을 스스로 꾸짖고 교서를 내려 직언을 구하셨습니다. 그러나 직언으로서 극력 간하는 사람이, 하나둘이 아닌데도 어물어물하며 속히 결단하지 않는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신은 아마 주상께서 마음속으로 욕심이 많으면서도 밖으로는 인의를 베풀려고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고려사절요] 공양왕 3년 5월)

이성계파는 왜 이처럼 극단적 태도를 취한 것일까? 그들이 진실로 두려워했던 것은 이성계가 정몽주의 대안을 선택하는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사실 이성계는 조선 건국 직전까지 정몽주의 대안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쫓겨난 윤소종과 정도전에게 구원의 손길을 거둔 것이 그 증거이다. 그 사이 이성계는 사퇴를 거듭 표명하고 있었다. 정도전 역시 병을 칭탁하고 나타나지 않았다. 왕에 대한 불만의 표시였다.

6월에 결국 이색과 우현보가 함창과 철원으로 각각 유배됐다. 왕이 출사를 간절히 부탁하자 7월에 다시 왕과 대면한 정도전은 거듭 강력한 처벌을 주장했다. 그러자 왕은 한 발 양보하여, “이색은 죄상이 조금 드러났지만 우현보의 죄는 아직 명백하지 않다”고 말했다. 정도전도 한 발자국 물러섰다. “이색의 죄는 이미 드러났으니, 마땅히 극형에 처하여 불충한 죄를 보여야 될 것이며, 우현보 같은 자는 죄상이 명백하지 않기 때문에 대간이 번갈아 글을 올려 먼 지방으로 귀양 보내기를 청하였으니, 신 또한 마땅히 선인과 악인은 한데 섞여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현보는 귀양으로 족하지만, 이색은 극형에 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색에 대한 정도전의 증오는 이처럼 강했다.

그런데 이 무렵 이성계도 윤이·이초사건의 죄상이 분명하지 않다는 공양왕의 주장에 대항해 공양왕의 눈물 어린 출사 간청을 끝까지 거부했다. 그런데 7월 들어 정몽주를 필두로 도당의 재상들이 김저사건과 윤이·이초사건을 매듭짓기를 요청했다. 정몽주가 간관에 이어 도당도 장악했던 것이다. 7월 9일, 이성계도 입장을 선회해 궁궐에 들어가 사은하고, 왕이 간언을 받아들이면 협조하겠다는 뜻을 표명했다. 그 이튿날 공양왕은 이성계의 사저에서 그를 위로하는 잔치를 베풀었다. 이성계 부부 역시 4일 뒤 궁궐에서 왕에게 감사하는 잔치를 베풀었다. 이렇게 공양왕과 이성계의 대립이 잠정적으로 해소되고, 권력의 추는 정몽주에게로 기울었다. 8월은 소강상태였다. 그리고 9월부터 반이성계파의 공격이 본격화돼 정도전이 제거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듬해 정몽주가 제거될 때까지 이성계는 이 과정을 수수방관했다.

※ 김영수 - 1987년 성균관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1997년 서울대 정치학과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도쿄대 법학부 객원연구원을 거쳐 2008년부터 영남대 정외과 교수로 재직하며 한국정치사상사를 가르치고 있다. 노작 [건국의 정치]는 드라마 [정도전]의 토대가 된 연구서로 제32회 월봉저작상, 2006년 한국정치학회 학술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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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호 (2019.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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