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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 특별기고(2)] 韓·日 역사문제 해법의 선결과제 

일본은 한국이 국내 사정 때문에 반일(反日) 부추긴다고 의심 

가해-피해의 역사를 미래 가치로 승화하자면 일본 제국주의 바라보는 시야 넓혀야
탈식민, 탈냉전의 세계사적 과제가 안 풀리면 한·일의 역사 화해 기대하기 어려워


▎한국과 일본은 역사 문제와 관련해 피해의식은 넘치고 지피지기 의지는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2001년 일본 우익단체에서 내놓은 역사교과서는 한·일 관계를 악화시켰다.
한·일 갈등의 밑바닥에 역사 문제가 놓여 있다. 이는 식민지배의 불법성과 역사 피해자에 대한 국가 범죄를 일본이 인정하고 배상해야 해소되는 사안이다. 그러나 일본은 ‘그동안 충분히 보상하고 사죄했으며, 개인 청구권에 대한 배상 책임도 한국 정부에 있다’고 말한다. 일본은 한국의 요구가 역사적 피해의 치유나 화해를 유도한다고 믿지 않는다. 오히려 국가 간 합의 내용을 번번이 무시하는 한국의 태도는 궁극적으로 ‘반일(反日)’이라고 여긴다.

일본의 마지노선은 확고부동하다. 한국이 그 선을 돌파하려면, 단교하거나 일본을 해체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할 능력도, 명분도 없다면, 역사 문제에 관한 한, 우리가 변해야 한다. 일본과 얽힌 역사 문제를 해결 가능한 문제로 바꿔야 한다.

2000년대 중반까지는 한·일 정치권에서 역사 문제를 조율하고 갈등을 관리했다. 1965년 양국 정부는 역사와 정치·경제를 분리하면서 한·일 회담을 성사시켰다. 그러나 2019년의 시점에서 역사 문제를 관리하거나, 정치 논리로 역사를 채색하는 권능은 한·일 정치에서 사라졌다.

정치권은 포퓰리즘과 야합하고, SNS 이용자들은 역사를 자유자재로 가필한다. 혼란이 가중되고 있지만, 이러한 환경 변화가 역사 문제를 재정립할 새로운 기회이기도 하다.

우리 교과서는 침략 야욕을 지닌 채 반성을 모르는 패륜아처럼 일본을 인식한다. 일본도 인권 침해와 식민지 침탈을 긍정하지 않는다. 조선 병합의 절차적 합법성을 주장하는 것도 역설적으로 강제적 침탈의 부당함을 알기 때문이다.

일본은 약육강식의 국가적 경쟁질서 속에서 관철한 그들의 ‘신념’과 현실 역사의 괴리 사이에서 수습할 방도를 찾지 못하는 것일 수 있다. 이를 풀려면 한·일이 더불어 제국주의와 냉전의 역사를 극복할 집단지성을 형성해야 한다. 그리고 한국은 전후(戰後) 일본의 평화국가 정체성을 옹호하고, ‘평화국가 일본’과 더불어 인류 평화에 이바지하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그것만이 역사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다.

식민지가 되지 않으려고 식민지를 만들다


▎일본은 비유럽 국가 중 식민지를 가진 유일한 나라였다.
진정한 역사 문제는 피해 보상과 배상의 차원을 넘어선다. 과거의 ‘가해-피해’로 대립한 역사를 ‘어떻게 새로운 미래 가치로 승화시킬 수 있느냐’가 열쇠다. 이 문제를 풀어 가기 위한 실마리로 일본 제국주의를 바라보는 시야부터 넓혀야 한다.

일본은 어떻게 제국주의 국가가 되었나? 왜 조선이 일본과 전쟁을 벌인 것도 아닌데, 한반도에서 청일전쟁, 러일전쟁이 일어났는가? 청일전쟁은 동아시아에 ‘식민지-제국’ 질서를 가져왔다. 러일전쟁은 세계사적인 좌우대립 구도를 태동시켰다. 근현대사의 커다란 질곡이 한반도에서 시작된 의미는 무엇인가?

일본의 근대사는 내전으로 시작해서 패전으로 끝났다. 아시아 유일의 제국주의 국가로서 백인 제국주의를 향해 ‘근대의 초극(超克)’을 외치며 달려들었던 일본인들도 내전과 대외 팽창 전쟁에서 무참하게 희생됐다.

제시된 지도는 지리상의 발견 이후 20세기 전반까지 유럽이 세계를 ‘식민지’, ‘반식민지’, ‘영향권’으로 지배했던 사실을 보여 준다. 유럽 이주민이 아메리카 인디언을 정복한 땅인 미국은 1776년 영국의 식민지에서 독립해 세계시민 국가로 변모했다. 아시아에서는 일본만이 독립국이자 식민지 보유국으로 존재했다. 조선이 국제 정세의 위중함에 어두웠다면, 해양국가 일본은 아편전쟁에 놀라서 1840년대부터 서세동점의 위기를 감지하고 곧바로 개혁에 착수했다.

도쿠가와 막부 정권은 ‘외국 선박을 발견하는 대로 포격하라’는 명령을 거뒀다. 그 대신, ‘물과 식량, 연료를 제공하라’는 유화책을 내놓았다. 미국 함대가 들이닥쳐 통상수교를 요청했을 때, 막부는 지방의 번주(藩主)들과 협의해 국가적 난국을 타개하려 했다. 하지만 웅번(雄藩, 사쓰마·조슈 등 세력이 강한 번을 지칭)의 반란에 직면해 나라가 두 동강 났다. 마지막 장군 도쿠가와 요시노부(徳川慶喜)는 국가 안위를 위해 천황에게 왕권을 봉환하고, 통치권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이에 반발한 막부의 군사들은 에도(도쿄)와 동북 지역을 사수하며 보신(戊辰)전쟁을 일으켰고, 결사 투쟁을 벌였다.

아편전쟁 이후 조슈번의 요시다 쇼인(吉田松陰)과 같은 웅번의 인재들은 국제 정세와 병학을 연구하고 시대정신을 불러일으켰다. 메이지 유신의 주역인 하급 무사들은 일본 국체의 존엄인 천황을 옹립하며 ‘존왕양이’를 내걸었다. 서양에 문호를 개방한 막부를 타도하려고 했다. 사쓰마(현재 가고시마현 지역)와 조슈(현재 야마구치현 지역)의 하급무사들은 영국과 프랑스 함대를 직접 공격하는 양이전쟁을 벌였다. 그러나 ‘오랑캐’의 실력에 놀라 꼬리를 내렸다. 현실을 간파한 그들은 ‘개국’으로 돌아서 유럽에 유학생을 보냈다.

일본은 중화질서의 책봉 체제를 부인하는 왕정복고를 조선에 알렸다. 만국공법에 입각한 국가 수교를 청했다. 흥선 대원군에게 수차례 쫓겨나자, 국가적 모욕을 갚자며 정한론(征韓論)이 일어났다. 사쓰마번의 실력자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 주위에 결집한 정한론자들은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 부국강병의 내치를 주장한 세력과 새롭게 내전을 벌였다. 메이지 유신의 혈맹이었던 ‘개국공신’들끼리 치열한 전쟁(세이난전쟁, 西南戦争)을 치렀다. 피로 점철된 도약의 일본 역사는 1945년, 2차대전 패망까지 이어졌다.

대미(對美) 종속 하에서 대미 자주를 추구한 일본


▎2005년 당시 노무현 대통령(오른쪽)이 청와대 상춘재에서 고이즈미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가졌다. 한·일 관계 경색 국면에서도 정상회담은 열렸다.
1880년대 일본의 지사들은 서구 제국주의를 공동 방어하자며 ‘한·일 합방’을 제기했다. 그러나 김옥균의 갑신정변이 청의 간섭으로 실패하자, 일본의 열혈 아시아주의자들은 조선과 청의 왕권을 아시아 독립을 저해하고 권력만을 탐하는 ‘공공의 적’으로 간주했다. 1895년 청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의 행보가 러시아의 ‘삼국간섭’으로 중단되자, 대러 주전론이 들끓었다. 일본 정부는 반러 감정을 제압하며 와신상담으로 실력을 키웠다. 1903년 러시아가 압록강 아래 용암포에 군사기지를 건설하자, 1904년 일본군이 인천항에 정박 중인 러시아 함대를 공격했다.

1905년 일본이 러일전쟁에 승리하자, 레닌은 “정치적으로 자유로워 급속한 문화적 진보를 이뤄 온 인민의 나라 일본이 러시아 전제정치의 붕괴를 가져왔다”며 러일전쟁을 러시아 인민의 승리로 재해석했다. 뤼순이 함락된 이틀 뒤 러시아에서 ‘피의 일요일 사건’이 일어나고, 전함 포템킨 반란 사건, 총 동맹파업 등 1905년 혁명이 계속됐다. 러일전쟁의 일본 승리는 볼셰비키 혁명으로 이어졌고, 동아시아에 좌우분단 구도를 그었다. 남북 분단의 싹도 러일전쟁에서 배양된 셈이다.

일본은 아관파천 이후 친러파가 행세하던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했다.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저격 사건이 일어나자 조선을 일본의 주권 아래에 완전히 복속시켰다. “풍부한 자원을 가진 조선의 백성이 왜 이리 곤궁하게 살아야 하나? 조선 국민 스스로가 산업을 개발하고 근검역행의 미풍과 후생의 길을 확립하여 가산과 국부를 일으키도록, 일본이 이주하여 융합동화의 실효를 거두어야 한다.”([조선 요람] 1910년 9월 15일). 식민강점은 이렇게 조선의 산업화와 근대화를 위한 명분으로 가려졌다.

일본제국도 식민 지배를 자주성의 억압으로 인식했다. 만주국의 건국이념도 서양의 ‘패도정치’에 대한 동양의 ‘왕도정치’, 아시아 민족의 ‘오족협화’에 있었다.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시기에도 서구적 근대를 극복하자는 ‘팔굉일우’와 ‘아시아 해방과 대동아 공영권의 확립’이 전쟁의 목적으로 제시됐다. 일본의 근대는 서구의 근대를 ‘악’으로 적대시했다. 이 때문에 오직 일본 제국만이 아시아 민중을 구제할 ‘선(善)’이라는 망상이 잉태됐다. 일본의 이런 허망을 깨우친 것은 식민지 민중이 아니라 (전쟁을 통해 일본을 패망시킨) ‘서구 제국’이었다.

중국 문학 연구자인 다케우치 요시미는 “일본의 근대는 서구에 대한 ‘저항’과 아시아에 대한 ‘지배’의 이중성을 지닌 아포리아(난제)”라고 말했다. 반미 성향의 일본 지식인은 아시아 침략을 인정하고 사죄하지만, 일본은 파시즘이고 서양은 민주주의라는 도식적인 역사 이해에 찬동하지 않는다. 일본의 근대사가 ‘절대 악’이라면, 그 선조들의 ‘피·땀·눈물’이 허망해진다.

실제로 1950년대 말 학술연구에서 전후 직후 ‘우익 파시스트’로 추방되었던 인물들에 대한 평가가 달라졌다. 2·26군부 반란의 정신적 지도자인 기타 잇키, 관동군 참모인 이시와라 간지 등을 제국주의 팽창과 모순으로 점철된 세계사의 질서를 종식하려던 ‘우익 혁명가’로 재해석한 것이다.

1950년대 한국전쟁과 반둥회의를 계기로 ‘전후 민주주의’에 입각한 역사관이 흔들렸다. 좌파의 반미 민족주의가 분출했기 때문이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반제국주의 민족운동의 기운이 고조됐다. 일본과 재일조선인 좌파도 동아시아 공산화 운동에 연대해 미군의 한국전쟁 참전을 저지하려고 했다. 전전(戰前) 우익의 ‘아시아 해방전쟁’은 전후(戰後) 좌익의 ‘반미 민족운동’에 의해 부활한 셈이다. 좌·우파가 표면적으로 대립했지만, 일본의 민족주의는 ‘좌우합작’의 융합과 동화를 이뤘던 것이다.

1960년대와 1970년대 반미 안보투쟁을 주도했던 학생운동 세대는 민족자주 의식을 고취하며 일본의 고도성장을 구가했다. 탈냉전 후 변화된 국제 정세 아래에서 그들은 일본 사회의 지도층으로 성장하여 ‘대미 종속’ 하에서 ‘대미 자주’를 추구했다. 2000년대에 한국과 중국이 성장하자, 그들은 더는 아시아에 대한 ‘사죄외교’를 반복하지 않는다. 일본이 홀로 아시아의 ‘거인’으로 활약하던 시대는 지났으며, 수평적 동등 관계에서 ‘소신외교’를 관철한다는 자세다.

화해와 대립 반복하는 난감한 이웃

한·일의 역사 문제는 피해의식에 근거한 양국의 민족 감정으로 접근할 수 없다. 탈식민, 탈냉전의 세계사적 과제가 풀리지 않는다면, 한·일의 역사 화해는 기대할 수 없다. 김대중 대통령은 남북대화를 진척시키면서 일본과의 역사 문제를 덮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도 한국의 햇볕정책에 호응해 2002년 평양을 방문했다. 그러나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가 터지면서 북·일 수교의 발목을 잡았다. 납치 희생자 가족과 시민운동 단체들이 납북자 전원 귀환을 요구했고, 일본의 대북 규제가 시작됐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했다. 어느 TV 생방송에 초대된 노 대통령은 일본의 젊은 청중들에게 ‘과거의 족쇄’에서 벗어나 ‘동북아 공영의 미래’를 함께 만들어가자고 제안했다. 당시 도쿄에 거주하던 필자는 한국 대통령의 환한 웃음에 일본 젊은이들이 커다란 환호와 박수를 보내던 장면을 잊지 못한다.

그러자 한국의 언론과 시민운동 단체들이 역사 문제의 봉합을 격렬하게 비판했다. 2004년 노 대통령 탄핵 사태가 종결되자, 역사 문제에 대한 좌파의 총공세가 시작됐다. 친일 규명이 시대정신의 화두가 됐고, 2005년 3·1절 대통령 연설에서 대일 강경노선이 천명됐다. 역사 문제의 해결 없이 대일 외교에서 어떠한 미래 비전도 합의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지역 질서를 위한 정치적 합의가 ‘정치 거래’로 비판받자, 한·일 정치가들은 표밭 관리로 돌아섰다. 한·일의 역사 문제는 피해자 중심주의로 흘러갔다. 2005년 5월 중국과 뉴욕에서 대규모 반일 시위가 일어났다. 미국이 국제분쟁 해결의 지원군으로 일본의 숙원인 UN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을 지원하려고 하자, 중국에서 반일 정서가 고조됐다. 한국은 야스쿠니 신사 참배와 역사 및 독도 문제로 반일 시위에 동참했다. 2006년 10월, 북한의 핵 실험으로 남남 대립이 격화하자, 한·일의 정치 외교적 갈등은 수그러들었다. 그 대신 한류(韓流)의 그늘에서 ‘혐한’이 싹텄다.

한·일 갈등은 2012년 8월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으로 다시 불거졌다. 이후 해마다 ‘최악’을 갱신했다. 박근혜 정권도 ‘역사 피해자 문제의 해결 없는’ 대일 외교를 거부했다. 2015년 박 대통령이 중국의 ‘항일전쟁 및 반(反)파시스트 전쟁 승리 70주년’ 열병식에 참가했다. 일본 언론은 ‘한·중이 공동으로 미·일을 견제한다’며 격하게 반응했다. 중국의 군사 대국화에 대응해 2014년부터 미·일이 일본의 집단 자위권 법제화를 추진하는 상황이었다.

한국은 한·미·일 안보 공조에 협력하지만, 미·중 패권 대결 속에서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에도, 미·일의 인도-태평양 전략에도 완전히 편입되기 어려운 위치에 있다. 이러한 한국의 태도에 일본은 불신을 표명한다. 일본은 남북한이 민족 공조를 추진하고, 한국이 친중국 균형외교를 펼칠 때 발생하는 내부의 좌우 정치적 대립을 일본을 적대시함으로써 해소한다고 의심한다. 한국이 한반도에서 탈냉전을 시도할수록, 냉전 시대의 대결 구도를 일본과의 대결 구도로 전환하기 위해 반일감정을 끄집어낸다고 보는 것이다.

- 조관자 서울대 일본연구소 교수

201912호 (2019.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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