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종.심층취재

Home>월간중앙>특종.심층취재

[창간 특별기획 | ‘6·15’ 20년과 ‘6·25’ 70년] 끝나지 않은 전쟁… 머나먼 한반도 평화의 길 

남북 정상회담은 새로운 갈등의 시작이었다 

미·중 신냉전시대 지혜롭게 건너가는 ‘신(新)햇볕정책’ 필요

▎6·25 전쟁 당시 대전에 진입하는 북한군 3사단 행렬(왼쪽). 50년 뒤인 2000년 6월 13일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한 김대중 대통령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만나고 있다.
올해는 6·15 남북공동선언 20주년인 동시에 6·25 한국전쟁 70주년을 맞는 해다. 역사적으로 중요하면서 서로 상반된 이미지의 두 사건이 같은 달 안에 열흘 간격으로 놓여 있다. 두 사건이 나란히 이어지는 모습이 올해 더 두드러져 보이는 이유가 있다. 미국과 중국의 대결이 가파르게 전개되기 때문이다. ‘신(新)냉전 시대’가 본격화됐다는 진단도 나온다. 강대국을 배경으로 해 남북이 총을 겨눴던 6·25전쟁, 그리고 남북 정상이 평화의 악수를 나눈 6·15 선언, 1945년 해방 이후 전쟁과 평화가 실타래처럼 꼬여 있는 한국 현대사를 극명하게 대비시키는 사건이다.

냉전(1945~1990) 시대는 소련의 붕괴와 함께 막을 내렸다. 1990년 이후 탈냉전이 시작되면서 평화의 세기가 지속될 줄 알았다. 역사는 우리의 예상과 희망대로 전개되지 않는다. 세계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코로나19)로 어수선하지만, 그 밑으로는 더욱 거센 물살이 지나가고 있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전쟁이다. 신냉전 시대의 개막을 알리고 있다. 끝난 줄 알았던 ‘자본주의 대 사회주의’, ‘자유주의 대 전체주의’ 진영 간 대립이 다시 시작됐다는 진단도 제기된다. 대한민국은 미국과 중국이 패권을 놓고 다투는 신냉전의 한복판에 놓여 있다.

역사도 일종의 생물 같다. 흔히 정치가 생물에 비유되곤 하는데, 정치의 영향을 역사가 많이 받는다는 얘기다. 역사도 정치일 수 있다. 국내 정치뿐 아니라 국제 정치의 영향도 적지 않다. 한국처럼 지정학적 요충지에 있는 나라는 국제 요소가 더 커 보인다. 현재 한국의 현실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외부 조건이 미·중 패권전쟁이라 할 수 있다. 신냉전 시대에 맞이하는 6·15 20주년과 6·25 70주년의 현실적 의미는 무엇일까.

미국 우선주의 vs 일대일로 중국몽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3월 2일 전선 장거리포병구분대의 화력타격훈련을 지도했다고 조선중앙TV가 보도했다. 사진은 조선중앙TV가 공개한 방사포 발사 장면. / 사진:연합뉴스
신냉전은 내셔널리즘(국가주의 혹은 민족주의)의 부활과 궤를 같이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내셔널리즘은 인류의 공적으로 손가락질받아왔다. 그랬던 내셔널리즘이 현재 강대국들의 국가 어젠다로 부각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와 시진핑 주석의 중국몽(夢)이 대표적이다. 여기에 영국의 브렉시트, 일본과 러시아의 자국 중심주의도 크게 보면 신민족주의의 흐름이다.

미·중 갈등은 단순한 무역분쟁 수준을 넘어서고 있다. 중국의 IT기업 화웨이에 대한 국제적 규제로 시작된 미·중 분쟁은 ‘자유주의 대 전체주의’의 대결 양상으로 치닫는 듯하다. 이는 10년 전과 비교하면 확연히 다른 분위기다.

중국의 급성장을 예찬해온 존 나이스비트는 2010년 출간된 [메가트렌드 차이나]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중국이 공산주의 옷을 입은 자본주의 국가인지, 자본주의 옷을 입은 공산주의 국가인지를 묻는 것은 우문(愚問)일 수밖에 없다. 중국은 어느 쪽도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중국은 서구가 걸친 자본주의의 옷을 입으려고 공산주의의 허물을 하나씩 벗고 있는 공산주의 국가도 결코 아니다.”

중국 공산당이 말하는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를 표현하고 있다. 당시 중국에 대한 이 같은 관찰과 해석에 크게 이의를 다는 이는 별로 없었다. 특히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 미국의 금융자본주의 시스템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 상대적으로 중국 시스템이 새롭게 돋보이기도 했다. 2013년 시진핑이 집권하고 나서 임기제를 없애고 중국몽을 발표하고 구체적으로 일대일로의 패권화 전략까지 드러내면서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중국몽과 일대일로를 미국의 패권에 도전하는 행위로 인식할 때부터 상황은 달리 보이게 된다.

2019년 6월 1일 미 국방성이 공개한 ‘인도-태평양 전략보고서’는 미국의 새로운 세계전략인데, 그 타깃은 중국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의 경제력과 군사력에 맞서는 패권 도전국으로 중국을 분명하게 지목해놓았다. 미국이 다시 치켜든 깃발은 자유와 민주주의(Freedom and Democracy)다. 중국이 개혁개방 이후 자유롭고 개방적인 세계 시스템에 편입해 경제적으로 급속하게 힘을 키운 후 이제 정치적·군사적으로 공격적인 모습을 보인다고 진단했다. 자유롭고 개방적인 국제질서를 훼손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중국 공산당이라고까지 명시해놓았다. 중국 공산당이 단기적으로는 인도-태평양 지역의 패권을 겨냥하고, 장기적으로 세계 패권을 노린다는 것이 미국의 우려다. 이 같은 중국의 전략을 그냥 두고 보지 못하겠다는 것이 ‘인도-태평양 전략’의 골자인 셈이다.

70년 전 6·25 전쟁은 구(舊)냉전을 대표한다. 구냉전은 미국 중심의 자유민주주의 진영과 소련 중심의 사회주의 진영 간의 이념적·군사적·체제적 패권전쟁이었다. 오늘날 신냉전은 과거 소련의 자리를 중국이 차지했다. 미국의 패권에 도전하는 위협적 존재로 중국이 부상한 것이다. 신냉전은 현재 겉으로는 미국과 중국의 경제적 패권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양상이다. 경제적 대립이 이념적 대립을 거쳐 군사적 대결로 치닫지 않으리라고 아무도 쉽게 장담을 하지는 못할 것이다. 실제 전쟁을 걱정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미중 패권전쟁과 문재인의 운명]을 쓴 구해우 미래전략연구원 원장은 “지금 대한민국은 30% 넘는 수준의 제2의 한국전쟁 전야 같다”고 우려했다. 70년 전 ‘구냉전의 전쟁터’이었던 한반도가 또다시 ‘신냉전의 화약고’가 될 가능성이 30% 이상 된다는 얘기다. 1964년생인 구 원장은 고려대 재학 시절 주사파 학생운동 조직의 리더로 활동했었다. 1990년대 들어 전향한 후, 민화협 청년위원장과 SK텔레콤 북한담당 상무를 거쳤다. 박근혜 정부 시절에 남재준 국정원장 밑에서 북한담당기획관(1급)을 지내기도 했다. 그는 “신냉전 시대는 미국과 중국의 패권전쟁과 각 민족국가 간의 무한 국익경쟁이 전개되는 시대”라면서 “미국과 중국의 패권전쟁은 문명충돌적 성격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무역전쟁으로 끝나지 않으며 세계 패권구도가 재정립될 때까지 지속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지금은 제2의 한국전쟁 전야”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류허 중국 경제 담당 부총리가 지난 1월 15일 백악관에서 미·중 1단계 무역합의에 서명한 뒤 악수하고 있다. / 사진:XINHUA/연합뉴스
6·15 남북공동선언은 탈냉전을 상징한다. 총을 겨누고 싸웠던 상대가 50년 만에 서로 평화의 악수를 나눈 일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탈냉전 시대였기에 가능했고 탈냉전의 의미를 배가하는 사건이었다.

하지만 신냉전으로 시대가 바뀌었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6·15 공동선언과 그 배경이 된 햇볕정책은 여전히 유효한 것인가.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하면서 6·15 선언과 햇볕정책의 의미가 감쇄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도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 기조를 유지했고, 문재인 정부에 들어서 다시 햇볕정책을 이어가고 있다. 그런 한편으로 북한은 미사일 실험을 계속하고 있다. 우리는 화해의 손을 내미는데 북한은 미사일을 쏴대는 형국이다.

최근 코로나19 사태로 온 나라가 발칵 뒤집어진 상황에서도 북한은 방사포를 쏴 올렸다. 많은 이가 어리둥절했다. 도대체 왜 이러는가. 이에 대해 구 원장은 “북한은 자기 전략을 가지고 가는 것, 즉 군사 옵션 통일 전략을 계속 추진하는 것”이라고 했다. 방사포에 전술 핵무기를 장착하면 그 파장은 엄청난 것이라고 한다. 북한에선 이걸 완성시키는 게 목표다. 주한 미군의 존재를 미국이 심각하게 고민하게 만들 것이다. 미군 철수까지 고려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라고 했다. 주한 미군의 안전이 위태로워지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햇볕정책은 더 이상 유효한 전략이 아니라고 구 원장은 진단한다. “지금은 햇볕정책이 틀렸다는 것을 분명히 얘기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너무 위축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북한의 위협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70년 전 6·25 전쟁 당시의 대한민국과 21세기 오늘의 대한민국 위상은 크게 차이가 난다. 경제력은 세계 10위권의 무역대국으로 성장했고, 그에 걸맞은 국방력의 성장도 이뤄냈다. 6·25 전쟁 막바지에 타결된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지금까지 한국의 성장을 뒷받침한 버팀목이다. 북한도 자신들이 섣불리 도발하면 그 이상의 반격에 직면하게 될 것이란 점을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의 하나라도 그 같은 비극이 되풀이되어선 안 될 것이다. 전쟁의 참상은 막아야 한다. 전쟁을 막으려면 평화를 유지하는 방법을 적극 모색해야 한다. 6·15 선언 20주년과 6·25 전쟁 70주년, 이 상반된 두 역사적 사건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방법에서부터 평화적 공존의 지혜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공존의 지혜는 두 사건의 의미를 왜곡하지 않고, 축소나 과장을 하지도 않으면서, 가능한 한 정확하게 사실적으로 기억하는 데서 출발할 수 있다.

6·25 전쟁이 패전국 일본에 ‘전쟁 특수’를 가져다준 일은 널리 알려져 있다. 우리는 일본에 대한 분한 마음이 있어서 그 점에만 주목을 하고 있는데 그것만이 아닌 듯하다. 어떤 면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폐허가 된 세계가 한국의 희생을 딛고 다시 일어섰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독일이 전쟁 특수를 누렸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북침설’ 등 6·25 둘러싼 음모론들의 뿌리


▎2007년 11월 18일 금강산에서 금강산관광 9주년 기념행사가 열렸다. 당시 윤만준 현대아산 사장(왼쪽 넷째)과 장우영 명승지종합개발지도국총국장(왼쪽 셋째) 등이 기념식수를 하고 있다.
김대중 정부에서 안기부 1·2차장 및 영국 대사, 노무현 정부에서 청와대 국가안보보좌관(현재 안보실장)과 일본 대사 등을 지낸 라종일 가천대 석좌교수에 따르면, 독일도 한국전쟁의 수혜자였다. 흔히 ‘라인강의 기적’으로 알려진 독일의 전후 부활도 그 출발점은 6·25 한국전쟁이었다는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 독일은 엄청나게 많은 철조망을 수출했다고 한다. 세계대전 때 만들었던 양질의 철조망이었는데, 한반도에서 전쟁이 벌어지니까 다시 그 철조망이 필요하게 됐다. 전쟁을 벌이며 군수품을 만들면서 기본적 산업 능력을 갖추었던 두 나라는 새로운 수요가 생기면서 곧바로 경제가 살아날 수 있었다. ‘6·25 특수’로 경제만 좋아진 것이 아니었다. 경제를 회복하고 나서는 정치적 위상도 올라갔다. 독일(당시 서독)의 경우 소련 군대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군대까지 다시 양성했다. 냉전 시대가 개막하면서 소련이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공동의 적이 되었고, 이 같은 좌우 대립 속에서 독일과 일본이 다시 경제적, 정치적으로 되살아난 셈이다.

전쟁범죄 국가인 독일과 일본이 ‘6·25 특수’를 통해 다시 일어나는 데 반해, 아이러니하게도 세계대전의 피해국인 한국은 6·25 한국전쟁으로 완전히 폐허가 됐다. 폐허에서 오늘의 대한민국으로 도약한 지난 70년의 성과에 세계가 놀라고 있다. 21세기 신냉전 시대에 우리가 다시 지난 냉전 시대의 전철을 반복해서는 안 될 것이다.

구냉전을 대표하는 6·25 전쟁은 한국 사회에 난무하는 온갖 음모론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이 일으킨 이 남침 전쟁을 한동안 남한의 북침으로 왜곡하는 시나리오가 적지 않게 돌아다녔다. 소련의 스탈린은 한국전쟁의 가장 중요한 행위자였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전쟁을 일으킨 자신의 역할을 끝까지 숨겼다. 음모론의 출발은 거기서 비롯됐을 수 있다.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전쟁을 일으켜도 좋다고 허락한 문서가 공개된 것은 1990년 냉전이 종식된 이후다. 1950년 전쟁 발발 이후 40년이나 지나서다. 소련 공산당이 몰락하면서 한국전쟁 관련 옛 소련의 문서가 공개됐기 때문이다. 소련의 지원을 받는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6·25 전쟁이 발발했음이 이 문서를 통해 명확하게 드러나게 됐다. 하지만 탈냉전 시대가 되어도 음모론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이념에 눈이 가리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소리만 듣게 마련이다.

음모론은 다양하게 변주된다. 우리 사회에는 “1950년 6월 25일 당일 누가 먼저 총을 쐈는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는 아리송한 주장이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버젓이 횡행한다. 전쟁의 책임 소재를 모호하게 만들었다. 한 미국 역사학자의 책이 1981년 출간되고 나서부터 이런 억측이 나돌기 시작했다. 그 미국 학자가 미국의 세계정책을 비판하기 위해 한국전쟁을 사례로 들어 이런 책을 썼다고 관대하게 넘어갈 수도 있다. 제3국의 사람이라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로 인한 우리 사회의 분열이 너무 깊고 오래가는 것 같다. 문제는 이념대립이 극심한 우리 사회에서 그런 류의 책이 활용되는 방식이다. 언제까지 그 학자 탓만 하고 있을 순 없을 것이다. 우리 사회의 면역력에도 문제가 있었다. 그 어처구니없는 내용이 한국 사회에 수용되는 양상을 우리는 이제 좀 더 차분하게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1950년 6월 25일 이전에 삼팔선을 사이에 두고 남북한 간에 여러 충돌이 벌어졌다고 해도, 그 같은 충돌을 6월 25일에 발발한 전면 전쟁과 동일하게 간주하는 오류를 범해선 안 될 것이다. 소규모 충돌과 대규모 전면 전쟁은 다르다. 무려 300만 명이 사망했고 그중 절반 이상이 민간인 희생자였던 6·25 한국전쟁에서 ‘누가 먼저 총을 쏘았는지’가 중요하지 않다는 궤변이 어떻게 우리 사회에 수용됐을까? 이런 억지가 우리 사회에 수용되는 과정의 미스터리는 ‘역사적 사실’에 관한 문제라기보다는 그 당시의 ‘사회적·심리적 문제’로 풀어야 할 것 같다. 1980년대 한국의 군사정권에 반대하는 이들이 이런 억지 주장을 ‘선택’한 것이다. 그 시절엔 역사적 사실을 꼼꼼하게 돌아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역사적 사실의 정확한 확인보다는 군부독재를 타도하려는 정치적 목표가 우선이었던 것이다. 민주화운동은 당시 또 하나의 시대정신이었다. 그런 시대정신의 바람을 타고 수많은 음모론이 양산됐다.

그 미국 학자는 한국전쟁은 국제전이 아니라 ‘내전’이라는 주장도 했다. 이를 위해 그는 한국전쟁의 국내적 뿌리를 찾기 위한 작업을 주로 했다. 그 뿌리는 1930년대 초반 일제와의 독립운동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가 말하는 한국전쟁의 시기는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부터 해방 이후 친일파와의 전쟁까지 계속 연결된다. 친일파와의 전쟁이 계속되는 일종의 ‘100년 전쟁’을 한국전쟁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1980년대까지 그런 점에 주목한 한국인 학자는 없었기에 반박하기 힘들었다. 전쟁 과정에 인권이 무참히 침해된 사실을 꼬집어내는 데 토를 달기도 힘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소련이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드러날 것은 드러난다. 6·25 전쟁 때 소련 공군이 직접 참전한 사실까지도 다 밝혀진 오늘의 상황에서 볼 때 그런 주장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그런 책을 통해 ‘시대의 한계’를 되새겨보게 된다.

라종일 교수는 오늘의 현실을 신냉전이라고 규정하는 데는 의문을 제기한다. 많은 것이 달라졌기 때문에 과거 냉전시대와 같은 모습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두 개의 진영으로 갈라지기보다는 현재 세계가 경제적, 정치적으로 너무 많이 연결돼 있다고 했다. 게다가 중국이 미국에 맞설 정도의 힘을 갖추지 못했다고 본다.

‘우리 민족끼리’ 전쟁 여력 없었다


▎북한이 2010년 11월 23일 서해 연평도에 100여 발의 해안포 및 곡사포를 발사해 섬 곳곳이 검은 연기에 휩싸였다.
현재를 신냉전으로 보느냐의 여부는 의견이 다를 수 있겠다. 하지만 70년 전 6·25 한국전쟁에 대한 기본적인 사실에서까지 의견이 갈려선 안 될 것 같다.

지난해 [세계와 한국전쟁]을 펴낸 라 교수에 따르면, 6·25 한국전쟁에서 소련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남한과 북한은 전쟁을 하고 싶어도 사실상 할 능력이 없었다. 무기만 없는 것이 아니라 전면전을 치를 지휘관도 없었다. 남북한 양쪽 모두 다 그랬다고 한다. 라 교수는 “1개 사단을 다룰 지휘관도 없는 상황이었는데, 적어도 10여 개 사단을 어떻게 운영하고 지휘하겠는가”라고 반문하면서 김일성의 통역이자 인민군 작전국장이었던 윤성철이 겪은 일화를 소개했다. 그는 김일성에게 숙청을 당할 위기에 처하자 카자흐스탄으로 망명해 살았고 한국에도 몇 차례 왔었다고 한다.

“북한 인민군이 만든 작전계획을 소련 고문관한테 보여줬더니 그 사람들이 깔깔거리고 웃었다고 한다. ‘파출소 습격하는 줄 아냐’고. 그러면서 그들이 작성한 작전계획을 건네줬고 윤성철 자신은 번역만 했다고 그러더라. 윤성철은 김일성의 통역이었다.”

남한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무기와 지휘관의 측면에서 볼 때, ‘우리 민족끼리’ 대규모 전면 전쟁을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강대국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전쟁이었다. 미국은 6·25 전쟁 이전엔 이승만 정부가 혹시라도 전쟁을 할까봐 남한에 무기 지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스탈린이 한국전쟁을 승인한 이유는 무엇일까? 스탈린이 1950년 1월에 김일성을 모스크바로 불러 한국전쟁을 허용한 배경엔 바로 불과 3개월 전인 1949년 10월의 ‘중국 공산화’가 있었다. 스탈린은 모택동의 거대 중국을 견제했다. 그러면서 동북 지역에서 소련의 이권을 취하려고 했다고 한다. 중국의 역사학자 션즈화의 책을 인용하면서 라 교수는 한국전쟁의 새로운 측면을 재조명했다.

중국 공산당의 승리 꺼린 스탈린


▎1946년 8월 28일 북조선노동당 창당대회에 참석한 김일성(가운데). 그 뒤로 스탈린과 본인의 초상화가 나란히 걸렸다.
6·25 한국전쟁에 대한 해석은 1980년대까지는 주로 미국 자료에 의존했다. 1990년대 탈냉전이 되어 소련 문서가 공개되면서 새로운 흐름을 만들었다. 2000년대 들어선 중국 자료에 의한 연구가 새롭게 이어지고 있다. 중국 측 연구가 나오면서 한국전쟁의 국제전적 성격은 더 부각됐다. 션즈화의 책 [조선전쟁의 재탐구]는 중국의 시각을 반영한다. 여기서 말하는 중국은 장개석의 중국이나 타이완이 아니라 공산당이 지배하는 중화인민공화국을 말한다.

한국전쟁은 ‘이념 전쟁’의 성격이 짙었지만, 션즈화의 주장을 따라가다 보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닌 것 같다. 소련과 중국은 한국전쟁을 앞두고 한반도에 공산주의 이념을 전파하기 위해 긴밀하게 협조한 것만은 아니었다. 스탈린은 장개석 국민당과 모택동 공산당이 국공 내전을 벌일 때부터 모택동을 전폭 지원한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 스탈린이 중국 내전에서 바랐던 것은 어느 한쪽의 일방적 승리가 아니라 장개석과 모택동의 불안정한 동거 혹은 내분 상태의 유지였다고 한다. 공산주의를 내걸었다고 무조건 환영한 것이 아니라, 거대한 중국의 탄생을 스탈린은 꺼렸던 것이다. 이념이란 포장을 걷고 보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스탈린의 주요 관심은 중국 동북지역의 이권을 계속 확보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당시 소련의 정책은 이념적인 고려보다 자국의 현실적인 이해에 따라 결정됐던 셈이다. 스탈린이 한국전쟁을 결정할 때도 중국에 돌려준 동북지역의 이권을 한반도에서 대신 확보할 수 있으리란 계산이 있었다고 한다. 이념은 구실이었고 소련의 국익이 먼저였다는 얘기다. 오늘의 국제 관계는 과연 어떨까. 신냉전시대에도 이념과 가치의 충돌이 진행되고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 이념의 깃발만 액면 그대로 믿을 순 없을 것 같다. 궁극적으로는 자국의 이익을 확보하기 위한 경쟁이라는 전제를 놓치면 안 될 것 같다. 구냉전이나 신냉전이나.

스탈린이 장개석과 모택동의 분열 상태가 유지되길 바랐다는 대목은 오늘 우리가 처한 현실을 되돌아보게 한다. 오늘날 중국이나 일본이 남한과 북한을 바라보는 시각도 이와 유사하지 않을까?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 중 누가 한국의 통일을 용인할 것인가. 한반도를 둘러싼 4강 중 미국은 유일하게 다를 것 같다. 한반도에서 영토가 멀리 떨어져 있는 미국은 통일된 한국의 탄생을 중국이나 일본만큼 꺼릴 이유가 없으리라는 얘기다.

햇볕정책, 북한에겐 ‘굴욕’이었을 수도


▎개성공단 가동이 멈춘 지 4년이 되는 지난 2월 10일, 경기 파주시 통일대교 남단에서 개성공단으로 이어지는 경의선 도로가 한적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한국전쟁의 또 다른 어부지리를 대만(타이완)이 누린 사실도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모택동은 공산화에 성공한 후 대만을 무력으로 침공하려 했다. 소련의 공군과 해군의 지원이 필요했지만 스탈린의 견제로 대만까지 넘보진 못했다. 그러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중공군이 참전하면서 ‘자유 진영 대(對) 공산 진영’의 대립각이 형성되면서 더 이상 대만을 모택동이 무력 침략하지 못한 것이다.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장개석의 국민당으로부터 도움을 받은 바 있다. 그 도움을 한국전쟁의 희생으로 대만에게 갚았다고 보아도 좋지 않을까?

6·15 남북공동선언은 탈냉전의 흐름을 반영한다. 지금까지 20년 동안 6·15 선언에 대해선 햇볕정책에 기반을 둔 ‘대화의 시작’이란 점에 주로 초점을 맞춘 것 같다.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개설이 높게 평가된 것은 그런 해석에 기반한 것이다. 현재를 신냉전 시대로 규정한다면 아마 앞으로 갈등이 더 부각될 수 있다. 신냉전 시대를 지혜롭게 건너가는 길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햇볕정책의 대화 속에도 갈등은 잠재해 있었다. 햇별이 비춘다고 갈등이 모두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는 얘기다. 햇볕정책을 ‘대화의 시작’이라고 보는 것은 엄밀히 말해 남한의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의 입장에서 보면, 햇볕을 쬐어 자신들의 웃옷을 벗기려는 정책이 ‘굴욕의 시작’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는 것이다.

남한보다 경제력과 국력이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떨어진 상황에서 북한이 뒷돈을 받아가며 햇볕정책을 겉으로는 받아들이는 척했지만 속으로는 절치부심했을 수 있다는 얘기다. 겉으로는 남한과 대화를 하면서 뒤로는 핵무기를 계속 개발했다는 데서 그런 점을 확인할 수 있다. 햇볕정책과 6·15 선언은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하면서부터 의미가 퇴색되기 시작했다. 햇볕정책의 3대 원칙 가운데 첫째인 ‘북측의 무력 도발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조항을 심각하게 위반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6·15 선언은 ‘새로운 갈등의 시작’으로 재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탈냉전 시대라고 해서 갈등이 없어진 게 아니었다. 탈냉전 시대엔 갈등이 수면 아래 잠복해 있었다. 갈등이 없어졌다고 생각했던 것이 착각이었다. 하지만 냉전 시대와는 다른 탈냉전 시대의 평화가 존재한 것은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탈냉전은 일종의 ‘평화 속 갈등’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신냉전 시대에는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갈등이 불거질지도 모른다. 안보의 의미를 실질적으로 소홀히 하지 않는 ‘신(新)햇볕정책’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갈등의 수위에 따른 유연한 ‘갈등 조절’ 혹은 ‘갈등 관리’ 능력이 결국 평화를 보장하는 열쇠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 배영대 중앙콘텐트랩 근현대사연구소장·철학박사 balance@joongang.co.kr

202004호 (2020.03.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