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토리

Home>월간중앙>히스토리

[선비 정신의 미학(50)] 만고의 충신 포은(圃隱) 정몽주 

“나라의 명(命)은 물불을 피하지 않는다” 

문신이면서 여진·왜구 정벌 때 종군, 明·일본과의 외교 현안 해결도
유학에 정통하고 터득하면 반드시 실천… 조선 사림파의 시조로 추앙


▎영일정씨포은공파종약원 정재화 사무국장이 임고서원 강당인 흥문당에 앉아 선생의 정신을 되새기고 있다.
"이때 전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유원(柳源)이 죽어 정몽주가 그 집에 들러 조문하였기 때문에 조영규(趙英珪) 등이 무기를 갖추어 기다릴 수 있게 되었다. 정몽주가 이르자 조영규가 달려가서 쳤으나 맞지 않았다. 정몽주가 돌아보고 꾸짖으며 말을 채찍질하여 달아났다. 조영규가 내달려 말 머리를 치니, 정몽주가 땅에 떨어져 달아나거늘, 고려(高呂) 등이 그를 베었다.”

한국고전번역원이 2018년 발간한 [포은집(圃隱集)]의 부록 중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 실린 내용이다. 많은 이가 한 번은 들었을 포은 정몽주(鄭夢周, 1337∼1392) 선생의 최후 정황이다. 사건은 1392년 4월 4일 개성 선죽교에서 일어났다. 628년 전이다. 그리고 넉 달 뒤인 7월 고려는 끝이 났다. 500년 고려가 망하고 조선 왕조가 일어나는 상징적 사건이다. 또 충절(忠節)을 대표하는 민족 이야기가 됐다. 용비어천가의 묘사는 현장을 보듯 생생하다. 용비어천가를 연구한 김성언 동아대 명예교수는 “용비어천가는 장(章) 아래 역사적 사실 등을 해설한 잔주(주석)가 있다”고 말했다. 1445년 성삼문 등, 집현전 학사들이 쓴 용비어천가 잔주는 포은의 순절 상황을 전하는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이방원 포은 살해 보고에 이성계는 ‘진노’


3월 20일 포은 선생의 정신을 찾아 위패가 모셔진 경북 영천시 임고면 양항리 임고서원(臨皐書院)을 찾았다. 방문 소식을 듣고 영일정씨포은공파종약원 정재화(69) 사무국장이 나왔다. 포은의 19대손이다. 임고서원은 최근 성역화사업으로 서원 건물을 비롯해 교육시설인 충효관과 유물관, 연수관 등이 들어섰다. 포은유물관을 둘러봤다. 과거시험 대책문 등 고문서를 관람하다 한 곳에서 발길이 멈춰졌다. 선죽교 최후 상황을 보여주는 디오라마 앞이다. 선생이 탄 말이 지나가는 앞으로 철퇴를 든 조영규가 달려드는 형상이다. 말을 탄 포은의 자세가 특이하다. 말 머리가 아니라 말 꼬리 쪽 반대 방향으로 앉아 있다.

[포은집] 용비어천가에는 그런 묘사가 없다. 오히려 ‘돌아본다(顧)’고 표현하고 있어 앞을 향해 앉아 있음을 추정케 한다. 정재화 사무국장은 그 지적에 “선조께서는 이미 죽음을 예감하고 흉한이 앞으로 달려들 것이기에 차마 그걸 보고 싶지 않아 말을 돌려 탄 것으로 들어왔다”고 설명했다. [포은집]을 국역한 박대현(59) 전 고전번역원 교수에게 그 부분을 물었다. 그는 “포은이 말에 돌아앉아 있었다는 이야기는 사실이라기 보다 전설이나 야담에 가까울 것”이라며 “다만 용비어천가의 최후 기록은 의심스러운 점이 분명 있다”고 강조했다. 특히 ‘(포은이) 땅에 떨어져 달아났다(墜而走)’는 부분이다. 이는 죽음을 각오한 군자의 마지막 모습과는 너무도 다르다는 것이다. 조선 중기의 문신 김응조도 그런 주장을 펼쳤다. 이런 서술은 용비어천가가 승자편의 기록이기 때문일 것이다.

용비어천가 잔주의 다음을 보자. 포은이 죽임을 당한 직후다. 이성계의 반응은 뜻밖이다. “태종(이방원)이 들어가서 사실을 고하니, 태조(이성계)가 매우 놀라 진노한다. ‘우리 집안은 본래 충효로써 세상에 알려졌다. 너희들이 마음대로 대신을 죽였으니, 나라 사람들이 내가 몰랐다고 하겠느냐, 나는 약을 마시고 죽고 싶다.’ 태종이 말한다. ‘정몽주 등이 장차 우리 집안을 무너뜨리려 하거늘, 어찌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유물관을 나와 임고서원 앞 선죽교를 둘러봤다. 개성 선죽교를 본 따 만든 똑같은 크기의 다리다. 임고서원 최홍철 관리소장은 “포은선생숭모사업회는 2008년 개성을 방문해 북한에 보존된 선죽교를 답사하고 실측한 뒤 그대로 만든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리 앞에 한석봉이 쓴 붉은색 ‘善竹橋’(선죽교) 글씨 돌비석이 서 있다. 이것도 개성 돌비석을 탁본한 것이라고 한다. 선죽교는 북한의 국보로 지정돼 있다.

포은과 이성계(1335∼1408)는 애증이 교차했다. 포은이 두 살 아래다. 두 사람은 본래 고려 말 함께 개혁을 주도하던 동지였다. 또 원(元)과 명(明) 교체기에는 같은 친명파였다. 그러다가 후일 반목하는 사이가 된다. 포은은 개혁을 통해 기울어가는 고려 왕조의 유지를 도모했지만, 이성계는 혁명을 통해 새로운 왕조를 열려고 했기 때문이다. 포은은 이성계 일파의 개국 의지를 고려 왕조의 찬탈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이성계가 황주에서 사냥하다 말에서 떨어져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되자 포은은 그 기회를 활용해 그 세력을 제거하려 했다. 그걸 알아챈 이방원이 선수를 친 것이다. 그런 중에도 비밀은 없었다. 이방원이 측근들과 포은 제거를 모의하자 이성계의 조카사위 변중량(卞仲良)이 그 사실을 포은에 누설한다. 그러자 포은은 정세를 알아보려 문병을 겸해 이성계의 사저를 방문하고 이방원은 조영규 등을 보내 돌아가는 포은을 살해했다. 그래서 포은은 죽음이 닥칠 줄을 뻔히 알면서도 명분과 절의를 위해 사지(死地)로 나아갔다고 해석한다.

임고서원을 답사했다. 임고서원은 건물이 크게 둘이다. ‘구(舊) 서원’으로 불리는 먼저 지은 건물이 왼쪽 언덕에 있고 오른쪽으로 새로 조성한 큰 규모의 건물이 또 있다. 임고서원은 본래 1554년(명종 9) 선생이 태어난 영천시 임고면 우항리 생가 인근 야트막한 부래산(浮來山)에 세워졌다. 명종은 임고서원에 사서오경과 위토를 내렸다. 사액서원이다. 그러나 서원은 임진왜란으로 소실됐다. 1603년(선조 36) 임고서원은 양항리 현 위치로 옮겨 지어졌다. 그게 구 서원이다. 현재 서원 앞 수령 500여 년 은행나무도 부래산에서 온 것이다.

순절 336년 지나 처음 실린 시조 ‘단심가’


▎드론으로 촬영한 임고서원 전경. 왼쪽이 ‘구 서원’이며 오른쪽이 본 서원 건물이다. 가운데 맨 위 건물이 사당 문충사다.
구 서원은 잠겨 있는 날이 많다. 영천시 조한웅 문화예술과장 등과 함께 구 서원의 빗장을 풀었다. 건물은 단출하고 맨 윗자리 사당 문충사(文忠祠)는 비어 있었다. 위패 등을 오른쪽 본 서원으로 옮긴 것이다. 문충사 앞에 서니 지대가 높아 시야가 탁 트였다. 건너편 벼랑 위에 누각이 있고 아래로 연못이 보인다. ‘조옹대(釣翁臺)’다. 연못은 ‘용연(龍淵)’이다. 여헌 장현광은 임고서원 중건상량문에 ‘조옹이라는 대(臺)가 시냇가에 있는 것은 아마도 은거한 초지(初志)일 것’이라고 적었다. 후세 사람들은 포은이 낚시를 즐겼다고 해 조옹대라 부르고 또 선생이 낚은 것은 물고기가 아닌 용(龍)이어서 연못을 용연이라 부른다고 한다. 조옹대와 용연은 최근 조성됐다. 구 서원을 나왔다. 오른쪽 본 서원 입구 돌계단 앞에 시비가 있다. 시조 ‘단심가(丹心歌)’와 ‘백로가’ 두 편이 새겨져 있다. 포은이 지었다는 단심가는 한국인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국민 시조’쯤 된다.

이 몸이 죽고 죽어/일백 번 고쳐 죽어/백골이 진토(塵土)되어/넋이라도 있고 없고/임 향한 일편단심이야/가실 줄이 있으랴

시가 지어진 배경은 포은이 이성계를 문병 목적으로 방문했을 때로 이야기된다. 이방원은 급히 조영규를 선죽교 주변에 배치하고 이성계를 만나고 나오는 포은을 자기 방으로 안내한다. 이방원은 포은에게 술자리를 베풀고 ‘하여가(何如歌)’를 읊으며 포은의 속마음을 떠봤다. 포은은 단심가로 화답한다. 두 사람은 서로 생각 차이만 확인했다. 일설에는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했을 때 주고받은 시라고도 한다. 이 시조는 김천택이 채록해 1728년 [청구영언]에 처음 적었다. 포은이 순절한 때로부터 336년이 지나서다. 그래서 포은이 직접 지은 시가 아닐 수 있다는 주장이 있다. 구전 소재를 누군가가 후대에 시조로 만들었다는 추정이다. 단재 신채호는 이 시조의 작자가 포은이 아니라 백제 여인 한주(韓珠)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본 서원으로 들어가 문성사에서 선생을 알묘했다. 위패에는 ‘圃隱鄭先生’(포은정선생)이라 쓰여 있다. 위패 왼쪽에 대형 초상화가 세워져 있다. 사당 오른쪽에는 김종서와 함께 6진을 개척한 황보인이 종향돼 있었다. 포은은 만고(萬古)의 충신으로 불린다. 극적인 순절로 여타의 다른 큰 행적은 가려져 있다. 그는 고려 공민왕 시기 문과에 장원 급제하고 요직을 두루 거쳐 1390년(공양왕 2) 수상직인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올랐다. 그는 문신이면서도 수차례 종군(從軍)한 남다른 이력이 있다. 화주에서 여진을 정벌할 때 종군했고 이성계와 함께 전라도 운봉과 동북지역 단주 등 두 차례 출정해 왜구 등을 물리쳤다.

사신 억류한 명나라 홍무제 만나 석방 수완


▎북한 개성에 보존된 선죽교와 똑같은 크기와 모습으로 조성한 임고서원 선죽교.
포은은 뛰어난 외교관이기도 했다. 그는 명나라로 여섯 차례, 일본으로 한 차례 사신을 다녀온 당대 최고의 외교관이었다. 고려는 당시 새로 등장한 명나라와 관계를 정립하는 것이 최대 현안이었다. 1384년 포은은 명나라 사신으로 네 번째 천거된다. 당시 고려는 명나라와의 마찰로 홍무제가 출병을 언급하고 사신을 억류하는 등으로 모두 사행(使行)을 꺼렸다. 우왕이 포은을 불러 의향을 묻자 그는 “나라의 명은 물불을 피하지 않거늘 하물며 천자를 뵙는 일에 있어서입니까. 다만 남경까지 90일 노정인데 행사 날짜까지 겨우 60일이 남았으니 그게 한스러운 바입니다” 하고는 그날로 바로 여정에 올라 날짜에 맞춰 표문을 올렸다. 난제를 정면 돌파한 것이다. 이런 걸로 보면 포은은 배포가 크고 호방했던 것 같다. 홍무제는 표문에 적힌 날짜를 보고는 치하하고 억류 사신을 풀어줬다. 사행은 큰 성과를 올렸다.

임고서원을 나왔다. 눈앞에 5m 높이의 큰 바윗돌이 우뚝하다. 앞면에 ‘東方理學之祖’(동방이학지조) 여섯 글자가 세로로 새겨져 있다. 글씨는 퇴계 이황의 유묵에서 집자했다. 이학은 성리학을 뜻한다. 포은의 학문을 일컫는 최고의 찬사이자 조선 사림파의 도통(道統)이 포은에서 시작됨을 알리는 표석이다. 목은 이색은 성균관 대사성으로 있을 때 성균관 학관으로 학생을 이끌던 포은을 ‘동방 이학의 조종’으로 불렀다. 목은은 당시 “달가(정몽주)의 논리는 횡으로 말하든 종으로 말하든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 없다”는 말을 자주했다고 한다. 이는 포은이 사서삼경의 정수를 정확히 터득하고 있어 성균관에 머문 9년간 유생들이 어떤 질문을 해도 답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그는 이렇게 유교 이념을 바탕으로 5부 학당과 향교를 지어 신진사류를 양성했다. 함부림은 행장(行狀)에서 “당시 우리나라에 들어온 경서는 오직 주자(朱子)의 [사서집주(四書集註)]뿐이었다. 공(포은)은 강설이 탁월해 사람들의 생각을 크게 뛰어넘었다”고 강조했다.

포은은 유학의 이론에 정통했을 뿐만 아니라 터득한 이론은 반드시 실천했다. 부자유친(父子有親)은 3년 시묘로, 군신유의(君臣有義)는 순절로 도리를 다했다. 박대현 전 교수는 “포은이 저술한 시문은 환란을 겪은 뒤 거의 수습되지 못해 내용이 어떠한지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다”며 “그러나 ‘독역(讀易)’ ‘관어(觀魚)’ 등 남아 있는 시를 통해 일단을 짐작할 수 있다”고 말했다. 포은은 이처럼 성리학의 초석을 놓은 유학자이자, 뛰어난 교육자였다.

정재화 종약원 사무국장과 함께 다시 포은 생가를 찾았다. 임고서원에서 2.5㎞ 떨어진 임고면 우항리다. 선생의 외가다. 영천시는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기록을 토대로 2015년 이곳에 생가를 지었다. 조선시대 기와집이다. 영천 지역 전민욱 향토사학자는 “생가가 조성된 곳은 포은의 방계 후손이 살던 집”이라며 “복원이 아닌 교육장 활용을 고려한 건물로 보면 된다”고 말했다. 건물의 구조나 규모 등이 무분별해 선생의 곧은 정신을 전하는데 오히려 누가 될 것 같았다.

생가에서 다시 900m를 내려가자 농로 옆에 ‘孝子里’(효자리) 글씨가 선명한 포은 유허비가 나타났다. 고려 공양왕 원년(1389)에 세워졌다고 한다. 포은은 18세에 부친상을 당하고 3년 시묘를 했다. 10년 뒤 다시 모친상을 치르고도 3년 시묘를 한다. 당시 상례는 불교의 영향으로 사대부들 대부분이 100일이면 탈상했다. 하지만 포은은 홀로 시묘하며 슬픔을 다해 1366년 조정은 정려를 내린다. 그래서 효자리 비각에는 ‘포은정선생지려’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100일 탈상 시대에 부모 3년 시묘한 효자


▎선생이 효자였음을 알리는 영천 생가 마을 입구에 세워진 고려 공양왕 시기 비석.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서면서 포은은 사후 어떤 평가를 받았을까. 포은은 선죽교에서 피살된 뒤 시신이 길가에 버려졌지만, 사람들은 감히 가까이 갈 수 없었다고 한다. 우현보가 비통하게 여겨 은밀히 승려를 시켜 시신을 거두었다고 전해진다. 조선 개국 이후 포은을 충신으로 자리매김한 이는 뜻밖에도 그를 죽인 태종이었다. 권근의 상서(上書)를 수용하면서다. “예로부터 나라를 소유한 사람이 반드시 절의의 선비를 포상한 것은 만세의 강상(綱常)을 견고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왕자(王者)가 거의하여 창업할 때는 나에게 붙는 자에게 상을 주고 붙지 않는 자에게 벌을 주는 것이 마땅하지만 대업이 정해져 수성할 때는 반드시 절의를 다한 전대(前代) 신하를 포상하여 죽은 자는 추증하고 살아 있는 자는 등용하여 표창과 포상을 넉넉히 더 함으로 후세 신하의 절의를 장려해야 하니, 이는 고금의 공통된 의리입니다….”

1401년 태종은 포은을 영의정에 추증하고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린다. 사후 9년 만이다. 조선 왕실이 포은의 충절을 인정한 것이다. 명예회복이다. 퇴계는 포은을 “학문은 천인의 이치에 통하였고, 충성은 해와 달을 꿰뚫었다”고 평가했다. 고려를 마지막까지 지키려 한 포은은 이렇게 조선에서 선비의 첫째 덕목인 충효의 표상으로 자리 잡았다.

[박스기사] 동반자이자 경쟁자였던 포은과 삼봉 - 나란히 이방원에 의해 비극적 최후 맞아

포은 정몽주와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 1342∼1398). 동시대에 비슷하면서도 다른 길을 간 두 사람과 관련해 [시대가 선비를 부른다]에 실린 한영우 전 서울대 교수의 글을 참고해 정리한다.

포은이 고려의 사직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렸다면, 삼봉은 새로운 왕조 조선의 창건에 이바지했다. 이들은 정치적으로 서로 대척점에 있었지만 삼봉은 포은으로부터 사상적 영향을 받았다. 삼봉이 주자학에 심취한 것이나 성리학 이론을 완성한 것은 포은의 영향이 컸다. 또 나이나 학문, 벼슬은 포은이 위였으며 두 사람은 이색으로부터 성리학과 개혁을 배웠다. 포은과 삼봉은 둘 다 신진세력으로 개혁적이었다. 다만 포은이 온건 개혁론자라면 삼봉은 급진론자였다. 둘은 불교를 비판했다. 또 친원파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둘 다 유배를 가기도 한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이성계와의 관계에서 결정적으로 다른 길을 걷는다. 포은은 2년여 언양 유배에서 돌아온 뒤 이성계와 함께 북쪽 여진과 남쪽 왜구 등 외적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운다. 그로 인해 포은과 이성계의 명성은 자자해졌다. 반면 삼봉은 당시 좌절의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그는 주저앉을 수 없다며 이성계를 찾아간다. 이성계만이 자신의 야심을 펼 수 있는 인물이라고 본 것이다. 판단은 옳았다. 이후 삼봉은 이성계의 오른팔이 돼 조선을 설계한다.

포은과 삼봉은 이후에도 한동안은 동반자였다. 포은이 외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명나라로 4차 사행(使行)에 올라 홍무제를 만날 때 삼봉은 서장관으로 동행했다. 당시 성과는 두 사람을 탄탄대로로 이끌었다.

1388년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을 결행한다. 그 뒤 고려는 우왕이 권좌에서 밀려나고 공양왕이 옹립되면서 이성계는 실권을 장악한다. 이 과정에서 포은과 삼봉은 큰 공을 세웠다. 하지만 이성계가 역성혁명을 추진하자 포은은 삼봉과 적대 관계로 급변한다. 포은은 고려의 사직을 지키기 위해 급진론자 삼봉을 제거하려 했다. 포은은 삼봉을 탄핵하고 유배 보냈다. 그런 중에 삼봉과 손을 잡은 이방원이 포은을 먼저 제거한 것이다. 삼봉은 이후 조선의 실력자가 됐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포은이 피살되고 6년이 지나 삼봉 역시 이방원의 손에 죽는다. 포은과 삼봉은 이방원에 의해 삶을 비극적으로 마친 공통점을 지닌다.

- 글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yeeho1219@naver.com / 사진 백종하 객원기자

202005호 (2020.04.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