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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인터뷰] 여성학자 변혜정이 말하는 ‘성희롱 오·남용’ 현주소 

“성적 언동만 강조하게 되면서 정치적 악용 길 터줘” 

‘노동권 침해’ 원래 취지 잃고 성적인 말·행동, 접촉 부위만 부각
비밀주의 일변도는 “추행했지만 기억 안 나” 식 궤변 낳기도


▎변혜정 전 한국여성인권진흥원장은 조만간 펴낼 책 [누구나 다 아는 비밀은 비밀이 아니다]에서 성희롱이 오·남용되는 현실을 지적한다.
#1. 2019년 4월 24일, 임이자 자유한국당(현 미래통합당) 의원이 문희상 당시 국회의장 앞을 가로막고 섰다. 문 의장만 결심하면 공수처(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등 쟁점 법안들이 사실상 ‘패스트 트랙’에 오르는 상황. 이를 막으려 임 의원을 비롯한 한국당 의원들이 의장실을 찾았다. 임 의원은 양팔을 벌리고 서서 문 의장을 향해 “의장님 손대면 이거 성희롱이에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문 의장은 “이렇게 하면 성추행이냐”며 임 의원의 양 볼을 두 손으로 감쌌다. 한국당은 즉시 “문 의장이 임 의원을 성추행했다”며 고소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6월 말 출간 예정인 변혜정 전 한국여성인권진흥원장의 저서 [누구나 다 아는 비밀은 비밀이 아니다]. / 사진:하다
#2. 2014년 12월 22일, 서울시향(서울시립교향악단) 직원 10명은 박현정 당시 서울시향 대표를 성희롱·강제추행 등 혐의로 고소했다. ‘회식 도중 박 대표가 간장 종지를 엎자 이를 닦던 남자 직원의 넥타이를 당겨 추행했다’는게 핵심이었다. 그러나 경찰이 압수수색을 통해 직원들의 문자메시지·카카오톡 대화 내역을 확보하면서 진상이 드러났다. 직원들은 “(소송에서) 이길 승산 아이템은 성희롱”이라며 허위 고소장 작성을 모의한 것으로 밝혀졌다. 2019년 7월, 검찰은 이들 직원 중 5명을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했다.

위 두 사례에서 나오는 ‘성희롱’ 개념은 1995년 처음 법체계 안으로 들어왔다(여성발전기본법, 현 양성평등기본법). 성폭력과는 달리, 직장 내 성차별과 불이익에 방점을 찍었다. 그보다 2년 전에 일어난 ‘서울대 신모 교수 사건’이 계기였다. 당시 서울대 화학과 조교 우모 씨는 담당 교수인 신모씨가 “교육을 빙자해 팔을 잡고 등을 어루만지듯이 쓰다듬었다”는 등 성희롱한 사실을 폭로했다. 또 이를 거부해 자신의 조교 연장 계약이 해지됐다고 주장했다.

우씨가 신씨 등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은 이후 6년 동안 이어졌다. 여성계는 공동대책위원회를 꾸려 우씨를 지원했다. 결국 1999년 “신씨는 우씨에게 500만원을 지급하라”는 최종 판결이 나왔다. 이후 남녀고용평등법(1999년)과 국가인권위원회법(2005년)이 차례로 제·개정되면서 성희롱 개념과 성립 요건 등이 구체화돼왔다.

그러나 성희롱 법제화 20년이 넘은 지금, 이를 오·남용하는 사례가 적잖게 벌어지고 있다. 앞서 소개한 두 사건이 단적이다. ‘어디를 만졌느냐, 얼마나 자극적이냐’만을 내세우거나 심지어 조작해내기도 한다. 성희롱이 성립된 맥락이었던 ‘차별적 환경과 (상급자 요구 거절 시) 불이익’은 온데간데없다. 이에 대해 여성학자인 변혜정 전 한국여성인권진흥원장은 “우리 사회가 성희롱 사건에서 성적인 말과 행동에만 주목해온 결과”라고 진단했다.

성희롱 법제화 20년 지났지만…


▎2018년 10월 서울 대학로 혜화역 1번 출구 인근에서 시민들이 ‘곰탕집 성추행 사건’ 2차 가해를 규탄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변 전 원장은 6월 말 선보이는 책 [누구나 다 아는 비밀은 비밀이 아니다]에서 이렇게 성희롱 사건의 뒤틀린 이면을 파헤친다. 변 전 원장은 “성희롱 관련법은 여성을 지키는 강력한 무기 중 하나가 됐다”면서도 “지난 20년간 직장 내 성차별 해소가 이뤄졌는지는 의문”이라고 말한다. 알면서도 쉬쉬하는 직장 실태는 비밀로 하고, 피해·가해자의 신상만 파헤치는 것이 성희롱 사건을 대하는 우리 사회의 비뚤어진 현주소라는 것이다. 변 전 원장은 이런 뒤틀린 비밀주의가 정치적 오·남용뿐 아니라, 남녀를 적극 분리하는 이른바 ‘펜스룰’을 정당화하는 데도 기여한다고 경고했다.

머리말 제목이 ‘여성 수비대, 성희롱을 설계하는 사람들’이다.

“국회의장 ‘성희롱’ 사건에서 발상을 얻었다. 문 의장이 한국당 의원들 사이를 빠져나가려고 하니, 한국당 의원들 사이에서 ‘여성 의원들이 막아야 돼’라는 말이 나왔다. 그 이후 임 의원이 문 의장 앞을 가로막았다. 물리적인 힘이 상대적으로 약한 여성을 수비대로 세운 것이다. 또 일반 여성이었다면 ‘성희롱하지 말라’고 쉽게 외칠 수 있었을까? 이런 점으로 볼 때 임 의원이 성희롱 제도를 오용했다는 것이 내 결론이었다.”

볼을 만졌으니 성희롱을 한 것 아닌가?

“그래서 머리말의 부제를 ‘그래도 문희상 의장은 여성 의원의 양 볼을 만지면 안 된다’로 잡았다. 아무리 야당 행태에 화가 난들, 남성 의원이면 그렇게 볼을 만졌겠나. 임 의원이 말하는 성희롱이 잘못됐다고 지적하려는 목적일 수 있지만 그 과정에서 의장/의원, 남/여라는 권력관계를 남용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의도보다 배경이 궁금하다.

“성희롱을 가능하게 하는 차별적 환경, 맥락보단 성적인 말과 행동에만 천착한 결과다. 맥락을 고려하면 실수로 넘어갈 수 있는 일도 ‘상대가 내 몸을 만졌다’는 것에만 주목하면 성희롱이 될 수 있다. 물론 성차별적 맥락과 무관하게 정치적 의도에서 기획된 것이라도 마찬가지로 몸에만 집중하면 성희롱이 될 수 있다.”

“성적 부위, 수치심이야말로 임의적”


▎지난 4월 23일 오거돈 당시 부산시장이 부산시청 9층 기자회견장에서 사퇴 기자회견을 한 이후 승강기를 타고 이동하고 있다. / 사진:뉴시스
맥락보단 언행이 객관적이지 않나? 법적 판단을 위해선 불가피한 측면도 있을 것 같다.

“버스 안에서 레깅스를 신은 여성의 하반신을 동영상으로 몰래 촬영한 남성이 무죄 선고를 받은 적이 있다. 성폭력 처벌법(성폭력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14조에 의하면, 사람의 신체에 대해 성적 욕망 또는 수치심 유발을 위해 촬영할 때 죄를 물을 수 있다. 그러나 재판부는 레깅스가 일상복으로 활용되며, 몰래 촬영하는 것이 성적 수치심을 줬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판단해 무죄 판결을 내렸다. 다시 말해 ‘몰래 찍혔다’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부위’인지에 따라 범죄 여부가 결정된다는 이야기다. 여성의 몸 중에 어떤 부위가 수치심을 유발한다고 정할 수 있을까? 역시 임의적이다.”

어쩌면 앞서 소개한 사례들이 특이한 경우는 아닐까?

“이런 일도 있었다. 클럽에서 다 같이 어울려서 춤추다 보면 남성과도 부딪칠 수 있지 않나. 그런데 지인의 딸이 어떤 남성과 부딪치는 순간 112에 신고했다고 하더라. 이런 시도가 가능할 정도로 성희롱 관련법이 여성을 지키는 강력한 보호구가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어떻게 보면 남성들로 하여금 여성과 철저히 거리를 두겠다는 ‘펜스 룰’을 자극하는 측면도 있다. 무섭지 않나, 살갗만 부딪쳐도 성희롱·성추행으로 고소·고발당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펜스 룰이란 미국 부통령 마이크 펜스의 이름에서 착안한 용어다. 펜스 부통령은 2002년 당시 미국 의회 전문지 [더 힐] 인터뷰에서 “아내가 아닌 다른 여성과는 단둘이 식사하지 않고, 아내 없이는 술자리에 참석하지도 않는다”라고 말했다. 여성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발생할 여지를 완전히 없애겠다는 뜻이다. 한국에서도 성희롱 사건이 늘면서 대중에 알려졌다.

성희롱 관련법이 펜스 룰을 정당화시킨다는 말인가?

“전혀 아니다. 남성들이 오해하고 억울해할 수 있는 지점이 있다는 거다. 그렇다고 해서 펜스 룰이라는 대응이 정당화될 순 없다. 펜스 룰은 여성을 차별하고 격리한다는 점에서 성희롱과 구조가 다르지 않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여성은 성희롱 신고를 통해 자기 몸을 지키는 데 그치고, 남성도 스스로를 지키겠다고 내놓는 대응법이 펜스 룰이라는 거다. 이때 차별을 가능케 하는 맥락은 그대로 간다.”

펜스 룰이 사회의 성숙을 해치더라도, 개인 차원에서 성희롱을 예방하는 데 효과적인 전략이란 점은 변함없는 것 같다.

“펜스 룰을 하면 당장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은 ‘남자는 누구나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잠재적 가해자론에 뿌리를 둔다. 남자들이 제일 싫어하는 게 잠재적 가해자론이다. 그 의식의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 펜스 룰이다. 나는 잠재적 가해자론을 반대한다. 어릴 때부터 남녀유별 문화에서 남자는 ‘도둑놈’, 이걸 유식하게 표현한 게 잠재적 가해자론이고, 더 진화한 게 펜스 룰이다. 제가 강의할 때도 같은 질문이 들어온다. 당장 일어나는 일은 막아야 하니 펜스 룰이 좋지 않으냐고. 그런데 남자를 잠재적 가해자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으면 절대 아니라고 한다.”

“펜스 룰과 잠재적 가해자론은 동전의 양면”


어쨌든 여성이 성희롱 신고를 통해 얻는 이득이 분명하다. 다소 부작용이 있다고 한들, 개선해야 할 동인이 되진 않을 것 같다.

“그렇지 않다. 성희롱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조직에선 엄벌주의를 들고 나오지만 현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성희롱 사건을 다룰 때 맥락보다 성적인 말이나 행동, 부위에 대한 논의가 주로 이뤄지는 탓이다. 성희롱에 대해 논의하는 것 자체를 ‘성적인 대화’로 간주하다 보니 부끄러운 것, 비밀스럽게 말해야 하는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내가 상담해온 피해자 대부분은 자신의 문제를 성이 아닌 차별(노동권 침해)로 보더라. 조직에서, 사회에서 공개적으로 다뤄지길 원했다.”

왜 그런 일이 벌어지나. 관행인가, 규정인가?

“양성고용평등법 14조 7항에 규정돼 있다. 직장 내 성희롱 사건 조사에 참여한 사람들은 조사 과정에서 알게 된 비밀을 피해자 의사에 반해 누설해선 안 된다. 2차 가해와 피해를 예방하기 위한 조항이다. ”

2차 피해 방지는 필요한 일 아닌가?

“2차 피해를 방지하는 것은 당연히 필요하다. 그런데 조사 내용 공개 금지라는 방식으로 중요한 어떤 것도 드러내지 못하게 하는 건 문제다. 예를 들어 오거돈 전 부산시장이 성추행 혐의와 관련해 ‘구체적인 범행은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지 않던가. 진실을 규명하려고 파고들면 ‘2차 피해 줄까봐’라고 둘러댈 수 있다. 이런 경우 비밀 유지는 가해자에게 심지어 이득이 된다. 오히려 진상을 공개할수록 피해자에게 이롭다.”

수사 관계자에 따르면, 오 전 시장은 지난 6월 2일 부산지법에서 열린 영장실질심사에서 ‘피해자 말이 다 맞고 성추행 범행은 인정하나 구체적인 범행은 기억나지 않는다’는 취지로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비밀로 해야 할 것과 드러내야 할 것을 구분한다면.

“피해·가해 사실은 계속 밝혀지고 알려져야 한다. 그러나 피해자·가해자의 신상은 드러나선 안 된다. 예를 들어 안희정·김지은은 드러나면 안 된다. 가해자도 예외 없다.”

가해자 신상은 공개하라는 요구가 많다. 특히 안희정 전 지사는 대선주자급 공인 아니었나?

“안희정 전 지사는 대권 주자니까 견제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신상을 드러내서 뭐가 달라졌나? 권력 가진 사람들은 더 숨어서 즐길 뿐이다.”

지난해 2월 진흥원장을 그만둔 뒤 이번 책이 첫 행보다. 다음 계획은 정했나?

“‘경단녀(경력 단절 여성)’다 보니 재취업은 어렵겠다(웃음). 식당 겸 강연·상담 공간을 조만간 열 계획이다. 강연 들으러 오는 사람은 밥값을 내고, 저는 밥을 내주고. 더는 후원금·보조금에 의존하는 시민운동은 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변 전 원장은 지난 30여 년간 여성인권 운동에 헌신해온 전문가다. 시민단체 활동을 계기로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 연구소장, 서강대 성평등상담실 상담교수, 충북도청 여성정책관 등을 역임했다. 지난 2017년 11월부터는 여성가족부산하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원장을 맡기도 했다.

- 글 문상덕 월간중앙 기자 mun.sangdeok@joongang.co.kr / 사진 김경빈 기자 kgboy@joongang.co.kr

202007호 (2020.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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