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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특집] 선진국으로 가는 마지막 조건: 총론 

경제 성적표 뒤에 가려진 국민의 ‘삶’에 주목해야 할 때 

2019년 개도국 지위 포기로 OECD 가입 23년 만에 정식 선진국 문턱 넘어
경제 규모 커졌지만 삶의 질은 뒷걸음질, 한국적 콘텐트 경쟁력은 희망적


▎선진국 문턱을 넘어선 한국 사회는 저출산 고령화의 위협에 직면해 있다. 사회 역동성은 떨어지고 갈등과 관계 단절이 심화하고 있다. 공익광고의 한 장면.
2019년 10월 25일, 정부는 합동 브리핑에서 세계무역기구(WTO) 농업 분야에서 개발도상국 지위를 더 이상 주장하지 않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압력에 따른 조치였지만, 한국의 경제 규모와 국제적 위상을 고려할 때 더는 개발도상국을 고집할 명분이 부족한 점도 이런 결정을 하게 된 배경이었다. 이로써 한국은 모든 분야에서 엄연한 선진국의 지위를 온전히 갖추게 됐다. 1996년 12월 20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29번째 정회원국이 된 지 23년 만의 일이다.

전쟁의 포연이 걷힌 뒤 반세기 만에 일궈낸 한국의 경제적 발전은 눈부시다. 2018년 국내총생산(GDP) 규모가 세계 10위에 올라섰다. 2019년 12위로 밀려나긴 했지만, 국제통화기금(IMF)은 지난해 다시 10위를 회복했을 것으로 전망했다. 우리보다 앞선 나라는 미국·중국·일본·독일·영국·인도·프랑스·이탈리아·캐나다 정도다.

2021년을 시작하는 첫걸음도 경쾌하다. 국내 증시는 사상 처음 종합주가지수 3000포인트를 돌파했다. IMF가 전망한 올해 한국의 경제 성장률은 -1.9%다. 올해 세계 경제 성장률 전망치인 -4.4%를 크게 웃돈다. 중국을 제외하고 가장 양호한 수준이다.

하지만 단지 경제지표의 순위만으로 선진국을 가늠하는 것은 단편적이다. 선진국은 그에 걸맞은 문화와 국민 의식, 삶의 질이 뒤따라야 한다. 진정한 의미에서 선진국으로 인정받기 위해선 국가의 부를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은 선진국 대열에 굳건히 자리를 잡을 수 있느냐의 기로에 놓여 있다.

경제 규모 이외의 글로벌 지표를 살펴보면 과연 한국을 온전한 선진국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에 의문을 갖게 한다. 지난 13년간 한국은 자살률에서 OECD 국가 중 1위라는 오명을 갖고 있다. 인구 10만 명당 자살자(26.6명)가 OECD 평균(11.2명)의 두 배를 넘는다. 그중에서도 노인 자살률은 무려 58.6명으로 OECD 평균(18.8명)의 3배를 웃돈다.

‘저녁이 있는 삶’은 주어졌지만, 행복한 저녁은 아직 요원하다. 정규 근로시간이 줄어드니 소득이 덩달아 줄었기 때문이다. 강제로 저녁이 주어진 직장인들은 여가가 아닌 생계유지를 위해 너도나도 부업 전선에 뛰어든다.

청년의 역동성은 사라진 지 오래다. ‘삼포세대(취업·결혼·출산 포기)’라는 청년의 자조는 이제 익살스러운 너스레로 웃어넘길 수 없는 수준이다. 국회 입법조사처의 ‘청년층의 교육 이수 현황과 시사점’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25~34세 청년층의 전문대학 이상 고등교육 이수율은 69.8%로 OECD 회원국 중 아일랜드(70.0%)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 교육 수준으로는 세계 어느 나라에 견줘도 손색없는 고학력 국가라는 의미다.

그러나 고용 통계는 한국의 현 상황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2020년 1분기 기준 한국의 청년(15~24세) 고용률은 25.6%로, OECD 37개 회원국 평균인 41.9%의 절반을 약간 넘는 정도였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오포(취업·연애·결혼·출산·내 집 마련)’를 넘어 N포라는 무한의 패배감이 청년의 꿈을 짓누른다. 한국 사회를 선진국 반열에 오르게 한 과거 원동력이 청년의 개척가 정신이었다는 점을 상기하면, 지금 무력감에 빠진 청년세대의 모습은 다가올 미래 한국상에 대한 경고의 징후다.

인구 증가세는 정체를 넘어 이제 역성장으로 진입했다. 통계 작성을 시작한 이래 지난해 처음으로 주민등록 인구가 감소했다. 태어난 아기의 수가 사망자보다 적었다. 한국의 합계 출산율(가임기 여성의 기대 출산 아이 수)은 0.9명대에 그친다. 세대와 빈부, 젠더, 이념 등 사회의 요소마다 나타나는 격차 심화는 사회적 갈등으로 표출된다. 한국의 사회갈등 수준은 비교 대상 37개국 중 32위 수준으로 최하위권에 머물러 있다. 잠재적 갈등 요인과 갈등 관리 역량, 재분배 역량 모두 하위권이다. 한국행정연구원(박준, 정동재)이 2005년부터 2015년까지 사회갈등을 지수화해 비교 분석한 결과다.

‘행복하지 않은 저녁’, 갈등과 분노 깊어져


▎2021년 코스피는 3000포인트를 넘어섰다. 한국은 경제 규모로 세계 10위권을 넘나드는 경제 선진국이다. / 사진:연합뉴스
더 큰 문제는 갈등의 수준과 관리 역량이 갈수록 악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은 갈등과 분노를 더욱 부채질한다. 서울대 보건대학원이 지난해 9월 전국 2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했더니 전달 조사보다 ‘분노’는 2.2배, ‘공포’는 2.8배 더 커진 것으로 나타났다.

갈수록 개인화하는 사회에서 사회적 안전망은 국가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다. 하지만 선진국으로서 손색없을 정도로 사회적 안전망이 갖춰졌다고 볼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곳곳에 설치된 CCTV(폐쇄회로TV) 덕분에 강력범죄는 갈수록 줄어들고, 치안 환경은 어디에 내놔도 손색없는 수준이다. 그러나 사회안전망은 단지 범죄를 감시하는 역량만 의미하지 않는다. 밤거리와 골목길을 비추는 감시망이 굶주리고 소외돼 생명의 불꽃이 꺼져가는 이들을 비추지 않는다면 그럴듯한 외형의 발전은 무색해지고 만다. 고독사의 규모를 가늠할 수 있는 무연고 사망자 수는 2019년에 2536명으로 3년 전인 2016년(1820명)에 비해 40% 가까이 늘었다.

한국 사회의 고령화는 가파른 상승세다. 노인복지와 안전망이 고령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가난한 노인은 증가하는데 이들의 인간다운 생활을 뒷받침할 제도 마련은 인색하기만 하다. 한국의 노인 빈곤율은 2017년 기준 44%로 OECD 평균(14.8%)의 3배 수준이다. 코로나19로 인해 인간관계의 단절은 어느 때보다 심화하고 있다. 언택트(Untact) 사회의 도래와 새로운 형태의 관계 맺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동안에도 고독한 죽음은 곳곳에서 이어지고 있다.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한눈에 보는 사회보장 2019’에 따르면 2019년 국내 1인 가구는 599만 가구로 전체 가구의 2.98%를 차지했다. 그중에서도 60세 이상 홀몸 노인 가구가 30%를 넘는다. 어려울 때 도움받을 사람이 없는 사회적 고립 인구 비율은 20%를 넘는다. OECD 국가 중 사회적 고립이 높은 편에 속한다.

가파른 고령화, 관계의 단절 심화돼


▎BTS 앨범 ‘BE’의 콘셉트 이미지. BTS를 비롯한 케이팝 가수들의 활약에 한국적인 콘텐트의 글로벌 경쟁력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 사진:빅히트엔터테인먼트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지적은 그동안 한국 사회가 겉으로 보이는 외형을 그럴싸하게 갖추는 데 집중해왔기 때문이다. 한국이 선진국 대열에 합류했다고 선포했던 25년 전으로 돌아가 보자.

1996년 12월 16일 자 정부 기관지인 [국정신문]은 한국의 OECD 가입 소식을 전하며 이렇게 의미를 부여했다. “열심히 일해 저축하고 이로써 국가 경제가 발전의 여력을 갖는 나라, 전 국민의 소득이 고르게 높아지고 건전한 문화 및 여가생활이 있어 ‘삶의 질’이 한껏 높아지는 나라가 OECD 회원국으로서의 우리의 지향점인 것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당부는 ‘국민경제를 좀먹고 서민들에게 박탈감을 안겨주는 과소비는 OECD 가입국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근면·성실’이란 개발독재 시대의 구호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습이다. 당시 정부 발표의 주요 키워드도 경제, 경쟁력, 저축과 같은 경제적 의미에 치중해 있다. 복지, 균등, 빈부 격차와 같은 삶의 질에 관한 부연설명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이후로도 GDP, 국민소득과 같이 숫자로 서열이 매겨지는 지표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닌데도 유독 선진국은 성적순이란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이다.

한국 사회가 유동성 파티에 취해있는 사이에 한쪽에선 한국 경제가 후퇴할 수 있다는 경고음을 내고 있다. 이른바 ‘중진국의 함정’이다. 그만큼 한국 경제의 역동성이 빠르게 상실되고 있다는 의미다. 1년 전인 2020년 1월 현대경제연구원이 발표한 ‘2020년 국내 10대 트렌드’에 따르면 한국은 선진국 문턱에 간신히 발을 걸친 상황이다. 다시 말해 성장 실속(實速)과 가속(加速)의 갈림길에 서 있다는 것이다. 지속하는 저성장 기조를 탈출하기 위해 정부가 편 재정 확대가 오히려 민간 부문의 역동성을 약화할 수 있다는 우려다.

보고서가 나온 시점은 코로나19 팬데믹이 시작되기 전에 나온 것이어서 코로나19 상황을 반영하지 못했지만, 저성장과 재정 확대, 부채 증가 등의 위험 징후는 오히려 더 뚜렷해졌다. 올해 국가 채무는 지난해보다 110조원 늘어난 956조원으로, 내년의 1000조원 시대를 눈앞에 두고 있다. 가계와 기업 부채는 2020년 3분기 말 기준으로 3014조3000억원을 기록했다. 지난해 GDP(1919조)의 1.57배 수준이다. 가계 부채(1682조원)만으로도 이미 같은 기간 GDP 수준을 넘어섰고, GDP 대비 기업 부채 증가 속도는 세계 주요 43개국 중 3위다. 국제결제은행(BIS)은 지난해 12월 우리나라의 민간 부문 빚 위험도를 11년 만에 ‘주의’에서 ‘경보’로 격상했다. 한국 경제의 재무 건전성 악화가 우려할 만한 수준에 도달하고 있다는 의미다.

코로나19 시대에 발견한 한국의 경쟁력

규모의 경제에 관한 맹신은 코로나19로 균열이 가고 있다. 2017년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GNI)은 3만1734달러를 기록하며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를 열었다. 2018년에는 3만3564달러로 순항하는 듯하더니 2019년 3만2115달러로 뒷걸음질 쳤다. 한국은행은 2020년에도 3만1000달러 수준을 기록할 것으로 예상하지만, 이미 디플레이션이 시작됐다는 분석마저 나오고 있다. 선진국의 조건으로 인식되는 3만 달러를 달성했는데도 그 수치가 국민의 피부에 와 닿지 않는다. 여전히 질 좋은 일자리는 부족하고, 아파트값과 주식 가치 폭등의 혜택을 받지 못한 95%의 삶은 팍팍하기만 하다. 자칫 성장과 내실 두 마리 토끼를 모두 놓칠지도 모르는 상황에 놓인 셈이다.

그래도 비관적이기만 한 건 아니다. 한국은 여전히 세계에서 보기 드물게 빠른 속도로 선진국에 진입한 모범 국가로 꼽힌다. 코로나19가 바꾼 비대면 사회는 한국의 글로벌화에 새로운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이미 한국의 문화는 세계에서 가장 ‘힙(hip)’한 트렌드로 자리잡고 있다. BTS를 비롯한 케이팝(K-pop)이 온라인을 통해 세계적인 팬덤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영화 [기생충]이 외국어 영화 최초의 오스카 작품상을 받으면서 한국적인 콘텐트가 세계에서 통한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메이저리그가 중단된 미국에서 온라인으로 생중계된 한국 프로야구가 인기를 끈 것도 비대면 시대에 한국 스포츠의 경쟁력을 보여준 예라 할 수 있다.

외국인들이 한국인으로부터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이 ‘두 유 노우 김치?(Do you know Kimchi?)’였다는 비아냥은 옛말이 됐다. 한국 가요를 부르려고 한글을 배우고, 한국을 찾는 외국인이 크게 늘었다. 미국현대언어협회가 2009~2016년 미국 대학의 외국어 수강생 수 변화를 조사한 결과, 중국어(-11%), 독일어(-16%), 일본어(-5%) 등 대부분 수강생 수가 줄었지만, 유독 한국어는 같은 기간 65%나 늘었다. 한국어가 명실공히 세계 10대 외국어 반열에 올랐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한다.

이제는 경제 성적표의 순위에 천착하기보다 성적표 뒤에 가려져 있던 국민의 ‘삶’에 시선을 돌려야 할 때다. 양적 성장과 함께 질적 성장에 대한 고민이 늘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를 체감하지 못하는 국민이 많은 것은 소득 양극화에 따른 박탈감, 소득 증가보다 빠른 자산 가격 상승 등으로 풍요로움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라는 하준경 한양대 교수의 지적은 여전히 우리의 삶이 선진국 시민의 풍요로운 저녁을 동경만 하는, 팍팍한 상황이란 현실을 일깨운다.

- 유길용 월간중앙 기자 yu.gilyong@joongang.co.kr

202102호 (2021.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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