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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범의 등산미학⑤ 고창 선운산에서 

 

좀 더 후회 없는 삶을 위하여… 더없이 소중할 30초

서해안고속도로를 달릴 때마다 수십 수백 번 ‘가 봐야지, 가 봐야지’ 마음을 먹고도 사는 게 뭔지, 대학교 MT 이후 무려 38년 만에 선운사를 다시 찾았고, 선운산에는 처음 올랐다. 3개월 전 친구들과 함께한 등산에서 청계산을 얕잡아 보고 운동화를 신은 채 등산을 하다가, 마침 내리는 진눈깨비에 미끄러지면서 발목이 꺾여 말 못 할 가슴앓이를 했다. 산다운 산을 3개월 만에 올라 그런지 마음이 상쾌하고 발걸음도 가벼웠다.

산은 즐거움과 행복을 준다. 동시에 변화무쌍한 곳으로 언제든지 사고와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에 철저한 준비, 특히 안전을 위해 등산화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실감하는 계기가 되었다.

넓은 주차장, 잘 정돈된 광장에 이색적인 조형물, 붉은색, 보라색, 하얀색, 노란색의 울긋불긋 갖가지 꽃들이 왜 이제야 왔냐는 듯 화사하게 미소 지으며 나를 반겼다.

선운, 구름 속에서 참선한다는 뜻을 담은 선운사는 백제의 위덕왕 24년 (577년) 검단 선사가 창건했다는 설과 진흥왕이 창건했다는 설이 있는데, 당시에는 암자만 89곳에 3000여 명의 수도승이 있던 대사찰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도솔암·청담암·석상암·동운암만 남아 있다. 도솔은 미륵보살이 머무는 정토로, 욕계의 여섯 하늘 중 4번째 하늘이다. 선운산은 처음에는 도솔산이라고 부르다가 선운사가 너무 유명해지면서 차츰 선운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선운산 수리봉 정상은 336m, 산은 별로 높지 않고 아담하다. 1시간도 채 안 되어 정상에 올라 사바세계를 바라보니, 파란 하늘에 뭉게구름이 하얀 동시를 이쁘게 쓰고 있었고, 겹겹이 펼쳐진 녹색 산들마다 연한 엽록색 이팔청춘 새싹들이 짧은 미니 치마를 입고 불타는 낭만과 열정을 뽐내고 있었다.

참 곱고도 곱다. 아! 나도 저렇게 순수하고 열정적인 꽃피던 좋은 시절이 있었던가! 남들 다해보는 연애다운 연애 한 번 못 했고, 그 당시 젊은 청춘, 피 끓는 젊은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나섰을 5.18 민주화운동, 12.12 쿠데타 반대 운동 등…. 그 많은 역사적 현장, 바로 그 중요한 자리에 한 번쯤 섰을 텐데. 바보같이 나는 없었다. 어리석게도 정의를 위해, 신념을 위해 데모 한 번, 피켓 한 번도 들지 못한 것이다. 이유야 여럿 있었겠지만, 솔직히 진정으로 용기와 자신감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도도한 선비처럼 흙 안 묻히고 어려운 꼴 안 당하며 편안하고 평탄하게 잘 살았다고 말하지만…. 환갑이 다 되어서 그런지, 참, 인생 앙꼬 없이 무탱으로, 재미없이 껍데기로 산 것이다. 나이 들어 참 나를 회상하고 기억하고 내세울 것, 하나 없다. 그 많은 나날 중에 단 하루, 단 한 시간이라도 좀 더 용기와 자신감을 갖고 역사의 주연으로 살았더라면….


한 번이라도, ‘제일 비싸고 좋은 자리의 관객으로라도 오롯이 인생의 참맛을 맛보고, 미래에 맛있게 꺼내 먹을 수 있는 안줏거리를 더 많이 만들었더라면…’ 하는 후회와 회한이 몰려왔다.

대장금이 마지막 어머니를 위해 산딸기와 복분자를 입에 넣어주고 애틋하게 돌무덤을 쌓아 놓은 용문굴, 연꽃무늬 받침에 나와 같이 평범한 얼굴을 아로새겨 놓은 동불암지마애여래 석가모니 좌상, 날씬하게 하나로 자라다가 달걀처럼 8개의 수장으로 섹시하게 펼쳐진 600년 된 천연기념물 장사송 등을 보면서 왜 선운사가 남도의 내금강이고, 오랫동안 회자되고 사랑받는지를 알 것 같았다.

하산 후 선운사, 1500년을 묵묵히 지켜온 석가모니 불상이 염불 미소를 지으며 날 반겼고, 마치 이 시대의 진정한 어른이자 지식인이었던 이어령 선생님이 마지막으로 타계하면서 후세에 남긴 예화를 나에게 대신 전하는 듯했다.

“사랑하는 내 딸 어린 민아가, 새로 산 예쁜 드레스를 입고 내 서재에 들어왔는데, 난 바쁘다는 핑계로 거들떠보지도 않고 손으로 나가라는 시늉을 했고, 심지어 아내에게 내가 이렇게 죽을 둥 살 둥 하며 원고를 쓰며 돈을 벌고, 가족의 사랑과 행복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데…. 그게 사랑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애들을 시끄럽게 방치한다며 야단을 쳤어요. 아마도, 민아는 그게 평생 큰 상처 스트레스가 되어 한창 젊은 나이에 암에 걸려 나보다 일찍 저세상으로 빨리 떠난 것 같아요. 하느님이 저에게 30초만 마지막 기회를 준다면… 지금 하고 있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사랑하는 내 딸 민아를 포옹하면서, 내 딸 민아가 이 세상에서 제일 예쁘구나. 사랑한다. 꼭 그 말을 하고 싶어요.”

이제라도 말로만, 머리로만 그리지 말고 사랑과 신념을 진정으로 실천하며 살아야겠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풍천장어 국물에 막걸리 한 사발을 게눈 감추듯 해치우고, 옛 향기 가득한 보리밭 유채밭을 걸으며, 어느 봄 하루를 행복하게, 행복하게 마감해 갔다.


※필자 소개: 김희범(한국유지보수협동조합 이사장)- 40대 후반 대기업에서 명예퇴직. 전혀 다른 분야인 유지보수협동조합을 창업해 운영 중인 10년 차 기업인. 잃어버린 낭만과 꿈을 찾고 워라밸 균형 잡힌 삶을 위해 등산·독서·글쓰기 등의 취미와 도전을 즐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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