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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호의 상해임정 27년사(20)] 상해임정을 전복하고 공산국가 건설하려 한 이동휘 

안창호 위시한 기호계열, 이동휘의 정부개혁안을 부결하다 

대통령제 폐지하고 ‘고려민국’ 국호로 하는 이동휘의 정부개혁안
상해임정 전복에 실패하자 국민의회와 연합해 ‘한족공산당’ 창당


▎1945년 12월 3일 촬영된 임시정부 요인 귀국기념 사진. 첫째줄 왼쪽부터 장건상, 조완구, 이시영, 김구, 김규식, 조소앙, 신익희, 조성환.
한인사회당의 부의장 겸 군사부 위원장 김규면은 총의장 이동휘에 뒤이어 당내 서열 제2인자였다. 함경도 경흥 출신인 그는 한인사회당에 입당하기 전 침례교회 목사로 이름을 떨쳤다. 오세호 교수의 [백추(白秋) 김규면(金圭冕)의 독립운동 기반과 대한신민단(大韓新民團)]에 의하면, 김규면은 26살 때인 1906년 원산의 침례교회에 입교해 전도사를 거쳐 목사가 됐다.

목사 김규면은 일제강점기 이전부터 만주의 훈춘현, 왕청현을 비롯해 연해주 각지에서 교회를 개척하고 신자들을 확보했다. 1915년 일제가 ‘포교규칙’을 공포해 종교 자유를 통제하자 침례 교단을 떠나 ‘대한성리교회(大韓聖理敎會)’라는 독립교단을 만들었다. 그 이유에 대해 ‘노병 김규면의 비망록(備忘錄)’에서는 “기도니 찬송가니 성경말씀이니 하는 비과학적 객담(客談)으로 시간을 허비하게 되고, 천만 수상한 허무잡담의 논리를 분간성이 약한 학생들에게 주입하는 것은 절대 못 할 일”이라고 언급했다.

당시 캐나다 선교사가 주도하던 침례 교단은 조선의 식민지 현실을 무시하고 개인의 영혼 구원만을 강조했다. 그런 침례 교단의 선교활동을 김규면은 비과학적 객담 또는 허무잡담의 논리라 비판했던 것이다. 이는 당시 김규면의 기독교 신앙이 영혼 구원보다는 식민지 해방에 치중돼 있었음을 알려준다. 아마도 1906년 침례교회에 입교한 이래 김규면은 조국 해방을 위해 그 누구보다 열심히 기도하고 찬송하며 성경도 읽었을 것이다. 하지만 응답은 없었다. 도리어 일제는 1915년 ‘포교규칙’을 공포해 종교 자유를 통제했고, 침례 교단은 순응했다. 그런 상황에서 기독교를 통한 조국 해방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김규면은 침례 교단에서 탈퇴해 독립 교단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김규면의 신앙 특징은 강력한 현실지향에 있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침례 교단에서 탈퇴하던 1915년 당시 대한성리교회는 만주와 연해주에 대략 300개 교회와 3만 신도를 거느린 대형 교단이었다. 이를 기반으로 김규면은 1918년 말 대한신민단을 조직했다. 그는 과거 안창호의 대한인신민회(大韓人新民會)에 참여했는데, 그 대한인신민회를 계승한다는 취지에서 대한신민단이라 명명했다. 그러므로 대한신민단의 기본 노선은 안창호의 대한인신민회와 마찬가지로 자유공화국 수립이었다.

공산주의자로 전향한 김규면


▎앞줄 왼쪽 첫째가 김규면.
그러나 김규면은 한인사회당원 김립의 권유로 1919년 5월 대한신민단을 한인사회당에 통합하면서 공산주의자로 전향했다. 공산주의에서 조국 해방의 현실적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한인사회당의 3거두인 이동휘, 김규면, 김립은 본래 독실한 기독교 신앙인이었다. 이동휘는 전향하기 전 수많은 교회를 개척한 전도사였는데, 1918년 4월 김립의 권유로 한인사회당을 창당하면서 공산주의자로 전향했다. 김립 역시 1917년 공산주의자로 전향하기 전에는 독실한 대한인신민회 회원이자 기독교 신앙인이었다. 그랬던 김립과 이동휘가 공산주의자로 전향한 이유 역시 김규면과 마찬가지로 조국 해방의 현실적 가능성을 공산주의에서 찾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김립과 이동휘의 신앙 특징 역시 김규면과 마찬가지로 강력한 현실지향에 있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기독교 신앙인에서 공산주의자로 전향한 이동휘, 김규면, 김립이 한인사회당의 3거두였다는 사실에서 한국공산주의 운동은 기독교 신앙인들이 시작하고 주도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한편 김규면이 1919년 5월 대한신민단을 한인사회당에 통합시킴으로써 대한성리교 300 교회와 3만 신도는 한인사회당의 재정적·군사적 기반으로 전환됐다. 이와 관련해 1921년 5월 상해파 고려공산당 창당 대회에서 이동휘는 “한인사회당 사업보고에서 들은 바, 한인사회당의 사업경비는 대한신민단 적립금으로 수만 원이 지불됐고, 지금부터는 국제당 보조금으로 보충한다는 말은 무엇을 증명하는가? 이것은 대한신민단은 한인사회당의 유모가 됐고, 한인사회당은 고려공산당의 산모가 됐다는 것”이라고 했다. 이 언급은 1919년 5월부터 1921년 5월까지 2년 동안 마치 유모처럼 한인사회당을 먹여 살린 것은 바로 대한신민단의 지원금이었음을 알려준다. 이뿐만 아니라 한인사회당의 군사 기반인 빨치산들 역시 대부분 대한신민단을 통해 충원됐다.

국호 ‘대한민국’에 반대한 이동휘


▎1948년 7월 17일 이승만 당시 초대 국회의장이 제헌국회가 제정한 헌법에 서명하고 있다.
김규면은 한인사회당 제2인자였기에 당내 은밀한 내막을 그 누구보다 잘 알았다. 당수 이동휘와의 개인적 친분 역시 아주 밀접했다. 그래서 김규면은 이동휘 탄신 9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1963년 <성재약전(誠齋略傳-이동휘 약전)에 관한 회상기(回想記)>를 썼다. 그 회상기에는 총리 이동휘가 1921년 1월 상해임정에서 탈퇴하게 된 내막도 자세히 기록됐다.

회상기에 의하면, 이동휘는 총리에서 탈퇴하기 전 정부개혁안을 제출하면서 개혁의 필요와 이유를 해석하는 설명서도 제출했다. 아마도 이동휘 정부개혁안은 1921년 1월 중 개최된 제2차 국무회의 때 제출됐을 것이다. 그때 제출된 이동휘 정부개혁안 설명서에 의하면 그 개혁안은 정부 개혁이 아니라 사실상 정부 전복안이었다. 이동휘 개혁안은 국호(國號), 국기(國旗)는 물론 국가체제 전반을 뒤집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국호의 경우, 망국 조선과 대한제국을 연상시키는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는 불길하고 허무하므로 ‘대한’을 없애고 ‘고려’로 바꾸자고 제안했다. 즉 기왕의 대한민국을 새로이 ‘고려민국’으로 바꾸자는 제안이었다.

당시 이동휘가 정부개혁안에서 국호를 고려로 제안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 함경도 출신이 절대다수인 한인사회당의 한국사 인식은 부여·고구려·발해·고려 등으로 이어지는 북방 역사를 정통으로 보는 북방사관(北方史觀)이었기 때문이다. 둘째, 1920년 7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제2차 코민테른 회의 때 한인사회당 대표 김규면과 박진순이 기왕의 ‘한인사회당’을 ‘고려공산당’으로 바꿔 등록했기 때문이다.

또한 상해임정 태극기의 경우, 유교의 음양오행설에 입각한 음양잡술에 불과하므로 ‘태극기’ 대신 ‘삼홍성청폭기(三紅星靑幅旗)’로 바꾸자고 제안했다. 삼홍성청폭기는 ‘세 개의 붉은 별이 그려진 푸른 바탕의 깃발’이란 의미이다. 설명서에 의하면, 세 개의 붉은 별은 북부여, 남부여, 동부여의 3부여를 상징하는 동시에 3부여의 통합을 상징하고, 푸른 바탕은 고려의 푸른 강산을 상징한다. 요컨대 상해임정의 국호와 국기인 대한민국과 태극기는 유교에 입각한 조선과 대한제국을 계승하는 것이므로 폐지하고, 새로이 부여와 고구려를 계승하는 고려민국을 건국하고 국기도 3부여를 상징하는 삼홍성청폭기로 바꾸자는 제안이었다.

이동휘의 정부개혁안 부결시킨 기호계열


▎1920년경 대한민국임시정부 시절의 안창호.
또한 국가체제의 경우, 기왕의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새로이 ‘고려혁명위원회’로 바꾸자고 제안했다. 설명서에 따르면, 고려혁명위원회는 각 지방, 단체의 대표회의를 개최해 조직하는데, 중앙집권 원칙에 따라 ‘중앙혁명위원회’와 ‘지방혁명위원회’로 구분한다. 중앙혁명위원회는 말 그대로 고려혁명위원회의 중앙조직이고, 지방혁명위원회는 고려혁명위원회의 지방조직이다. 중앙혁명위원회는 기왕의 상해임정 요인들이 담당하고, 지방혁명위원회는 대표회의에 참가한 각 지방, 단체의 대표들이 담당한다. 아울러 내지(內地)의 도(道)와 군(郡)에도 각각 ‘도혁명위원회(道革命委員會)’, ‘군혁명위원회(郡革命委員會)’를 비밀리에 조직하자고 했다. 그리고 이 모든 조직을 중앙혁명위원회의 통제 속에 두자는 것이었다.

이 같은 고려혁명위원회는 사실상 김립이 제창했던 ‘집행위원회’ 제도를 국내와 미국·중국·소비에트러시아 등으로 확장한 것이었다. 따라서 고려혁명위원회는 집행위원회 제도와 마찬가지로 기왕의 자유민주주의 국가체제인 상해임시정부를 전복하고 새로이 소비에트 국가체제를 수립하려는 제안과 같았다.

그런데 김규면의 [성재약전에 관한 회상기]에 의하면, 이동휘의 정부개혁안은 한인사회당의 의견과 주장을 대표한 것이었다. 이동휘가 상해임정에 참여하기 위해 1919년 9월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할 때, 한인사회당 집행위원회가 개최돼 독립운동 방향 문제를 토론했다. 결론은 상해임시정부를 ‘혁명위원회’로 바꾸자는 것이었다.

당시 이동휘의 상해임정 참여를 강력하게 주장한 인물이 김립이었다는 사실에서, 상해임시정부를 혁명위원회로 바꾸자는 결론 역시 김립의 주장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김립이 주장한 집행위원회는 물론 이동휘 명의로 제출된 정부개혁안과 설명서 역시 김립이 주동했을 것으로 이해된다. 아울러 이동휘 명의로 제출된 정부개혁안과 설명서는 한인사회당이 상해임정에 참여한 최종 목표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최후 카드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김규면의 [성재약전에 관한 회상기]에 따르면 이동휘의 정부개혁안이 제출되자 임시정부에서는 그 개혁안을 검토하기 위해 심의위원회를 설치했다. 심의위원회는 이틀에 걸쳐 이동휘의 정부개혁안을 검토했는데 질문과 찬성이 있었고, 반대토론은 없었다. 반대토론이 없었다는 것은 공개적인 반대가 없었다는 의미다. 즉, 겉으로 볼 때 심의회위원회 위원들은 모두 찬성이었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이동휘는 3일째 되던 날 자신의 정부개혁안을 표결에 부쳤다. 그날 제3차 국무회의가 개최됐기 때문이다. 표결 결과는 의외로 부결이었다.

그러자 이동휘는 즉석에서 일어나 부결 표를 던진 사람들을 성토했는데, 그 내용은 “입에는 꿀이 있고 뱃속에는 칼이 있다는 말과 한가지로 입으로는 찬성하는 체하고 손으로는 반대하는 음모술책은 독립운동 혁명자의 본의가 아니고, 망국운동자의 반복 행위이니, 우리 혁명운동자는 이런 망국운동 정부에서는 탈퇴한다”였다. 당시 이동휘는 몹시 흥분해 부결 표를 던진 사람들을 ‘망국운동자’라고 매도했을 뿐만 아니라 상해임정을 ‘망국운동 정부’라고까지 매도했던 것이다.

국민의회와 손잡고 공산국가 꿈꾼 이동휘


▎상해임정 체제 전복에 실패하자 한족공산당을 창당한 이동휘(오른쪽).
이동휘가 부결 표를 던진 사람들은 물론 상해임정까지 매도하자 대통령 이승만이 나서서 질책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아마도 “총리가 어떻게 우리 정부를 망국운동 정부라고 매도할 수 있단 말이오”라고 질책했을 듯하다. 하지만 이승만의 질책에 더 격분한 이동휘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의자를 들어 이승만을 쳤다. 그렇게 상해임정과 이동휘는 결별했다.

당시 부결 표를 던진 사람들은 평안도의 안창호를 위시한 이동녕·이시영·신규식·신익희 등 기호계열 요인들이었다. 그들은 이동휘의 정부개혁안이 명칭만 개혁안이지 사실상 정부 전복안이라고 판단해 부결 표를 던졌을 것이다. 만약 그들이 부결 표를 던지지 않았다면 상해임정은 그때 자유민주주의 국가 체제에서 소비에트 국가체제로 전환됐을 것이다. 그러므로 당시 자유민주주의 상해임정을 지켜낸 사람들은 바로 이승만을 위시해 부결 표를 던진 안창호·이동녕·이시영·신규식·신익희 등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한편 만반의 준비 끝에 던진 최후의 카드, 즉 정부 개혁안과 설명서가 실패로 돌아가자 이동휘와 김립은 다른 대안을 모색했다. 그것은 기왕의 국민의회 세력과 연합해 상해임정을 전복하고 새로운 국가를 설립하는 대안이었다. 물론 그 공작 역시 김립이 주도했다.

이와 관련해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在魯高麗革命軍隊沿革)]에는 “상해에서 김립 일파가 상해정부를 흔동(掀動)하다가 필경은 승리치 못하고, 노령(魯領)에서도 박애 일파의 수단이 여의치 못하므로 김립의 주책(籌策)이 다시 변경된다. 그것은 노령 일대가 자기들과 적대되는 상해정부를 임의(任意)로 장악할 수 없음이니, 이에서 국민의회와 조화책(調和策)을 강구했다. 그 증거는 김립이가 상해에서 원세훈에게 국민의회와 조화를 토의할 때에 자기가 국민의회에 대해 ‘전에 전투적 방략을 지휘함이 있었다. 그간 어떠한 정도까지 흔단(釁端)이 일어났는지도 알 수 없으나 이것이 유감이다. 자기의 서신이 치타 한인부에 가게 되면 그 전쟁은 해결된 줄 자신하노라’ 했더라”고 기록돼 있다. 요컨대 그동안 한인사회당과 국민의회 사이에 있었던 전쟁은 김립 자신의 전투적 방략 때문이었고, 김립은 장차 그 전쟁을 해결하기 위해 치타 한인부에 서신을 보내 타협하게 만들겠다는 의미다. 이런 기록 또한 한인사회당의 모든 전략과 전술을 김립이 주도했음을 보여준다.

당시 김립이 국민의회와 조화책을 강구한 배경은 1921년 2월 중순경 발표된 ‘우리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격문이었다. 이 격문은 임정 반대세력을 대표하던 국민의회와 북경파(北京派)의 연합 작품이었다. 1921년 2월 8일 자로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이 외무차관에게 통보한 ‘재상해 한인독립운동자의 내홍(內訌) 및 국민대표회의의 발단’이라는 정보보고에 의하면, 당시 상해임정 반대세력에는 경파(硬派)와 연파(軟派)가 있었다.

경파는 상해임정을 전면 전복해 노국(魯國) 과격파, 즉 소비에트러시아 볼셰비키와 결탁해 무력(武力) 급진을 주장하는 자들로 김립·원세훈·이한영·장건상·김만겸 등이 그들이었다. 그들 중에서 김립과 이한영은 한인사회당 계열이고, 원세훈·장건상·김만겸은 국민의회 계열이다.

박용만·신채호는 김립의 공작에 동조

일제 정보보고에는 ‘북경의 박용만·신채호 등이 또한 이(경파)에 동정할 뿐 아니라 오히려 주모자가 된 관(觀)이 있다’는 언급도 있다. 그 언급은 상해임정 전복에 북경의 박용만·신채호 등이 한인사회당이나 국민의회보다 더 열성이었다는 뜻이다. 박용만과 신채호는 무력투쟁을 주장하던 사람들로서 상해임정 설립 때부터 위임통치 청원을 한 이승만은 대통령 자격이 없다며 상해임정 반대운동을 했다. 그들은 1920년 가을 일제의 간도참변 때 상해임정에서 미온적으로 대응한다면서 상해임정 해체를 주장했고 더 나아가 1921년 2월 중순 국민의회 원세훈 등과 연합해 ‘우리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격문까지 공포했다.

북경의 김창숙, 박은식 그리고 국민의회의 원세훈, 안병찬 등이 서명한 그 격문에는 “간북(墾北-북간도), 간서(墾西-서간도)는 지난겨울의 참화 이래 한층 원망하는 소리를 내고 있다. (중략) 정국을 맡은 자가 어찌 그 책임을 면할 수 있다고 하겠는가? (중략) 그러므로 이에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제창한다”는 내용이 있다. 요컨대 간도참변에 미온적으로 대응한 상해임정은 정부 자격이 없으므로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해 새로 정부를 조직하자는 주장이었다.

한편 1921년 5월 5일 자의 일제 정보보고인 ‘고경(高警) 제13534호’에 의하면 이동휘·문창범·박용만 등 일파는 노령(魯領) 소재 각지 대표자 100여 명을 하바로프스크에서 소집하고 그곳에 한족공산당 본부를 두기로 합의했다고 한다. 그 합의가 이루어진 때는 1921년 2월 22일이었다. 위에 언급된 ‘한족공산당’은 한인사회당과 국민의회를 통합한 공산당으로서 그 본부를 하바로프스크에 둔다는 의미다.

통합 공산당인 한족공산당 창당은 바로 김립이 공작한 국민의회와의 조화책이었다. 일제 정보보고에 의하면 그 조화책은 한족공산당 본부를 하바로프스크에 두고, 장차 한족공산당이 소비에트러시아주의, 즉 볼셰비키 주의에 기초해 신국가를 건설한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따라서 김립의 공작이 성공한다면 신국가의 수도는 하바로프스크에 두고, 국호(國號)는 ‘고려인민공화국’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 공작에 국민의회는 물론 북경의 상해임정 반대세력까지 동조함으로써 상해임정은 더더욱 궁지에 몰렸다. 반면 한인사회당, 국민의회 그리고 북경의 상해임정 반대세력이 요구하는 국민대표회의는 더더욱 대세로 굳어졌다.

※ 신명호 - 강원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202311호 (202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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