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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정신의 미학(91)] 소론의 사상적 원류 우계(牛溪) 성혼 

마음을 다스리고 다른 학설에 귀를 열다 

파주 이웃마을 율곡 이이 만나 평생 교유하고 퇴계 이황 흠모 천거로 관직 60여 차례 받고도 벼슬 멀리하며 우계학파 형성

▎우계문화재단 성길수 상임이사가 성혼 묘소 오른쪽에 위치한 우계사당에서 내력 등을 설명하고 있다. / 사진:송의호
"의리를 깨우치는 점은 내가 우계보다 나아 그가 나의 설을 많이 좇았다. 그러나 나는 성격이 사려 깊지 못해 알고도 실천하지 못하는데 우계는 알고 나면 곧바로 일일이 실천해 자기 것으로 만든다. 이 점이 내가 그에 미치지 못하는 바이다.”

[율곡전서(栗谷全書)] 어록에 나오는 구절이다. 조선을 대표하는 유학자 율곡 이이가 성리학의 길을 함께 간 도우(道友)를 배울 수 있는 좋은 벗으로 표현하고 있다. 자신이 경세와 학문은 앞서지만 도덕과 행실은 미칠 수 없다는 고백이다. 그 벗은 바로 우계(牛溪) 성혼(成渾, 1535~98)이다.

우계와 율곡은 구봉 송익필과 더불어 경기 파주가 고향이고 나이도 비슷했다. 1554년 우계는 20세에 한 살 아래 율곡을 만나 평생 우의를 변치 않았다. [우계속집]에는 이런 글이 나온다. “숙헌(叔獻, 율곡)의 명민함은 하늘에서 얻은 것이다. 문자를 볼 때 다른 사람과 얘기하면서도 두루 열람해 대의를 파악하는 것이 비바람같이 빨랐다.” 우계와 율곡은 1681년(숙종 7)에는 학행을 인정받아 둘 다 명예의 전당인 문묘에 배향됐다.

8월 8일 파주시 파주읍 문산역에 내렸다. 택시를 타고 10분 거리 향양리 우계기념관에 도착했다. 우계문화재단 성길수 상임이사를 만났다. 70여 평 기념관은 외관이 현대식이다. 유물은 거의 없이 서실이 꾸며지고 서책과 선생의 학문적 연원 등이 정리돼 있었다. 기념관은 “기호학파가 크게 율곡학파와 우계학파로 나뉜다”고 정리했다.

기념관을 나와 200여m 떨어진 산자락의 성혼선생 묘를 찾았다. 홍살문을 지나 도로가 끝나는 왼편 위로 묘소가 보였다. 성대하지 않았다. 폭염 속에 묘역을 둘러봤다. 눈길을 끈 것은 묘비가 향한 방향이다. 비석은 정면 대신 왼편을 보고 있다. 언뜻 퇴계 이황 선생의 묘비가 떠올랐다. 똑같이 왼편을 보고 있다.

문신이자 선비였던 우계는 1587년(선조 20) 53세에 ‘자찬묘지(自撰墓誌)’를 지었다. 자신의 생애를 스스로 정리한 것이다. 그 글은 소박했던 삶처럼 사후 장례도 검소하게 해달라고 당부한다. 우계가 흠모한 퇴계가 실천했던 방법이다. 그는 자찬묘지에 이렇게 적었다. “일찍이 아들에게 말하기를 ‘내 평생 명예를 도둑질해 나라 은혜를 저버렸다. 누가 나보다 더한 자가 있겠는가. 내 죄가 크다. 나는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너는 마땅히 내 뜻에 따라 부의(賻儀)와 치제(致祭) 등 예우를 사양하라. 또 묘 앞에는 창녕성모묘(昌寧成某墓) 다섯 글자만 비석에 새겨 자손들에게 무덤이 있는 곳만 알게 하면 충분하다.’”

경쟁하는 일은 멀리하다


비석을 살폈다. 앞면은 우계의 뜻대로 관직명 없이 ‘창녕성공휘혼지묘(昌寧成公諱渾之墓)’ 8자가 새겨져 있다. 우계의 묘소 아래에는 아버지 청송 성수침이 묻혀 있다. 안내한 성길수 이사는 “가끔 역장(逆葬)이 아니냐”는 질문을 받는다고 했다. 공교롭게도 우계의 벗 율곡의 묘소도 어머니 신사임당의 묘소 위에 자리해 있다. 우계의 아들은 아버지 뜻에 따라 본래 할아버지 묘소 아래 묻으려 했으나 장차 도로가 날 곳 등 다섯 가지 걱정이 들어 위에다 자리를 잡았다고 ‘후서(後敍)’에 남겼다. 일대 묘역은 선조 임금이 하사했다고 한다.

묘소를 내려왔다. 묘소 오른쪽 널찍한 산자락에 ‘우계사당(牛溪祠堂)’이 들어서 있다. 불천위 우계의 신주를 모시고 후손들이 모여 1년에 두 차례 제사를 지내는 공간이다. 사당 왼쪽 비각 안에 우계의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신도비는 김상헌이 글을 짓고 김집이 글씨를 썼다.

율곡은 어머니 신사임당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그에 비해 우계는 아버지 청송 성수침의 삶이 일생을 지배했다. 성씨 가문은 사육신 성삼문의 죽음과 기묘사화를 겪으면서 분위기가 확 바뀐다. 성수침은 바로 조광조의 문인이었고 종제(從弟)가 사화로 비명에 가자 벼슬을 단념하고 도학의 길을 걸었다.

성수침은 아들 성혼에게 이렇게 타일렀다. “도(道)는 큰길과 같고 성현의 가르침은 해와 별처럼 밝아 알기 어렵지 않으나, 요는 힘써 행하여 그 앎을 채우는 데 있으니 말로만 하는 학문은 소용이 없다.” 이러한 아버지의 가르침은 그의 학문에 깊이 스며들었다.

우계는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했다. 그는 아버지 병환이 위독하자 다리 살을 베어 약을 만들었다. 이듬해도 그렇게 했지만 효험 없이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우계선생연보보유]에는 “그는 명예와 절개를 소중히 여겨 무너진 풍속을 드높였다. 남을 대할 때는 겸손했으며, 남과 더불어 조금이라도 경쟁이 관계되는 일이면 즉시 버리고 돌아보지 않았다”고 기록돼 있다.

7차례 관직 나가 채 1년 채우지 않아


▎충남대 윤여환 교수가 2022년 그린 우계 성혼 초상화. / 사진:우계문화재단
그는 평생 벼슬을 멀리한 지식인이기도 했다. 1551년 우계는 생원과 진사의 초시에 모두 합격했지만 복시에 응시하지 않고 신병으로 대과를 그만둔다. 이후 휴암 백인걸 문하에서 수학하며 학식과 덕행을 인정받는다. 그런데도 벼슬은 60여 차례나 그를 찾아와 7차례 관직에 나가지만 통틀어 1년을 채우지 않았다.

우계는 30세 무렵 천거로 처음 참봉에 임명된다. 이어 6품직, 대관(臺官) 등을 받았으나 질병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1581년 선조는 우계를 사정전으로 불러 대도(大道)의 요체가 무엇인지 물었다. 우계는 물러나 만언봉사를 올리자 선조는 경연(經筵) 출입을 명한다.

1583년(선조 16) 그는 병조참지와 이조참의에 잇따라 임명된다. 그때마다 사양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무렵 병조판서로 있던 율곡은 국정을 전횡한다는 이유로 삼사(三司, 사헌부·사간원·홍문관)의 탄핵을 당한다. 그러자 우계는 “이이가 충성을 다하는데 삼사에서 붕당을 지어 모함한다”는 글을 올렸다. 삼사는 다시 우계를 탄핵한다.

우계는 다시 이조참의로 부름을 받은 지 보름 만에 이조참판으로 승진한다. 봉직 한 달 뒤 그가 사직소를 올리자 동지중추부사로 옮겼다가 1584년 집으로 돌아왔다. 이것이 우계가 자찬묘지에 정리한 출사의 대강이다.

우계는 붕당이 출현하던 시기에 활동했다. 그 여파로 그도 탄핵당한다. 대표적인 것이 1589년 기축옥사 당시 북인(北人)의 영수인 최영경의 죽음과 관련된 것이었다. 우계문화재단 장상록 자문위원은 “동인(東人)들 비판과 달리 우계는 최영경 구명을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돌아본다. 기축옥사의 본질적 책임은 선조 임금에게 있었다는 것이다.

또 임진왜란 당시 선조를 호종하지 않았다는 비판도 무리가 있음을 강조한다. 선조가 임진 나루터에 이르러 “성혼의 집이 어디 있느냐?”고 호종하던 신하 이홍로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는 옆 동네를 가리키며 “저곳에 산다”고 했다. 선조는 직접 나와 배알하지 않는 성혼을 매우 섭섭하게 여겼다. 성혼이 살던 우계(쇠내)는 임진강에서 멀지 않다.

성문준은 후서에 당시 상황을 소상히 적었다. “임진년 왜적이 대거 쳐들어왔는데, 이때 당화(黨禍)가 크게 일어났다. 아버지는 시골에서 명을 기다리고 있어 감히 대궐에 나아가지 못했다.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떠날 때 일이 경황 중에 벌어진 데다 아버지 집은 산중에 있어 외부 소식을 들을 길 없어 대가가 멀리 지나간 뒤에야 비로소 이 사실을 알았다.”

이후 세자 광해와의 관계도 오해를 받는 대목이다. 성문준은 이렇게 기록했다. “마침 동궁(東宮, 세자)이 임시로 국사를 대리했는데, 글을 내려 아버지를 부르고 특명으로 말을 보내 맞이한 뒤 빈사(賓師)의 예로 대했다. 아버지는 사양했다. 겨울에 의주 행조(行朝, 피난 조정)로 달려갔는데 도중에 우참찬으로 높여 임명했다.”

우계를 둘러싼 마지막 비판은 영의정 류성룡과 함께 일본과 화의를 주장했다는 것이다. 삼사는 전라도 관찰사 이정암이 화의를 주장하는 장계를 올리자 그를 옹호하는 우계를 거세게 공격했다. 우계는 결국 파주로 낙향했지만, 화의는 명나라 군사가 힘이 소진된 당시 상황에서 불가피한 선택이란 것이다.

묘소와 사당을 내려와 오후에 북쪽으로 15㎞ 떨어진 파산서원을 찾았다. 선생과 성수침·성수종·백인걸 등 4인의 위패가 모셔진 곳이다. 차 한 대가 겨우 들어가는 제방 길을 따라 들어가자 왼쪽 산 아래로 서원이 보였다. 제방 오른쪽 눌노천은 물이 넉넉히 흘렀다. 우계천으로도 불린다. 파산서원은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당시 훼철되지 않은 전국 47곳 중 하나로, 파주시가 정비를 위해 발굴 중이었다. 김지한 발굴팀장은 “그동안 자기 등이 출토됐다”고 말했다. 파산서원은 1568년(선조 1) 율곡 등 파주지역 유생들이 처음 세웠고 1650년(효종 1) 사액서원이 됐다. ‘파산서원’ 편액은 강당이 없어 사당에 걸려 있었다.

서원 왼쪽이 선생의 고향인 우계 마을이다. 아버지가 기묘사화로 낙향한 외가 동네다. 산 아래 ‘우계서실’ 비가 풀숲에 가려 겨우 보였다. 이 마을엔 얼마 전까지 종가로 추정되는 99칸 집이 있었다고 한다.

퇴계 찾아가 물러남의 이치를 묻다


▎경기도 파주 성혼 묘소 아래에 현대식 건축으로 조성된 우계기념관. / 사진:송의호
우계는 1535년(중종 30) 본래 서울 순화방에서 태어나 1598년 이곳 우계 파산서당에서 6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선생이 아버지를 따라 이곳으로 이주한 것은 10세 시기인 1544년. 그는 그때부터 아버지로부터 배웠는데 해가 거듭될수록 학업이 크게 향상돼 15세엔 경사(經史)에 박통하고 문사(文辭)도 뛰어났다고 한다.

20세에 율곡을 만났으며 1568년 34세에 평소 존경하던 퇴계 선생을 서울 경저(京邸)로 찾아가 배알하고 물러남의 이치 등을 물었다. 그의 시 ‘퇴계 선생이 벼슬을 버리고 도산으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다’에 그런 마음이 잘 남아 있다.

“기사년 늦은 봄에/ 퇴계께서 홀연히 고향으로 가셨다네/ 서울에는 우러를 분 적어지고/ 선비들은 의지할 곳 잃었어라/ 원로가 복이 없으시니/ 천운이 쇠미한 때를 당하였네/ 산중에 부질없이 홀로 탄식하며/ 한밤중 눈물만 줄줄 흘리노라.”

우계는 선조 임금이 내린 벼슬을 수십 차례 거부하며 우계의 오두막집에서 후학을 가르치는 데 힘썼다. 눌노리에 우계서실을 세우고 체계적인 교육을 위해 학규를 마련했으며 학문 방법을 다룬 [위학지방(爲學之方)]을 편찬했다. 1572년 여름에는 율곡과 1년 동안 9차례에 걸쳐 서신을 주고받으며 ‘사단칠정(四端七情)’‘인심도심(人心道心)’‘이기(理氣)’ 등 성리학의 주요 주제를 놓고 치열한 논변을 벌였다. [우계학파 연구]를 쓴 황의동 교수는 “우계는 율곡의 인심도 심설이나 사단칠정론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고, 퇴계설에 근거해 자신의 절충적 견해를 밝혀 이기일발설(理氣一發說)을 세웠다”고 정리한다.

우계는 성리학의 이론보다 내면적인 수양을 중시했다. 또 실심(實心)·실천(實踐)을 중시하는 무실(務實) 학풍을 일으켰다. 자기 수양의 방법은 경(敬)이었다. 이러한 학풍은 사위 윤황을 비롯해 제자인 황신·이항복·김상용·이정구·조헌 등에 전해졌으며 이후 윤선거·윤증을 거쳐 박세채·정제두 등을 포함하는 우계학파를 형성한다. 주류인 율곡학파와 함께 기호학파의 한 축을 이룬 것이다. 이들은 당시 경직되고 배타적인 여타 학풍과 달리 개방적이고 유연했다. 사후 그의 학통은 외손인 윤선거와 외증손 윤증을 통해 소론(少論)의 사상적 원류가 된다.

가르침은 소론의 사상적 바탕으로


▎우계사당 왼쪽에 세워진 성혼 신도비(오른쪽)와 아버지 성수침의 묘비. / 사진:송의호
돌아보면 성혼은 이이의 벗이면서 스승이었고, 이이는 성혼의 벗이면서 스승이었다. 둘은 기호학파의 지도자로 운명을 같이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우계는 늘 율곡의 명성 아래 묻혀 있었다. 그러한 평가는 근래 들어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그의 도학적 위상은 율곡과 쌍벽을 이루는 기호학자로 재조명되고 있다.

‘우계학파’라는 자리매김도 새로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론보다 실천을 중시하고 다른 학설에 귀를 열며 마음공부를 강조한 것은 시대를 초월해 절실히 요구되는 자세일 터다.

[박스기사] 독서법에 관한 책까지 집필한 우계 성혼의 열성 - “잡서를 읽지 말고 익힌 학업을 아침저녁으로 점검하라”

우계 성혼은 파주 눌로리에 우계서실을 세우고 22개 조항에 이르는 학규인 서실의(書室儀)를 만들었다. 학규를 보면 우계가 후학양성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거기다 단순한 지식의 전달이 아닌 수양을 통한 인격 도야에 초점을 맞췄다.

제1조 서실에 든 자는 아침 일찍 일어나 직접 침구를 정리 정돈한다… 제4조 각자 책 읽는 곳으로 가서 책상에 책을 바르게 놓고 단정하고 엄숙하고 위엄있게 앉아 글을 읽고 외워야 한다. 딴마음이나 어지러운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제7조 글을 쓸 때 어지러운 초서를 써서는 안 되며 반드시 단정한 해서로 쓴다고 되어 있다. 마지막 제22조는 관례(冠禮)를 올린 자가 출입하면 미성년은 모두 일어선다고 쓰여 있다.

또 [주자대전]과 [주자어류] 중 공부 방법 부분을 뽑아 [위학지방(爲學之方)]이라는 책을 편찬해 독서법 등을 정리했다. 책 읽는 순서 등은 이렇다. 고전은 소리 내어 여러 번 읽고, 의심나는 곳이 있으면 스스로 해결하려 노력하되 그래도 해결이 어려우면 그때는 스승에게 묻는다. 잡서를 읽지 말고 익힌 학업을 아침저녁으로 점검하라. 또 과거시험을 위한 학문을 경계하고 다독보다는 많이 생각하고 궁리하는 정밀한 책 읽기를 하라. 이와 함께 글에 담긴 뜻을 착실하게 실천하라 등이다.

-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yeeho1219@naver.com

202310호 (2023.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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