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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석의 19세기 미시사 탐구(8)] 조선시대 자치단체장인 지방관 임용 절차는 어떠했을까 

임금의 낙점 이후 신원조회 통과해야… 복무 수칙 잘못 외우면 벼슬이 떨어지기도 

부임지 관속이 상경해 신임 수령 모시고 가는 것이 관례
신관사또 행렬은 부임지 백성 앞에서 엄숙하게 진행해야


▎요즘 각 지역에서 재현하는 행사는 대체로 해당 지역에 신관사또가 부임하는 과정을 중심으로 구성됐다. 2022년 10월 14일 서울 마포구 월드컵공원 평화의 광장 일대에서 열린 제15회 마포나루 새우젓축제에서 사또 행차 퍼레이드가 진행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봉건시대에는 어느 나라나 개인의 꿈을 실현할 수 있는 길이 많지 않았다. 특히 조선처럼 엄격한 신분제 사회에서는 각 신분에 따라 할 수 있는 일이 매우 제한적이었으므로, 지금처럼 자유롭게 자신의 꿈을 펼쳐나가기 어려웠다. 남자는 벼슬을 해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날리는 입신양명을 이상으로 삼았다면, 여자는 시부모를 잘 모시고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강조하는 현모양처가 이상적 인물형이었다.

조선시대 남자의 꿈은 과거에 급제해 높은 벼슬을 하는 것이지만, 양반계층 이외의 사람들은 과거시험을 보는 일 자체가 어려웠다. 그런데 양반이라고 하더라도 과거를 보는 사람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과거에 합격해 벼슬을 하는 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다. 19세기 초 과거 응시자의 숫자는 1회에 10만 명 정도였는데, 19세기 말 과거제도가 폐지될 무렵에는 20만 명을 웃돌았다. 이렇게 많은 수험생 가운데 급제하는 숫자는 한 회에 평균 20명 정도였다.

벼슬하기 위해 반드시 과거를 거쳐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나라에 공을 세운 일이 있는 사람의 후손에게 벼슬을 주기도 했고, 학문이나 덕행이 뛰어난 인물에게 관직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은 높은 벼슬에 올라갈 수 없었으므로, 조선에서 높은 벼슬을 하려면 과거에 급제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과거에 합격해도 높은 벼슬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었다.

문과 급제자는 조선시대를 통틀어 대략 1만5000명 정도인데, 현종 때까지 280년 동안 약 6600명이 급제했고, 숙종부터 고종까지 220년 동안에는 약 8400명의 급제자를 배출했다. 단순한 통계만 보더라도 후기로 가면 갈수록 과거에 급제하더라도 높은 벼슬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줄어들었다고 할 수 있다.

‘내삼천(內三千) 외팔백(外八百)’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이 말은 조선시대 서울의 벼슬자리가 3000개고, 지방의 벼슬자리가 800개라는 뜻이다. 이 숫자는 조선시대 내내 별로 변동이 없었다. 800개의 지방 벼슬 중 330개 정도가 우리가 ‘원님’이라고 부르는 지방관 자리다.

조선시대 지방관은 현재의 지방자치단체장과 비슷한데, 행정권 이외에 사법권과 군사권도 가지고 있었다. 지방관에 임명되면 부임하기까지 여러 가지 부수된 절차가 있었는데, 이 절차도 조선이라는 나라를 이해하기 위해 알아둘 필요가 있다. [춘향전]에도 신관사또의 부임과정에 관한 대목이 있어서, 이를 역사 자료와 함께 보면 재미있을 것이다.

관리 임용 절차의 시작은 서울에서

요즘 ‘신관사또 부임행차’라는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하는 지방자치단체가 있는데, 제주도의 정의현감을 위시해 울산도호부사, 남원부사, 나주목사, 고창현감 등의 부임행차가 바로 그것이다. 각 지역에서 재현하는 행사를 보면 대체로 해당 지역에 신관사또가 부임하는 과정을 중심으로 구성돼 있다. 부임행차 재현은 주로 자치단체에서 열리는 축제의 하나로 기획하는 것이므로,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하려면 이렇게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수령이 발령을 받고 부임하는 전반적 절차의 시작은 먼저 서울에서 이뤄진다.

수령(守令)은 다른 말로 원(員)이라고도 하는데, 백성이 말할 때는 존경하는 의미로 ‘원님’이라고 불렀고, ‘사또’라고도 했다. 수령이라는 용어는 중국에서 나온 것으로, 태수(太守)와 현령(縣令)에서 한 자씩 따서 만든 것이다. 조선시대에 ‘태수’라는 벼슬은 없었지만, 지방관청의 우두머리를 말할 때는 수령이라는 용어를 많이 썼다. 부윤, 목사, 부사, 군수, 현감, 현령 등 각 지방을 맡아 다스리는 관리가 바로 수령이다.

왕이 관리를 임명하는 절차의 첫 단계는 ‘삼망(三望)’이다. 어떤 벼슬자리가 비게 되면 관련 부서에서 3인의 후보자 명단을 작성해 왕에게 올리는데, 이것이 삼망이다. 임금은 세 사람의 후보자 명단을 보고, 그 가운데 한 명의 이름 위에 점을 찍어서 임명한다. 임금이 점을 찍는 것을 낙점(落點)이라고 한다. 만약 왕의 뜻에 맞는 사람이 없으면 추가로 후보자를 선정해 명단에 올리도록 했으나, 대체로 세 사람 가운데 한 명을 골랐다.

수령을 임명하는 절차도 마찬가지여서, 임금이 세 후보자 가운데 한 명을 낙점하는 것이다. 신임 수령이 확정되면 이 소식을 새로 임명된 사람과 그 고을에 알리는데, 이 일은 경주인(京主人)이 담당했다. 경주인은 각 지방에서 서울에 둔 연락사무실의 책임자로, 새 수령이 임명되면 바로 그 사람에게 연락해 필요한 절차를 밟도록 했다.

새로 수령으로 임명된 사람이 해야 할 몇 가지 절차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대궐에 가서 임금에게 감사인사를 올리는 것이었다. 이를 ‘사은숙배(謝恩肅拜)’라고 하는데, 임금을 직접 뵙고 인사를 하기도 하나, 직접 만나지 못하면 승정원에서 임금이 거처하는 곳을 향해 절을 했다. 그 다음에는 지금의 신원조회에 해당하는 ‘서경(署經)’이라는 절차가 있었다. 본가와 외가 그리고 처가에 천민과 혼인한 사실이 있는가를 조사하는 것으로, 벼슬을 받은 당사자가 작성해 제출한 서류를 해당 관청에서 확인한다. 서경을 통과하면 서울의 여러 관료들에게 인사를 해야 하는데, 이것은 사적인 것이 아니라 공적으로 정해진 절차 중 하나였다.

이런 절차가 끝나고 출발하기에 앞서 신임 수령은 임금에게 하직인사를 드리는데, 이를 ‘하직숙배’라고 한다. 앞에서 본 사은숙배와 마찬가지로, 하직숙배도 임금을 직접 만나지 못해 승정원의 관리인 승지에게 하는 경우도 많았다. 하직숙배 자리에서 중요한 일 하나는 수령칠사(守令七事)를 외우는 것이었다.

수령칠사는 수령이 힘써야 할 일곱 가지 일로, 농업과 잠업을 성하게 함, 인구를 늘림, 교육을 일으킴, 군대의 의무를 공평하게 함, 세금 등을 균등하게 함, 소송은 간결하게 처리함, 간사하고 교활한 자를 없앨 것 등이다. 이 일곱 가지를 잘못 외우거나, 내용을 제대로 말하지 못하면 그 자리에서 벼슬이 떨어지기도 했다.

부임지로 출발 전 비공식 절차 ‘신연’


▎조선시대 남자의 꿈은 과거에 급제해 높은 벼슬을 하는 것이었다. 지난 5월 5일 강원 강릉시 강릉농악전수관에서 열린 ‘나도 구도장원 이이’ 행사에 참여한 어린이들이 도포를 입은 채 과거시험을 보고 있다. 이날 행사는 과거시험에서 아홉 번 모두 장원급제한 율곡 이이를 기리기 위해 열린 행사다. / 사진:연합뉴스
서울에서 임금에게 하직인사를 올리면 모든 공식적 절차가 끝난 것이다. 이제 서울을 떠나 부임지로 가면 되는데, 여기에도 비공식적 절차가 있었다. 신임 수령으로 어떤 사람이 발령을 받았다는 사실을 경주인이 지방의 고을에 알리면 20여 명의 부임지 관속이 서울에 올라와 신임 수령을 모시고 가는 것이 관례였다. 이를 ‘신연(新延)’ 또는 ‘신영(新迎)’이라고 하는데, 관속들이 수령을 부임지까지 모시고 가는 전 과정을 ‘신연맞이’라고 한다.

그러나 신연행차는 공식적 절차가 아니므로, 이 과정에 대한 규정은 따로 없었다. 이 신연행차에 대해 참고할 수 있는 자료로는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가 있다. [목민심서]는 12편으로 돼 있는데, 그중 첫째가 관직을 받고 고을에 도착해 업무를 시작할 때까지 필요한 내용을 써놓은 ‘부임’편이다. 부임편은 다시 6개 조로 나뉘는데, 각 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벼슬을 받아 부임하는 수령은 백성을 위해 열심히 일해야 한다. 특히 비용을 줄이는 일에 힘써야 하는데, 부임행차에 드는 비용도 줄여야한다.

2. 부임할 때 의복이나 기타 장비를 새로 마련하거나, 많은 사람을 데리고 가지 말아야 한다. 필요한 서적은 많이 가지고 가는 것이 좋다.

3. 임금과 여러 관료에게 하직 인사를 할 때 주의해야 할 사항과 신연하러 온 고을의 아전과 하인을 대하는 태도 등을 잘 알아둬야 한다.

4. 서울을 떠나 임지로 갈 때 미신을 믿어 길을 돌아가면 안 된다. 그리고 지나는 길에 들르는 고을 수령들과 잡담이나 하며 놀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5. 임지에 도착하는 날짜를 점을 쳐 정하지 말고, 날씨가 좋은 날로 정하면 된다. 그리고 관청에 도착하기까지 지나는 길에서는 엄숙한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

6. 부임한 다음날부터 바로 업무를 시행한다. 고을 현황을 파악하기 위해 정확한 지도를 그려서 가지고 있어야 하며, 고을의 민폐를 파악하고, 소송을 정확하게 처리할 수 있는 지침을 만든다.

위 여섯 가지 조목 가운데 셋째에 신연에 관한 내용이 들어 있다. 다산은 수령이 신연관속을 처음 만날 때 될 수 있으면 말을 적게 할 것을 권했다. 그리고 집안 식구나 하인이 이들 신연관속과 말을 하지 않도록 할 것과 인사가 끝나면 바로 관속을 그들이 묵는 처소로 돌려보내라고 했다. 특히 신연관속의 우두머리인 이방(吏房)이 고을 예산을 빼돌리는 방법을 기록한 책자를 바치고, 그 내용을 신임 수령과 상의하는 것이 관례인데, 수령이 된 자는 이방과 이런 짓을 해서는 안 된다고 다산은 강조했다.

조선이 망할 때까지 신임사또를 맞이하는 이 신연은 계속됐다. 신연맞이는 수령이 아랫사람들에게 권위를 보이기 위한 것인데, 다산 정약용조차도 이 부조리한 관례를 없애야 한다고 말하지 못할 정도였다. 1890년 운양 김윤식이 쓴 글에서는 이 신연행차 제도를 개혁해야 할 대상으로 꼽았다. 김윤식은 고을 이방이 “아전과 노비를 데리고 수백 리 혹은 천리 먼 땅에 가서 신관을 맞이해 오는데, 일행의 복식과 기구 및 왕래하고 머무는 비용과 신관의 행차 비용 모두 공금을 유용해 조달한다.”라고 했다.

수령이 부임하는 일과 관련된 기록은 모두 양반 지식인의 기록밖에 없지만, [춘향전]을 잘 읽어보면 백성의 눈높이에서 신연행차를 바라보는 시각이 무엇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변사또의 부임 과정을 통해 이를 살펴보기로 한다.

신연관속이 늦게 상경하자 쫒아낸 변사또


▎2022년 10월 14일 제28회 동래읍성역사축제가 열린 부산 동래구 동래부동헌 앞에서 동래부사행차 길놀이가 재현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춘향전]에서 새로 남원부사로 발령받은 인물은 남촌 호박골에 사는 변악도다. 서울의 원본에는 변악도인데, 전주에서 나온 책에서는 발음이 변해 변학도가 됐다. 원본에서 신임사또의 이름을 ‘변악도’라고 한 것은 이름만으로도 그 인물이 좋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성인 ‘변’은 소변이나 대변의 ‘변’을 연상시키고, 이름의 ‘악도’는 문자 그대로 ‘악(惡)한 도(道)’라는 의미다.

변사또가 사는 곳을 서울 남촌 호박골이라고 한 것도 변사또가 그리 대단한 집안 출신이 아니라는 뜻이 들어 있다. 남촌은 남산 기슭으로, 지체 높은 양반의 거주지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는 “천만 뜻밖의 연줄 덕분에, 말망낙점(末望落點)하였다”라고 했다. 앞에서 관리를 추천할 때 삼망 제도가 있다고 했는데, 첫째로 추천된 사람을 수망(首望), 둘째를 부망(副望), 셋째를 말망(末望)이라고 한다. 말망은 세 명의 후보자 가운데 가장 뒤처진 사람인데, 말망이 낙점을 받은 것을 ‘말망낙점’이라고 한다. 변악도는 세 사람의 후보자 가운데 꼴찌였는데, 연줄 덕분에 운 좋게 남원부사가 됐다는 말이다.

변악도가 낙점됐다는 소식을 들은 남원에서는 신임사또를 모시고 올 신연관속을 서울로 보낸다. 남원의 신연관속은 13일 만에 서울에 도착해 변사또의 집에 가 인사를 드렸다. 변사또는 신연관속이 늦게 올라온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해 매우 화를 내면서 이들을 아낸다. 그리고 늦게 온 하인에게 남원까지 얼마나 걸리느냐고 물어보자 남원에서 온 하인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내일 임금님께 절을 올려 조정에 하직인사를 한 다음 각 관청을 돌면서 윗분들에게 인사를 올려야 하는데, 이렇게 되면 모레 오전에 떠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다보면 자연히 날씨가 나쁜 날도 있고, 또 공주나 전주 같이 감사가 있는 큰 고을에 들르면 관찰사에게 인사를 올려야 합니다. 그리고 혹간 경치가 좋은 곳에서는 놀이라도 하게 되고, 지나는 길에 있는 여러 고을에서 묵게 되니까, 이렇게 천천히 내려가면 한 보름 정도 걸려야 남원에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신연행차의 경비에 대해 신연하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연행차 때 사또를 모시러 올 때나 관청의 공무로 서울을 다녀올 때 출장 경비는 자기가 부담하게 돼 있어 주막에서 외상으로 먹고 다니거나 심지어는 굶고 다닐 적이 많습니다. 그래서 높은 이자를 주고 경주인에게 돈을 빌리므로 빚이 많습니다. 그리고 관청에서 빌린 돈을 제때 갚지 못해 자주 곤장을 맞습니다.”

소설 속에서 신연하인이 하는 이 말은 앞에서 양반 지식인 정약용이나 김윤식이 생각하는 신연제도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는 차원이 다른, 이 제도로 고통 받는 당사자의 솔직한 발언이다. 신연에 드는 경비는 공금으로 지불하게 돼있으나, 실제로는 [춘향전]의 신연하인 말처럼 개인이 부담한 것이 사실이다. 소설 내용은 당대의 사실적 기록이 많으므로, 당대 실제 상황을 파악하는 데는 규정으로 정해진 것보다 소설 내용이 더 정확한 경우가 있다.

신연의 규모는 대략 20명 정도다. [춘향전]에서는 남원에서 올라온 기간이 13일이고, 서울에 며칠 묵은 후 다시 15일 정도 걸려서 돌아가는 것으로 돼 있다. 약 한 달 동안 이들이 쓰는 경비는 법률의 규정에는 공금이라고 돼 있지만, 결국 남원 고을 백성에게서 착취하는 돈이다.

신관사또는 부임 사흘째부터 업무 시작

서울에 올라가 신임사또를 맞이해온 신연행차가 고을 경계에 이르면 해당 고을의 관속들이 전부 나와 신관사또를 맞이한다. 여기에는 군악대가 음악을 연주하는 군사 퍼레이드도 함께 펼쳐진다. [춘향전]에서 신관사또를 맞이하는 대목에 등장하는 인물은 육방아전, 집사, 마병, 통인, 관노, 급창, 다모, 방자, 도훈도, 기생, 좌수, 별감, 장교 등인데, 남원에서 관청과 연관이 있는 사람은 다 나온 셈이다.

신관사또 행렬은 부임지 백성들에게 수령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해 엄숙하게 행진하는데, [춘향전]에서는 그 행렬을 “깃발과 창검은 서릿발 같고, 살기가 하늘을 찌를듯하다”라고 묘사했다.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백성들에게 엄숙하게 보이기 위해 수령은 “말 위에서는 눈을 두리번거리지 말고, 몸을 비스듬히 하지 말며, 의관을 정제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춘향전]에서 변사또는 “백성에게 무섭게 하느라고 눈을 궁굴궁굴” 굴린다고 했다. 두 책을 통해 신임사또 중 변사또처럼 백성에게 위엄을 보이려고 눈을 크게 뜨고 굴리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수령의 행동은 백성들에게 결코 엄숙하게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 또한 분명하다.

신관사또는 일반적으로 부임한 지 사흘이 되면 업무를 시작하는데, [춘향전]에서 변사또는 부임 첫날부터 기생점고를 한다. 기생점고도 업무의 하나라고 할 수 있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업무인 백성에게 곡식을 빌려줬다가 받아들이는 환상이라든가 세금에 관련된 문제 등은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았다. 이를 본 이방아전은 “이 사또 알아보겠다. 사또가 아니요, 백설이 풀풀 흩날릴 제 깔고 앉는 개가죽방석의 아들놈이로다”라고 욕한다.

19세기 신임 수령 부임과 관련한 당대 실정은 지식인의 저술에서도 볼 수 있지만, 소설에서 더욱 사실적으로 나타난다고 하겠다.

※ 이윤석 - 한국 고전문학 연구자다. 연세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고, 2016년 연세대 국어국문학과에서 정년 퇴임했다. [홍길동전]과 [춘향전] 같은 고전소설을 연구해서 기존의 잘못을 바로잡았다. [홍길동전] 이본(異本) 30여 종 가운데 원본의 흔적을 찾아내 복원했을 뿐만 아니라 작품 해석 방법을 서술했다. 고전소설과 관련된 저서 30여 권과 논문 80여 편이 있다. 최근에는 [홍길동전의 작자는 허균이 아니다]와 같은 대중서적도 썼다.

202310호 (2023.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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