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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정신의 미학(90)] 접화군생(接化群生) 내세운 고운(孤雲) 최치원 

통일신라 말 혼란기에 유·불·선 사회통합을 주창하다 

육두품으로 당나라 유학 가서 과거 급제, ‘격황소서’로 문명 떨쳐
신라 귀국 뒤 예악정치 펼친 뒤 시무 10조 거부되자 자연에 은거


▎무성서원 안성렬 별유사가 강당에서 내력을 설명하고 있다. 강당의 주련 위아래로 연꽃 문양이 보인다. / 사진:송의호
"무릇 올바름을 지키고 떳떳한 것을 도(道)라 하고, 위기에서 변통하는 것을 권(權)이라 한다. 지혜로운 자는 때에 순응하며 이루고, 어리석은 자는 이치를 거슬러 패한다. 그렇다면 백 년 인생에 생사를 기약하긴 어렵겠지만 마음이 주가 되어 만사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는 것이다. (…) 너는 불 지르고 겁탈하는 것을 능사로 여기고 살상을 급선무로 삼아 큰 죄는 헤아릴 수 없이 많고 속죄하려는 마음은 조금도 없으니 천하 사람들이 모두 공개 처형하려고 생각할 뿐 아니라 지하 귀신들도 은밀히 죽이려고 이미 의논했을 것이다. 그러니 네가 비록 숨은 붙어 있다지만 넋은 이미 빠졌을 것이다.”

1000년도 더 지난 881년 당나라 전역에 나붙은 ‘격황소서(檄黃巢書)’의 일부다. ‘토황소격문’으로도 불린다. 반란을 일으켜 세를 불리던 황소가 이 글을 읽고 혼비백산해 의자에서 굴러떨어졌다는 칼보다 강한 명문이다. 신라 출신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이 당에 머물던 시절 고변의 막하에서 서기로 있으면서 지은 격문이다. 명성은 천지로 퍼져나갔다. [고운집(孤雲集)] ‘삼국사본전(三國史本傳)’에 나오는 내용이다.

육두품으로 당나라 유학 6년 만에 급제


7월 17일 전북 정읍시 칠보면 최치원 선생을 기리는 무성서원(武城書院)을 찾아갔다. 이곳은 201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국내 9개 서원 중 하나다. 무성서원 안성렬 별유사를 만났다. 그는 인사를 마치자 서원의 맨 안쪽, 사당인 태산사(泰山祠)로 안내했다. 사당으로 들어서자 벽면 한가운데 좌정한 고운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조선의 마지막 어진화사 채용신이 그렸다. 향을 피우고 예를 표했다. 고운 선생을 주벽으로 좌우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가사 ‘상춘곡’(賞春曲)을 남긴 정극인과 신잠·송세림 등 6인의 위패가 배향돼 있었다.

[삼국사기] ‘최치원열전’은 “(최치원이) 신라 사량부(沙梁部) 사람이다”라고 적고 있다. 사량부는 신라 육부 중 하나로 최씨성(崔氏姓)을 배정했다고 한다. [삼국유사] ‘기이(紀異)’편은 구체적이다. “고운의 옛집은 신라 본피부 황룡사 남쪽 미탄사 북쪽에 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의 기록으로 보면 최치원이 서라벌 즉 경주 출신인데 전북 정읍의 서원에 모셔진 것은 무슨 까닭일까? 안 별유사는 누구나 들었을 고운의 격황소서를 언급한 뒤 무성서원에 모셔진 내력을 설명했다. “선생은 지방관을 자청해 이곳에서 선정을 베풀었습니다.”

최치원은 어려서부터 정민하고 학문을 좋아했다. 그가 살았던 시기는 권력 쟁탈이 치열한 9세기 신라 하대였다.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통일을 이룬 뒤 676년 당나라 군대까지 몰아내면서 문무왕 이후 바야흐로 통일신라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혜공왕 때부터 중앙정부는 내부 분열이 시작됐으며 왕권은 점차 위기로 치달았다. 거기다 폐쇄적인 골품제로 고구려·백제 유민을 포용하지 못하면서 중앙정계는 진골 귀족의 정권 쟁탈 각축장이 됐다.

최치원은 바로 이 시기에 육두품으로 태어났다. 868년(경문왕 8), 그는 12세에 출세를 꿈꾸며 배를 타고 당나라로 유학을 떠난다. 당시 당은 유교가 크게 부흥하고 고전이 편찬됐다. 개방적인 당은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특전을 유학생에게도 부여했다. 출국에 앞서 고운의 아버지가 한마디 붙인다. “10년 동안 공부해서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 가서 노력할지어다.” 최치원이 쓴 [계원필경(桂苑筆耕)]에 전하는 내용이다.

최치원은 당나라에 도착해 스승을 찾아 열심히 공부했다. 그리하여 874년(당 희종 1) 예부시랑 배찬이 주관한 과거에서 단번에 급제했다. 외국인을 위한 과거시험인 이른바 빈공과(賓貢科)다. 그때 그의 나이 18세. [계원필경[에 그 방법을 적었다. “아버지의 엄훈을 마음 깊이 새겨 (…) 남이 백 번 해서 이루면 천 번을 했다.”

지방관으로 태인에 부임해 선정 베풀어


▎무성서원 사당인 태산사 주벽에 모셔진 고운 최치원 선생의 초상화와 위패. 어진화사 채용신이 그렸다. / 사진:송의호
최치원은 급제와 동시에 바로 선주 율수현 위(尉)에 임명되었다. 위는 도적을 잡고 죄수를 다루는 관직이다. 그는 그 뒤 성적을 평가받아 승무랑 시어사 내봉공이 됐으며 자금어대를 하사받았다. 황소가 반란을 일으킨 것은 그 무렵이었다. 고변이 최치원을 종사순관(從事巡官)으로 임명해 서기를 맡기며 ‘격황소서’가 나온 것이다. 그러나 청년 고운의 당 체류는 ‘추야우중(秋夜雨中)’이란 시에서 보듯 향수와 고독으로 점철됐다.

“가을 바람에 괴로이 읊나니(秋風唯苦吟)/ 세상에 알아주는 이 없네(世路少知音)/ 창밖에 밤 깊도록 비 내리는데(窓外三更雨)/ 등불 앞 마음은 만리를 달리네(風前萬里心)”

당 희종은 28세 최치원에게 어버이를 찾아뵈려는 뜻이 있음을 알고는 조서를 지닌 사신 자격으로 본국에 돌아가게 했다. 당에 머무른 지 17년 만이다. 신라 헌강왕은 귀국한 최치원을 시독 겸 한림학사 수 병부시랑 지서서감사에 임명한다. 헌강왕은 당에서 문명을 떨친 최치원을 큰 기대를 걸며 환대한 것이다. 최치원은 처음에는 당에서 배운 경륜을 의욕적으로 펼치려 했다. 그러나 진골 귀족 중심의 독점 신분 체제와 국정이 문란함을 깨닫고 외직을 원해 890년 지방관인 태산군 태수가 됐다. 무성서원이 들어선 지금의 정읍시 태인 일대다.

무성서원 사우(祠宇)를 나와 바로 앞 강당에 앉았다. 지방관을 지낸 고운의 선정 내용이 궁금했다. 안 별유사는 태수 고운은 고을 백성에게 시를 짓고 읊는 등 예악을 장려한 것으로 봤다. 이른바 흥학(興學)이다. “인근에 시를 주고받은 유상곡수 터가 전하고 최초의 가사인 상춘곡이 이곳에서 태동한 것도 그런 전통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풍류로 교화한 착한 정치다. 태인 사람들은 이를 [논어]에 나오는 ‘현가지성(絃歌之聲)’ 유풍으로 받아들였다.

공자의 제자 자유(子遊)가 무성 현감이 됐다. 공자가 이곳을 지나다가 거문고를 타며 노래하는 소리를 들었다. 공자가 미소를 지으며 “닭 잡는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쓰는가?” 했다. 이에 자유가 “전에 선생님이 군자는 도를 배우면 남을 사랑하고, 소인은 도를 배우면 부리기 쉽다고 하지 않았습니까”라고 반문했다. 그러자 공자는 “자유의 말이 맞다. 방금 한 말은 농담이었다”고 인정했다. ‘무성’이라는 서원 이름과 문루 이름 ‘현가루(絃歌樓)’는 여기서 유래한다.

고운보다 500여 년 뒤 이곳에서 고현향약 제정 등 유교적 이상향을 건설했던 정극인은 가사 [상춘곡] 첫머리에 선생의 풍류를 떠올린다. “홍진에 묻힌 분네 이 내 생애 어떠한가/ 옛사람 풍류를 미칠까 못 미칠까” 여기 나오는 ‘옛사람’이 바로 최치원일 것이라는 해석이다.

고운에 이어 가사문학을 열었던 정극인은 존현(尊賢)에도 앞장섰다. 정극인은 자신이 세운 서당인 향학당(鄕學堂) 자리로 고운을 모신 생사당(生祠堂)을 옮기고 태산사(泰山祠)로 명명했다. 양사(養士)와 존현을 시작한 것이다. 안 별유사는 그래서 무성서원의 전신이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보다 60년 앞서 이곳에 들어섰다고 주장한다. 무성서원은 이렇게 신라 말 최치원의 생사당에 기원을 두고 있다. 사당은 본래 돌아가신 뒤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는 곳이지만, 생사당은 살아 있을 때 존숭을 시작하는 공간이다. 태인 유림은 최치원이 이직하자 공의로 성황산 서쪽 능선인 월연대에 생사당을 세웠다.

무성서원 강당 앞으로 멀찍이 누각인 현가루가 있다. 현가루의 2층 누대에 올랐다. 서원과 작은 길 사이로 붙어 있는 50여 호 원촌마을 집들이 보였다. 여느 서원과 달리 무성서원은 마을에 들어앉은 구조다. 안 별유사가 무성서원의 특징을 강조했다. “여느 서원과 달리 지방관을 모시고, 마을 안에서 향약에 따라 주민들과 희로애락을 같이 합니다. 또 단정하고 검소한 공간이지요.” 그가 다시 한 가지 자랑거리를 덧붙였다. “전국에 서원이 1000여 곳 있지만 나라가 어려울 때 창의한 서원은 여기가 유일합니다. 호국서원입니다.”

강수재 앞에 호국의 내력을 적은 ‘병오창의기적비(丙午倡義紀蹟碑)’가 서 있다. 1905년 11월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삼으려는 을사늑약이 체결됐다. 이에 반발해 1906년 6월 무성서원 앞마당에서는 최익현과 임병찬 등 호남 유생 80여 명이 무장 의병을 발의했다.

홍살문을 지나 무성서원을 나왔다. 고운이 태수 시절 유상곡수(流觴曲水)연을 베풀었다는 자리를 찾아갔다.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는 풍류의 흔적이 궁금했다. 서원에서 자동차로 5분 거리 칠보면 소재지 주변이다. 그러나 유상대(流觴臺)는 간곳없고 빈터에 17세기 조지겸이 쓴 빗돌이 있었다. “울퉁불퉁한 바윗돌이 있고 그 바위 아래로 강물이 휘돌아 흐르는데, 문창(최치원)이 매번 여기서 술잔을 띄우고 노래했다고 전한다.” 옆으로 그 풍류를 회고하는 시판이 걸린 감운정(感雲亭)이 있다. 안 별유사가 덧붙였다. “여기서 동진강과 저쪽 고운천이 만났어요. 그 자리에 유상곡수 바위가 있었다는데 철종 시기 대홍수로 지금은 땅속에 묻혔습니다.”

시무 10조 개혁안 거부 당하자 자연 은거


▎무성서원 문루인 현가루. [논어]의 현가지성(絃歌之聲) 고사에서 이름을 땄다. / 사진:송의호
고운의 자취가 남은 곳은 하나 더 있었다. 태인면 피향정(披香亭)이다. 무성서원에서 북서쪽으로 8㎞쯤 떨어져 있다. 정자 앞 널찍한 하연지엔 연꽃이 막 봉우리를 틔우고 있다. 고을 태수 최치원은 이곳 연못가를 거닐며 풍월을 읊었다고 전한다. 점필재 김종직은 이곳에서 고운을 향한 그리움을 시로 남겼다. 정자 전면 현판은 ‘호남제일정(湖南第一亭)’이다. 정자 천장엔 학과 꽃 등 도교풍 단청이 화려했다. 모두 고운의 지방관 시절 흔적들이다. 이후엔 천령군(함양) 태수 등을 지내고 사신으로 당에 가기도 했다. 894년(진성여왕 8) 최치원은 존왕 이념을 담은 사회개혁안 시무(時務) 10여 조를 올린다. 진성여왕은 이를 받아들이고 육두품 신분으로 최고 관등인 아찬(阿飡)에 임명했다. 그러나 진골 귀족은 그의 개혁안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나라는 혼란을 거듭했다.

고운은 더는 벼슬할 뜻이 없어졌다. 그는 그때부터 산림이나 강·바다 주변을 소요하며 대(臺)를 짓고 송죽을 심었다. 또 서사(書史)에 묻혀 풍월을 노래했다. 경주 남산과 지리산 쌍계사, 마산 합포, 부산 해운대 등지다. 마지막에는 가족을 데리고 가야산 해인사에서 마음 편히 노닐다가 생을 마쳤다. [삼국사기]에는 “형인 승려 현준, 정현사와 더불어 도우를 맺었다”고 돼 있다. 연구자들은 고운이 말년에는 불교에 귀의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의 최후는 신비함으로 남아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최치원이 어느 날 아침 일찍 일어나 집을 나갔는데 갓과 신을 수풀 사이에 남겨두고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했다고 한다. 이로 인해 그가 신선이 되었다고 전하기도 한다. 훗날 고려 현종은 고운을 문묘에 배향하고 문창후(文昌侯)란 시호를 내렸다.

사회통합 향한 ‘접화군생’ 새겨볼 만


▎최치원이 풍월을 읊었다는 피향정. 도교풍 그림이 천장에 그려져 있다. / 사진:송의호
한국 서원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한 주역인 이배용 박사는 “일찍이 최치원은 당시 사회적 현실과 자신의 정치적 이상 사이 심각한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인간 본원에 바탕을 둔 사상과 진리의 보편성을 추구하는 해결책을 제시했다”고 정리한다. 즉 유교·불교·도교 사상의 융합이다. 공자의 충효를 바탕으로 한 윤리 실천, 노자의 무위자연 인생관, 석가의 권선징악 교화주의가 그것이다.

신라 화랑도의 풍류에 담긴 접화군생(接化群生) 사회통합은 방법론이다. 접화군생의 접은 관계, 화는 순환, 군은 다양성, 생은 생명으로 뭇 생명에 다가가 사귀어 감화시키고 변화시키고 교화하자는 공동체 정신이다. 선비 공간인 무성서원과 피향정의 주련, 단청에 연꽃이 그려진 것도 이런 유·불·선 융합과 무관치 않다.

최치원은 신라 말기 난마처럼 얽히고 갈린 사회를 극복할 새로운 힘을 접화군생의 조화 속에서 찾았다. 그의 주장은 사회통합이 절실한 오늘날에도 다시 새겨볼 만한 정신일 것이다.

[박스기사] 실학으로 계승된 최치원의 '계원필경' - 조선 성리학에서 혹평 받다가 북학사상 선구로 재평가

[계원필경(桂苑筆耕)]은 최치원이 20대에 저술한 한시 등을 모은 문집이다. 대부분 그가 당나라 고변의 막하에서 서기로 있을 때 쓴 것이다. 명문 ‘격황소서’도 여기에 들어 있다. 우리나라에 남은 가장 오랜 개인 문집이다.

글이 쓰인 시기는 당나라 유학 시절이지만, [계원필경] 자체는 신라에 귀국한 최치원이 헌강왕에게 바치기 위해 훗날 다시 선별했다. 여기서 ‘계원’은 문장가가 모인 곳, ‘필경’은 군막에서 글을 쓰며 먹고 살았다는 뜻을 담았다. [계원필경]은 전체 20권이며 1~16권은 고변의 서기로서 쓴 내용이고, 17~20권은 신변이나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 글이다.

[계원필경]은 오랜 세월 이름 있는 몇몇 집에 어렵게 전해지다가 조선에 와서 최치원이 성리학 도통과 거리가 있다는 냉랭한 평가를 받는다. 그러다가 [북학의]를 쓴 박제가에 이르러 최치원은 마침내 북학사상 선구로 재평가 받는다. 그 무렵 [임원경제지]를 쓴 실학자 서유구는 1834년(순조 34) 전라관찰사 시절 무성서원에 들렀다가 최치원을 향한 태산 사람들의 존숭에 감동을 받는다. 때마침 좌의정 홍석주가 자신의 집에 보관해오던 [계원필경]을 서유구에게 보여주며 그 문집을 다시 출판해 세상에 널리 퍼뜨리기를 희망했다. 서유구는 그 책을 서둘러 교정하고 사재와 녹봉을 털어 조판한 뒤 100부를 인쇄해 무성서원과 가야산 해인사에 나눠 보관했다. [계원필경]이 드디어 세상으로 나온 것이다.

-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yeeho1219@naver.com

202309호 (2023.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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