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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호의 상해임정 27년사(18)] 모스크바 차관을 횡령해 상해임정 장악하려 한 이동휘 

귀국한 이승만, 이동휘와 한판 승부 준비  

김립, 공산당마저 무시하는 궤변으로 횡령의 정당성 주장
상해임정 분열 틈타 외교 영사까지 독단으로 결정하기도


▎1920년 12월 28일 상하이에서 열린 이승만 초대 임정 대통령 환영회 모습. 대통령 이승만(가운데)의 옆에 카이저 수염을 기른 국무총리 이동휘(왼쪽)와 내무부장 안창호(오른쪽)가 서 있다. / 사진:독립기념관
대통령 이승만이 상해에 도착한 1920년 12월 5일 총리 이동휘는 모스크바 차관을 무기로 상해임정을 장악하고자 노력 중이었다. 그즈음 김립이 모스크바 차관 중 일부를 소지하고 상해에 도착했기 때문이었다. 김립은 모스크바 차관 중 8만원을 가지고 1920년 12월 초 상해에 돌아왔는데 그 경과는 다음과 같았다.

김립과 계봉우는 1920년 9월 하순 상해를 출발해 10월 초순 베르흐네우딘스크에 도착했다. 한국공산당을 코민테른에 보고, 승인받는 임무와 함께 이르쿠츠크 한인공산당과의 통합을 협의하라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한편 김립과 계봉우가 상해를 출발하기 전인 1920년 초순에 한형권과 박진순은 모스크바에서 차관 40만원을 수령해 이르쿠츠크로 떠났다. 한형권과 박진순은 옴스크를 거쳐 이르쿠츠크에 들렀는데 그곳에서 박애를 만나 함께 떠났다. 그들이 베르흐네우딘스크에 도착한 때는 1920년 10월 24일이었다. 그곳에서 한형권·박진순·박애는 김립과 계봉우를 만났다.

한형권의 [임시정부의 대아외교(對俄外交)와 국민대표회의의 전말]에 의하면, 베르흐네우딘스크에서 한형권이 김립을 만났을 때 김립은 “임시정부에는 내홍(內訌)이 생기어 중요 인물 4~5명이 탈퇴해서 현상유지도 불능(不能)이며, 그대가 모스크바로 떠나온 후 금일까지 아무런 연락도 취할 수 없으므로 너무도 궁금해 모스크바로 갈 예정으로 이곳에 도착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김립의 이 말은 거짓말이었다. 임시정부를 탈퇴했다는 중요 인물 4~5명은 이동휘·안창호 등을 지칭하는데 당시 그런 일은 없었다. 게다가 김립의 공식적인 임무는 한국공산당을 코민테른에 보고해 승인받고 이르쿠츠크 한인공산당과의 통합을 협의하는 것이었지, 모스크바 차관의 귀추를 확인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마도 김립이 한형권을 만났을 때 단 둘뿐이었던 듯하다. 만약 계봉우가 함께 있었다면 이런 거짓말을 하기가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분명 김립이 은밀하게 한형권을 만났을 것이다. 한형권을 모스크바에 밀파해 차관을 확보하게 한 주모자는 김립과 이동휘였다. 그러므로 김립은 한형권을 찾아 차관 문제가 어떻게 됐는지 물었을 것이다. 따라서 “너무도 궁금해 모스크바로 갈 예정”이라는 말은 한국공산당의 임무가 아니라 김립과 이동휘만의 밀약이었을 것이다.

거짓말을 지어내 모스크바 차관을 횡령한 김립

[임시정부의 대아외교(對俄外交)와 국민대표회의의 전말]에 의하면, 김립의 말에 한형권은 낙심천만했다고 한다. 모스크바 차관은 임시정부를 위한 것인데, 그 임시정부 주역들이 탈퇴해 현상유지도 불가능하다면 아직 수령하지 못한 모스크바 차관 160만원이 수포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한형권은 “내가 모스크바 당국과 교섭한 것은 성공이다. 계속적으로 무장(武裝), 금전 등 원조를 받을 터인데 이제 우리 정부 자체의 분열이 이처럼 됐으니 이를 장차 어찌할까? 지금이라도 무슨 방법으로든지 임시정부의 원상을 회복하는 것이 최선 급무이니 군(君)은 나의 정부에 대한 보고서와 제1기 차관의 일부인 40만원을 가지고 곧 길을 돌리어 상해로 가서 원상회복의 공작에 주력해 우리의 뜻대로 그것을 완성하면서 내가 다시 모스크바에 가서 160만원 잔액을 휴대하고 상해로 돌아갈 시기를 고대해달라”고 했다.

이 같은 한형권의 대답을 생각해보면 김립이 왜 거짓말을 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김립은 한형권이 수령해온 모스크바 차관 40만원을 중간에서 횡령하려 거짓말했던 것이다. 다만 그 거짓말은 김립 혼자 지어낸 것이 아니라 이동휘와 밀약한 결과로 이해된다. 한형권이 상해로 온다면 모스크바 차관이 임시정부로 들어갈 것이기에 김립과 이동휘는 중간에서 횡령하자고 밀약했을 것이다. 그들은 한형권을 파견한 주체는 자신들이기에 자신들이 모스크바 차관을 갖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듯하다.

베르흐네우딘스크에서 김립은 다른 공작도 했다. ‘동아총국(東亞總局)’ 조직이 그것이었다. 동아총국은 말 그대로 ‘동양무산혁명(東洋無産革命)’, 즉 ‘동북아 공산혁명’을 주도하려는 조직이었다.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 쪽에서 쓴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在露高麗革命軍隊沿革)]에 의하면 김립·계봉우·한형권·박진순·박애는 베르흐네우딘스크에서 만나 동아총국을 조직했다. 동아총국을 조직하면서 4가지 사항도 결정했다.

첫째, 동아총국의 위치는 극동공화국의 수도인 치타에 두고 중앙위원은 박애·계봉우·권화순·장도정으로 한다. 둘째, 상해 한국공산당과 이르쿠츠크 한인공산당의 통합 논의는 중단하고 상해 한국공산당을 중앙으로 한다. 셋째, 코민테른 보고는 중단한다. 넷째, 상해임정에서 극동공화국에 파견하는 외교 영사는 박애가 겸임한다.

위의 동아총국 조직 그리고 4가지 사항 역시 김립의 주도로 결정됐다. 김립은 박진순의 ‘코민테른 재외전권위원’이라는 지위와 권한을 근거로 동아총국 조직과 4가지 사항을 결정했다. 이 또한 김립 개인의 독단이라기보다는 이동휘와의 밀약에 따른 것으로 이해된다. 김립과 이동휘가 한형권으로부터 모스크바 차관을 자기들의 돈이라 생각하고 중간에서 접수하고자 밀약했다면, 그 후 대책도 밀약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김립에 뒤이어 모스크바 차관을 관리한 상해파 고려공산당 재무담당 김철수의 회고록인 [지운(遲耘) 김철수]에는 모스크바 차관 200만원에 대해 “원래 주기를 임시정부 준 돈 아니여. 아 저 한인사회당 간부고, 거기서 돈 가지고 쓸텐게 옳게 쓰것다 하고 준 것이지. 한형권이도 한인사회당 간부네. 그것 첫째 박진순이 덕택이여”라는 언급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하지만 이런 언급은 모스크바 차관을 접수한 김립과 이동휘의 거짓 논리에 지나지 않는다. 모스크바 차관은 자신들이 노력해서 얻은 것이므로 자신들이 받아서 쓰는 것이 당연하다는 거짓 논리이기 때문이다.

이런 거짓 논리는 국가는 물론 공산당도 무시하는 궤변에 지나지 않는다. 국가의 일원으로 또는 공산당의 일원으로 어떤 임무를 성공시킨 자가 본인 덕에 성공했으니 그 결실을 자신이 갖겠다고 한다면 그것이 바로 궤변인 것이다. 그런 약점을 알기에 김립은 박진순의 ‘코민테른 재외전권위원’이라는 지위와 권한을 이용했다. 모스크바 차관은 코민테른 공작금이기에 코민테른 재외전권위원 박진순이 접수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논리지만, 이 또한 궤변에 지나지 않는다. 모스크바 차관은 코민테른 공작금이 아니라 소비에트러시아 차관이기 때문이다.

박진순의 권위 앞세워 동아총국을 조직


▎한인사회당을 한국공산당으로 변경한 후, 총리 이동휘(앞줄 왼쪽에서 둘째)와 비서장 김립(앞줄 왼쪽에서 넷째)은 적극적으로 공산당 당원들을 포섭했다. 예컨대 비서장 김립은 만주의 저명한 독립운동가 계봉우(뒷줄 가운데)를 포섭했다. / 사진:성재이동휘선생기념사업
모스크바 차관이 코민테른 공작금이 아니라 소비에트러시아 차관이라는 사실은 김립 자신부터 잘 알고 있었다. 김립은 웨이하이(威海)에 있던 이동휘에게 1920년 7월 19일 편지를 썼는데, 그 편지에서 “만일 차관만 되면 이승만, 안창호 상관할 것 없이 하여볼 수도 유(有) 하오다. 여하간 차관 일절(一節)은 즉금(卽今) 운동 중이오다”라고 했다. 위에서 보듯 김립과 이동휘가 모스크바 차관을 받으려던 목적은 무엇보다도 이승만·안창호를 축출하고 상해임정을 장악하려는 데 있었다. 그러려면 모스크바 차관이 이승만·안창호에게 들어가면 절대 안 됐다. 그래서 모스크바 차관을 중간에서 횡령하면서 그 차관은 차관이 아니라 코민테른 공작금이라는 거짓 논리를 선전했던 것이다.

한형권 역시 모스크바 차관은 상해임정을 원조하는 차관이라고 했다. 그 외에 같은 한국공산당에 있던 여운형 역시 차관이라고 했다. 1929년 8월 6일자 [피의자 신문조서]에서 여운형은 “그 돈은 러시아 정부가 임시정부를 원조하기 위한 돈이었는데, 이것을 김립 등이 속이고 횡령했다”고 증언했다. 심지어 여운형은 1929년 8월 1일 자 [피의자 신문조서]에서 “국제공산당은 이전에 이동휘 일파가 40만원을 사취(詐取)했던 것에 대해 체포할 수 있었지만, 노농정부(勞農政府-소비에트러시아)는 가정부(假政府-상해임시정부)의 유력자를 체포하는 데 있어 조선민중의 감정을 해칠 것을 두려워해 이것을 그만두고 이동휘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추방했다”고 증언했다. 모스크바 차관을 코민테른 공작금이라 거짓 선동하는 이동휘를 코민테른에서 체포하려 했지만 소비에트러시아 정부가 막았다는 증언인데, 이는 코민테른이나 소비에트러시아 정부도 차관으로 생각했다는 의미와 같다. 당연히 상해임정도 차관이라 생각했다. 요컨대 모스크바 차관을 코민테른 공작금이라 주장한 측은 모스크바 차관을 횡령한 김립과 이동휘 일파뿐이었던 것이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김립의 주장이 얼마나 궤변인지 금방 이해할 수 있다. 예컨대 동아총국과 4가지 사항의 경우, 김립은 박진순의 ‘코민테른 재외전권위원’이라는 지위와 권한을 근거로 결정했다. 하지만 그런 논리 역시 궤변에 지나지 않는다.

코민테른은 1920년 5월 초 빌렌스키를 임시의장으로 하는 ‘동아시아 비서국’을 설치하고, 그 공작원 보이친스키와 김만겸 등을 상해에 파견하기까지 했다. 이들 공작원과 함께 김립·이동휘 등은 상해에 ‘동아시아 비서국’을 설치하고, 그 산하에 한국공산당을 설치하기로 합의한 후 한국공산당을 확장하고 있었다. 한국공산당 설치와 확장 역시 김립이 주도했다.

김립의 모스크바 차관 횡령을 증언한 여운형


▎사진은 1920년 7월 개최된 코민테른 제2차 대회에 참석한 박진순(오른쪽에서 셋째)의 모습. 박진순의 왼쪽에 앉은 레닌이 눈에 띈다. 박진순은 1920년 3월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 공작금 400만 루블을 수령, 이를 이한영과 박애에게 전달하고 모스크바에 남았다. / 사진:레닌 사진집
따라서 코민테른의 ‘동아시아 비서국’보다 늦게 ‘코민테른 재외전권위원’에 임명된 박진순이 ‘동아총국’을 조직한다면 당연히 ‘동아시아 비서국’과 협의해야 했다. 만약 협의 없이 일반적으로 ‘동아총국’을 조직하면, ‘동아시아 비서국’과 충돌하며 갈등을 벌일 것이 명약관화했다. 그런데도 김립은 ‘동아시아 비서국’과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동아총국’을 조직했다. 그것도 ‘동아시아 비서국’의 존재를 그 누구보다 잘 알면서 그랬다. 이는 공산당 ‘철의 규율’로 본다면, 소영웅주의 또는 분파주의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박진순이 비록 ‘코민테른 재외전권위원’이라 할지라도, 그의 독단으로 극동공화국에 파견할 상해임정 외교 영사를 결정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상해임정은 엄연히 ‘민주공화국’을 천명한 민주국가인데, 어떻게 코민테른이 감히 상해임정의 외교 영사를 결정한단 말인가?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에 의하면 김립은 심지어 박애의 영사 위임장까지 위조했다고 한다. 그런 처사는 상해임정을 정부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에게서나 가능할 수 있는 일이었다.

또한 상해 한국공산당과 이르쿠츠크 한인공산당의 통합 역시 코민테른이 독단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아무리 코민테른이라도 특정 공산당의 통합은 해당 조직 간의 논의와 합의를 통해야 가능한 것이 코민테른의 관행이자 규칙이기 때문이었다. 나아가 한국공산당 중앙위원회의에서 결정한 사항은 비록 코민테른 전권위원이라도 독단적으로 정지할 수 없다. 코민테른은 그렇게 독단적·절대적 조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김립은 코민테른을 내세워 동아총국 조직과 4가지 사항을 결정했다. 또한 모스크바 차관 40만원도 접수했다. 이는 김립이 코민테른을 과신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이동휘와 사전 밀약이 있었기 때문으로 이해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에서는 김립이 모스크바 차관을 접수하고 동아총국을 조직한 이유에 대해 “이로부터는 이르쿠츠크 한인공산당은 아무쪼록 지장을 주어야 할 것이며, 상해정부는 장악할 수가 있다. 금전이면 이에 더한 세력이 없음을 자신하며”라고 나온다. 즉, 동아총국과 모스크바 차관을 이용해 이르쿠츠크 한인공산당을 제압하고 동시에 상해임정을 장악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르쿠츠크 한인공산당을 제압한다는 것은 한인공산주의 운동을 장악한다는 의미이다. 또한 상해임정을 장악한다는 것은 이승만과 안창호를 제압한다는 의미이다. 그런 일을 김립 혼자 결정할 수 없다는 사실은 명약관화하다. 따라서 김립이 상해를 출발하기 전, 모스크바 차관 접수와 동아총국 조직을 이동휘와 밀약했다는 사실 또한 명약관화하다고 이해할 수 있다.

모스크바 차관 횡령에 동참한 이동휘


▎여운형은 이동휘와 김립 등이 모스크바 차관을 횡령했다고 증언했다. 사진은 1947년 당시 여운형 선생의 모습. / 사진: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김철수의 회고록인 [지운(遲耘) 김철수]에 의하면, 김립은 모스크바 차관을 운반하다가 중간에서 “사람을 보내라. 여그 시방 백당(白黨-러시아 백군 세력)들이 있은게. 서로 만나서 주고받고 해야 되겠다”는 소식을 보냈다고 한다. 그 소식이란 김립이 이동휘에게 보낸 것이었다. 이동휘가 그 소식을 접수한 시점은 1920년 11월 중순경이었다. 따라서 이동휘는 모스크바 차관 문제는 물론 동아총국 문제도 1920년 11월 중순경 인식했다고 이해된다. 그때부터 이동휘는 이르쿠츠크 한인공산당을 제압하고 상해임정을 장악하고자 백방으로 노력했다.

그런데 김립이 베르흐네우딘스크에서 결정한 일들은 심각한 부작용을 유발했다. 우선 치타에 설치하려던 동아총국은 러시아공산당 원동국의 거부로 무산됐다. 원동국은 ‘권한 이상의 범위를 포함했다’는 이유로 동아총국 설치를 거절했다. 동북아 공산혁명을 주도할 동아총국은 당연히 코민테른 소관이기 때문이었다.

김립이 동아총국 설치를 코민테른에 보고하지 않고 원동공화국의 러시아공산당 원동국에 의뢰한 이유는 코민테른에 보고해봐야 승인되지 않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코민테른 입장에서는 이미 ‘동아 비서부’를 승인한 상황이라 거듭해서 ‘동아총국’을 승인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치타에 동아총국 설치가 무산되자, 김립은 상해에 동아총국을 설치하는 것으로 변경했다. 대신 치타에는 ‘한인부(韓人部)’를 설치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한인부는 원동부 산하에 배치됐다. 김립은 이 한인부를 이용해 이르쿠츠크 한인공산당을 제압하고자 했다. 이 모든 사업에 필요한 자금은 모스크바 차관에서 충당됐다.

모스크바 차관의 사용내역은 1921년 10월 16일 자로 이동휘가 소비에트 러시아 외무인민위원회에 제출한 [대한민국 상해임시정부 비판과 소비에트 측이 제공한 혁명지원금의 사용내역 보고] 그리고 1923년 6월 10일 자로 한형권이 소비에트 러시아 외무인민위원회에 제출한 [1920년 11월 10일 본인이 박진순으로부터 받은 금액에 대한 지출보고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들 보고서에 의하면, 40만원 중에서 박진순에게는 22만원, 김립에게는 12만원, 한형권에게는 6만원이 지급됐다. 그렇게 지급된 이유는 각자 임무가 달랐기 때문이다. 예컨대 한형권은 모스크바로 되돌아가 나머지 160만원을 수령해 오는 것이 임무였다. 그 임무를 위해 6만원이 지급됐던 것이다.

그런데 [노병(老兵) 김규면 비망록]에 의하면, 한형권은 치타에 와서 김규면과 이용에게 4만원을 지급하고 모스크바로 되돌아갔다고 한다. 김규면은 한인사회당 계열의 빨치산 총사령관이었다. 그에게 지급된 4만원은 소비에트 러시아 정부와 합의한 4개 조항 중 세 번째 조항, 즉 “우리는 독립군을 크게 양성해야 할 터인데 지휘사관이 부족하니 서시베리아 지정 장소에 사관학교를 설치할 것”과 관련된 비용이었다.

모스크바 차관을 독단적으로 사용한 김립


▎1921년 워싱턴군축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구미위원부 청사를 나서는 한국대표단의 이승만(왼쪽) 대통령과 서재필(오른쪽) 박사.
박진순과 김립은 상해로 가서 동아총국을 조직하는 것이 임무였다. 그중 박진순은 치타에 들러 3만원을 박애와 계봉우에게 지급해 한인부 활동 자금으로 사용하게 했다. 박진순은 나머지 19만원을 가지고 1921년 3월 상해로 왔다.

한편 김립은 12만원을 몽고까지 운반했고, 운송위험을 분산하기 위해 몽고지역의 연락책 이태준에게 4만원을 주어 운송하게 하고, 나머지 8만원을 직접 운송했다. 김립이 상해에 도착한 시점은 1920년 12월 초였다. [지운(遲耘) 김철수]에 의하면, 김립은 모스크바 차관을 혼자 독단적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당초 한형권을 보낼 때, 상해임정의 윤현진·이규홍·김철 등이 협조했는데, 그들과도 상의하지 않고 사용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같은 한국공산당원 중에서도 한인사회당 계열에만 알리고 여운형 같은 비한인사회당 계열에는 알리지 않았다. 이유는 이동휘의 한인사회당 중심으로 상해임정을 장악하고 나아가 한인공산주의 운동 주도권도 장악하기 위해서였다. 바로 그 시점에 이승만이 1920년 12월 5일 상해에 도착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과 이동휘 사이에 상해임정의 국가노선과 주도권을 둘러싼 한판 승부는 피할 수 없었다.

※ 신명호 - 강원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202309호 (2023.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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