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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경률의 노래하는 한국사(18)] 한국인의 즉흥곡 플랫폼 ‘아리랑’ 

한(恨) 많은 역사 속 든든한 길동무 되다 

나운규 영화 [아리랑]에 주제가로 쓰이며 ‘민족의 노래’ 자리매김
경복궁 중건 계기로 민요 아리랑 확산… 독립운동 지탱한 원동력


▎ 사진:연합뉴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 (1절)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나네 / (2절) 청천 하날엔 별도 많고 / 우리네 살림살이 말도 많다 / (3절) 풍년이 온다네 풍년이 온다네 / 이 강산 삼천리에 풍년이 온다네 / (4절) 산천에 초목은 젊어나 가고 / 인간에 청춘은 늙어만 가네”

영화 [아리랑] 전단지에 실린 주제가 ‘아리랑’의 가사다. [아리랑]은 1926년 10월 1일 서울 종로에 자리한 극장 단성사에서 개봉했다. 나운규가 시나리오를 쓰고 감독과 주연까지 맡은 무성영화였다. 주인공이 일본 경찰의 포승에 묶여 고개를 넘어가는 마지막 장면…. 변사의 북받치는 사설이 고조되는 가운데 만원을 이룬 관객들은 주제가 ‘아리랑’을 함께 부르며 목 놓아 울었다. 억눌렀던 민족의 울분과 독립에 대한 열망이 폭발한 것이다.

영화 주제가가 몰고 온 ‘아리랑 신드롬’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은 노래 ‘아리랑’을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사용해 항일 민족의식을 불러일으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해 4월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이 세상을 떠나고 장례에 맞춰 6·10 만세운동이 전국을 들썩인 직후였다. 채 가시지 않은 한국인의 울분과 열망이 출구를 찾고 있는데 [아리랑]이 개봉한 것이다. 주인공 영진은 1919년 3·1운동 때 잔인한 고문을 당하고 광인(狂人)이 된 인물이다. 일제의 광기에 정신을 놓았던 그는 여동생을 범하려는 왜경(倭警) 앞잡이를 낫으로 찔러 죽이고서야 제정신을 차린다. 영진의 삶은 민족의 운명과 다르지 않았다.

“여러분, 울지 마십시오. 이 몸이 삼천리강산에 태어났기에 미쳤고 사람까지 죽였습니다. 저는 떠나지만 죽음의 길이 아니라 갱생의 길을 가는 것이니, 부디 눈물을 거두십시오.”

오열하는 마을 사람들을 이렇게 달래고 영진은 ‘아리랑’을 부르면서 고개를 넘는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항일 민족의식의 영화적 표현이다. [아리랑]이 개봉한 1926년 10월 1일은 마침 조선총독부 신청사 낙성식이 열린 날이었다. 일본 경찰은 영화 주제가인 ‘아리랑’이 공공의 안녕을 해칠 우려가 있다며 가사가 실린 전단지 1만 장을 압수했다. 그리고 일제의 토지 수탈을 겨냥한 것으로 보이는 5절은 삭제하도록 했다.

“문전에 옥답은 다 어디로 가고 / 동냥의 쪽박이 웬 말인가”

‘아리랑’은 명실상부한 주제가였다.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쓰이며 항일 민족의식을 불러일으켰다. 현실의 아리랑 고개를 넘어가는 관객들은 떼창으로 민족적 울분과 열망을 터뜨렸다. 함께 부르는 노래는 힘이 세다. 일본 경찰이 서둘러 전단지를 압수하고 5절 가사를 삭제한 이유다. 그러나 노래가 일제의 탄압을 받자 영화는 오히려 거국적인 호응을 얻어 크게 흥행했다. 주제가 ‘아리랑’은 이제 스크린을 찢고 나와 한국인의 애창곡으로 떠올랐다.

‘아리랑’은 때마침 보급된 유성기와 음반, 라디오 덕분에 최고의 유행가로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다. 뜨거운 인기는 식을 줄 모르고 여러 해 이어졌다. 서울이든 지방이든, 어른이나 어린이나 모두 즐겨 불렀다고 한다. 이 노래는 영화뿐 아니라 연극, 무용 등 다양한 분야에 영감을 줬다. 국내는 물론 세계 각지로 퍼져나가 한민족의 심금을 울렸다. 장르와 국경을 뛰어넘어 ‘아리랑 신드롬’이 일어난 것이다.

‘아리랑’이 뜨면서 그 연원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19세기 후반부터 비슷한 곡조와 가사의 민요가 ‘아라리’, ‘아라렁’, ‘아르렁’, ‘어르렁’, ‘아리랑’ 등으로 불려 왔다. 그 명칭들이 신드롬을 몰고 온 영화 주제가 덕분에 ‘아리랑’으로 모아진 것이다. 그러나 주제가 ‘아리랑’이 널리 알려졌다고 해서 오래전부터 전해졌거나 민요 아리랑의 원류인 것은 아니다. 1931년에 나온 선문당 [영화소곡집]을 보면 이 노래는 ‘나운규 작품’이라고 돼 있다.

“내가 지었소이다. 소학생 때 청진에서 고향 회령까지 철도가 놓였는데 남쪽에서 온 노동자들이 철로 길을 닦으면서 ‘아리랑, 아리랑’ 하고 구슬픈 노래를 부르더군요. 그것이 어쩐지 가슴에 충동을 주어서 길 가다가 노랫소리가 들리면 걸음을 멈추고 한참 들었어요. 그러고는 애련하고 아름답게 넘어가는 그 멜로디를 혼자 읊조려 보았답니다. 서울 올라와서 나는 그 노래를 찾았어요. 도무지 들을 길이 없더군요. 그래서 내가 예전에 듣던 멜로디를 생각해내어 가사를 짓고 곡보는 단성사 음악대에 부탁하여 만들었지요.”

1937년 1월 월간 잡지 [삼천리]에 나운규의 인터뷰가 실렸다. 그는 어린 시절에 인상 깊게 들었던 철도 노동자들의 아리랑 민요를 기억해내 가사를 짓고 악보는 악단에 맡겼다고 했다. 나운규가 지었다고 했지만, 원형은 따로 있었다는 말이다. 다만 예전에 들었던 노래의 원형은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당시 서울에는 ‘강원도아리랑’이 간혹 들릴 뿐 기억 속의 노래는 기생들도 별로 아는 바 없고, 명창들도 부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리랑 기원설과 경복궁 중건 사업


▎알마티고려민족중앙회 산하 ‘고향’, ‘비단길’ 합창단이 1월 22일 저녁(현지시간) 공화국궁전에서 설날 축하공연으로 고려아리랑을 합창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그렇다면 나운규의 영화 주제가에 영감을 준 철도 노동자들의 노래는 무엇이었을까? 청진과 회령 사이에 철도가 놓인 시기는 나운규가 소학교 상급생이었던 1911년부터 1914년 사이다. 이 시기에 나온 조선총독부의 자료 [이요·이언급 통속적 독물 등 조사](1912)에 주제가 ‘아리랑’의 원형으로 보이는 민요가 여럿 나온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 아리랑 고개에 정거장 짓고 / 우리 임 오기만 기다린다”(아리랑 타령)

“날 바리고 가는 임은 / 십 리를 못 가서 발병 나지”(어르렁 타령)

1910년 한국을 병합한 일제는 이른바 ‘조선심(朝鮮心)’을 알아낸다는 명목으로 민간의 노래, 속된 말, 읽을거리 등을 널리 조사한다. 이때 수집된 ‘아리랑 타령’, ‘어르렁 타령’, ‘사랑가’, ‘수심가’ 등의 노랫말은 영화 주제가 ‘아리랑’의 1절 및 후렴과 흡사하다. 나운규는 바로 그 타령조의 민요를 복원한 것이다. ‘아리랑’ 2~5절은 그가 지었을 수 있지만, 한국인이 애창하는 1절은 원래 경기 지역에 나돌던 백성의 노래였다.

1926년 영화 [아리랑]이 흥행하고 주제가가 신드롬을 몰고 오자 조선총독부는 민요 아리랑에 대한 연구를 본격화한다. 1930년 6월 조선총독부 촉탁연구원 김지연이 기관지 [조선]에 ‘조선민요 아리랑 - 조선민요의 연구(2)’를 기고했다. 이 글에서 필자는 민요 아리랑의 기원에 관한 초창기 연구자들의 주장을 정리해 6가지 설을 소개했다.

먼저 ‘아이롱(我耳聾)’, ‘아리랑(我離娘)’, ‘아난리(我難離)’의 세 가지 기원설은 1865~1868년에 흥선대원군이 추진한 경복궁 중건(重建)을 아리랑의 발생 무대로 보는 것이다. 대원군은 공사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원납전을 거둬들였다. 사실상 강제 징수였기에 백성들이 부담을 느끼고 반감을 드러냈다. ‘아이롱(我耳聾)’은 원납전 내라는 소리에 귀를 막는다는 뜻이다. 또 공사에 징발된 일꾼들은 가족과의 이별을 한탄하고 고향과 집을 그리워했다. 그런 의미에서 ‘아리랑(我離娘)’은 임과 이별했다는 것이다. ‘아난리(我難離)’는 진시황 때 만리장성을 쌓으면서 불렀다는 노래 ‘어유하아난리차역(魚遊河我難離此役)’을 줄인 말이다. 만리장성을 쌓는 것처럼 고생이 막심하다는 경복궁 중건 현장의 목소리다.

조선총독부의 설은 ‘아이롱(我耳聾)’, ‘아리랑(我離娘)’, ‘아난리(我難離)’가 민요 아리랑과 아라리의 유래라는 것이다. 다소 억지스러운데, 여기에는 정치적 의도가 숨어 있다. 일제는 식민 통치를 정당화하려고 흥선대원군, 고종, 명성황후 등 조선의 위정자들이 백성들을 압제해 민심이 등을 돌리고 나라가 망했다는 논리를 폈다.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 사업은 위정자의 압제와 민심의 이반이라는 저들의 망국 논리를 뒷받침했다. 민요 아리랑이 백성의 원성에서 기원했다는 설로 일제의 식민 통치를 정당화한 것이다.

다음은 ‘아랑위(兒郞偉)’의 설이다. 아랑위는 목조 건축에서 마룻대를 올릴 때 축문에 쓰이는 의례적인 글귀인데 그것을 낭송하다가 아리랑이 됐다는 것이다. ‘아랑(阿娘)’ 기원설은 경남 밀양의 전설에서 비롯됐다. 밀양 사또의 딸 아랑이 자신을 겁탈하려던 통인에게 살해당하고 원귀가 돼 한을 푼다는 이야기다. 아랑과 아리랑은 발음이 비슷하다. ‘알영(閼英)’의 설도 있다.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부인 알영은 농업과 길쌈을 보급해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다. 아리랑의 기원은 아득한 상고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설은 일제강점기를 지나 광복 이후에도 속속 등장했다. 역사학자 이병도와 국문학자 양주동은 ‘아리랑 고개’를 주목했다. 이병도는 낙랑(樂浪)이 ‘아라’로 발음되므로, ‘아리랑 고개’가 황해도 자비령이라고 했다. 반면 양주동은 ‘아리’가 ‘밝(光)’의 고어이고, ‘랑’은 ‘령(嶺)’의 전음(轉音)이니 ‘광명한 고개’라는 견해를 내놓았다. 이 밖에도 ‘아리랑 쓰리랑’이 ‘아리고 쓰리다’에서 연유했다는 설 등이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산골짜기 노래에서 궁중 타령으로


▎매일신보 1926년 10월 3일 기사. 영화 주제가 ‘아리랑’에 공안(公安)을 해칠 가사가 있어 선전지 1만 매를 압수했다는 내용이다. / 사진:한국영상자료원
어원이 아닌 노래로서의 아리랑은 본래 강원 지역의 향토민요였다는 게 통설이다. 산간 주민들이 나무하거나 밭일하면서 흥얼거리는 노래였는데 지역민들은 ‘아라리’라고 불렀다. 이 산골짜기 노래가 전국으로 퍼져나간 계기는 19세기 후반의 경복궁 중건 사업이었다.

흥선대원군은 무너진 왕권을 다시 세우기 위하여 1865년부터 야심차게 ‘대역사(大役事)’를 벌였다.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경복궁을 장대하게 재건하려고 한 것이다. 공사가 개시되자 약 4만 명의 일꾼이 팔도에서 징발돼 도성에 집결했다. 인부들에게는 고생스러운 부역이었다. 화재를 비롯해 사고도 끊이지 않았다. 병인양요 등 국내외 사정으로 지체되기도 했다. 고향집이 그리운 일꾼들은 불만에 휩싸였다.

대원군은 불만을 무마하고 일의 능률을 올리려고 여러 가지 수단을 강구했다. 전국의 놀이패와 농악대, 소리꾼들을 불러 모아 잔치를 베풀었다. 일꾼들에게 두둑한 상금을 걸고 경창(競唱), 곧 노래자랑을 열기도 했다. 가장 큰 호응을 얻은 것은 강원도 일꾼들의 아라리였다고 한다. 매력을 느낀 4만 일꾼과 예인들이 각자 고향으로 돌아가 아라리를 전파했다. 아라리에 지역의 특색 있는 소리와 이야기가 스며들며 오만가지 아리랑이 탄생했다. 1890년대에 이르면 아리랑이 궁궐 문턱까지 넘어선다.

“임금은 밤마다 궁궐에 전등불을 대낮같이 밝히고 광대와 배우들을 불러 ‘아리랑 타령’을 연주하고 놀았다. 타령을 잘하는 자에게는 금과 은을 상으로 주라고 지시했다.”

구한말의 문인 황현이 [매천야록]에 남긴 아리랑의 기록이다. 그 해가 1894년이었는데 남도에선 동학농민운동이 들불처럼 번졌고 일본과 청나라는 개입할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이런 마당에 임금이 아리랑 놀음이라니, 황현은 나라의 장래가 걱정스러웠다. 민요 아리랑은 외국인들에게도 알려졌다.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는 ‘문경새재 아리랑’을 채록해 1896년 서양식 악보와 함께 자신이 간행하는 잡지에 실었다.

“아라렁 아라렁 아라리요 / 아라렁 배 띄여라 노다 가세 / 문경새재 박달나무는 / 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간다”(헐버트, ‘Korea Vocal Music’, [Korean Repository])

문경새재는 임진왜란에 이어 구한말에 의병이 일어나 일본군과 전투를 치른 곳이다. 가사는 하찮은 방망이로 쓰려고 아까운 박달나무를 벤다는 비유로 건장한 청년들의 희생을 안타까워하는 내용이다. 이 노래를 채록한 헐버트는 흥미로운 설명을 달았다. “아리랑은 즉흥곡의 명수인 조선인들이 쌀처럼 귀하게 여기는 노래”라는 것이다. 조선 사람들은 아리랑 특유의 후렴에 맞춰 삶의 애환, 시대정신, 지역색 등을 즉흥적으로 노래에 담았다. 수많은 즉흥곡이 쏟아져 나온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나 들을 수 있다. 민요 아리랑의 본질이다.

독립투사와 광복군에게 아리랑은 곧 조국


▎경남 밀양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의 주인공인 아랑의 영정. 영남루 아래에 아랑의 혼백을 위로하는 사당이 있다. / 사진:밀양시청
1910년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면서 아리랑은 민족의 고난을 끌어안는다. 나라를 잃은 백성들은 “나를 버리고 가시는 임은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라고 원망했다. 임은 내 나라다. 그것은 원망이 아니라 차라리 애원이었다. 하루빨리 내 나라를 되찾길 바라는 간절한 기다림의 시작이었다.

나라를 잃으면 사람들이 떠난다. 독립운동가들은 일제의 가혹한 탄압을 피해, 땅을 빼앗긴 사람들은 먹고살기 위해 조국을 떠나야 했다. 간도로, 연해주로, 하와이로 건너갔다. 미국과 중국과 일본 땅을 헤맸다. 그들이 가슴에 품은 것은 여권이 아니라 아리랑이었다. 아리랑이 곧 조국이고 고향이었다.

‘아리랑 고개’는 이쪽과 저쪽을 가르는 경계다. 떠나는 자는 고갯마루에 서서 고향 산천을 돌아보고 눈물을 삼키며 고개를 넘어가는 것이다. 이제 고달프고 모진 고난의 길을 걸어야 한다. 희망을 찾으려면 또다시 고개를 넘어야 할 것이다. 꼬불꼬불 열두 굽이 고개를 넘으면 찾아낼 수 있을까? 김산은 확신했다. 미국 언론인 님 웨일스가 [아리랑의 노래]로 되살린 바로 그 사람이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중국 혁명에 뛰어든 투사에게 아리랑이란 무엇이었을까? 1931년 김산은 일본 경찰에게 끌려가 극심한 고문을 당했다. 당시 그는 감방 벽에 “이곳에서 다시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고 썼다. 견디기 힘든 육체적 고통과 심리적 압박 속에서 그를 지탱한 힘은 아리랑이었다. ‘아리랑 열두 고개’에 그치면 안 된다. 김산은 ‘아리랑 열세 고개’를 넘어야 조선이 독립할 것이라고 믿었다. 죽도록 싸우고 또 싸워야 한다는 말이다.

광복군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1940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충칭(重慶)에서 조직한 광복군은 ‘광복군 아리랑’을 힘차게 부르며 국내 진공 작전을 준비했다. ‘광복군 아리랑’은 가족을 떠나 광복군이 된 전사의 소망을 ‘밀양아리랑’의 경쾌한 곡조에 실은 노래다. 1942년 임시의정원에서 광복군의 공식 군가 중 하나로 제정했다. 광복군뿐 아니라 중국에 거주하는 한국인 청년들이 즐겨 불렀으며, 조국 독립에 대한 낙관적인 믿음을 확산시키는 데 공헌했다.

“(1절) 우리네 부모가 날 찾으시거든 / 광복군 갔다고 말 전해주소 / (2절) 광풍이 불어요 광풍이 불어요 / 삼천만 가슴에 광풍이 불어요 / (3절) 바다에 두둥실 떠오는 배는 / 광복군 싣고서 오시는 배래요 / (4절) 동실령 고개서 북소리 둥둥 나더니 / 한양성 복판에 태극기 펄펄 날려요 / (후렴) 아리랑 쓰리랑 아라리요 / 광복군 아리랑 불러 보세”

한을 다독이며 멍석 깔아주는 노래


▎미국 언론인 님 웨일스는 조선인 독립운동가 김산을 취재해 [아리랑의 노래]를 저술했다. / 사진:윤태옥
일제는 1929년 금창령(禁唱令)을 발동해 한민족의 정신적 버팀목이 돼가는 민요 아리랑의 힘을 빼보려고 했다. 그러나 아리랑은 강인한 생명력으로 탄압을 이겨내고, 고난을 넘어 희망을 찾아 나서는 한국인의 든든한 길동무가 됐다. 굽이굽이 아리랑 고개를 함께 넘으며 명실상부한 민족의 노래가 된 것이다.

현재 아리랑은 60여 종 3600여 수에 이른다고 한다. ‘아리랑’, ‘정선아리랑’, ‘밀양아리랑’, ‘진도아리랑’처럼 유명하고 익숙한 노래들만 있는 게 아니다. 민요 아리랑은 한국인의 사연과 감정을 털어놓는 즉흥곡 플랫폼이다. 삶의 애환, 시대정신, 지역색이 사설로 흘러나와 아리랑이 된다. 아리랑 특유의 후렴은 흥을 북돋우고 한을 다독이며 멍석을 깔아준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하다 보면 이야기나 응어리가 술술 풀리는 것이다. 그것이 씨줄 날줄로 엮여 오늘날 한국인의 정체성을 이루고 있다.

※ 권경률 - 역사 칼럼니스트이자 작가. 서강대에서 역사를 공부했다. 새로운 해석과 기발한 상상력으로 한국사에 숨결을 불어넣는다. 유튜브·페이스북에 ‘역사채널권경률’을 열어 독자들과 역사 하는 재미를 나누고 있다. [모함의 나라](2022), [시작은 모두 사랑이었다](2019), [조선을 새롭게 하라](2017) 등을 썼다.

202309호 (2023.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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