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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공개] 흥선대원군 외손녀이자 이회영 며느리 조계진의 일제 강점기 회상 

“백범은 내게 영친왕을 알아볼 수 있느냐고 물었다” 

박성현 월간중앙 지역전문위원
■청나라서 귀국한 대원군 외면한 고종… “두 사람은 말 한마디 없었다”
■백범, 조계진에게 “사실은 내가 국모 살해한 자를 보고 복수했었지…”
■영친왕 망명 주도한 백범, 조계진과 영친왕의 대면(對面) 계획 세워
■순종 유조(遺詔), 조정구→조계진→이규학 통해 임시정부에 전달


▎1945년 해방을 맞아 귀국에 앞서 중국 상해 공항에 모인 임시정부 요인들. 가운데 꽃다발을 건 백범 김구 바로 앞 소년이 이종찬 현 광복회장이다. 오른쪽 둘째 줄 첫 여성이 이종찬의 어머니 조계진이다. / 사진:우당기념관
1996년 작고한 조계진은 흥선대원군의 외손녀이자, 고종의 조카이다. 또 일제강점기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독립운동가이자 임시정부 요인인 우당(友堂) 이회영의 며느리이기도 하다. 조선 왕조와 임시정부 양쪽에 가장 깊이 밀착한 인물 중의 한 사람이 바로 조계진이다. 생전의 조계진은 구한말 조선 왕조의 몰락 과정과 상해임시정부 비화(秘話)를 아들 이종찬(현 광복회장)에게 구술로 남겼다. 이종찬 광복회장은 어머니로부터 들은 얘기를 최근 원고로 정리해 출판을 앞두고 있다. 조계진의 구술은 오래된 기억에 의존하는 내용들이라 제 3자의 검증 범위를 벗어난 경우도 있고, 역사적 사실로서의 객관화가 불가능한 기록일 수도 있다. 하지만 조계진의 아버지 조정구(궁내부 특진관 등 역임)와 오빠 3인은 고종의 최측근이자 복심(腹心)으로 활동했다. 조계진은 결혼 후 이회영 가문의 일원으로 백범 김구 등 임시정부 요인들을 두루 만났다. 역사의 중심부를 목격할 지위와 인연을 가진 조계진의 기억은 그 나름대로 가치가 있고, 그 전제 위에서 음미할 대목도 적지 않다고 할 것이다. 월간중앙은 조계진·이종찬의 기록인 가칭 [나의 어머니 조계진 여사의 자서전(子敍傳) - 아들이 쓴 자서전]을 입수, 주요 내용을 소개한다.

을사늑약, 고종 망명 시도, 한일합병조약, 3·1 만세운동, 임시정부 출범 등은 우리 역사에 망국(亡國)과 항일의 족적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조계진에게 이들 사건은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서로 맞물려 개인의 생애를 축조하는 구성 요소들이다. 예컨대 조계진과 이규학(이회영의 차남)의 결혼은 고종 망명 프로젝트의 한 소품(小品)으로 활용됐다고 이종찬 광복회장은 전한다. 당시 고종은 일제의 엄중 감시 하에 7년째 경운궁(현 덕수궁)에 유폐 중이었다. 고종 망명을 계획한 우당 이회영과 조정구는 이규학과 조계진(고종의 조카)의 결혼을 상주(上奏, 임금에게 말씀을 아룀)한다는 명분으로 고종에게 접근하고자 했다.

이처럼 한반도의 명운을 좌우한 역사적 사건들이 한 사람의 기억을 통해 서술되는 것도 드문 일이다. 조계진이 왕가의 혈친이자, 임시정부의 구성원이었던 덕이다. 이 기록에서 조계진은 책의 발행을 전제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죽은 지 30년 가까이 되어 이 글을 남기지만 이는 픽션이 아니고 사실의 기록이다. 내가 체험한 바를 증명하기 위해 자료 인용을 정확하게 해 사실을 기했다.”

“고종의 가장 큰 장애는 대원군이었다”

■ 고종과 흥선대원군의 불화(不和), 악연

조계진은 부자지간인 흥선대원군과 고종은 진작에 상극(相剋)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인식한다. 부친인 조정구로부터 들은 바를 토대로 다음과 같은 기억을 구술했다. 긴박하게 이뤄진 고종의 아관파천(俄館播遷)에 아버지 흥선대원군과 고종의 불화도 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종 임금께서도 부친인 대원군 덕에 왕위에 올랐으나 또 부친 때문에 일생을 권력투쟁을 할 수밖에 없는 삶을 살았다. 부친의 권력욕으로 인하여 왕비도 무참하게 희생되는 비극, 그 권력욕 때문에 왕위가 위태로움을 보위하기 위하여 부친 대원군과 대결할 수밖에 없는 삶, 참으로 기구하였다.”

“가장 큰 장애는 대원군이었다. 어떻게 하든지 임금을 끌어내리는 데만 열중하고 계셨다. 1881년 임오군란 당시에도 민(閔)중전을 제거하고, 아들 왕권을 정지시키고, 자신의 권력으로 대처하려다 청국에 납치되었다.”

“1885년 대원군이 귀국길에 올랐다. 아버지(조정구-편집자 주 )는 광경을 보고 안절부절못했다고 했다. ‘참석했던 다른 사람들도 분위기가 얼마나 냉랭했는지… 두 분 모두 한 마디 말이 없었소…’ 당시 아버지는 부교리, 부사직이라는 미관 직위에 있었지만 장인 대원군을 맞이하는 자리에 있었다. 대원군은 성상의 감정이 풀리지 않았음을 알아차리고 운현궁으로 직행했다. 임금의 지시로 운현궁은 다시 출입 통제되었다.”

“우리 아버지는 일단 고종 임금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어(移御)한 사실을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사실 성상이 궁에 갇혀 있으면 무슨 흉변이 일어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대원군은 이 틈을 이용하여 임금을 폐하고 이준용을 국왕으로 올리려는 행동도 엿보였다. 그래서 대원군은 부대부인(흥선대원군의 부인 -편집자 주)까지 궁으로 들여보내 임금을 위로하라고 했지만 동정을 살피라는 뜻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부대부인은 오히려 반대편에서 아버지에게 ‘성상을 잘 모시라’고 알 듯 모르듯 말씀을 되뇌었다. 이처럼 조선의 정정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여 언제 현 상황이 뒤집혀 임금의 신상이 다시 위태롭게 될지 알 수 없었다.”


“근신들은 대부분 살해되었다”


▎1918년 결혼한 이규학(왼쪽)과 조계진. 이규학은 우당 이회영의 아들이고, 조계진은 흥선대원군의 외손녀다. / 사진:이종찬
■을미사변과 흥선대원군

고종의 처남이자 왕태자궁 첨사로 있던 조정구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 직후 궁궐을 찾는다. 아버지 조정구에게서 조계진이 들은 을미사변 전후의 상황은 다음과 같다. 조정구에게 흥선대원군은 장인이 된다. 명성황후 시해를 전후로 조정구는 장인 흥선대원군에게 실망과 분노의 감정을 표출한다.

“아버지께서 특히 한탄하신 것은 왜놈의 농간에 놀아난 대원군의 어리석음이었다. 일생을 통하여 민중전을 제거하지 못해 급급한 나머지 중국 힘도 빌리고, 또 일본 힘을 빌려 민중전 제거에 성공했다. 하지만 말년에 그 모습은 추하기 짝이 없었다.”

“을미사변 이후 고종 임금은 식음을 전폐할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아버지는 급히 대궐로 들어갔다. 고종 임금께서는 근처에 누구도 믿지 못하고 외롭게 계셨다. 왕세자도 왜놈들에게 피격을 당하여 얼이 빠져 있었다. 왕태자궁 첨사로 재직 중인 아버지께서는 태자를 보호해야 하는 몸인데 이런 광경을 보고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 데 대하여 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변에는 알렌 미국 공사 내외와 평소에 가까이 지냈던 미국인 언더우드와 헐버트 등이 있었고, 성상을 지켰던 홍계훈·정범조·이경일…. 근신들은 대부분 살해되었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의논한 후 그날로 대궐에서 지내기로 하셨다.”


백범, “민 황후를 뵈온 적이 있소?”


▎고종(왼쪽)과 흥선대원군. 부자지간인 두 사람은 끝내 화해를 하지 못했다.
■을미사변과 백범의 복수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대해 훗날 백범 김구가 직접 언급한 대목이 나온다. 백범은 조계진을 만나 소싯적 일본인을 때려죽인 배경에 일제에 의한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자리하고 있음을 밝힌다.

“민중들은 마음속으로 부글부글 끓었다. ‘왜놈들 칼에 우리 왕비가 죽다니.’ 복수의 칼을 가는 사람들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백범 김구 선생도 그중 한 분이었다. 내가 1927년에 상해로 가서, 남편 따라 처음 백범 선생께 인사드리러 갔었다. 그때 그분은 나에게 물었다.

‘민 황후를 뵈온 적이 있소?’

졸지에 약간 엉뚱한 질문을 받고 나는 당혹했다. 그 순간 속으로 주변에서 민 황후가 나의 외숙모가 된다는 사실을 알려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나기 직전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렇군… 사실은 내가 국모 살해한 자를 보고 복수했었지. 그때 왜놈들을 보면 전부 원수로 생각했었거든.’

인사를 드린 후 돌아오는 길에 남편은 나에게 백범 선생이 민 황후의 한을 남긴 죽음에 대해 복수하고자 왜놈을 살해하여 사형선고를 받고 탈옥하셨다는 영화 같은 이야기를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해방 후 서울에서 백범 선생이 나에게 준 [백범일지]를 처음 읽고 나서야 그게 ‘치하포사건’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을사늑약과 고종

이 기록은 일본제국의 강요로 체결된 을사늑약 이후의 고종의 심리와 동태를 리얼하게 전하고 있다. 조계진의 아버지 조정구는 고종의 부승지로 지근거리에서 고종을 보좌했다. 조계진의 오빠들도 고종의 측근으로 활동했기에 현장의 목격자이다. 이 기록에는 조계진이 아버지와 오빠들에게서 들은 고종의 상태를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1월 15일 이토는 직접 황제(고종-편집자 주)를 알현하여 조약 체결을 설득했지만 황제는 중대사인 만큼 대신들과 의논하여야 한다고 했다. 이토는 황제가 절대권자이니 결심하면 된다고 고집하였으나 아무런 합의를 보지 못하고 화를 내고 퇴궐하였다. 이 소식을 시종으로 있는 둘째오빠 조남익이 아버지와 큰오빠에게 전해주어서 알게 되었다. 무엇인가 일이 점점 심각하게 되어 가는 것 같았다.”

“새벽 궁궐을 포위했던 일본군이 장비를 수습하고 부대로 돌아가는 듯했다. 아버지는 재빨리 경운궁으로 향했다. 궁내로 들어가니 황제께서는 피로해서 용상에 반쯤 누워 계시는 듯했고 시종 조남익이 눈에 띄었다. 일본군이 포위하여 무력으로 위협하고 대신들도 우왕좌왕하는 가운데 버티고 있던 한규설 참정대신을 일본군이 끌고나갔고, 결국 새벽녘에 박제순 외부대신이 외부에서 관인을 갖고와 조약문에 서명 날인함으로써 일단락되었다는 것이다.”

“을사늑약 체결 이후 허탈해진 황제께서는 누구도 믿지 못했다. 자연히 조카들을 마지막 충신으로 어겼다. 우리 오빠들, 조남승(당 25세), 남익(22세), 남복(20세) 세 젊은이가 마지막 충신이 된 셈이다. 또한 황제가 특별히 임명한 별입시들이 있었다. 이분들은 지방의 유생들과 소통하면서 임금의 참뜻을 전달하였고 때로는 밀지도 전하면서 읽은 후 반드시 소각토록 하였다. 이들은 동학을 비롯한 지방의 항일 세력과도 꾸준히 연락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인하여 나라의 외교권을 일제에게 강제로 빼앗기자, 황제는 궁내부와 의정원 가운데 궁내부를 강화하여 내치라도 튼튼하게 하겠다고 결심하셨다. 그리하여 아버지와 오빠들에게 궁내부의 중책을 맡기고 내밀한 지시를 통하여 행정이 집행되기를 희망했다.”

“황제께서는 ‘짐은 이들을 신임한다’는 뜻을 대외에 알리기 위해서 1906년 아버지와 둘째오빠에게 훈장을 내렸다.”


“4~5세 시절 영친왕과 소꿉장난”


▎고종은 조카인 조남승·남익·남복 형제들을 각별히 신뢰했다. 고종이 중국 교주만 저택을 조남승에게 하사한다는 내용의 증서, 고종이 시종 조남익에게 내린 서훈 교서, 미국 연수에 나선 조남복을 잘 챙겨달라며 호머 헐버트 박사에게 보낸 고종의 편지(왼쪽부터). / 사진:이종찬
■ 영친왕 망명 관련 백범과의 대화록

조계진은 고종의 일곱째 아들인 영친왕 이은과 같은 해(1897년) 태어났다. 어릴 적엔 궁궐에서 동갑내기 영친왕과 함께 놀았다. 고종과 엄 귀인 사이에 난 아들인 영친왕은 1907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왕족인 마사코(이방자)와 결혼한다. 세월이 흘러 조계진과 영친왕과의 대면 기회가 있었으나 일본 정부의 차단 조치로 인해 무위에 그친다. 당시 임시정부는 영친왕을 망명케 해 항일·독립 운동의 거점으로 삼고자 했다는 것이다.

“내가 태어난 후 얼마 안 있어 영친왕도 태어나 나와 동갑내기가 되었다. 내가 4~5세 시절 경운궁으로 불려가 영친왕과 소꿉장난도 하곤 했다.”

“새해에 들어서자 백범은 새 내각의 국무령으로 무엇인가 실력을 보여주어야 했다. 때마침 일본에서 황실 여성 방자(方子) 황족과 결혼한 영친왕이 세계여행 길에 1차로 상해에 기착한다는 정보를 임정에서 입수하였다. 백범은 어느 날 우리 내외를 불렀다. 나는 사실 이때 백범이란 분을 처음 뵈었다. 얼굴은 크고 굴곡이 있었고 색은 거무티티하였다. 안경 너머로 나를 보는 그 시선은 맹수와 같이 날카로웠다. 표정 하나하나가 나를 긴장시켰다(이날은 앞서 백범이 조계진에게 ‘민 황후를 뵈온 적이 있소?’ 라고 물었던 날이다- 편집자 주).

‘연초에 상해에 도착했다죠.’

‘네…’

‘황제의 유조도 갖고 왔다는 말 들었어요.’

‘네…’

‘영친왕을 아시나요.’

‘어렸을 적에 엄비 전하께서 여러 번 궁에 들라 해서 같이 지냈습니다.’

‘동갑이신가요.’

‘네…’

백범은 한동안 말없이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다가 ‘영친왕을 지금 만나도 서로 알아볼 수 있겠죠.’

‘…글쎄요. 만난 지가 20년이나 지났는데… 만나서 시간을 두고 기억을 더듬으면 알아볼 수는 있겠습니다.’

백범은 또 한동안 무얼 생각하다가 불쑥 말을 꺼냈다.

‘사실은 영친왕이 곧 상해를 들른다는 말이 있어요. 이 사실도 비밀입니다. 그런데 그분을 알아볼 사람이 없습니다. 사실 영친왕이 일본인 여성과 결혼하기 전, 약혼까지 한 여성이 이곳에 와 있긴 하지만 그분을 영친왕이 알긴 어려울 겁니다. 그래서 영친왕이 상해에 체류하는 동안 조 여사가 뵙고 대화하는 것이 어떤가 생각했어요.’

백범은 동의를 구하듯이 남편 주명(이규학, 이회영의 차남- 편집자 주)에게 눈짓을 했다.

‘영친왕이 언제 상해에 옵니까?’

주명이 물었다.

‘확실한 날짜는 모르겠는데 곧 세계여행을 떠나면서 여기에 2~3일 체류한다는 정보가 있네.’

‘중요한 기회인데 저희들도 할 일 있으면 한몫해야죠.’

백범은 그동안 북경에서 주명의 다물단이 벌였던 일들을 알고 있는 듯 신뢰를 표했다.

‘자세한 사항은 더 지켜봐야 할 걸세. 하지만 꼭 만나서 할 일이 있을 걸세. 그리고 오늘은 여기까지 의논하고 돌아가게. 오늘 일은 절대 비밀이야. 나를 만난 사실도 없는 일일세. 알겠나?’

백범은 먼저 일어섰다. 긴 청색 중국 두루마기 속으로 무엇이 감춰져 있는지 두툼해 보였다. 우리는 인사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영친왕이 찬동해야 망명시킬 수 있다”


▎백범 김구(왼쪽)와 영친왕. 백범은 상하이에서 영친왕 망명 계획을 세웠으나 일본이 가로막아 불발에 그쳤다.
그동안 고종과 그의 다섯째 아들 의친왕 이강의 국외(國外) 망명설은 많이 알려졌지만 영친왕 망명 얘기는 극히 드물었다. 일제강점기 저널리스트로 활동했고, 1950년부터 영친왕과 교류한 김을한은 저서 [영친왕-조선의 마지막 황태자]에서 상해임시정부가 영친왕의 ‘납치’를 기도한 것으로 기술한 바 있다. 당시 영친왕은 임정의 동태를 보고하던 일본 관헌들에게 “누구든 정 만나자면 만나지”라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백범 김구가 영친왕 망명과 관련해 조계진에게 영친왕과의 관계를 물었다는 것은 처음 공개되는 내용이다.

“주명이 아침 5시에 나를 깨웠다. 그리고 영친왕이 상해에 도착하여 호텔에 들어가면 할 일들을 대강 말했다.

‘쉽지 않겠지만 우선 영친왕이 찬동해야 상해로 망명시킬 수 있다는 거야. 더욱이 일본 여성과 결혼한 몸이니 단독행동은 안 할 거고. 일본 여인이 반대하면 좌절될 수도 있어….’

그제서야 계획의 일단을 알게 되었다. 1919년 이강(의친왕- 편집자 주) 공을 해외로 망명시키려다 실패한 공작을 다시 재현하여 영친왕을 망명시키려는 의도임을 알게 되었다.

남편 주명은 지난해 7월에 미국에서 보도된 순종 황제의 유조 기사를 다시 정리하였다. 영친왕을 설득하는 데 1차로 이 기사를 이용하자는 것이었다.

얼마 동안 기다렸다. 백범에게서 아무런 소식이 없다. 상해 주재 일본영사관은 연일 분주했다. 영사관 근방에는 사복형사들의 왕래가 부쩍 많아진 것 같다.

1927년 5월 영친왕 내외는 하코네마루(箱根丸)를 타고 세계여행 길에 올랐다. 30일 상해에 도착했는데도 배에서 내린다는 뉴스가 없다. 숙소는 상해항에 정박해 있는 군함에서 모신다고 했다. 상해 관광은 배에서 내려서 하는 것이 아니라 배 위에서 망원경으로 상해 겉모양만 보고 끝났다. 배에서 내리면 무슨 불상사가 생길지 모른다는 뜻에서 아예 영친왕의 하선을 중단시켰다. 백범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이렇게 상해임시정부의 영친왕 망명 시도는 불발에 그쳤다. 이종찬 광복회장은 이 대목에 대해 “고종, 의친왕은 망명시키려고 노력을 했으나 다 수포로 돌아갔다”면서 “그동안 영친왕 망명 기도 얘기는 없었으며 아마 이 기록이 처음일 것”이라고 말했다. 나아가 이 회장은 “비록 무산되기는 했지만 당시 백범이 일본에 관한 정보를 세밀하게 파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한편, 조계진은 당시의 심경을 다음과 같이 진솔하게 남겼다. 영친왕 망명은 백범 입장에서는 항일독립운동의 전기(轉機)가 될 사안이지만, 일개 여성에 불과한 조계진의 입장은 또 달랐다.

“나는 오히려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사실 영친왕을 만나 설득하기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옆에서 일본 여인 방자가 방해할 것은 불문가지다. 그러면 결국 물리력으로 그를 호텔에서 끌고가야 할 터인데 영화에서 보듯 쉽게 이루어지게 될까? 이 일로 나는 어떻게 될까? 남편 주명은 걱정하지 말라며, 자기가 그 대열에 함께 들어가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나를 일본인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할 것이라 다짐했지만 하여간 큰 모험 속에 일이 벌어질 것이라 예측했다. 이런 부담스런 일들을 일본 측에서 미리 예측하고 영친왕을 군함에서 한 발짝도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고 떠났다. 나는 영친왕을 만나지 못했지만 이런 기회에 서로 원수처럼 지내야 하는 연극으로 발전하지 않아서 마음이 가벼웠다.”

“집안 경사를 황제에게 보고하는데 허하지 않는다”


▎고종 옥새 진본 (아래쪽)과 비교하면 헤이그 특사 신임장(위쪽)에 찍힌 옥새는 가운데 획과 매듭 등이 진본과 조금씩 다르다. 이종찬 광복회장은 우당 이회영이 옥새를 위조해 신임장에 찍었다고 말한다. / 사진:이종찬
■ 이규학- 조계진 혼담과 고종의 유폐

조계진의 아버지 조정구와 우당 이회영은 자녀(조계진-이규학) 혼사를 계기로 고종을 알현하고 망명을 추진하고자 했다. 하지만 일본이 조정구 등 조선 왕조 고관을 지낸 친인척들의 고종 접근을 철저히 차단하는 통에 알현은 차일피일 미뤄졌다.

“이런 아버지의 뜻에 따라 다음날 둘째오빠는 즉시 이왕직에 태황제 알현을 신청했다. 벌써 태황제는 경운궁에 유폐된 지 7년째였다. 일가친척들도 태황제를 마음대로 알현하지 못하고 이왕직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당시 이왕직 장관은 한일합병 과정에서 나라 팔아 먹은 주범 민병석(閔丙奭)이지만, 그는 실권이 없었고 차관인 일본인 고미야 미호마쓰(小宮三保松)가 실권자였다.”

“태황제의 조카 결혼을 상주하고자 알현 신청한 것을 거부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알현 날짜를 통보해 오지 않는다. 이왕직 측에서 작위와 은사금도 거부한 아버지에 대하여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은 것은 이해가 간다. 그런데 집안의 경사를 태황제에게 보고하는데 그것마저 허하지 않는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큰오빠는 다시 사랑채 안방으로 들어가 아버지와 우당장(우당 이회영을 높여 부르는 말 - 편집자 주)이 마주 앉아 논의가 시작되었다. 그때 3인은 태황제 망명건에 대하여 진지하게 논의하였다고 했다.”


■ 헤이그 밀사 신임장의 진위

고종은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특사로 보내 을사늑약의 부당성과 한국 독립을 호소했다고 알려져 있다. 당시 특사가 현지 언론에 제시한 고종의 신임장은 우당 이회영이 만든 위조품이라는 대목이 나온다.

“내가 아는 것은 그와 다르다. 신임장은 황제의 지시에 의하여 궁내에서 작성하지 않았고, 신임장을 만들기 위하여 수결이나 황제어새(皇帝御璽)도 밖에서 준비하여 실행하여도 가하다는 윤허만 받았다. 그 이유는 궁내에서 어새를 찍는 신임장 제작 작업도 어렵고, 또 혹시 사후에 문제가 되어도 황제는 ‘모르는 일’로 발뺌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상동파 신민회에서 이런 작업을 우당장에게 책임지고 전담케 하라 했다. 다 아는 바와 같이 우당장은 전각(篆刻)에도 전문가 수준으로 일가견이 있었다.”

“황제의 특사 파견은 불장난이 아니었다”

당시 [황성신문] 1910년 6월 5일자는 ‘조남승 기소’ 제하의 기사에서 “옥새(玉璽) 위조범 조남승은 약림(若林) 경시총감의 귀임을 대(待)하여 기소하기로 결정하였다더라”라는 기사가 보도됐다. 조계진은 이때의 기억을 이렇게 돌이켰다.

“내가 아직 어렸을 때 일이다. 당시 일본 관헌이 묘동(妙洞) 집에 들이닥쳐 오빠가 소지했던 모든 문서들, 특히 옥새를 감추었다고 하여 내놓으라고 우리 가족들을 닦달했던 일이 있었다. 오빠 조남승은 체포 구금됐고, 집에는 오빠 조남익만 있었는데 그들은 집을 샅샅이 수색했으며, 장판까지 뜯어 파헤쳐 가며 수색했었다. 그들은 오빠의 목을 쥐고 ‘죽기 전에 내놓지 못할까’라며 소리쳤다. 나는 너무 무서워 할머니 품 속에 숨어서 그 뒤 무엇이 벌어졌는지 몰랐다. 그리고 그들은 물러갔다. 그때 오빠들이 비밀리에 무엇인가 꾸민 게 틀림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신임장을 기술하는 문안의 작성 방법이나 수결, 옥새 인(印)은 어떻게 이루어졌나? 의심이 갈 만한 부분이 하나둘 아니었다.”

“상동교회를 찾은 사람 가운데 헤이그에 특사를 파견한 것은 졸견(拙見)이었다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우당장의 생각은 확고했다. 일본이 한국 병탄 계획을 짜놓고 순차적으로 한국 황제의 권한과 지위를 빼앗아 가고 있는데 이를 앞당겼을 뿐이다. 그러므로 황제가 허수아비처럼 무장해제당하느니 차라리 항일 의지라도 분명하게 밝혀놓는 것이 후일 항일 독립정신의 원동력이 될 것이라 했다. 황제의 특사 파견은 불장난이 아니라 일본의 민낯을 우리 백성과 세계에 알리는 좋은 계기였다.”


■ 천재 신채호의 생활상과 그의 부인 박자혜

중국 망명 시절 조계진은 항일 지사와 위인들의 생활상을 가까이서 접하게 된다. 그중 한 사람인 단재 신채호의 진면목과 박자혜의 러브스토리도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박자혜 여사는 우당 이회영 선생의 부인 이은숙 여사의 소개로 단재 신채호 선생을 만나 곧바로 결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경에서 지내는 동안 아름다운 이야기도 있다. 신채호는 당시 독신으로 부지런히 고구려 옛 강토를 답사하기도 하고, 북경대학으로 가서 2~3일간 잠적하면서 역사 자료 읽기에 열중하였다. 그는 말 그대로 천재적인 학자였다. 말수도 적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토의를 하거나 객담을 나눌 때도 혼자 떨어져 책을 읽곤 하였다. 하지만 비상한 지식의 흡수력을 가진 것만은 사실이었다. 하룻밤 새 원고 뭉치를 써서 어딘가 보내기도 하였다. 어느 날 밤늦게 곤하게 잠이 들었는데 방에 빗물이 새서 작성했던 원고들이 모두 물에 젖어 버렸다. 원고 마감일자는 되고 난감하였지만 이 천재는 마치 요새 컴퓨터에 입력된 자료 찾아내는 것처럼 줄줄이 풀어 금세 원고를 복원하였던 일도 있었다.”

비상한 지식의 흡수자 신채호

“우리 집에 북경대학에 유학 온 여학생들도 가끔 와서 저녁을 먹고 가곤 했다. 그 가운데 박자혜란 분이 있었다. 그분은 경운궁에서 소녀 시절을 궁녀 후보로 보냈다. 경술국치 이후 궁에서 나와 숙명여고 기예과를 졸업한 후 조산(助産)양성소 과정을 필하고 조산원 자격을 얻어 조선총독부 의무과에 근무 중 기미년 만세운동에 가담하였다. 그리하여 총독부를 떠나 이곳 북경으로 유학 온 것이다. 그는 나보다 2~3년 연상이지만 나에게 참으로 다정하게 대했고 을진이가 태중에 있을 때 여러 가지 산중 몸 관리를 조언해 주고 도와주었다. 어느 날 시어머니가 박자혜에 대하여 묻기에 나는 참으로 ‘훌륭한 조선 여성’이라고 답했다. 그런데 신채호와 결혼하도록 중매함이 어떠냐고 의견을 묻는다. 나는 약간 당혹하였다. 과연 객지에서 생활력이 전혀 없는 홀아비 신채호 같은 천재와 어떻게 결혼을 해서 살까 걱정되었다. 시어머님 말씀이 북경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조산원을 개업하면 좋지 않겠느냐고 해서 나도 찬동하였다.”

“1920년 말 신채호와 박자혜는 결혼하였다. 신채호 내외는 결혼 후 북신교(北新橋) 영정문(永定門)내 관음사(觀音寺) 근방에 방을 얻어 신혼살림에 들어갔다. 신채호는 결혼 전 독신이었을 때 중국 두루마기, 중국어로 남포장삼(藍布長衫)만 입고 다녔는데 앞가슴 부분에 음식을 흘러 반들반들하여 보기가 흉했었다. 그런데 결혼한 후로는 단정하게 중국옷을 입었는데 옷의 앞부분이 깨끗하여 일견 가정을 이루더니 달라졌음을 느끼게 하였다. 신채호, 박자혜 내외는 1년여 행복한 신혼생활을 했다. 물론 경제적으로는 곤궁했지만 박 여사가 부지런하여 근근이 생활을 이어 나갔다. 신채호라는 분은 자기 삶을 살아갈 돈을 마련한다는 것은 생각지도 않은 역사학자요, 혁명가 그대로였다. 그러나 박 여사가 아기를 잉태한 후로는 만삭의 몸으로 도저히 생활 전선에서 일하기가 어려웠다. 자연 곤궁하여 때로 우리 집에서 지원은 하였지만 도저히 이어가기 어려워 산월이 가까워지면서 불가피하게 박 여사는 귀국하게 되었다.”

“1923년 1월 의열단 유자명이 신채호에게 단원들을 훈련하고 대외적으로 의열단의 존재를 과시할 수 있는 선언문을 써달라고 한 즉, 며칠 새 명문으로 알려진 ‘조선혁명선언’을 써왔다. 우당장과 일행이 이를 읽어보고 감탄했었다.

‘역시 단재는 천재야, 명문 중에 명문인걸…’

의열단은 약산 김원봉, 윤세주 같은 신흥무관학교를 필한 신흥학우단이 중심이 되어 조직된 무장투쟁조직이다. 이들의 활동은 천하를 놀라게 했다.”


■마지막 황제 순종의 밀지

나라를 잃고, 본인도 건강 수명을 다하지 못한 순종의 한탄과 비애가 닮긴 유조(遺詔, 임금의 유언)에 관한 내용도 눈길을 끈다. 기록에 따르면 순종은 조계진의 아버지 조정구에게 다음과 같은 유조를 남겼다.

“그날 밤 늦게 아버지(조정구- 편집자 주)께서 전해준 편지 뭉텅이를 저고리 안섶에서 뜯어내어 주명에게 전했다. 그 편지에 아버지께서 사위에게 긴 사연을 써놓았다. 붓으로 작은 글씨로 한문과 언문을 섞어서 쓴 것이었는데 대충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중략)

둘째, 여기에 중요한 문건을 하나 같이 보낸다. 이 문건은 내가 지난 연초 황제(순종- 편집자 주)를 알현했을 때 황제께서 나에게 받아쓰라 하여 그대로 여기에 내가 옮겨 써놓은 것이다. 이게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가 남긴 유조(遺詔)라 생각하여라. 그 내용은 황제께서 강제로 일본에게 나라를 강탈당한 사연을 자세히 기록한 것이다.

샛째, 이 유조를 당장 반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황제께서 왜놈들 감시 하에 유수(幽囚)처럼 살고 계시니 대외적으로 알려지면 황제께서 얼마나 혹독한 보복을 당할 것인지 상상해 보라. 그러니 비밀리에 가지고 있다가 황제가 붕어하면 즉시 공개하여라.

넷째, 발표하는 방법은 주명이가 직접 임시정부 요인들, 특히 성재(이시영)나 우천(조완구)과 의논하여 대외적으로 성과 있게 하여야 한다. 이게 일본이 조선을 강제로 점령하고 병합한 행위가 불법이고, 만국공법에 어긋남을 대외에 알리는 마지막 황제의 뜻임을 강조하여야 한다. (중략)

우천장(조완구)은 한 번 더 유조를 읽고, 성재장(이시영)에게 넘기면서 의견을 말했다.

‘이걸 여기 독립신문에 보내서 그대로 보도해서 되겠습니까?’

‘나도 생각했는데 지금 임시정부나 독립신문이 이런 대사를 처리하기는 역부족인 상황 같아요. 그러니 미국에 보내서 먼저 보도하도록 하죠. 그래야 국제적인 여론도 확산할 겁니다. 미국에서 보도하면 그걸 독립신문에서 받아서 재보도하는 것이 휠씬 효과가 클 것 같지 않아요?’

성재는 당시 임정이 거의 제 기능을 하지 못해서 이를 처리하고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라면 해외에서 보도하는 방안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우천은 임정의 사정을 감안해 볼 때, 그 말씀이 지당하다고 느끼신 것 같다.

‘그게 좋겠습니다’”


“유조는 황제가 붕어하면 즉시 공개하라”


▎조선의 마지막 황제 순종(왼쪽)은 총신(寵臣) 조정구에게 유조를 남겼다. 1926년 7월 8일 미국 신한민보에 실린 순종 유조 관련 기사.
이런 과정을 거쳐 순종의 유조는 황제 장례식 이후 미국의 한국 교민들이 발행하는 신한민보(1926년 7월 8일)에 실린다. 하지만 이 유조는 진위 논쟁으로 옮아갔다. 이에 대해 조계진은 다음과 같이 기억했다.

“내가 상해에 도착하는 계기로 이런 큰일을 이면에서 도왔다는 소문이 퍼지자 상해에 있는 분들이 나를 주시하게 되었다. 또 한편 내가 황실과 연결되었다는 점에서 경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조선 황실에 적의를 갖고 있는 분들, 특히 역대로 소외되었던 지방 사람들, 또한 나라를 제대로 나라답게 유지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황실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황제의 마지막 절규에도 그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다.”

조계진의 구술을 대필, 정리한 이종찬 광복회장은 이와 관련해 “일제는 순종의 유조가 임시정부에서 꾸민 것이라고 했다”면서 “순종의 유조가 미국의 신한민보에 실리기까지 조정구, 이규학을 거쳤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알려진 바가 별로 없다”고 말했다.

- 박성현 월간중앙 지역전문위원 park.sunghyun@joongang.co.kr

202309호 (2023.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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