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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석의 19세기 미시사 탐구(7)] 조선시대 관광은 어떤 형태였을까 

서민 삶에 ‘1박2일’ 여행은 언감생심 

주변의 자연 풍광을 당일치기로 구경하고 감상하는 수준에 그쳐
중국의 ‘소상팔경’ 전해진 이후 여덟 가지 경치 읊은 ‘팔경’ 유행


▎단원 김홍도의 ‘산수인물도’. 두 척의 배에 총 4명의 어부가 탔는데, 모두 노를 젓지 않고 있다. 고기잡이를 잠시 그치고 배 위에서 한가히 한때를 보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사진:문화재청
다른 지방이나 다른 나라에 가서 그곳의 풍경·풍습·문물 따위를 구경하는 것이 관광이다. 관광은 근래 거대한 산업이 돼 우주관광이나 심해관광 등 과거와 다른 차원의 다양한 종류가 생겨나고 있다. 관광산업이 GDP의 20% 이상을 차지하는 국가가 여럿 있고, 10% 이상인 나라도 상당수다. 이런 나라에서는 관광을 국가 기간산업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다. 또 한 나라 안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구경하기를 원하는 관광자원을 가지고 있는 지역은 이를 이용해 다른 지역보다 더 많은 소득을 올리고 있다.

산업으로서 관광은 근대의 산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아름답거나 진귀한 것을 보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은 원초적인 것이므로, 근대 이전에도 현재의 관광과 같은 것이 많이 있었다. 관광을 위해서는 여행을 해야 하는데, 조선시대 여행은 걸어가거나 나귀를 이용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간혹 아주 신분이 높은 사람은 가마를 타고 여행하기도 했다. 그리고 하루 동안 주변의 경치를 감상하는 관광에서부터 며칠이나 몇 달이 걸리는 여행까지 다양한 형태의 관광이 있었다.

과거의 관광은 주로 자연 풍광을 구경하는 것이었지만, 인간이 만들어놓은 인공적 문물을 관람하는 것도 포함됐다. 중세부터 있었던 기독교인이나 이슬람교도들의 성지순례는 이런 종류의 여행이라고 할 수 있다. 동양에서도 일찍이 종교적 목적의 여행이 있었다. 인도나 서역에서 불교를 전파하러 중국으로 긴 여행을 한 스님들이 있었고, 또 인도로 구도의 여행을 떠난 중국 승려도 많았다. [왕오천축국전]을 남긴 신라의 스님 혜초도 8세기 무렵 인도로 여행한 승려 중 하나였다. 혜초 이전에도 신라의 승려 가운데 중국에 공부하러 갔다가 인도까지 간 사람이 여러 명 있다.

조선은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삼은 나라였으므로, 유학의 시조인 공자나 그의 후계자인 맹자 그리고 주자학을 확립한 주희 등을 대단히 존경했다. 만약 조선시대에 외국 여행이 자유로웠다면 공자의 고향인 산동성 곡부현이나 주희가 자신의 학문을 완성시킨 복건성 무이산을 찾아간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과 일본에 가는 외교사절 이외에는 외국여행이 금지됐으므로, 조선인이 할 수 있는 여행은 국내로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외교사절의 여행이라고 하더라도 정해진 경로 외에는 갈 수 없었기 때문에 자유로운 외국여행은 불가능했다. 외국의 명승은 말할 것도 없고 국내 명승지도 구경하기 어려웠던 조선시대에는 직접 가지 못하더라도 책이나 그림을 통해 명승을 즐겼다. 이를 누워서 유람한다는 의미로 와유(臥遊)라고 했다.

소탈했던 조선시대 서민들의 관광

조선시대에도 관광이라는 용어가 현재와 비슷한 의미로 쓰였지만, 완전히 같은 의미는 아니었다. 현재의 관광과 비슷한 의미라면 ‘유람’이나 ‘만유’ 같은 단어를 생각해볼 수 있는데, 특별히 산을 오르며 구경하는 데 중점을 뒀을 때는 ‘유산’이라는 용어를 썼다. 유산은 현재의 등산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만, 등산이 산을 오르는 데 중점을 두는 것이라면 유산은 산에서 노닌다는 의미가 더 크다.

산에서 노닐면 바위나 산봉우리만 아니라 자연스럽게 계곡을 흐르는 물도 볼 수 있다. 또 나무와 꽃 같은 식물은 말할 것도 없고, 숲에 사는 여러 종류의 새나 길짐승도 만날 수 있다. 조선 후기에 유행한 노래 [유산가] 가사를 보면 산과 물은 물론이고 산에서 볼 수 있는 동물과 식물 등을 모두 노래하고 있다. 이렇게 산에서 논다는 의미의 ‘유산(遊山)’은 산의 정상을 향해 올라간다는 점에 초점을 맞춘 ‘등산(登山)’보다 훨씬 더 다양하게 산을 즐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산에 오르거나 산수를 즐기는 여행을 하면서 여행의 경로와 감흥을 글로 남겨놓기도 했는데, 이런 글에는 ‘유산기(遊山記)’라는 제목을 붙이는 경우가 많았다. 꽤 이름이 알려진 인물이 쓴 유산기만 하더라도 1000종류가 넘는다고 한다. 전해지지 않은 유산기까지 합한다면 그 수가 매우 많을 것이다. 왜냐하면 금강산, 묘향산, 백두산, 지리산, 설악산, 속리산, 가야산 등의 높고 유명한 산이 아니더라도 자신이 사는 고을 근처의 나지막한 산에서 노닐면서 써놓은 유산기도 많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근대 이후 서양에서 형성된 관광의 개념은 자연 풍광만 아니라 인간이 만든 인공물을 구경하는 것에 더 치중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유럽을 관광한다면 알프스나 지중해의 자연풍광을 구경하는 것보다는 프랑스 파리의 시가지나 이탈리아 로마의 유적을 보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시대 관광은 주로 자연 풍광을 감상하면서 그 안에서 노니는 것이었다.

조선에서 손꼽히는 아름다운 경치에는 대부분 누각이나 정자가 함께 있다. [춘향전]에서 춘향과 이도령이 처음 만나는 남원 광한루도 아름다운 누각으로 이름난 곳이다. 광한루 이외에도 경상도 진주의 촉석루와 밀양의 영남루, 평안도 평양의 연광정과 성천의 강선루, 전라도 전주의 한벽루와 태인의 피향정 등은 [춘향전]에서도 언급하는 유명한 누각이다.

중국 ‘소상팔경’과 한국의 팔경

이들 누각은 대체로 그 형태가 비슷했다. 건물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누각이 서 있는 장소의 경치와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가 중요했다. 현재 서울 마포구 합정동 한강변에는 조선시대 정자 망원정을 복원해놓은 것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아름다운 경치로 유명한 정자였지만, 강변북로의 시끄러운 자동차 소리가 들리는 콘크리트 강둑을 보면 더 이상 좋은 풍광 속의 누각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서울에서 지내다가 남원부사가 된 아버지를 따라 남원에 온 이도령은 그곳에서 보내는 하루하루가 심심하기 짝이 없었다. 뭔가 재미있는 일이 없을까 하고 이런저런 궁리를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도령은 서울에서 “삼월 봄바람 불고 꽃 피는 시절과 가을날 국화 피고 단풍 드는 때면 하루도 빼지 않고 술집과 기생집에서 노래와 춤과 술로 세월을 보냈다”고 스스로 말하는 인물이다. 그런데 이런 인물이 시골에 와서 아버지에게 밤낮 공부하라는 말만 들으니 생활이 재미있을 리가 없다.

하루는 이도령이 방자를 불러 남원의 경치를 완상하려고 하니 구경할 만한 곳을 말해보라고 한다. 이 말을 들은 방자는 중국과 조선의 명승지를 쭉 나열한 다음 남원에서 가장 경치가 좋은 곳은 광한루라고 대답한다. 이 대목에서 방자가 말하는 중국과 조선의 유명한 곳은 19세기 이 소설의 독자인 조선의 일반 서민도 잘 알고 있는 명승지라고 볼 수 있다. 방자가 먼저 예로 든 명승지는 중국 소상팔경과 조선 관동팔경이다.

중국의 소상팔경(瀟湘八景)은 동정호로 흘러들어가는 양자강의 지류인 상강(湘江)과 상강의 지류인 소수(瀟水)의 여덟 가지 경치를 말한다. 송나라 때 화가들이 이 풍경을 그렸고, 북송의 학자 심괄(沈括)은 [몽계필담]에서 아래의 여덟 가지를 말했다.

평사낙안(平沙落雁): 가을날 남쪽으로 와서 모래밭에 내려앉는 기러기.

원포귀범(遠浦歸帆): 저녁나절 멀리서 포구로 돌아오는 돛단배.

산시청람(山市晴嵐): 산 속 마을이 맑은 아지랑이에 싸여 있는 모습.

강천모설(江天暮雪): 겨울 날 어두워질 무렵 하늘과 강을 뒤덮은 눈.

동정추월(洞庭秋月): 동정호에 뜬 맑은 가을 달.

소상야우(瀟湘夜雨): 소수가 상강과 합류하는 곳에 내리는 쓸쓸한 밤비.

연사만종(烟寺晩鍾): 연무가 낀 강에서 듣는 청량사의 저녁 종소리.

어촌석조(漁村夕照): 저녁노을이 붉게 물든 어촌의 풍경.


중국 송나라에서 유행한 이 여덟 가지 풍경을 그린 그림의 제목은 이후 중국은 물론 한국과 일본에도 전해져 수없이 많은 그림과 시가 나왔다. 그리고 여덟 가지 경치라고 하는 ‘팔경’을 붙이는 것도 함께 유행해 다양한 팔경이 나오게 된다.

한국에서 잘 알려진 팔경은 강원도 관동팔경, 충청도 단양팔경, 평안도 관서팔경, 평양 기성팔경, 서울 국도팔경, 전주 완산팔경 등이 있다. 이렇게 유명한 것 외에도 수많은 팔경이 있다. 가장 유명한 팔경인 관동팔경은 조선시대 강원도 동해안의 여덟 가지 경치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순서대로 보면 통천 총석정, 고성 삼일포, 간성 청간정, 양양 낙산사, 강릉 경포대, 삼척 죽서루, 울진 망양정, 평해 월송정 등이다.

관동팔경 중 총석정과 삼일포는 북한에 있고, 울진군이 경상북도로 편입되면서 망양정과 월송정은 경북 지역이 됐다. 현재 망양정과 월송정은 모두 울진군에 들어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울진과 평해가 각기 독립된 행정구역이었으므로 울진 망양정과 평해 월송정이라고 불렀다.

어떤 지역의 아름다운 경치가 반드시 여덟 가지만은 아니겠지만, 중국의 ‘소상팔경’이 한국과 일본으로 퍼진 이후 경치를 읊은 시와 노래는 ‘팔경’이 대세가 됐다.

고려의 수도인 개성(송도)의 볼 만한 경치를 읊은 고려 시인 이제현의 ‘송도팔경’은 매우 유명한 작품이었다. 조선 건국의 주역인 정도전도 새로 옮긴 수도 서울의 여덟 가지 경치를 ‘신도팔경’에서 노래했다.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한 이래 조선의 수도 서울의 아름다운 경치를 노래한 작품은 무수히 많다. 이런 작품은 대부분 저명한 지식인들이 한문으로 쓴 한시다.

정조가 읊은 ‘서울팔경’은 어디?


▎단원 김홍도가 정조의 어명으로 금강산과 ‘관동팔경’ 지역을 여행하며 그린 ‘낙산사도’.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팔경’이 관동팔경이다.
서울의 팔경을 묘사한 시는 조선의 임금들도 많이 썼는데, 그중 정조 임금이 쓴 작품도 있다. 정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 지은 시 가운데 ‘국도팔영(國都八詠)’이라는 작품이 있는데, “우리나라 서울의 여덟 가지 경치를 읊다”는 의미다. 서울의 경치를 시로 지은 임금들의 작품은 대체로 국가를 다스리는 임금의 자세가 드러나는 내용이다. 그러나 정조의 국도팔영은 순수하게 자신이 보고 느낀 서울의 경치를 읊었다.

정조는 사물을 관찰하는 능력이 뛰어난 인물이므로 국도팔영에서 읊은 여덟 가지 경치는 당대 최고 수준의 서울 팔경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시에서는 다음과 같이 여덟 가지 경치를 노래했다.

필운화류(弼雲花柳): 필운동의 꽃과 버들.

압구범주(狎鷗泛舟): 압구정 앞 한강의 뱃놀이.

삼청녹음(三淸綠陰): 삼청동의 우거진 수풀.

자각관등(紫閣觀燈): 남산에서 보는 관등놀이.

청계간풍(淸溪看楓): 청운동 계곡의 단풍놀이.

반지상련(盤池賞蓮): 반지의 연꽃 감상.

세검빙폭(洗劍氷瀑): 세검정의 얼음 폭포.

통교제월(通橋霽月): 광통교에서 보는 맑은 달.


정조는 국도팔영에서 꽃피는 봄, 녹음이 우거진 여름날, 가을의 단풍, 겨울의 얼음폭포 등을 읊으면서 그 사이사이에 각 계절의 흥취를 보여주는 뱃놀이, 사월초파일의 관등, 연꽃 핀 연못, 다리 위에서 보는 달 등을 끼워 넣었다.

이 시에 등장하는 지명 대부분은 현재도 그대로 쓰고 있는데, 다만 풍경이 바뀌었을 뿐이다. 필운동, 압구정, 삼청동, 남산, 세검정, 광통교 등은 지금도 그 이름이 남아 있다. 현재는 복개해서 보이지 않는 청운동을 흐르던 시내가 청계(청풍계)고, 반지(반송지)는 독립문 근처에 있던 연못이다.

필운·압구·삼청 등 남은 지명 여럿


▎단원 김홍도의 ‘마상청앵도’. 한 선비가 꾀꼬리 노니는 소리에 말을 멈추고 버드나무 위를 무심히 바라보는 모습을 그렸다. / 사진:문화재청
중국 소상팔경에서 따온 수많은 조선의 팔경을 읊은 시는 모두 한문으로 지은 것이므로, 이런 시에서 볼 수 있는 경치는 결국 양반 지식인이 즐긴 것이다. 19세기 조선의 서민들 중 자신이 즐긴 경치를 기록으로 남긴 것은 보기 힘들다. 따라서 서민 여행이나 관광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알 길이 없다. 그러나 19세기 조선 서민들이 양반 지식인처럼 며칠씩 또는 몇 달씩 명승지를 여행하며 관광할 수 없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므로, 이들의 관광은 자신이 사는 근처의 명승지를 하루 정도 구경하는 것이었다.

방자가 이도령에게 남원에서 구경할 만한 곳을 말하기 전 중국과 조선의 유명한 경치를 쭉 나열했지만, 이런 곳은 서민이 가기에 너무나 먼 곳이다. [춘향전]의 작자는 당대 서민이므로, 좋은 경치라고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는 곳은 자신이 사는 곳을 얘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서울에서 나온 원본 [춘향전]의 작자는 자신이 아는 서울의 볼 만한 경치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동쪽으로는 불암사, 서쪽으로 진관사, 남쪽으로 삼막사, 북쪽으로 승가사”라며 서울 근교 불교사찰 네 군데를 말한 것이다. 조선시대 도성 안에는 사찰이 없었지만, 위로는 왕실 부녀자부터 아래로 서민 남녀까지 불교도가 매우 많았다. 그러므로 도성에서 10리나 20리쯤 떨어진 경치 좋은 곳에 위치한 사찰은 서울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었다. 위에서 본 정조가 지은 시에서 사월초파일 석가탄신일이면 서울 시내에 등을 단 집이 매우 많았다고 말한 것을 통해서도 일반 백성 사이에서 불교가 여전히 성행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춘향은 이도령과 헤어질 때, 서울에 가서 경치 좋은 곳에서 이름난 기생과 놀더라도 자신을 잊지 말고, 또 공부 열심히 해 과거에 급제해 좋은 여자와 결혼하더라도 자신을 잊지 말라고 당부한다. 이때 춘향이 예로 든 경치 좋은 곳은 필운대, 소격서, 탕춘대, 한강 강변 등이다. 현재 지명으로 보면 필운대는 필운동이고, 소격서 자리는 삼청동이며, 탕춘대는 자하문 밖 세검정 근처다.

남원에 사는 춘향이 서울 유명한 경치를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서울의 이런 곳이 전국적으로 잘 알려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서울에서 나온 [춘향전]의 작자가 잘 알고 있는 서울의 명소를 말한 것이라고 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18세기 후반의 임금인 정조와 19세기 초의 [춘향전] 작자가 생각한 서울의 명소는 대체로 같다. 이는 정조가 서민 눈높이로 서울 경치를 바라본 것일 수도 있고, 또는 19세기 서울 서민들이 즐긴 경치는 이미 국왕이 즐긴 것과 큰 차이가 없는 것일 수도 있다.

※ 이윤석 - 한국 고전문학 연구자다. 연세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고, 2016년 연세대 국어국문학과에서 정년 퇴임했다. [홍길동전]과 [춘향전] 같은 고전소설을 연구해서 기존의 잘못을 바로잡았다. [홍길동전] 이본(異本) 30여 종 가운데 원본의 흔적을 찾아내 복원했을 뿐만 아니라 작품 해석 방법을 서술했다. 고전소설과 관련된 저서 30여 권과 논문 80여 편이 있다. 최근에는 [홍길동전의 작자는 허균이 아니다]와 같은 대중서적도 썼다.

202309호 (2023.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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