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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경률의 노래하는 한국사(17)] ‘모죽지랑가’와 신라 화랑의 삼국통일 분투기 

“그 찬란한 영광이 파국을 몰고 올 줄이야” 

신라, 당(唐)나라가 평양 이남과 백제 영토 준다는 약조 깨자 전쟁 돌입
전쟁 후 대숙청… 신문왕, 화랑 출신 공신과 외척 제거해 통치체제 강화


▎영화 〈황산벌〉에서 신라 대장군 김유신(왼쪽)과 백제 결사대를 이끈 계백이 막사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 사진:쇼박스
"간 봄 그리매 / (임께서) 더 못 살아 울어 설워하더이다 / 애달픔 나토시던 모습이 / 해 거듭하는 즈음에 개더이다 / 눈 돌이킬 새 / 만나 뵙기 어찌 지으오리까 / 낭이여, 그리는 마음에 가올 길 / 다북쑥 마을에 잘 밤 있사오리까”([삼국유사] 기이 ‘효소왕대 죽지랑’)

누구에게나 인생의 봄날은 있다. 득오에게는 풍류황권(風流黃卷, 신라 화랑도의 명부)에 이름을 올리고 화랑 죽지를 따르던 낭도 시절이 그리운 봄날이었나 보다. 죽지는 효소왕(재위 692~702) 때 세상을 떠난 것으로 보이는데, 득오가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를 지어 사모와 애도의 정을 노래했다.

죽지가 화랑으로 활동하던 때는 진평왕(재위 579~632) 말년으로 추정된다. 신라 화랑도는 애초 청소년 수양 단체로 출발했는데, 이 무렵에는 국가 인재 등용문이라 할 만큼 위상이 높아졌다. 이에 김대문은 [화랑세기] 서문에서 “어진 재상과 충성스러운 신하가 여기에서 나왔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사가 이로부터 생겨났다”라고 했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죽지의 행적은 신라가 요구하는 인재상이었다. 낭도 득오가 산성 창고지기로 징발됐는데 알고 보니 군대 지휘관의 밭에서 부역했다. 화랑 죽지는 고생하는 낭도를 격려하고 휴가를 요구해 지휘관의 비리에 항의했다. 사람들은 아름다운 풍모라고 칭송했다. 어리지만 싹수가 보인다. 죽지는 장성해 진덕여왕(재위 647~654)부터 신문왕(재위 681~692)까지 4대에 걸쳐 재상을 지내며 나라를 안정시켰다.

재상이자 장수로서 김유신 보필한 죽지


▎1926년에 발간된 ‘조선명현초상화사진첩’에 실린 김유신의 초상화. / 사진:Wikimedia Commons(Public Domain)
그는 삼국통일 전쟁에도 굵직한 발자취를 남겼다. 장수로서 김유신을 도와 대업을 이룩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김유신은 화랑도의 우두머리인 풍월주(風月主)를 지낸 인물이다. 15세에 화랑이 됐는데 신라를 자주 침범하던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하고자 명산에 올라 기도하고 수련했다. 김유신은 화랑도를 전사 집단으로 탈바꿈시켰고, 삼국통일 전쟁에 화랑 출신들을 앞장세웠다. 문무를 겸비한 죽지는 김유신을 충실히 보필했다.

[삼국사기]에서 죽지가 전장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진덕여왕 3년(649) 도살성 전투였다. 백제 장군 은상이 대군을 거느리고 신라의 7개 성을 함락시키자 대장군 김유신은 죽지, 천존, 진춘 등을 부장으로 삼아 반격에 나섰다. 도살성 아래에서 김유신은 지원군이 온다는 거짓 정보를 흘려 백제군 지휘부를 교란시키고 대승을 거두었다. 죽지는 대장군을 가까이서 보좌하며 그의 출중한 지략을 배우고 익혔다.

진덕여왕 재위기는 김춘추가 당태종을 만나 나당 동맹을 약속받고, 김유신이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할 준비에 착수할 때다. 김유신은 전투에만 출중한 장수가 아니었다. 당시 그는 알천, 임종, 술종, 호림, 염장 등과 남산 우지암에 모여 나랏일을 의논했다. 그들은 모두 김유신의 위엄에 복종했다([삼국유사] 기이 ‘진덕왕’). 김유신이 화랑 출신 중진들을 끌어들여 자문회의를 조직하고 강력한 카리스마로 국정을 주도한 것이다.

651년 2월에는 조정에 집사부(執事部)를 설치하고 죽지를 초대 중시(中侍)로 발탁했다. 집사부는 나라의 기밀 사무를 맡아보는 기구였다. 기밀 사무의 골자는 백제와 고구려에 대한 군사 업무 내지는 첩보 활동이었을 것이다. 이는 삼국통일 전쟁을 준비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 무렵 김유신은 첩자 조미압을 백제에 들여보내 좌평 임자를 포섭하고 적국의 사정을 염탐했다. 이런 일을 실무적으로 관장한 기구가 집사부였으리라.

집사부 수장은 김유신이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이어야 했다. 죽지는 남산 우지암 회의에 참여하는 술종의 아들로 화랑 시절부터 좋은 평판을 쌓아왔다. 김유신은 그를 전장에 데리고 다니며 유능함과 성실성을 직접 확인했다. 집사부 중시에 적합한 인재라고 여겼을 것이다. 죽지는 4년간 이 중책을 훌륭히 수행하며 삼국통일 전쟁 준비에 공헌했다.

황산벌 넘어 사비로 진격한 화랑정신


▎충남 부여 능산리 고분군 의자왕과 태자 부여융의 가묘. 오른쪽이 의자왕 묘다.
654년 진덕여왕이 세상을 떠나고 김춘추가 왕위에 오르면서 백제·고구려 정벌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태종무열왕(재위 654~661)은 당나라에 백제를 먼저 치자는 뜻을 전했다. 방심하고 있는 백제부터 멸하고 고구려를 남북에서 협공한다면 난공불락인 평양성도 함락시킬 수 있을 터였다. 고구려 평정에 애를 먹어온 당나라가 이를 수락했다.

660년 7월 9일 대장군 김유신은 신라 정예병 5만을 거느리고 탄현을 넘어 황산벌로 진격했다. 대총관 소정방이 이끄는 당나라 13만 대군도 기벌포에 상륙해 성대한 진영을 구축했다. 나당연합군의 백제 정벌이 막을 올린 것이다. 백제 의자왕은 설마 했던 나당연합군의 출현에 당황했던 것 같다. 예상치 못했기에 도성을 방어할 병력이 모자랐다. 어떻게든 진격을 저지하면서 시간을 벌어 지방의 병력을 불러모아야 했다.

그나마 백제 장군 계백과 5000명의 결사대가 선전했다. 황산벌로 발 빠르게 움직여 험준한 곳에 진영을 설치하고 5만 신라군을 네 차례나 격퇴한 것이다. 김유신 군단은 병력이 10배나 많았지만, 계백군의 강력한 저항을 뚫지 못했다. 이 난관을 돌파하고 전세를 역전시킨 것은 화랑 관창이었다. 16세 소년이 창 한 자루 들고 말에 올라 적진으로 달려 들어갔다. 자신을 희생해 아군을 격분시키는 화랑도의 전술이자 제의(祭儀)였다.

“내 아이의 얼굴이 살아있는 것 같구나! 왕을 위하여 죽을 수 있었으니 다행이다.”([삼국사기] 신라 본기 태종무열왕 7년 7월 9일)

관창의 아버지 좌장군 품일이 옷소매를 피로 물들이며 자식의 머리를 들어 올리자 신라군은 슬퍼하며 일제히 진격했다. 어쩌면 백제의 운명을 바꿀 수도 있었던 계백과 5000명 결사대의 분전은 그렇게 마침표를 찍었다.

7월 12일 나당연합군은 사비성을 향해 진격했다. 소정방은 막사 위를 맴도는 새가 불길하다며 진군을 꺼렸지만, 김유신이 백제군이 모여들기 전에 쳐야 한다고 설복했다. 연합군의 맹공에 사비성은 맥없이 무너졌다. 660년 음력 7월 18일 웅진으로 도망갔던 의자왕이 돌아와 항복했다. 백제가 멸망한 날이다.

당나라는 백제 땅에 웅진도독부 등을 설치하고 낭장 유인원에게 군사 1만 명을 주어 지키게 했다. 당나라 영토로 삼아 직접 지배하겠다는 야욕을 드러낸 것이다. 신라로서는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었다. 태종무열왕은 648년 당나라에 들어가 군사동맹을 맺으면서 당태종으로부터 중요한 약조를 받은 바 있다.

“내가 고구려와 백제를 평정하면 평양 이남과 백제 땅은 모두 너희 신라에게 주어 길이 편안하게 하겠다.”([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11년 7월 26일 ‘답설인귀서’)

평양 이남과 백제 땅은 신라의 몫이었다. 당나라의 웅진도독부 설치는 약속 위반의 징조였다. 신라로서는 할 말이 많았을 테지만 일단 참기로 했다. 고구려마저 평정해야 발효되는 약조였다. 동맹의 도리를 다해 명분과 조건을 갖추는 게 우선이었다. 당나라의 야욕은 곧 심각한 도전에 직면했다. 지배층의 방심으로 나라가 망했지만, 백제인들은 굽히지 않았다. 백제 부흥 세력이 각지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부흥군은 주류성과 임존성을 근거지로 삼고 200여 개의 성을 탈환했다. 심지어 사비성까지 에워싸며 당나라군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웅진도독 유인궤는 신라에 구원을 요청했다.

661년 6월 태종무열왕이 세상을 떠나고 맏아들 법민이 왕위에 올랐다. 문무왕(재위 661~681)은 군사를 백제 땅으로 보내 부흥군을 진압했다. 성을 함락시키면 신라의 관리와 군사들을 두었다. 사실상 영토를 확보한 것이다. 단, 당나라를 의식해 사비성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들을 취했다.

당나라는 663년 백제 왕자 부여융을 웅진도독으로 삼아 백제인들을 회유하고, 장군 손인사와 군사 7000명을 추가로 파병해 부흥군을 뿌리 뽑고자 했다. 문무왕도 그해 7월 김유신, 죽지 등 28명의 장군을 거느리고 직접 출전했다. 그러자 백제 부흥군은 열세를 만회하려고 왜국을 끌어들였다.

8월에 나당연합군과 백제·왜 동맹군의 국제전이 벌어졌다. 신라군은 손인사·유인원이 이끄는 당나라 육군과 함께 주류성으로 진격해 부흥군 본거지를 함락시켰다. 신라 기병이 선봉에 나서 적진을 돌파하며 맹활약했다. 유인궤·부여융의 당나라 수군은 백강 어귀에서 왜국 선단과 싸워 400척을 불태웠다. 나당연합군의 승리였다. 이로써 백제 부흥군은 섬멸했지만, 백제 영토를 둘러싼 신라와 당나라의 갈등이 고조됐다.

고구려 정벌과 신라의 헌신, 그러나…


▎나당전쟁 중 신라가 당나라 20만 대군을 물리친 매소성 전투 기록화. / 사진:전쟁기념관
660년 백제를 멸하고 나서 당나라는 여세를 몰아 고구려 정벌에 착수했다. 소정방은 661년 8월 배를 타고 패강(대동강)으로 들어가 평양성을 포위했다. 하지만 다른 방면의 장수들이 군사를 돌리거나 패해 전사하는 바람에 소정방 군단은 평양에 고립되고 말았다. 곧 겨울이 닥쳤고 군량마저 떨어졌다. 군사들은 큰 눈에 갇혀 굶주리고 지쳐갔다.

당나라의 긴급 요청을 받고 신라군이 평양으로 출동했다. 한겨울에 적지 한가운데를 관통해 군량을 수송하는 극히 위험한 임무였다. 어쩌면 전투보다 어려운 그 일을 노장 김유신이 맡았다. 662년 1월 칠중하(임진강)를 건넌 수송대는 고구려군과 싸우면서 눈보라를 뚫고 나아갔다. 보급은 극적으로 성공했고 당나라군은 구사일생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죽지는 전해에 귀당총관이 됐는데, 귀당도 이 수송 작전에 참여해 김유신을 도왔다.

665년 고구려 대막리지 연개소문이 세상을 떠나자 권력을 두고 장남 남생과 차남 남건이 내분을 일으켰다. 666년 남생이 당나라에 투항하면서 전황이 급변했다. 당나라는 고구려 평정의 호기로 보고 대규모 정벌군을 편성했다. 667~668년 당나라군은 신성, 부여성 등 요동의 요충지를 함락시키고 압록강을 넘어 평양성으로 진격했다.

668년 6월 신라 문무왕은 김유신을 대당대총관으로 삼고 20만 대군을 일으켜 북진했다. 죽지는 경정총관으로 동참했다. 평양에 이른 신라군은 당나라군과 연합해 성을 포위했다. 7월에는 사수(대동강 지류)로 나온 고구려군을 신라군이 선봉에서 격파해 평양성의 사기를 꺾었다. 9월에 당나라 대총관 이적이 평양성에 진입할 때도 신라 기병 500명을 뽑아 성문을 돌파했다. 668년 음력 9월 21일 고구려는 결국 패망했다.

당나라는 고구려 땅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설인귀에게 2만 병력을 주어 지키게 했다. 백제에 이어 고구려 땅까지 독차지하려 한 것이다. 신라의 공은 손톱만큼도 인정하지 않았다. 지금껏 동맹에 헌신한 신라도 더는 참지 않았다. 이제 전쟁이다!

나당전쟁 최대 승부처, 매소성 전투


▎영화 [황산벌]에서 계백 장군이 5000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5만 신라군에 맞서 최후의 결전을 펼치고 있다. / 사진:쇼박스
670년 3월 신라 사찬 설오유와 고구려 태대형 고연무가 각각 정예병 1만 명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오골성에 이르렀다. 4월에 당나라군과 싸워 크게 이기고 백석성으로 물러나 지켰다. 당시 안동도호부는 고구려 부흥군의 활동과 고구려인 강제이주 정책에 따라 요동으로 옮긴 상태였다. 또 안동도호 설인귀는 토번(티베트)과의 전쟁에 대총관으로 차출됐다. 신라는 지금의 황해도 일대를 장악한 고구려 부흥군과 손잡고 압록강까지 넘나들었다.

본격적인 나당전쟁은 백제 영토에서 벌어졌다. 문무왕은 670년 7월에 군사를 일으켜 웅진도독부와 백제 유민 세력을 쳤다. 죽지를 포함한 여러 장수가 지금의 전라도 지역을 중심으로 82개 성을 빼앗았다. 671년에는 웅진도독부로 조여 들어갔다. 6월에 장군 죽지가 가림성(부여)의 벼를 밟아 적의 군량 공급을 끊고, 석성(부여)에서 당나라군과 싸워 5300명을 베었다. 당나라 웅진도독부를 무너뜨린 것이다.

“오호라! (백제와 고구려) 두 나라를 평정하기 전에는 발자취를 쫓는 부림을 입더니 들에 짐승이 모두 없어지자 오히려 요리하는 이의 습격과 핍박을 받는 꼴입니다.”([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11년 7월 26일 ‘답설인귀서’)

‘답설인귀서’는 671년 당나라 계림도행군총관 설인귀가 보낸 편지에 대해 신라 문무왕이 답장을 한 것이다. ‘계림도행군총관’이라는 직명은 ‘신라 정벌사령관’을 뜻한다. 설인귀는 신라가 당나라의 은혜를 배반했다며 사실상 선전포고를 했다. 이에 문무왕은 공손하면서도 결기 넘치는 문장으로 신라가 전쟁을 선택한 이유를 시원하게 밝혔다. 당나라가 신의를 저버리고 토사구팽을 하려 하니 신라의 것을 스스로 쟁취하겠다는 결의였다.

신라군과 고구려 부흥군은 673년부터 임진강과 한강 사이에 포진한 150여 개의 성을 방벽 삼아 당나라군의 남하를 저지했다. 일진일퇴의 뜨거운 공방전이 계속됐다. 후방에서의 심리전도 치열했다. 674년 당나라 고종은 문무왕의 관작을 삭탈하고 장안에 머물던 왕의 동생 김인문을 신라왕에 봉했다. 그러자 문무왕은 영묘사 앞길에서 군대를 사열하고 설수진의 육진병법을 펼쳐 보이며 신라인의 전의를 다졌다.

675년 9월 29일에 벌어진 매소성 전투는 나당전쟁의 최대 승부처였다. 기병, 거란병, 말갈병으로 이루어진 당나라 20만 대군이 매소성(연천)과 들판을 뒤덮고 있었다. 신라의 9개 군단은 맞은편 협곡에 진을 쳤다. 새로운 전법과 무기를 갖추고 결전을 기다렸다. 이윽고 당나라 장수 이근행의 진격 명령이 떨어졌고 20만 대군이 쏟아져 나왔다.

당나라 기병의 돌격전은 긴 창을 겨눈 신라 장창당(長槍幢)의 밀집대형에 가로막혔다. 속도를 잃은 기병은 보병의 먹잇감일 뿐이다. 거란병과 말갈병의 전열은 비처럼 쏟아지는 신라 노당(弩幢)의 쇠뇌 화살에 속절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당나라군은 쓰러져 죽거나 뿔뿔이 흩어졌다. 신라군은 적의 전마 3만380필을 얻었다. 기념비적인 대승이었다.

육군이 와해되자 당나라는 마지막으로 물길을 노렸다. 676년 11월 설인귀가 이끄는 병선들이 기벌포 앞바다에 나타났다. 백제 땅으로 들어가는 금강 어귀였기에 신라군이 철저히 대비하고 있었다. 양군은 바다와 육지에서 22번 싸웠고, 신라군이 적병 4000명의 목을 베고 이겼다. 7년에 걸친 나당전쟁이 신라의 승리로 마침표를 찍는 순간이었다. 나당동맹 이후 30년 가까이 이어진 삼국통일 전쟁! 최후의 승자는 신라였다.

‘모죽지랑가’에 어른거리는 공신 숙청

김유신은 673년 삼국통일을 코앞에 두고 7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신라를 도탄의 수렁에서 건져내고 삼국통일 전쟁을 승리로 이끈 수호신이었다. 특히 죽지와 같은 화랑 출신 인재들을 나라의 동량으로 키워 역사적인 대업을 이룩했다. 신라 화랑도를 삼국통일의 빛나는 주역으로 만든 것이다. 하지만 그 찬란한 영광이 파국을 몰고 올 줄이야.

681년 문무왕에 이어 즉위한 신문왕은 장인 김흠돌을 역모로 몰아 처형했다. 병부령 김군관도 역모를 알았지만, 고하지 않았다며 자결하게 했다. 김흠돌은 김유신과 문명왕후의 조카였고, 김군관은 문무왕 때 상대등을 역임했다. 두 사람 다 화랑도의 풍월주를 지냈으며, 삼국통일 전쟁에서 공을 세웠다. 신문왕은 화랑 출신의 전쟁 공신들을 숙청하고 왕권 강화에 나섰다. 화랑도는 한동안 폐지됐고, 군부는 새롭게 재편됐다.

큰 전쟁이나 건국 이후에는 늘 대숙청이 뒤따른다. 통치체제 안정은 공신과 외척의 피를 대가로 요구한다. 그럼 화랑 출신 공신이었던 죽지의 여생은 어땠을까? ‘모죽지랑가’의 회상조 가사에 한 시대가 저무는 풍경을 처연히 지켜보는 그이가 어른거린다.

“애달픔 나토시던 모습이 / 해 거듭하는 즈음에 개더이다”

※ 권경률 - 역사 칼럼니스트이자 작가. 서강대에서 역사를 공부했다. 새로운 해석과 기발한 상상력으로 한국사에 숨결을 불어넣는다. 유튜브·페이스북에 ‘역사채널권경률’을 열어 독자들과 역사 하는 재미를 나누고 있다. [모함의 나라](2022), [시작은 모두 사랑이었다](2019), [조선을 새롭게 하라](2017) 등을 썼다.

202308호 (2023.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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