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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호의 상해임정 27년사(17)] 일제의 현상수배 피해 은밀히 움직인 이승만의 6개월 

대통령 이승만, 태평양을 밀항해 상해로 가다 

밀항 준비 위해 주(州) 경계 넘다 비서 김노디와의 불륜 의혹 휩싸이기도
선원에게 밀항 발각돼 밤낮 4시간씩 갑판에서 망 보는 일하며 위기 넘겨


▎이승만 대통령이 1939년 10월 25일 하와이 한인기독교회에서 독립운동단체 고문단과 함께 있는 모습. 뒷줄 오른쪽에서 둘째 모자 쓴 사람이 김노디. / 사진:이승만연구원
[이승만일기]에 의하면, 대통령 이승만은 1920년 6월 12일 오전 기차로 워싱턴을 출발했다. 장차 상해임정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이승만은 다음날 한밤중 오하이오 주의 클리블랜드에 도착해 그곳 호텔에 숙박했다.

당시 일제는 이승만에게 36만 불(弗)이라는 거액의 현상금을 걸어 놓은 상황이었다. 따라서 이승만의 움직임은 은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이승만은 클리블랜드에서 6월 14일 오전 김노디, 김신실, 주영순 등 3명의 여대생을 만났다.

그 여대생들은 이승만이 하와이에 있었을 때 클리블랜드 주변의 오벌린 대학에 유학시킨 인재들이었다. 오벌린 대학은 청교도 윤리가 팽배한 미국 사회에서 일찌감치 남녀공학을 시행한 대학으로 유명했다. 이승만은 김노디, 김신실, 주영순 등을 미래 세대의 여성 지도자로 육성하기 위해 오벌린 대학으로 유학시켰던 것이다.

실제로 김노디, 김신실 등은 한국 현대사의 유력한 여성 지도자로 성장했다. 예컨대 김신실은 한국 여성으로서는 특이하게 체육학을 전공했다. 귀국 후, 이화여대 교수가 된 김신실은 여자 무용, 여자 농구, 여자 하키 등 여성 체육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또한 김노디는 이승만의 수양딸로 오벌린 대학에 다니면서 이승만 비서 역할도 겸하고 있었다. 1922년 오벌린 대학을 졸업한 김노디는 훗날 하와이 독립운동을 이끌어간 여성 지도자로 성장했다. 이런 공로를 인정해 대한민국 정부는 2021년 9월 김노디 여사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이런 배경을 감안한다면, 1920년 6월 14일 오전에 이승만이 김노디, 김신실, 주영순 등을 만난 이유는 상해임정으로 가 있을 동안 미국과의 연락 또는 미국에서의 독립운동 추진 등에 관한 문제를 밀의하기 위해서라고 이해된다. 또한 이승만이 클리블랜드에서 숙박한 이유 역시 주변에 있는 오벌린 대학의 학생들인 김노디, 김신실, 주영순 등과의 만남을 위해서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날 오후 1시 33분 이승만은 학생들과 헤어져 시카고로 향했다. 물론 김노디, 김신실, 주영순 등은 오벌린 대학으로 돌아갔다. 이승만은 이후 시카고에 도착해 그곳 호텔에 숙박했다. 그런데 이승만은 15일에 시카고를 떠나지 않고 더 머무르다가 16일이 돼서야 출발했고, 당일 오후 7~8시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이승만일기]에는 6월 15일에 왜 이승만이 시카고에 머물렀는지 설명이 없다. 하지만 다른 기록에 의하면, 당시 이승만은 비서 김노디를 기다렸고, 김노디와 함께 기차로 시카고에서부터 샌프란시스코까지 함께 갔다. 이유는 하와이에서 상해임정으로 가기 위한 문제 및 하와이에서의 독립운동 등을 논의하기 위해서라고 이해된다. 당시 이승만이 이런 은밀한 문제를 허심탄회하게 논의할 수 있는 사람은 수양딸이자 비서인 김노디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승만, ‘불륜’ 신고로 미국 이민국 조사 받아


▎1920년 3월1일 미국 워싱턴에서 3·1절 1주년 기념식을 마치고 기념촬영을 한 임정 구미위원부 간부들. 앞줄 가운데가 이승만 대통령, 그 오른쪽이 김규식 박사, 그 오른쪽이 이희경 의학박사 초대적십자회장.
11월 16일 오후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이승만은 11월 19일 새크라멘토에 갔다가 11월 20일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왔다. 뒤이어 교민 환영회 등으로 샌프란시스코에서 이틀을 보내고 11월 22일 오후 4시 샌프란시스코 항구를 출항해 11월 29일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승만일기]에는 7월부터 10월까지 3개 월 동안 이승만의 행적이 거의 기록되지 않았다. 특별히 중요한 일이 없어서 생략했을까 짐작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동안 이승만은 뜻하지 않게 김노디와의 불륜 의혹으로 미국 이민국의 조사를 받았던 것이다.

이와 관련해 지난 2012년 12월에 민족문제연구소는 ‘백년전쟁-두 얼굴의 이승만-’이라는 영상을 제작, 공개해 큰 물의를 일으켰다. 이 영상에서 민족문제연구소는 이승만과 김노디가 실제 불륜을 저지른 것처럼 교묘하게 왜곡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이승만을 옹호하는 측에서 격렬한 항의와 소송을 제기했고, [뉴데일리]와 [조선일보] 등에서 몇 차례 반박 기사를 게재하기도 했다.

[뉴데일리]와 [조선일보]의 반박 기사는 ‘미국국립기록관리청(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의 ‘미국 이민국 기록’을 근거로 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예컨대 2013년 3월 16일자 [뉴데일리] 기사에서 박성현 주필은 ‘백년전쟁의 흉측한 뽀샵 모략 질에 숨은 비밀!’이라는 자극적 제목으로 이승만과 김노디의 불륜 의혹이 발생한 배경·과정·결과 등을 정리했다.

그 기사에 의하면, 이승만과 김노디의 불륜 의혹은 구타펠(Gautafel)이라는 미국 여성이 시카고 이민국에 신고함으로써 발생했다. 본래 구타펠은 시카고 지역에서 한국독립운동을 후원하던 미국 여성이었는데, 1920년 4월 이승만에 의해 해고됐다. 이에 앙심을 품은 구타펠은 이승만과 김노디가 시카고에서 같은 기차를 타고 샌프란시스코로 간 사실을 알고 시카고 이민국에 신고했다.

당시 청교도 윤리가 팽배한 미국에서는 부부가 아닌 남녀가 같은 기차를 타고 주(州) 경계를 넘는 행위를 불륜으로 처벌하는 ‘맨법(Mann Act)’이 시행되고 있었다. 구타펠은 이승만과 김노디를 ‘맨법’ 위반으로 시카고 이민국에 신고했던 것이다.

시카고 이민국에서는 그 신고를 기초로 1920년 6월 22일 샌프란시스코 이민국 등 서부지역 대도시 이민국에 공문을 보내 이승만과 김노디 사건을 조사할 것을 의뢰했다. 그 공문에는 ‘가끔씩 얼굴을 부들부들 떠는 40대 한국인 이승만(당시 45세)이 오벌린 대학 재학 중이며 YMCA, YWCA, 교회 등지에서 연설하고 다니는 22살 처녀 김노디를 끼고 미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맨법을 위반하고 있다’는 내용이 있었다. 시카고 이민국에서는 7월 12일과 8월 2일 이승만과 김노디 사건을 속히 조사할 것을 재촉하는 공문을 보냈다.

이에 캘리포니아 이민국에서는 8월 9일 하와이 이민국으로 공문을 보내 이승만과 김노디 사건을 조사하라고 명령했다. 당시 이승만과 김노디가 하와이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와이 이민국에서 이승만과 김노디 사건을 조사해 8월 27일 캘리포니아 이민국에 결과를 보고했는데, 핵심내용은 사실무근이라는 것이었다.

부부 아닌 남녀가 주 경계 넘으면 불륜 간주


▎이승만 전 대통령이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와 결혼 후 하와이에 들러 찍은 사진. 이승만은 1933년 제네바 국제연맹회의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중, 프란체스카 여사를 만나 1934년 10월 뉴욕 몽클레어 호텔에서 결혼했다.
사건 조사 때, 김노디는 하와이의 가족을 만나기 위해 기차를 탔다가 시카고에서 우연히 이승만을 만났다고 진술했는데, 이는 상해임정으로 가려는 이승만의 일정을 비밀로 하기 위해서라고 이해된다. 겉으로 김노디는 하와이의 가족을 만나러 간다고 했지만, 실제는 이승만의 상해 밀항을 돕기 위해 또 하와이 독립운동을 논의하기 위해 시카고에서 이승만과 만났다고 이해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일 것이다. 하와이 이민국의 조사결과 이승만과 김노디 사건은 무혐의로 종결됐다. 요컨대 구타펠의 신고는 무고였던 것이다.

이런 사실로 본다면, 6월 30일 하와이에 도착한 이승만은 상해로 갈 방법을 은밀하게 찾다가 뜻하지 않게 구타펠의 무고에 말려들어 8월 한 달 동안 고생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하와이에는 일본인들이 적지 않게 거주했다. 따라서 이승만은 김노디 사건을 공개할 수도 없었다. 최대한 은밀하게 조사를 받았고, 또 그것이 무고임을 은밀하게 밝힐 수밖에 없었다.

김노디 사건이 일단락된 후, 이승만은 임병직을 하와이로 불렀다. 당시 27살의 임병직은 오하이오주립대학교에 재학 중이었는데, 3·1운동 이후 이승만의 비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즉 임병직과 김노디는 당시 이승만의 비서로서 측근 중의 측근이었던 것이다. 이승만의 부름을 받은 임병직은 1920년 10월 12일 하와이에 도착했다. [임병직 회고록]에 의하면, 당시 이승만은 하와이의 한인 학교와 한인교회를 순회하며 강연을 했는데, 하와이에 온 목적에 대해 몇몇 유지 이외에는 절대 밝히지 않았다고 한다. 즉 이승만의 상해 밀항은 극비 중의 극비였다. 아마도 당시 이승만의 상해 밀항은 김노디와 임병직을 위시해 윌리엄 보스윅(William Bothwick) 같은 핵심 측근들에게만 알렸을 것으로 이해된다. 보스윅은 일리노이 주 출신으로 하와이에서 장의사 사업으로 큰돈을 번 사업가였다. 그는 하와이 사업가 중에서 이승만을 열렬히 지지한 핵심 후원자였다. 이승만이 1920년 6월 29일 하와이에 도착했을 때, 상해 밀항 계획을 가장 먼저 알린 사람 중 한 명이 바로 보스윅이었다.

이승만 상해 밀항을 도와준 하와이 사업가


▎1947년 한국대표 임병직, 루이스임이 유엔총회 1차 위원회 참석한 모습. 임병직은 이승만 대통령과 함께 밀항하는 등 그의 최측근이었다. / 사진:국가기록원
당시 하와이에서 상해로 가는 선박은 대부분이 일본을 거쳐서 갔다. 따라서 일본을 거치는 선박으로 상해 밀항을 감행한다면 자칫 일본에서 적발될 위험이 컸다. 그래서 이승만은 일본을 거치지 않고 상해로 직항하는 선편을 보스윅에게 부탁했다. [임병직 회고록]에 의하면, 임병직이 하와이에 도착한 후 며칠 지났을 때, 보스윅은 상해로 직행하는 선편을 주선해 주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런 선편을 주선하려면 다소간 시일이 필요하고, 그동안 일본 밀정으로부터 은신하기 위해 한가한 바닷가에 있는 그의 별장에서 기다리라고 제안했다. 그 제안에 이승만과 임병직은 호놀룰루 시내에서 보스윅의 별장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 별장에서 이승만과 임병직은 한 달 가까이 시간을 보내며 보스윅의 소식을 기다려야 했다. 이승만은 시를 짓고 임병직은 수영하면서 지루한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너무나 지루해서 이승만은 워싱턴의 구미위원부에 있는 김규식과 노백린을 하와이로 부르기까지 했다. [이승만일기]에 의하면 이승만은 1920년 10월 28일 김규식과 노백린을 별장으로 안내했다. 바닷가 별장에서 이승만은 김규식, 노백린과 더불어 독립운동과 상해임정 문제를 세밀히 논의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지루하면, 노백린의 지도로 체조를 하거나 섬에 가서 낚시하기도 하고, 밤에는 바둑이나 장기를 두면서 시간을 보냈다.

드디어 11월 5일 보스윅으로부터 상해로 직항하는 선편이 마련됐다는 연락이 왔다. 그가 마련한 선편은 캘리포니아에서 목재를 만재하고 상해로 직행하는 네덜란드 소속의 웨스트 하이카(S.S West Hika)호였다. 그 배는 연료공급과 식량 준비를 위해 호놀룰루에 며칠 기항하게 됐는데, 그 기회에 보스윅이 선장을 설득해 이승만과 임병직을 상해로 밀항할 수 있게 했다.

이승만과 임병직은 11월 5일 보스윅의 별장을 떠나 호놀룰루로 갔다가 11월 8일에는 아예 보스윅의 집으로 갔다. 그곳에서 8일을 더 기다리다가 마침내 11월 16일 밤 웨스트 하이카 호에 승선했다.

[임병직 회고록]에 의하면, 이승만과 임병직은 한밤중 노동자 차림으로 위장해 보스윅이 안내하는 보트를 타고 몰래 하이카 호에 승선했다. 이승만과 임병직은 서로 손을 잡고 배 밑으로 내려가 닥치는 대로 문을 열다가 창고 비슷한 문 하나가 열려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마도 이 문은 선장이 몰래 열어놓았을 것으로 이해된다. 이승만과 임병직은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가 몸을 감추고 그날 밤을 지새웠다.

다음날 새벽 드디어 하이카 호가 출항했다. 그동안 이승만과 임병직은 배 안의 창고에 쥐죽은 듯 숨어 있었다. 하지만 몇 시간 지나서 창고 안에 들어온 선원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두 사람을 발견한 선원은 놀라서 “중국인 두 놈이 있다. (Two Chinaman)”고 소리쳤다 한다. 아마도 당시 중국인들이 밀항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선원은 중국인일 것이라 생각했던 듯하다.

이승만과 임병직은 몰려온 선원들에게 붙들려 선장실로 끌려갔다. 선장은 모든 상황을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하며 대경실색한 표정을 짓고 질문했다고 한다. 선장의 질문에 임병직은 “우리는 부자(父子)입니다. 미국에서는 가난해 도저히 살 수가 없어 본국에 가서 살려고 최후 수단으로 어젯밤 몰래 이 배에 탔으니 용서해 달라”고 대답했다. 선장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사무장에게 눈짓했다고 한다. 알아서 처리하라는 뜻이었다.

그러자 사무장은 “너희들을 물속에 집어 던질 수는 없고 같이 항해를 하자니 그만큼 비용이 드니 너희가 먹는 값은 스스로 치러야 한다. 노인은 기운이 없을 터이니 밤낮 네 시간씩 전(前) 갑판에서 망을 보고, 너는 젊은이니까 갑판을 닦는 잡일을 해라”고 했다고 한다. 이로써 이승만과 임병직은 선원들과 함께 항해할 수 있게 됐다.

중국인 시체 담은 관 보관 창고로 숨어들다


▎이승만 대통령과 김규식 선생. / 사진:공훈전자사료관
며칠 지난 후, 이승만과 임병직은 그들이 숨어들었던 창고가 중국인 시체를 담은 관을 보관하는 창고였음을 알게 됐다. 당시 미국의 화교들은 죽은 뒤에 유해만이라도 본토에 묻히기 위해 관에 담겨 고국으로 옮겨지는 것이 관행이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이승만은 감개무량해 이런 시를 지었다.

대한민국 2년(1920년) 음력 11월에 / 民國二年至月天
하와이 먼 밀항 객, 몰래 배에 올랐네. / 布哇遠客暗登船
판자문에는 큰 자물쇠와 등불이 걸렸는데 / 板門重鎖洪爐煖
철벽으로 휘둘린 창고 안은 캄캄했네. / 鐵壁四圍黎室玄
날 밝은 후, 산천은 아득히 씻은 듯했지만 / 山川渺滌明朝後
동트기 전, 창고 안 세월은 지리 했었네. / 歲月支離北夜前
태평양 위에서 배는 바람처럼 달렸지만 / 太平洋上飄然去
배 안에도 구천이 있음을 누가 알았으랴? / 誰識此中有九泉
그때 관 속의 중국인 시체가 옆에 있었다. / 時有華人屍體入棺在側

이승만과 임병직은 하이카 호에서 성심으로 일했다. 그래서 며칠 후부터 선원들은 더 이상 “두 명의 중국 놈”이라 부르지 않고 “좋은 중국사람”이라 불렀다. 그렇게 신뢰를 얻게 되면서 이승만은 병실에 기거하는 특전을 받게 됐다.

하와이 출항 20일 만에 상해에 무사히 도착

어느 날 밤, 먼 곳의 불빛이 반짝거리는 것이 갑판에서 망을 보던 임병직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바로 나가사키의 불빛이었다. 하이카 호가 큐슈 나가사키를 지나는 중이었던 것이다. 나가사키를 지나면 멀지 않아 한반도와 상해였다. 임병직은 병실로 가 이승만에게 이 사실을 전했다. 그러자 이승만은 말없이 천장을 멍하니 보다가 이런 시를 지었다.

이 한 몸은 물과 하늘 사이를 떠돌며 / 一身漂漂水天間
만 리 태평양을 몇 번이나 오갔던고? / 萬里太洋幾往還
나 도착한 곳 평범한 곳이긴 하지만 / 到處尋常形勝地
꿈 속 내 혼령, 한양 남산에 머무른다네. / 夢魂長在漢南山

1920년 12월 5일 오전 10시 마침내 하이카 호는 상해 항구에 도착했다. 하와이를 출항한 새벽으로부터 근 20일 만이었다. 상해 항구에 도착한 하이카호에 중국인 노동자들이 승선해 재목을 내렸다. 그 기회를 이용해 이승만과 임병직 역시 어깨에 무거운 재목 하나를 메고 배에서 내렸다. 마치 중국인 노동자처럼 허름한 노동복을 입은 이승만과 임병직을 상해임정의 요원이 맞이했다. 그 요원을 따라 이승만과 임병직은 인력거를 타고 맹연관이라는 여관으로 가서 여장을 풀었다.

※ 신명호 - 강원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202308호 (2023.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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