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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석의 19세기 미시사 탐구(6)] 초상화 논란에 다시 주목 받는 '춘향전' 

춘향의 실제 미모는 어느 정도였을까 

남원시, 소설 속 인물 묘사한 김은호 화백의 친일 이력에 새 초상 제작
“17세 얼굴 맞나” 논란… 픽션이 현실 된 마당에 원작 제대로 뜯어봐야


▎김현철 화백이 그린 새 춘향 영정이 최근 전북 남원시 ‘춘향사당’에 봉안됐다. 새 영정과 관련해 ‘도저히 10대로 보기 어렵다’는 등의 논란이 일자 김 화백은 “시대가 바뀌면 여성을 바라보는 시각도 달라진다”며 “모델같이 ‘예쁜 춘향’보다 인격체로서 ‘당당하고 주체적인 춘향’을 그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 사진:김현철 화백
전라북도 남원시에는 소설 [춘향전]의 여주인공 춘향을 모시는 사당인 ‘열녀춘향사(烈女春香祠)’가 있다. 열녀춘향사를 흔히 ‘춘향사당’이라고 부르는데, 이 춘향사당을 1931년 지었으니 이제 거의 100년이 다 돼간다. 춘향사당에는 춘향의 모습을 그려놓은 전신 초상화가 걸려 있는데, 최근 이 초상화를 두고 이런저런 얘기가 나와 전국적 화제가 됐다.

얘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애초 춘향사당을 지으면서 여기에 초상화를 걸어 놨다. 그런데 1938년 이곳을 방문한 일본 식산은행장 하야시 시게조(林繁藏)와 호남은행장 현준호가 춘향의 초상이 너무 초라하다고 해 당시 조선의 저명한 화가 김은호에게 새 춘향 초상을 의뢰했다. 김은호가 그린 춘향의 초상은 기존에 있던 초상화와 함께 1939년부터 춘향사당에 걸렸는데, 6·25 때 김은호가 그린 초상화는 없어졌다. 그 후 춘향사당에는 최초 봉안한 초상화만 걸려 있다가 1961년 다시 김은호에게 의뢰해 춘향의 초상화를 그려 걸면서 애초의 초상은 치웠다고 한다.

김은호가 1961년 다시 그린 춘향의 초상화는 2020년까지 춘향사당에 걸어뒀다. 원본은 남원시 향토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었고, 복제품을 걸어놓은 것이었다. 남원시는 김은호 화백의 식민지 시기 친일 이력이 문제가 되자 2020년 이 초상화를 춘향사당에서 철거했다. 그리고 2022년 김현철 화백에게 의뢰해 새로운 춘향 초상을 제작했고, 이 초상화를 지난 5월 25일 춘향사당에 걸었다. 그런데 새로 건 초상화를 남원시민들이 마땅치 않게 생각한다는 보도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 문제는 단순히 남원의 춘향사당에 거는 춘향의 초상화 문제를 넘어 춘향의 외모에 대한 전국적 뉴스로 비화됐다. 거의 모든 언론사에서 뉴스로 보도하면서 “17세 춘향 얼굴 맞나”, “도저히 10대로 보기 어렵다”, “1억7000만원 들인 새 영정 논란” 등의 선정적 제목을 달았다. 여기에 남원시의회가 남원시와 남원문화원에, 작가와 협의해 새로운 영정을 제작할 것을 주문했다는 보도까지 나왔다.

춘향의 모습을 어떻게 그려야 하는가에 대한 답변을 찾기 위해서는 소설 [춘향전]을 잘 읽어보는 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춘향은 실존 인물이 아닌 소설의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먼저 [춘향전]의 원본과 후대에 나온 버전에서는 춘향의 신분과 외모를 어떻게 묘사했는지 보기로 한다.

소설 [춘향전]을 읽어보지 않은 사람이라도 춘향의 어머니 월매가 기생이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다. 기생 신분은 조선의 신분 중 가장 낮은 천민이므로, 월매는 천민 계층 인물이다.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노비종모법(奴婢從母法)에 의해 어머니 쪽 신분을 따르게 돼 있어서 어머니가 천민인 기생이라면 아버지가 누구인지에 관계없이 자식도 당연히 천민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춘향도 천민인 셈이다.

[춘향전]은 19세기 초 서울에서 창작된 소설이다. 여러 가지 다양한 버전의 소설이 있고 또 판소리로도 유행했지만, 춘향 이야기의 원본은 서울 도서대여점에서 빌려주던 소설이다. 이 서울 도서대여점(세 책집)에서 빌려주던 소설을 바탕으로 20세기 초 전주에서 [열녀춘향수절가]를 만들었는데, 이 소설이 일반적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열녀춘향수절가]는 판소리 창자들이 많이 이용했기 때문에 판소리 [춘향가]의 내용은 전주에서 간행된 이 소설과 같은 내용이 많다.

소설 속 춘향의 신분은 천민 기생


▎1931년 춘향사당 건립과 함께 봉안된 최초 춘향 영정. / 사진:김현철 화백·남원문화원
서울판이나 전주판이나 춘향의 어머니 신분이 기생이라는 것은 같다. 그러나 아버지의 신분은 전혀 다르다. 원본인 서울 세책집에서 빌려주던 [춘향전]에서 춘향 아버지의 신분은 정확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춘향의 아버지가 하층민이라는 것은 추정이 가능하다. 작품 후반부에서 옥에 갇힌 춘향이 지나가는 장님 점쟁이에게 점을 치는 내용이 있는데, 이 대목에서 춘향이 점쟁이에게 어릴 때 기억을 얘기하는 대목이 있다.

춘향 말에 의하면 이 장님 점쟁이와 춘향의 아버지는 술친구였다. 점쟁이가 돈이 한 푼만 생겨도 춘향의 아버지를 불러내 술집에 같이 갔고, 술집에 갈 때면 춘향이도 데려갔다고 한다. 춘향이 이 점쟁이에게 점을 부탁하면서 어렸을 때 술집에서 안주도 주면서 달래주던 생각이 나니 아버지를 다시 만난 듯 반갑다고 말하는 구절이 있다. 조선시대 맹인 점쟁이는 대체로 하층민이었으므로 이런 하층민의 친구인 춘향의 아버지가 지체 높은 인물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서울의 [춘향전]에서 춘향의 아버지가 하층민인 것과는 달리 전주판에서 춘향의 아버지는 남원부사를 하다가 서울로 승진해 간 사람이다. 춘향 어머니 월매의 말에 따르면 성씨 성을 가진 남원부사가 재임할 때 자신이 세 달 수청을 들었는데, 그때 춘향을 가졌다고 했다.

다만, 서울판이나 전주판 모두 춘향은 기생의 딸이므로 그의 신분은 천민이다. 서울의 원본 [춘향전]에는 춘향이 스스로 자신이 기생이며 천민이라고 말하는 대목이 여러 군데 나타난다. 그 중 한 대목을 보면 춘향이 변사또의 수청 요구를 거절해 관가에 잡혀갔을 때 “소녀는 본래 기생의 후손이고, 하찮은 천한 계집”이라고 말한다. 소설에서 춘향의 신분은 기생인 것이 분명하다.

인물은 절색, 행실은 백옥 같이 깨끗


▎김은호 화백이 1961년 다시 그린 춘향 영정. 남원시는 김 화백의 식민지 시기 친일 이력이 문제가 되자 2020년 이 초상화를 춘향사당에서 철거했다. / 사진:김현철 화백·남원문화원
한국 영화시장에서 찍으면 반드시 흥행에 성공하던 이야기 중 하나로 [춘향전]이 있다. 1923년 무성 영화를 시작으로 최초 발성영화, 최초 컬러 시네마스코프 영화, 최초 70밀리 영화, 최초 칸영화제 본선 진출 작품 등 다양한 분야에서 최초라는 이름을 얻은 영화가 모두 [춘향전]이다. 특히 한국의 내로라하는 여배우들은 대부분 춘향 역을 한 번씩은 맡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춘향전]보다 더 많이 영화화한 고전 작품이 없으니, 춘향이 한국 최고의 전통 미인이라 말해도 될 것 같다.

이렇게 최고의 전통 미인으로 알려진 춘향의 외모는 소설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고 있을까? 먼저 원본인 서울 세책집에서 빌려주던 [춘향전]에서는 춘향의 외모를 어떻게 표현했나 보기로 한다.

이도령이 춘향을 처음 보는 장면에서 작가는 춘향의 외모를 “모습은 옥처럼 깨끗한데, 엷게 화장을 하고, 붉은 입술에 이빨은 희며, 살짝 핀 복숭아꽃 같은 고운 얼굴에 눈썹이 예쁘고, 머리는 풍성하다”고 그렸다. 그런데 이런 춘향 외모에 대한 묘사는 당대 미인을 묘사하는 일반적 방식이다. 또 이도령이 춘향을 만났을 때 춘향을 천향국색(天香國色)이니 화용월태(花容月態)라고 말하는데, 천향국색은 천하에 제일가는 향기와 빛깔이라는 의미로 모란꽃을 가리키는 말이고, 화용월태는 꽃 같은 얼굴과 달 같은 자태라는 의미로 아름다운 여인을 묘사하는 말이다.

이런 표현은 너무나도 추상적이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생긴 모습을 말하는지 알기 어렵다. 전주에서 나온 [열녀춘향수절가]도 마찬가지여서 꽃 같은 얼굴과 달 같은 자태, 붉은 입술에 흰 이빨, 조촐한 얼굴, 고운 태도 등의 표현 외에 구체적으로 외모를 알 수 있는 내용이 없다.

소설 속에서 춘향의 외모만이 아니라 성격을 파악할 수 있는 내용도 그렇게 많은 것은 아니다. 그런데 서울 세책집에서 빌려주던 소설에는 방자가 이도령에게 춘향의 성격을 얘기하는 대목이 있다. 방자는 춘향이 16세이고, 인물은 절색이며, 행실은 백옥같이 깨끗하고, 재질이 뛰어나며, 시도 잘 짓고 노래도 잘한다고 말한 다음 “성품이 쌀쌀맞고, 사박스러우며, 교만하고, 말하는 수준이 높다”고 했다.

소설에서 구체적으로 외모와 성격을 얘기하는 대목은 이런 정도다. 문자로 돼 있는 소설 내용을 읽고, 주인공의 형상을 그려내는 일은 결코 쉬운 게 아니다. 소설을 읽는 사람마다 각자 자신이 생각하는 춘향의 형상이 있을 것이므로, 모두의 마음에 맞는 춘향을 그려내는 일도 정말 어려울 것이다. 구체적으로 춘향의 모습을 그려내야 한다면 먼저 소설을 자세히 읽는 길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춘향사당을 처음 만들었을 때 여기에 걸린 춘향의 초상은 누가 그린 것인지 알 수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첫 초상을 그린 화가가 어떤 과정을 통해 춘향의 초상을 그렸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런데 이 그림에 대해 서울에서 나오던 일본어 신문 [경성일보] 1936년 7월 30일자 기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다.

“동북쪽 한 모퉁이에 한 묘가 있다. 춘향묘(廟)라고 한다. 춘향전으로 불후의 이름을 남긴 절개의 여성 춘향을 제사지낸다. 매년 5월의 제삿날에는 원근에서 와 참배하는 기녀와 그 외 사람들이 수 천 명에 이른다고 한다. 사당의 한 가운데는 채색의 아름다운 춘향상이 있다. (중략) 참배하는 사람들은 모두 ‘춘향이 살아있다’라고 경이의 탄성을 지른다. 과연 춘향은 살아있다. 이 세상에 여성이 있는 한, 춘향은 영원히 아름답고 품위 있게 살아있을 것이다.”

이 기사를 보면 처음 춘향사당에 걸어놓은 춘향의 초상도 사람들에게 상당히 호응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초상이 일반인에게는 살아있는 것처럼 보였겠지만, 그림에 조예가 있는 사람 사이에서는 이전부터 문제가 있다고 알려졌던 것으로 보인다. 아주 재미있는 글이 있어서 소개한다. 1934년 9월 11일 [동아일보]에 위당 정인보가 쓴 글이다. 위당은 민세 안재홍, 석전 박한영 등과 함께 충청도와 전라도를 여행하면서 기행문을 썼는데, 남원 춘향사당에서 춘향 초상화를 보고 다음과 같은 내용을 남겼다.

첫 번째 초상화도 썩 좋은 그림 아니었다


▎지난 5월 춘향제 행사의 하나로 전북 남원시 광한루원에서 열린 제93회 전국춘향선발대회에서 미스 춘향 진에 뽑힌 김주희 씨. / 사진:남원시
“광한루 앞에 작은 사당집이 있고, 그 속은 춘향가의 주인 춘향의 화상을 그려 걸었는데, 이 인물의 사실성이 있고 없음은 여기서 의견을 낼 것이 아니로 되, 박한영 스님은 화법(畵法)에 안목이 있는 사람인만큼 그 그림의 십분 잘 되지 못함을 여러 번 안타까워하며, 이당 김은호 이야기를 하고 또 하여 마지 아니합니다. 나는 화법을 모르는 까닭에 어떤 것이 된 것이고, 어떤 것이 아니 된 것임을 모르나, 안재홍 형도 나보다는 다소 안목이 있어 박한영 스님의 의견을 옳다 하고 지났습니다.”

이 내용을 보면 그림에 조금이라도 안목이 있는 사람은 당시 춘향사당에 걸린 춘향 초상화가 썩 좋은 그림이 아니라고 말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당시 조선에서 인물화와 관련해 가장 권위 있는 인물로 김은호를 손꼽는다는 것도 알 수 있다. 1938년 가을 남원 춘향사당에 걸어놓을 춘향의 초상을 의뢰받은 김은호 화백은 춘향을 어떻게 그려야 할 것인가를 고심했다. 그는 자신의 상상력만으로 그리기보다는 역사적 고증도 하고, 또 각 방면 전문가 의견을 듣기로 했다. 그는 민속학자 송석하, 미술가 이여성, 국문학자 김태준, 연극인 유치진 등 당대 저명한 인사들과 회합을 갖고, 이들 의견을 종합해 다음과 같이 춘향 초상의 방향을 잡았다고 한다.

첫째, 처녀 춘향을 그리되 명랑하고도 총명하고 의지가 강하여 절개 있는 여성을 그릴 것.

둘째, 옷은 170년 내지 200년 전의 풍속을 참고하여 당홍치마에 연두저고리로 하고, 긴 치마에 짧은 저고리에 회장을 달아서, 아주 얌전한 옛 색시를 그릴 것.

셋째, 말할 것도 없이 미인을 그리고, 앉은 춘향보다는 서 있는 춘향을 그릴 것.

이와 같이 기본 방향을 정했지만, 사람마다 마음속에 그려둔 춘향이 있으므로 이를 그린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김은호는 말했다. 그는 1939년 5월 26일(음력 4월 8일) 열리는 춘향제 전에 초상화를 완성해 남원으로 보내기로 하고, 약속대로 5월 22일 남원으로 보냈다.

김은호가 그린 춘향 초상은 남원으로 보내기 전 이미 언론에 공개돼 5월 21일자 [동아일보]에 초상화 사진과 함께 이 그림을 극찬하는 보도가 나왔다. ‘조선의 모나리자’, ‘아름답고 신비한 걸작’, ‘동양미의 최고봉’ 등의 찬사와 함께 연두저고리에 다홍치마를 입은 19세 춘향 입상에 대한 설명을 했다. 그리고 “선마다 춘향의 혼이 숨고, 색마다 이 땅의 신비한 꿈이 숨어, 흡사 춘향이 호흡하는 듯하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저절로 머리를 숙이게 한다”는 평도 붙였다.

원본 '춘향전'을 꼼꼼히 읽고 그려야

반면 이 그림에 대한 비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5월 27일자 [동아일보]에는 춘향의 머리 모양과 치마꼬리를 잡은 손의 위치에 대한 문제를 지적하면서 이 춘향은 현대 처녀의 모습이라고 비판한 글이 실렸다. 처녀를 그렸다면 머리를 땋아야 하는데 비녀를 꽂은 머리로 그렸고, 기생인 춘향이 서울 양반 여자들의 왼치마(왼손으로 치마꼬리를 잡는 것)를 했다는 것이다. 또 춘향이 열녀로 추앙을 받는 이유는 이도령과 결혼 후 변사또의 수청을 거절했다는 점이 가장 중요한 것인데, 처녀로 그려놨으니 열녀가 되기 전 평범한 기녀 모습을 그린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은호 화백은 그림 솜씨에 있어서는 당대 최고의 수준을 자랑한 인물이다. 그러나 식민지 시기 친일행위가 문제가 돼 광복 후 만들어진 조선미술건설본부에서 그를 제외시켰고, 근래에 친일 반민족행위자 명단에도 들어갔다. 그리고 이 때문에 그가 그린 춘향사당의 춘향 초상도 철거하게 됐다.

남원에 춘향의 사당을 세운 후 이도령과 춘향이 처음 만난 음력 5월 5일 단오일에 성대한 제사를 올렸는데, 이때 전국 각지 기생들이 와 참배하고, 여러 가지 재미있는 행사가 많이 열렸다. 1931년 춘향 사당을 지은 후 시작한 이 행사는 매해 수만 명의 관람객이 모이는 대단히 큰 축제가 됐다. 그리고 1935년부터는 서울의 원본 <춘향전>에 춘향의 생일이 음력 4월 8일로 돼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이 날로 춘향 제사 날짜를 바꿨다. 올해도 남원시에서는 음력 4월 8일(양력 5월 27일)을 전후로 닷새 동안 춘향제를 개최했고, 이 기간 약 40만 명의 관광객이 남원을 방문했다. 2017년 90만 명보다는 적지만 대단한 숫자다. 새로 그린 춘향 초상을 봉안하는 행사도 이 춘향제 기간에 있었다.

소설 주인공을 주제로 한 축제를 알차게 하려면 당연히 소설의 내용을 잘 이해하고 축제를 구상해야 한다. 그리고 소설 주인공의 형상을 그림이나 조각으로 나타내고 싶다면 마찬가지로 그 소설을 잘 읽어봐야 할 것이다. 만약 춘향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나 연극 또는 뮤지컬이나 창극을 만들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원본 <춘향전>을 꼼꼼히 읽지 않으면 안 된다.

※ 이윤석 - 한국 고전문학 연구자다. 연세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고, 2016년 연세대 국어국문학과에서 정년 퇴임했다. [홍길동전]과 [춘향전] 같은 고전소설을 연구해서 기존의 잘못을 바로잡았다. [홍길동전] 이본(異本) 30여 종 가운데 원본의 흔적을 찾아내 복원했을 뿐만 아니라 작품 해석 방법을 서술했다. 고전소설과 관련된 저서 30여 권과 논문 80여 편이 있다. 최근에는 [홍길동전의 작자는 허균이 아니다]와 같은 대중서적도 썼다.

202308호 (2023.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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