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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정신의 미학(89)] ‘동방의 노스트라다무스’ 격암(格庵) 남사고 

동서 분당과 임진왜란을 예언하다 

울진 벽지에서 [소학] 실천하며 독학으로 천문, 풍수, 복서(점) 천착
과거 실패 뒤 관상감 천문 교수 지내… 숱한 예언 적중시키며 비결 남겨


▎남문열(오른쪽) 전 울진문화원장과 격암사상선양회 임태수 회원이 울진군 근남면 남사고 추정 생가터에 세워진 자동서원의 조성 내력을 설명하고 있다. / 사진:송의호
"남사고는 명종 시기 사람으로 관동(關東)에 살았다. 그는 풍수와 천문·복서(점)를 잘 알아 모두 전해지지 않는 비결을 얻었으므로 말하면 반드시 맞았다. 명종 말년 서울에 살면서 판서 권극례와 친했다. 그가 일찍이 말하기를 ‘오래지 않아 조정이 반드시 분당될 것이며, 또 오래지 않아 반드시 왜변이 있을 것인데, 만일 진년(辰年)에 일어난다면 그래도 구할 수 있지만 사년(巳年)에 일어난다면 구할 수 없을 것’이라 했다. 조정이 을해년 이래 의론이 두 갈래로 갈라지기 시작해 지금까지 거의 50년이 됐지만 그치지 않으며, 왜병의 침입은 임진년에 시작됐다. 우리나라에도 이러한 사람이 있었으니 기이한 일이다.”

조선 초기부터 인조 시기까지 야사와 일화 등을 모아 엮은 [대동야승(大東野乘)] 중 신흠의 ‘상촌잡록’에 기술된 내용이다. 상촌 신흠은 격암(格庵) 남사고(南師古, 1509~1571)보다 57년 연하로 영의정까지 지낸 인물이다. 여기서 보듯 남사고는 동서 분당과 임진왜란 발발을 예언하고 있다.

이이·신흠 등이 주목한 격암의 예언 능력


▎이문희 화백이 그린 남사고 초상화. / 사진:울진군
신흠뿐만 아니다. 율곡 이이는 [석담일기]에 “남명조식이 세상을 떠났는데 이에 앞서 천문 교수 남사고가 금년에 처사성(處士星)이 빛을 잃는다 하더니 조식이 과연 이 해에 죽었다”고 적었다. 또 이기는 [송와잡설]에 “남사고는 천문과 망기(望氣, 하늘의 기운을 보아 조짐을 아는 것)에 밝았다. 공빈(恭嬪, 광해군의 생모)의 선대 무덤이 있는 원주 동남쪽에 왕기가 있다고 했는데 사람들이 모두 믿지 않았으나, 임진년 여름 광해군이 왕세자로 책봉된 다음 그의 말이 증명됐다”고 했다.

서양에는 노스트라다무스라는 예언가가 유명했다. 그는 앙리 2세의 죽음과 프랑스대혁명, 나폴레옹의 등장 등을 예언했다. 남사고는 나이로 보면 노스트라다무스의 6년 후배로 동시대 인물이다. 격암은 ‘동방의 노스트라다무스’로 불린다. 남사고의 예언은 당대 학자나 문사들이 감탄하듯 놀라운 데가 있다. 문제는 그의 저술이 전하는 것은 거의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에 관한 후대의 글은 과장, 와전되기도 한다.

6월 16일 남사고의 실체에 조금이나마 다가가기 위해 그가 태어나 성장하고 학문을 닦은 경북 울진군 근남면 수곡리 누금마을 추정 생가터를 찾았다. 대구에서 자동차로 3시간이 걸리는 두메산골이다.

조성된 생가 옆 격암기념관에서 남사고의 방계 후손인 남문열 전 울진문화원장을 만났다. 그는 2011년 발족된 격암사상선양회를 이끄는 중심인물이다. 남전 원장은 격암이 길흉화복을 점치는 역술가가 아닌 평생 [소학]을 공부한 실천 유학자이자 [주역]에 바탕 한 천문학자였음을 강조했다. 기념관 가운데 천문학을 상징하는 혼천의가 전시돼 있었다. 격암기념관을 비롯한 일대 남사고 유적지는 1999년 김대중 정부 시절 유교문화권 개발 사업으로 40억원 가까운 국비를 지원받아 울진군 중심으로 조성됐다.

남사고는 1509년(중종 4) 이조좌랑을 지낸 남희백의 아들로 태어났다. 자호 격암(格庵)은 [대학]의 ‘격물치지(格物致知)’에서 따 붙였다고 한다. 그의 자연과학 지식이 유학적 사유의 범주에 있음을 스스로 드러낸 것이다. 남사고 가문은 증조가 세종 시기 공도(空島) 정책으로 울릉도를 토벌할 때 만호로서 공을 세우는 등 무반으로 이름을 얻었다. 그러다가 그의 조부가 정4품 의정부 사인(舍人)에 오르면서 문반 가문이 됐다. 그러나 설석규는 “격암의 할아버지·아버지의 중앙 관계 진출은 족보에만 나올 뿐 [국조문과방목]에 과거 합격 기록이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여타 기록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고 논문에서 정리했다. 그의 가문은 당대 울진을 대표하는 성씨도 아니었다.

남사고는 그저 그런 가문과 열악한 지역 조건 등으로 배울 만한 스승을 만나지 못해 가학과 독학으로 공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같은 불리한 여건이 오히려 그가 유학에 얽매이지 않고 천문·지리·관상·복서 등 다양한 학문으로 시야를 넓히는 계기가 됐다는 견해도 있다. 그가 불영사에 머물면서 스님으로부터 신서(神書)를 받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도 그런 맥락이다.

달팽이 같은 집에 살면서 하늘과 땅을 경영


▎포항 호미곶에 세워진 지명 유래 표석. 남사고는 한반도를 백두산 호랑이가 앞발로 만주 땅을 할퀴는 형상으로 보았으며, 영일만 동쪽 끝 땅을 호미(虎尾)라고 불렀다. / 사진:울진군
남사고는 어릴 때부터 재물을 쉽게 또는 구차하게 얻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을 정도로 절제된 자세를 견지했다고 한다. 친구 황응청과 함께 길을 가다 붉은 띠로 장식된 패도를 보고도 그냥 지나쳤다고 한다. 대신 그는 평생 책상 위에 [소학(小學)]을 두고 실천하려 애썼다. [소학]은 김굉필이 성리학의 실천궁행 지침서로 삼은 이래 사림들 사이에 널리 퍼졌다. 남사고는 제자 주경안에게 많이 외우고 글을 잘 짓기보다 [소학]을 일용의 홀기처럼 여기며 가르침을 준수하도록 했다.

국보 장양수 홍패에 시문을 남기고 울진에 은둔했던 장만시(1696~1769)는 남사고의 학문을 이렇게 정리한다. “선생은 [소학]의 일상 도를 몸소 체득하여 효로 연결하고 [주역]의 예측할 수 없는 묘미를 실천해 심신을 운용했다. 그래서 달팽이 같은 집에 살면서도 하늘과 땅 전체를 집으로 삼았던 것이다.”

남사고는 유학뿐만 아니라 다방면에 조예가 깊으면서도 저서는 거의 전해지지 않는다. 그와 관련된 행적이나 이력을 엿볼 수 있는 자료는 시와 편지, 묘비명 그리고 후학들이 쓴 글을 모은 [격암선생일고역(格庵先生逸稿譯)] 정도다. 그로 인해 특정 부문이 과장되고 신비화되어 유학자 아닌 이인(異人)으로 더 알려져 있다.

남사고는 인품이 고결했지만 [격암선생일고역] ‘격암선생유전(格庵先生遺傳)’에 따르면 한편으로 호방하고 낙천적이기도 했다. 그는 절친한 친구들이 주는 것이라도 함부로 받는 법이 없었으나 술은 사양하지 않았다고 한다. 나아가 술을 즐기는 그를 위해 부인이 술을 담가 놓으면 채 익기도 전에 표주박을 띄워 자작하고, 혹 집 앞을 지나는 사람이 있으면 불러 술동이가 바닥이 보일 때까지 마셨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내면적 수신에 힘쓰면서도 외면적으로는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연에 순응하는 자유분방한 삶을 추구했다.

격암은 당대에 ‘해동강절(海東康節)’로 불리었다. 강절은 중국 송대 유학의 역(易)을 발전시켜 수리철학을 만든 소옹(邵雍)을 가리킨다. 남사고가 조선의 소옹이란 것이다. 당시 격암이 사림의 종장으로 이(理)를 중시한 이황·조식과 달리 기(氣)의 수에 바탕 한 우주관을 지닌 것에 주목한 것이다.

과거시험 도전하다 관상감 천문 교수로 발탁


▎울진지역 후학들이 남사고를 기리기 위해 세운 공간인 수남정사. / 사진:송의호
기념관의 설명문을 읽다가 한곳에 눈길이 멈췄다. 소수서원 [입원록(入院錄)] 을묘(1555년) 조에 ‘남사고 복초 울진’이라는 이름이 동향 출신 전복룡과 함께 선명히 남아 있다. 격암이 소수서원에 등록하고 일정 기간 수학했다는 기록이다. 당시 남사고는 유생 즉 선비의 길을 걸은 것이다.

나아가 그는 퇴계 이황의 제자로 이름이 올랐다는 설도 있다. 격암은 퇴계보다 8년 아래다. 울진 유학자 남진영(1889~1972)에 따르면 퇴계 6대손 이수연이 [도산급문제현록]을 만들 때 초고에 남사고의 이름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갑인본(1914년)에 수록된 문인 309명에는 남사고의 이름을 찾을 수 없다. 어쨌든 남사고는 주세붕이 세우고 이황이 사액을 받은 소수서원의 원생으로 퇴계로부터 감화를 받았을 것이다.

퇴계 학맥인 밀암 이재는 [격암선생일고역] ‘남격암유적’에서 “역수(易數)에 정밀하여 음양 변화를 잘 따졌고 천문과 지리, 예언의 요체를 깊이 탐구했다”고 적었다. 그렇지만 남사고의 성리학은 기의 작용성을 강조한 서경덕이나 이이에 가까웠다.

그러면서도 현실을 도외시하며 한평생 처사로 살아간 서경덕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그는 당시 훈구(勳舊)·척신(戚臣) 정권이 초래한 정치·사회적 모순에도 불구하고 현실에 참여하려는 의지를 드러냈다. 그래서 30세 전후 과거시험에 도전한다. 당시 시험 답안지라는 ‘해옥첨주부(海屋添籌賦)’가 전한다. “삼황이 아침까지 살다가 갔다고 했는데 오제(五帝)가 또 저녁나절에 죽었다고 한다. 요순이 지치(至治)를 했다는 시대도 경각이고 한당(漢唐)도 요란했지만 한순간이었다. 오호(五胡)도 안개같이 사라졌고 송원(宋元)도 가을 풀처럼 시들고 말았다.”

남사고 평전소설을 쓴 남지심은 “격암은 30세 전후에 우주를 간파하고 그 안에 담긴 무한한 시간과 공간을 이해했던 청년”이라고 표현한다. 격암은 이렇게 [주역]을 추상 아닌 우주적 원리로 해석함으로써 실용적 방안을 모색했다.

1564년(명종 19) 남사고는 효렴(孝廉)으로 조정에 천거돼 종9품 사직 참봉에 제수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직한 뒤 고향에 내려와 학문에 몰두했다. 남사고는 울진 불영계곡 초입 주천대를 찾다가 경치 좋은 남수산 자락에 돌을 쌓고 오두막을 지어 후학을 양성했다. 남세영·주경안·임유후 등이 문하에서 배출됐고 황응청과 조카 황여일, 주세창, 기자헌 등과 학문을 교류했다. 남사고는 향시에는 수차례 합격했으나 대과에는 끝내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그 뒤 훈척 정권이 무너지고 사림이 정계에 대두한 1570년 종6품 관상감 천문 교수로 다시 발탁된다. 그는 여기서 자신의 자질과 능력을 발휘하다가 이듬해 6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양사언이 '주역' 논하다가 스승으로 예우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란 시조를 남긴 문장가 양사언은 강릉부사로 있을 때 격암과 [주역]을 논하다가 그 깊이에 감탄해 그를 ‘자동(紫洞) 선생’으로 불렀다. 신선 동네의 스승이란 뜻이다. 기념관 앞쪽에 ‘격암남선생신위’라 쓴 위패를 모신 서원이 있었다. 양사언이 붙인 호칭을 따라 ‘자동서원’이다. 남문열 전 원장은 “유림이 봄에 향사를 올린다”고 했다.

남사고 유적지를 둘러본 뒤 구천십장(九遷十葬, 묘를 아홉 차례 옮김) 설화로 남은 그의 아버지 묘소를 찾아 나섰다. 남 전 원장이 안내했지만 그사이 길이 바뀌고 숲이 우거져 끝내 찾을 수 없었다. 돌아오는 길에 근남면 구산리 남사고 묘소에 들렀다. 상석 등 일부 석물이 바뀌었지만 묘비는 옛 그대로였다. 남사고는 자신이 묻힐 자리를 생전에 봐 두지 않아 문우들이 묘터를 정했다고 전한다. 앞으로 ‘문필봉’이 보였다. 1574년(선조 7) 울진현령 정구수는 고을 사람들과 같이 격암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울진읍에 옥계서원을 창건했으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탔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선조실록]과 [영조실록]에 남사고가 4차례 등장한다. [영조실록] 35권은 1733년(영조 9) 영조가 승지들과 남사고에 대해 묻고 잡술에 관한 방서를 금지하는 문제를 의논하는 대목이 나온다. “도제조 서명균은 말하기를 ‘남사고의 비기가 세상에 전해지고 행해지자 세상 사람들이 말을 덧붙이고 부회하여 와전된 것이 많습니다’고 하였다.”

남사고는 16세기 정치적 혼란과 사회·경제적 피폐상을 극복해야 하는 시대적 과제를 절감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독자적 방안을 모색한 사림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성리학에서 벗어나 천문학 등에 정통했던 실학자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 과정에서 그가 남긴 말은 대부분 모순된 현실을 종식시키는데 확신을 심어줌으로써 미래에 희망을 던지는 메시지였다. 또 예견되는 국가적 환란을 모두가 대비할 것을 촉구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박스기사] 조선인에게 영향 남긴 남사고의 이상향 ‘십승지’ - 영일만 동쪽 끝 땅을 호미(虎尾, 호랑이 꼬리)로 명명

남사고는 이상향 십승지(十勝地)를 예견하기도 했다. [정감록(鄭鑑錄)] ‘남사고비결’에 실려 있는 이른바 십승보길지지(十勝保吉之地)다. 남사고는 전란을 피해 살 만한 열 곳을 꼽았다. 십승지는 대체로 한반도의 남부지역에 한정돼 있으며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공통점이 있다. 또 십승지는 소백산에서 지리산에 이르는 백두대간의 큰 굽이에 집중돼 있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남사고가 소백산을 보고 갑자기 말에서 내려 절하면서 ‘사람을 살리는 산’이라 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 영주를 지나면서 비 갠 후 흰구름이 소백산 허리에 띠처럼 가로놓여 있는 것을 보고 상서롭다며 이 산 아래 사는 사람들은 안전할 것이라 했다고 한다.

남사고가 예견한 열 곳은 공주의 유구와 마곡, 무주의 무풍, 보은 속리산, 부안 변산, 성주 만수동, 봉화 춘양, 예천 금당실, 영월 정동 상류, 남원 운봉 두류산, 영주 풍기 금계촌이다.

승지는 본래 자연경관과 거주환경이 뛰어난 장소를 의미한다. 그러나 조선 중·후기 커다란 사회적 혼란을 겪으면서 안위를 보전하며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피난지를 의미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십승지는 조선인의 삶과 지리 인식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또한 남사고는 “한반도는 백두산 호랑이가 앞발로 만주 땅을 할퀴는 형상이다. 백두산은 호랑이 코, 호미곶은 호랑이 꼬리에 해당한다”고 했다. 즉 한반도를 용맹스러운 호랑이 형상으로 보고 포항의 영일만 동쪽 끝 땅을 그 꼬리라는 뜻에서 호미(虎尾)라고 불렀다.

-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yeeho1219@naver.com

202308호 (2023.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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