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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경률의 노래하는 한국사(20)] ‘한양가(漢陽歌)’ 노래한 유흥가의 큰손, 조선 별감 

19세기 서울 사람들은 무슨 낙(樂)으로 살았을까 

상업도시 한양에 유흥과 취미 일군 새로운 중간층 ‘여항인’
거리에는 술집과 기방이 범람… 과거시험장엔 부정 만연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진주검무’. 검무는 조선 후기 놀이판에서 가장 주목받은 예능 중 하나다. / 사진:국가문화유산포털
"화려가 이러할 제 놀인들 없을소냐 / 선비의 시축(詩軸)놀음 한량(閑良)의 성청(成廳)놀음 / 공물방(貢物房) 선유(船遊)놀음 포교(捕校)의 세찬(歲饌)놀음 / 각사(各司) 서리(書吏) 수유(受由)놀음 각집 겸종(傔從) 화류(花柳)놀음 / 장안의 편사(便射)놀음 장안의 호걸(豪傑)놀음 / 재상(宰相)의 분부(分付)놀음 백성(百姓)의 중포(中脯)놀음 / 각색놀음 벌어지니 방방곡곡 놀이처(處)라.”(한산거사, [한양가])

조선 사람들은 어떻게 놀았을까? 무엇을 즐기고 또 무엇에 취했을까? 19세기 국문 가사 [한양가(漢陽歌)]에 그 생생한 여흥이 들썩거린다. 조선이라고 하면 어쩐지 ‘공자 왈, 주자 왈’ 할 것 같은 고리타분하고 숨 막히는 이미지가 떠오른다. 하지만 [한양가]가 묘사한 조선 후기의 풍모는 의외로 낙(樂)이 넘친다. 꽃놀이, 뱃놀이도 다니고 여럿이 어울려 활도 쏘고 방방곡곡 놀음들이 흐드러졌다. 이름만 쭉 열거해도 흥에 취해 어깨춤이 절로 난다.

붉은 옷에 초립 쓴 장안의 왈짜


▎국립중앙도서관이 소장한 목판본 [한양가]. 1844년 한산거사가 지은 장편 한글 가사다. / 사진:연합뉴스
[한양가]는 한산거사(漢山居士)가 1844년에 지은 장편 가사다. 왕도 한양의 지세와 연혁, 궁궐·관아와 시전의 면모, 각양각색 유희와 승전놀음, 헌종 임금의 화성 능행(陵行), 그리고 과거장과 유가(遊街) 풍경 등을 화폭에 담듯이 세밀하게 그려냈다. 도성의 풍속과 문물을 통통 튀는 운율로 생동감 있게 묘사한 것이다. 한산거사는 누구인지 불분명하지만, 궁궐이나 관아에 몸담은 하급 관리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특히 승전(承傳)놀음에 긴 분량을 할애하고 공을 들인 것으로 보아 별감일 가능성이 높다.

조선 시대 사극을 보면 붉은 옷 입은 사내들이 임금을 따르거나 궁궐에서 서성인다. 내관, 궁녀들이야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알겠는데, 이 자들의 정체는 아리송하다. 그들이 바로 액정서(掖庭署)나 무예청(武藝廳)에 속한 별감(別監)이다. 액정서의 전별감(殿別監)은 왕명 전달, 왕이 쓰는 붓과 벼루 대령, 궁내 열쇠 보관, 궁정 뜰의 설비 등 시시콜콜한 업무를 담당했다. 무예청의 무예별감(武藝別監)은 임금을 호종하고 궐문을 맡아서 지켰다. 그런데 이 사내들이 궁궐을 나서면 또 다른 얼굴을 드러냈다.

“왈짜라 불리는 장안의 유협(遊俠長安號曰者) / 붉은 옷에 초립 쓴 우림아(茜衣草笠羽林兒) / 동원에서 술 마시며 노래할 때(當歌對酒東園裏) / 뉘라서 의랑을 차지해 뽐낼 것인가(誰把宜娘示獲驪).”

송만재의 [관우희(觀優戱)]에 별감을 일컫는 대목이 나온다. ‘붉은 옷에 초립 쓴 장안의 왈짜’다. 송만재는 1843년 아들이 등과(登科)하자 당대의 연희(演戲)를 묘사하는 50수의 시를 지었다. 과거에 급제하면 창우(倡優)나 재인(才人)을 불러 놀이판을 벌이는 풍속이 있었는데, 집안 형편상 연희시로 대신한 것이다. 그는 단가, 판소리, 줄타기, 땅재주, 검무 등을 보고 심중의 소회를 밝혔다. 별감은 판소리 열두 마당 중 [왈짜타령]을 묘사한 시에 등장한다. [한양가]가 지어질 무렵 세간에서는 별감을 왈짜의 한 부류로 인식했다.

왈짜는 화류계를 장악한 무리를 말한다. 별감은 포도청 포교, 승정원 사령, 의금부 나장 등과 함께 한양 거리에 즐비한 술집을 주름잡았다. 그들은 중간층 신분이었지만, 힘깨나 쓰는 자리에 있었다. 궁궐이나 권력기관에 몸담으며 왕족, 고관대작, 거상들의 편의를 봐주고 장안의 한량들과 어울렸다. 그 인맥과 수완을 이용해 기방(妓房)을 관리하고 기생 등 예인의 뒤를 봐주기도 했다. 조선 후기 유흥가의 실세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붉은 옷에 초립 쓴 별감이 단연 눈에 띄었다. 신윤복의 풍속화에도 단골로 나온다. 선술집 풍경을 그린 ‘주사거배(酒肆擧盃)’에서는 별감 복장을 한 자가 국자로 술을 뜨는 주모 앞에서 안주를 집고 있다. 일행으로 보이는 양반과 나장 등이 잔술 한잔 걸치려고 차례를 기다린다. 이 그림에 붙인 화제(畫題)가 그럴싸하다. ‘거배요호월(擧杯邀皓月) 포옹대청풍(抱甕對淸風).’ 술잔을 들어 밝은 달을 맞이하고, 술항아리 끌어안으며 맑은 바람 마주한다. 풍류 한 모금 곁들이면 선술집 잔술에도 취흥이 돋고 멋이 우러난다.

신윤복의 ‘유곽쟁웅(遊廓爭雄)’은 기생집 앞에서 벌어진 난투극을 담고 있다. 장죽에 담배를 태우는 기생을 두고 사내 둘이 주먹다짐을 벌인 모양이다. 별감이 중재하자 어린 축은 수그러들지만, 나이 든 쪽은 분이 덜 풀렸는지 웃통을 벗어젖힌다. 유곽에서 이런 일은 비일비재했을 터. 힘깨나 쓰는 별감이 사내들의 주사와 허세를 다스렸을 것이다. ‘야금모행(夜禁冒行)’에서는 야간 통행금지를 무릅쓰고 양반과 기생이 동자의 안내를 받아 길을 나서고 있다. 순라군에게 걸리면 곤욕을 치르겠지만, 뒤를 봐주는 별감이 이미 손을 쓴 듯하다.

“하물며 승전놀음 별감의 놀음인데”


▎조선 후기 화가 신윤복이 그린 ‘주사거배’. 별감, 나장 등 유흥가 왈짜들이 선술집에서 잔술을 마시고 있다. / 사진:간송미술문화재단
승전놀음은 화류계를 주름잡던 별감들이 경치 좋은 곳에 사람들을 모아 놓고 한바탕 크게 벌인 놀이판이었다. 여기서 ‘승전(承傳)’은 왕명을 전달한다는 뜻이다. 임금을 지근거리에서 섬기는 별감의 자긍심을 드러낸다. 그 신명나는 유희의 현장을 [한양가]는 마치 카메라로 촬영하듯이 낱낱이 뜯어보고 상세히 형용하고 있다.

“구경 가자 구경 가자 승전놀음 구경 가자 / 북일영(北一營) 군자정(君子亭)에 좋은 놀음 벌였구나 / 눈빛 같은 흰 휘장에 구름 같은 높은 차일 / 아로새긴 서까래에 각 영문(營門) 사촉롱(紗燭籠)을 / 빈틈없이 달아놓고 좁쌀 같은 화초등(花草燈)과 / 보기 좋은 양각등(羊角燈)을 차례 있게 걸어 놓고 / 백동타구 옥타구며 백동요강 은재떨이 / 왜찬합(倭饌盒) 당찬합(唐饌盒)과 아로새긴 교자상과 / 모란병풍 영모병풍(翎毛屛風) 산수병풍 글씨병풍 / 홍융사(紅絨絲) 구멍 뚫어 이리저리 얽어매고.”(한산거사, [한양가])

무대가 화려하다. 경희궁 북쪽 훈련도감 분영(分營) 정자에 새하얀 휘장, 오색 등롱, 갖가지 병풍으로 한껏 모양을 냈다. 소품은 사치스럽다. 침을 뱉는 타구와 볼일 보는 요강마저 백동이요, 옥이요, 은이다. 이곳에 근무를 마친 별감 100여 명이 맵시 있게 차려입고 자리했다. 조각달 모양 상투에 호박 동곳을 대자(大字)로 꽂고, 곱게 뜬 평양 망건과 거북 등 딱지 대모(玳瑁) 관자를 착용했다. 여덟 가닥 실을 꼬아 만든 초립과 삶지 않은 명주실로 짠 홍의에는 궁궐 상의원의 솜씨가 담겼다. 별감의 멋을 뽐내는 명품 복장이다.

“금객(琴客) 가객(歌客) 모였구나 거문고 임종철이 / 노래에 양사길이 계면에 공득이며 / 오동복판 거문고는 줄 골라 세워놓고 / 치장 차린 새 양금은 떠는 나비 앉혔구나 / 생황 퉁소 죽장고며 피리 저해금이며 / 각생 기생 들어온다 예사로운 놀음에도 / 치장이 놀랍거든 하물며 승전놀음 / 별감의 놀음인데 범연히 치장하랴 / 백만교태 다 피우고 모양 좋게 들어온다 / 늙은 기생 젊은 기생 명기(名妓) 동기(童妓) 들어온다.”(한산거사, [한양가])

이제 예인(藝人)들을 들일 차례다. 놀이판에 공연이 빠질 수 있나? 잘나가는 소리꾼과 악공, 그리고 기생들이 군중의 환호와 함께 입장한다. 기생은 어여쁘게 치장하고 ‘백만교태’ 피우면서 눈길을 사로잡는다. “오동(梧桐) 양월(良月) 밝은 달에 밝고 밝은 추월이!”, “옥은 곤륜산에서 나고 금은 여수에서 나니 보배로운 금옥이!”, 진행자가 미사여구를 갖다붙이며 간드러지게 소개한다. 지방에서 재능 있는 예인이 오면 왈짜가 한양에 거처를 마련하고 일을 알선했는데 큰손은 별감들이었다. 예인들이 승전놀음에 총출동한 이유다.

승전놀음은 한양 중간층인 여항문화 산물


▎조선 후기 화가 신윤복이 그린 ‘유곽쟁웅’. 기생을 두고 벌어진 사내들의 주먹다짐을 별감이 말리고 있다. 별감은 기방을 관리하며 기생의 뒤를 봐주기도 했다. / 사진:간송미술문화재단
“관현의 좋은 소리 심신이 황홀하다 / 거상조(擧床調) 내린 후에 노래하는 어린 기생 / 한 손으로 머리받고 아미(蛾眉)를 반쯤 숙여 / 우조(羽調)라 계면(界面)이며 소용(搔聳)이 편락(編樂)이며 / 춘면곡(春眠曲) 처사가(處士歌)며 어부사(漁夫詞) 상사별곡(相思別曲) / 황계타령(黃鷄打令) 매화타령 잡가시조 듣기 좋다.”(한산거사, [한양가])

이윽고 공연이 시작되면 놀이판은 금세 달아오른다. 악공들의 연주에 ‘쑥대머리’ 군중들은 머리를 끄덕끄덕, 눈을 까막까막하며 황홀하게 빠져든다. ‘춘면곡’, ‘어부사’, ‘상사별곡’, ‘매화타령’ 등 십이가사(十二歌詞)는 사랑과 이별, 풍류와 서정을 노래한 조선 후기의 유행가다. 우조, 계면, 소용, 편락 같은 곡조를 따라 놀이판의 감흥은 폭풍처럼 휘몰아쳤다가 애잔하게 가라앉으며 무르익는다.

“춤추는 기생들은 머리에 수건 매고 / 웃영산 늦은 춤에 중영산 춤을 몰아 / 잔영산 입춤 추니 무산선녀(巫山仙女) 내려온다 / 배떠나기 북춤이며 대무(對舞) 남무(男舞) 다 춘 후에 / 안 올린 벙거지에 성성전(猩猩氈) 중두리에 / 갑사군복(甲紗軍服) 홍수(紅袖)달아 남수화주(藍繡花紬) 긴 전대(纏帶)를 / 허리를 잔뜩 매고 상모(象毛) 단 노는 칼을 / 두 손에 비껴 쥐고 잔영산 모는 새면 / 항장(項莊)의 춤일런가 가슴이 서늘하다.”(한산거사, [한양가])

기생의 춤사위는 승전놀음의 백미였다. 기악곡‘영산회상(靈山會上)’이 웃영산에서 잔영산으로 전개되며 춤은 갈수록 빨라지고, 서도민요 배따라기와 어우러진 북춤에 이르면 놀이판은 절정으로 치닫는다. 피날레는 검무(劍舞), 곧 칼춤의 몫이다. 항우가 베푼 홍문의 연(宴)에서 항장이 유방을 노리고 칼춤을 추는 듯 서늘한 한기가 가슴에 꽂힌다. 그 소름 돋는 전율과 함께 승전놀음은 막을 내린다.

승전놀음과 같은 놀이판은 조선 후기에 한양 인구가 증가하고 상품화폐 경제가 발달하면서 나타난 여항문화의 산물이다. 한양이 커다란 상업 도시로 변모하자 백성들의 살림집이 밀집한 여항(閭巷)에 새로운 계층과 가치관이 형성됐다. 별감을 비롯한 중간층이 부(富)를 쌓고 여가를 누리며 문화적 욕구를 해소하려고 한 것이다. 그 배경에는 돈으로 상품과 사람을 끌어모으는 시장이 있었다.

“큰광통교 넘어서니 육주비전(六注比廛) 여기로다 / 일 아는 여리꾼과 물화 맡은 전시정(廛市井)은 / 큰창옷에 갓을 쓰고 소창옷에 한삼(汗衫) 달고 / 사람 불러 흥정할 제 경박하기 측량 없다 / 선전(縇廛)은 수전(首廛)이라 돈 많은 시정(市井)들이 / 호사(豪奢)도 혼란(焜爛)하고 인물도 준수하다 / 각색 비단 벌였으니 화려도 장할시고.”(한산거사, [한양가])

돈벌이 긍정한 새로운 인간군상, 여항인


▎국립한글박물관은 기획특별전 [서울 구경 가자스라, 한양가]를 2024년 2월 12일까지 선보인다. 풍물가사 [한양가]를 통해 과거의 한양과 현재의 서울을 조명하는 전시다. / 사진:연합뉴스
한양도성에는 선전(비단), 면주전(명주), 백목전(무명), 포전(삼베), 지전(종이), 어물전(해산물) 등 육의전을 중심으로 관영 상설시장인 시전이 번창했다. 시전은 상공업의 발달과 함께 연초전(담배), 곡자전(누룩), 도자전(패물), 분전(화장품), 화피전(물감), 상전(잡화) 등으로 품목을 다양화하며 확장했다. 금난전권 철폐로 난전 시장도 활기를 띠었다. 도성 안에는 칠패와 이현, 도성 밖에는 송파와 다락원이 거점을 이뤘다. 한강 연안의 경강상인들도 전국적인 유통망을 구축하고 거상으로 명성을 떨쳤다.

시장이 먹여 살리는 인구는 갈수록 늘어났다. 가게마다 장사를 거드는 차인꾼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여리꾼들은 흥정을 붙이고 거래의 구문을 챙겼다. 이른 아침 한강 연안에는 품을 팔기 위해 짐꾼들이 몰려나왔다. 재화는 물론 노동과 서비스까지 사고팔지 못할 것이 없었다. 한양에서는 화폐가 일상생활을 좌우했다. 돈이 도시를 지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1842년 암행어사 행세를 하다가 포도청에 끌려온 어느 죄인의 말이다.

“서울은 시골과 달라 돈이면 안 되는 일이 없다(京中異於鄕中 有錢則無事不成).”([우포청등록] 임인년 3월 29일, 죄인 최동욱의 공초)

한양의 중간층은 상업적 변화를 받아들이고 경제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중간층은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먼저 하급 관리는 서울의 궁궐, 관아, 군영에서 실무를 맡아보던 아전·별감·사령·나장·포교·장교 등을 말한다. 다음으로 기술직 중인이 있었는데, 의원과 역관이 대표적이다. 부유한 상인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시전 상인은 나라에 물품을 조달하고 부족한 국가재정을 충당했다. 일부 중간층은 직업적인 능력과 정보를 활용해 왕실, 세도가, 고관대작 등 권력층의 편의를 도모했으며 그 대가로 금전적 이권과 보상을 챙겼다.

그들을 ‘여항인(閭巷人)’이라고 부른다. 18~19세기 한양의 동네와 거리에 나타난 새로운 인간군상이다. 여항인들은 나름의 지식을 보유하고 시, 소설, 수필 등을 통해 자신들의 가치관을 드러냈다. 그들은 유교 윤리에서 경계하는 인간의 감정과 욕망을 부정하지 않았다. 남녀의 애정에 솔직한 관심을 갖고 치부(致富)나 돈벌이를 긍정적으로 바라봤다. 그것은 상업 도시 한양이 빚어낸 도시인의 기질이자, 유교적 굴레를 벗으려는 근대의식의 맹아였다.

여항인들은 안정된 직업과 경제활동으로 부를 쌓았다. 또한 자급자족하지 않고 시장을 이용함으로써 여가도 얻게 됐다. 부와 여가는 문화적 욕구를 불러일으켰다. 동네마다 광(狂)적인 ‘덕후’들이 나타났다. 그림, 꽃, 분재, 바둑, 서책, 골동품 등 취미에 미친 사람들이었다. 거리에는 술집과 기방이 범람했다. 주등(酒燈)으로 뒤덮인 서울의 밤 풍경에 임금이 탄식할 정도였다. 유흥과 더불어 복색과 치장의 사치도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어사화(御賜花)냐 금은화(金銀花)냐”


▎1795년 정조가 화성에 행차하는 모습을 그린 ‘한강주교환어도’. 배다리를 만들어 한강을 건넘으로써 군왕의 위엄을 보였다. / 사진:위키피디아 캡처
“전세 대동미 싣는 배와 두대박이 외대박이 / 당도리며 먼정이며 중거루 낚거루를 / 십리 장강 너른 물에 머리 맞게 늘어 세고 / 배 위에 장송(長松) 깔고 장송 위에 박송(薄松) 깔고 / 그 위에 황토 깔고 좌우에 난간 짜고 / 팔뚝 같은 쇠사슬로 배머리를 걸어매고 / 십리 주교(舟橋) 벌였으니 천승군왕(千乘君王) 위의로다.”(한산거사, [한양가]) 1843년 3월 조선 제24대 왕 헌종이 화성에 행차했다. 건릉(정조와 효의왕후의 무덤)과 현륭원(사

도세자의 무덤)에 제사를 지내러 간 것이다. 1795년 정조가 화성 현륭원을 찾았을 때는 수행 인원만 1779명에 이르렀다. 18~19세기에 임금이 화성 능행을 나서면 한강에 배를 늘어세워 주교(舟橋)를 만들게 했다. 오방기 휘날리는 대규모 어가 행렬이 포를 쏘고 취타를 연주하며 한강 배다리를 건너는 모습은 생각만 해도 성대하고 장엄하다. 한번 보면 평생 잊기 어려운 광경이다. 정조가 그랬듯이 헌종도 이렇게 군왕의 위엄을 세우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왕조는 기울고 있었다. 겉은 그럴싸하지만, 속은 허물어졌다.

“어제(御製)를 고이 들고 현제판(懸題板) 임하여서 / 홍마삭(紅麻索) 끈을 매어 일시에 올려 다니 / 과거장 선비들이 붓을 들고 달아난다 / 각각 제 접(接) 찾아가서 책행담(冊行擔) 열어놓고 / 해제(解題)를 생각하여 풍우(風雨)같이 지어내니 / 글 하는 거벽(巨擘)들은 귀귀(句句)이 읊어내고 / 글씨 쓰는 사수(寫手)들은 시각을 못 머문다.”(한산거사, [한양가])

화성 능행을 다녀온 헌종은 과거령(科擧令)을 내렸다. 과거장에는 돈을 받고 고용된 ‘과시꾼’들이 득실거렸다. 거벽(巨擘)은 응시자 대신 글을 지었고, 사수(寫手)는 글씨를 써줬다. 이들이 좋은 자리를 잡는 ‘선접꾼’과 한 팀을 이뤄 대리시험을 치렀다. 세도가에서는 과거 출제자, 채점자, 감독관까지 돕게 했다. “어사화(御賜花)냐 금은화(金銀花)냐”, 실록에 실린 동요다. 좌절한 흙수저 선비들은 과시꾼으로 변신해 돈벌이에 나섰다. 세도정치와 삼정의 문란 속에 인재 등용이 막히면서 조선은 시나브로 저물어 갔다. [한양가]는 조선 후기 여항의 풍속과 함께 화성 능행과 과거장 풍경을 담아 왕도의 명암을 사실적으로 보여줬다.

- 권경률 역사 작가 kweonhistory@naver.com

202311호 (202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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