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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호의 상해임정 27년사(최종회)] 군사노선 세력의 연합공격에 고립된 이승만 

이승만, 노백린과 김규식의 대통령 사퇴 압박을 물리치다 

이동휘, 군사노선세력 통합해 상해임정 재장악 시도
이승만, 대통령 사퇴 요구에 외교·실력노선으로 돌파


▎1920년 12월 28일 상하이에서 열린 이승만 초대 임정 대통령 환영회 모습. 이승만(가운데)의 옆에 카이저 수염을 기른 이동휘(왼쪽)와 안창호(오른쪽)가 서 있다. / 사진:독립기념관
근대민족운동을 거시적인 측면에서 평가할 때 국무총리 이동휘가 사퇴한 1921년 1월은 군사노선 세력의 연합과 상해임정의 고립으로 요약된다. 당시 군사노선 세력의 연합은 아령(俄領)의 대한국민의회가 주도했다. 대한국민의회는 3·1운동 이후 등장한 수많은 임시정부 중 하나로서 1919년 3월 17일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조직됐다.

그러나 대한국민의회는 1919년 9월 상해임시정부와 통합을 결의하면서 해산됐다. 그 결과 군무총장 이동휘가 상해임정 국무총리로 취임했지만 통합 조건에 불만을 품은 의장 문창범 등 몇몇은 취임하지 않고 되돌아가 1920년 2월 15일 국민의회를 재건했다.

하지만 그 영향은 미미했다. 상해임정에 참여한 이동휘와 김립이 재건 국민의회를 타도하려 공작했기 때문이다. [재로고려혁명군대연혁(在露高麗革命軍隊沿革)]의 기록, 즉 김립이 재건 국민의회에 대해 “전에 전투적 방략을 지휘함이 있었다”고 한 언급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럼에도 재건 국민의회는 그 간부들이 1920년 5월 아무르주의 자유시로 이동하면서 급성장했다. 자유시로 이동한 국민의회 간부는 회장 문창범, 비서장 오창환, 평의장 김하석, 군무부장 오하묵 등이었다. 그들은 1920년 4월 일본군이 블라디보스토크를 점령하자 5월 자유시로 피신했다.

자유시의 재건 국민의회는 상해임정을 반대하는 여러 세력과 연대함으로써 급성장할 수 있었다. 재건 국민의회가 제일 먼저 연대한 세력은 북경의 박용만이었다. 재건 국민의회나 박용만은 공히 이승만의 위임통치청원을 명분으로 상해임정을 반대해 왔기 때문이다.

조규태 교수의 [북경 ‘군사통일회의(軍事統一會議)’의 조직과 활동]에 의하면, 재건 국민의회 의장 문창범은 이미 1920년 4월 중순 북경에서 박용만을 만나 군사단체의 통일과 노령지역에서의 독립운동에 대해 논의한 적 있었다. 뒤이어 자유시로 이동한 후인 1920년 6월 초순에도 문창범은 아령(俄領) 수분하(綏芬河)에서 박용만·신채호 등과 만나 바이칼 서쪽 시베리아 지역에서의 독립운동 방안을 협의했다.

박용만은 문창범과의 협의를 바탕으로 1920년 9월 북경에서 ‘군사통일촉성회(軍事統一促成會)’를 조직했다. 군사통일촉성회는 말 그대로 ‘분산된 항일무장단체를 통일하고 독립운동 노선을 군사노선으로 통일’하려는 조직이었다. 그 주도세력은 박용만·신채호·이회영 등 북경의 반임시정부 세력과 남공선 등의 재건 국민의회 세력이었다. 그러므로 군사통일촉성회는 인적 구성이나 독립노선에서 상해임정의 외교·실력노선과는 정반대였다.

재건 국민의회, 한인사회·한인무장부대 장악


▎사진은 1920년 7월 개최된 코민테른 제2차 대회에 참석한 박진순(오른쪽에서 셋째)의 모습. 박진순의 왼쪽에 앉은 레닌이 눈에 띈다. 박진순은 1920년 3월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 공작금 400만 루블을 수령, 이를 이한영과 박애에게 전달하고 모스크바에 남았다. / 사진:레닌 사진집
한편 1920년 10월 14일 블라디보스토크 일본영사관에서 작성한 ‘기밀 제62호’에 의하면, 자유시로 이동한 재건 국민의회 간부들은 소비에트 주정부(州政府)의 후원을 받게 됐다. 이에 자유시의 한인의회(韓人議會)는 1920년 7월부터 재건 국민의회를 정통 정부로 봉대(奉戴)했다. 이로써 재건 국민의회는 자유시에 강력한 기반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재건 국민의회는 자유시의 한인의회 산하에 있던 한인자유대대 병력 500여 명에 대한 군권(軍權)도 장악했다. 재건 국민의회는 극동공화국으로부터 군비(軍費)를 지원받기 위해 9월경 한인자유대대 병력을 제2군단에 소속시켰다. 이에 따라 한인자유대대는 극동공화국 제2군단 산하의 한인보병자유대대(韓人步兵自由大隊)로 재편됐고 재건 국민의회 군무부장이자 제2군단 제6연대장인 오하묵이 대대장으로 취임했다.

자유시 한인사회의 자치 행정권과 한인무장부대를 장악한 재건 국민의회는 1920년 9월 15일 ‘대한국민의회 선포문’을 통해 소비에트 러시아 노선, 즉 공산주의 노선과 군사노선을 확립했음을 선언했다. 이처럼 재건 국민의회가 공산주의 노선과 군사노선을 선포한 이유는 그 즈음 소비에트 러시아의 적군이 백군에 대해 승리할 것이 명백해졌기 때문이다. 그 외에 북경의 ‘군사통일촉성회’와 보조를 맞추기 위해서라고 이해할 수 있다.

자유시 한인사회의 자치 행정권과 한인무장부대를 장악한 재건 국민의회는 한인공산주의운동의 주도권은 물론 북경 ‘군사통일촉성회’와의 연대를 통해 민족독립운동의 주도권도 장악하려 했다. 한인공산주의운동의 주도권 장악을 위해 재건 국민의회는 시베리아 주요 한인사회에 비밀지부를 설치했다.

박용만, 중로연합선전부 조직


▎이동휘(앞줄 왼쪽에서 둘째)와 김립(앞줄 오른쪽에서 첫째)은 상해임정 장악에 실패하자 최고사령부를 조직해 한인무장부대를 모두 장악했다. 이후 그들은 이승만의 위임통치청원을 비난하면서 독립운동 노선투쟁에서 우위를 점하려 했다. / 사진:성재이동휘선생기념사업
일제의 정보보고인 ‘기밀 62호’에 의하면 1920년 10월 재건 국민의회는 연해주를 제외한 극동지역의 주요 한인사회에 비밀지부를 설치했다. 각 지역의 비밀지부는 통신사무를 집행함은 물론 일본군의 상황을 조사해 재건 국민의회 본부에 보고하는 임무 등을 수행했다. 예컨대 이르쿠츠크의 비밀지부장은 김철훈이었는데, 그는 1920년 7월 이르쿠츠크에서 조직된 전로한인공산당 중앙총회의 유력 인사였다. 그런 김철훈이 재건 국민의회 이르쿠츠크 비밀지부장이었다는 사실은 당시 재건 국민의회와 이르쿠츠크 한인사회가 밀접하게 연결됐음을 의미한다. 그런 상황에서 이르쿠츠크 비밀지부장 김철훈도 재건 국민의회 본부에 보고서를 올렸는데 이르쿠츠크 비밀지부에 속한 한인군대가 1500명이나 된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김철훈이 언급한 한인군대는 이르쿠츠크 전로 한인공산당 중앙총회에 속한 군대였다. 김철훈이 재건 국민의회 본부에 이르쿠츠크의 한인군대 1500명을 보고한 이유는 당시 재건 국민의회와 이르쿠츠크 중앙총회가 사실상 통합됐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생각은 ‘재건 국민의회는 임시정부로서 또 이르쿠츠크 중앙총회는 당으로’ 통합됐다는 의미와 같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재건 국민의회는 1920년 10월경 연해주를 제외한 극동 전역의 임시정부로 기능하면서 그 휘하에 자유시와 이르쿠츠크의 한인무장부대 2000여 명을 거느림은 물론 이르쿠츠크 중앙총회와 연대할 정도로 성장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즉, 당시 재건 국민의회는 극동지역 한인사회의 정권(政權)은 물론 당권(黨權)·군권(軍權)까지 장악했던 것이다. 다만 연해주 지역은 여전히 이동휘의 한인사회당 세력이 강력해 그때까지 장악하지 못했을 뿐이다.

극동지역 한인사회를 거의 장악한 재건 국민의회는 ‘군사통일촉성회’와 연대해 민족독립운동의 주도권도 장악하려 했다. 그것은 박용만이 조직한 ‘중로연합선전회(中魯聯合宣傳會)’를 통해 구체화됐다. 이와 관련해 1923년 8월 25일 자 일제의 정보보고인 ‘고경(高警) 제2878호’에 의하면, 상해임정의 외교총장 박용만이 1920년 7월 이후 모스크바에 가서 레닌 정부와 비밀조약을 체결하고 10월 20일경 치타로 돌아와 ‘중로연합선전회’를 조직했다고 한다.

박용만이 1920년 7월 이후 모스크바에 갔다는 것은 ‘군사통일촉성회’를 조직한 9월 이후 갔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아울러 모스크바에서 박용만이 레닌 정부와 체결했다는 비밀조약은 일제의 정보보고 ‘기밀 356호’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920년 12월 18일 자 일제의 정보보고인 ‘기밀 356호’에 의하면, 비밀조약은 서문과 총 여섯 조항으로 구성됐는데 서문은 “노농정부(레닌의 소비에트러시아)와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지난번 아한양국수교(俄韓兩國修交)에 기초해 공수동맹을 체결하고 상호 다음의 조항을 준수한다”는 내용이다.

또한 총 여섯 조항의 비밀조약은 공수동맹을 체결한 상해임정은 소비에트 러시아의 공산주의를 찬동, 원조하고 소비에트 러시아는 상해임정을 찬동, 원조한다는 것으로서 그 목적을 위해 ‘중로연합선전부’를 조직한다는 내용이 핵심이다.

그런데 그 비밀조약을 박용만이 상해임정 외무총장 자격으로 레닌 정부와 체결했다는 것은 그대로 신뢰하기 어렵다. 박용만은 이승만의 외교·실력론을 비판하며 상해임정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박용만은 이동휘의 도움으로 상해임정의 외무총장 자격을 증명했을 것으로 이해된다. 이동휘는 모스크바 특사 한형권도 몰래 파견한 만큼 박용만도 몰래 모스크바 특사로 파견했을 것으로 이해된다.

그것은 비밀조약의 서문에 ‘노농정부와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지난번의 아한양국수교(俄韓兩國修交)에 기초해 공수동맹을 체결’이라는 내용을 통해 추정할 수 있다. ‘지난번의 아한양국수교’란 분명 한형권과 레닌 정부 사이에 체결된 조약이기 때문이다. 이런 비밀조약은 이동휘의 도움으로 가능했을 듯하다. 당시 상해임정에서 군사노선을 주창하던 이동휘는 자신의 군사노선을 실현하기 위해 한형권에 뒤이어 박용만을 밀사로 파견했을 가능성이 높다. 박용만 역시 비록 공식적으로는 상해임정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군사노선을 실현하기 위해 모스크바 밀사로 갔을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므로 박용만이 체결했다는 비밀조약은 상해임정 요원들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말 그대로 비밀조약이었다.

1920년 10월 20일경 치타에 도착한 박용만은 한국인·중국인·일본인 등 200여 명을 규합해 중로연합선전부 본부를 치타에 설치하고 북경·상해·천진·하얼빈·간도·한양·평양·대구·회령 등에는 지부를 설치하기로 했다. 본부 본부장은 극동공화국 전권위원 유린, 부부장(副副長)은 박용만 그리고 위원부장은 문창범 등이었다. 이런 조직 간부들로 본다면 중로연합선전부는 문창범의 재건 국민의회와 박용만의 군사통일촉성회가 중심이 된 조직임을 알 수 있다.

상해임정 전복 시도한 박용만


▎김규식(오른쪽)은 파리강화회의에서 위임통치청원을 했는데도 마치 자신은 관계없다는 듯 이승만에게 대통령 사퇴를 요구했다. / 사진:공훈전자사료관
그런데 1920년 12월 17일 자 일제의 정보보고 ‘고경(高警) 제40046호’에 의하면, 박용만은 치타에서 중로연합선전부를 조직할 때, 길림에 체재 중이던 김립·계봉우 등을 불러 연합선전부 사업을 논의했다고 한다. 또한 1920년 11월 29일 일제의 정보보고 ‘기밀 제319호’에 의하면, 김립과 계봉우는 11월 10일 경길림성의 학생회에서 연설회를 개최했다고 한다. 따라서 박용만은 1920년 11월 전후에 김립, 계봉우를 만나 중로연합선전부 사업을 논의했다고 이해된다.

본래 김립과 계봉우는 1920년 9월 하순 상해를 출발해 10월 초순 베르흐네우진스크에 도착했다. 한국공산당을 코민테른에 보고, 승인받는 임무와 함께 이르쿠츠크 한인공산당과의 통합을 협의하라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뒤이어 1920년 10월 24일 김립과 계봉우는 베르흐네우진스크에서 한형권·박진순·박애를 만나 모스크바 차관을 접수했다. 그 후 김립과 계봉우는 길림으로 가서 선전활동을 벌이던 중 박용만의 연락을 받고 치타로 가서 연합선전부 사업을 논의했던 것이다.

당시 박용만이 김립·계봉우와 연합선전부 사업을 논의한 이유는 군사노선세력을 대통합하기 위해서라고 이해된다. 이미 재건 국민의회를 통해 연해주를 제외한 극동지역의 한인무장부대는 대부분 통합됐다. 이에 더해 박용만의 ‘군사통일촉성회’는 만주의 독립군부대를 대통합 중이었다. 따라서 연해주의 한인무장부대만 통합하면 만주와 노령의 모든 한인무장부대가 통합되는 것이나 같았다. 그래서 박용만은 치타로 김립과 계봉우를 불렀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1920년 12월 초 상해로 귀환한 김립이 왜 극단적으로 군사노선을 주장하면서 대통령 이승만을 축출하려 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조만간 재건 국민의회 중심으로 한인무장부대가 대통합된다면 상해임정은 물론 이동휘의 한인사회당 역시 비주류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김립 입장에서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상해임정을 장악하고 민족독립운동을 주도하든가, 아니면 상해임정을 고쳐서라도 장악해야만 했다.

새 정부 조직하려 한 이동휘와 김립

그와 관련해 당시 김립과 이동휘가 어떤 입장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자료가 1921년 10월 16일 자로 이동휘가 소비에트 러시아 외무인민위원부 부장 치체린에게 보낸 보고서이다. 이 보고서에서 이동휘는 임시정부 탈퇴 이유에 대해 “임시정부 요원 중 나이 든 사람들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대중에 대한 영향력을 잃어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언급했다. 이는 재건 국민의회 중심으로 형성된 공산주의 노선과 군사노선이 만주와 극동, 나아가 북경의 한인사회에 점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의미이다. 이런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김립과 이동휘는 상해임정을 장악하려 했지만 실패했고 그 결과 탈퇴했다는 것이다.

상해임정에서 탈퇴한 김립과 이동휘는 곧바로 국민대회 소집에 착수했는데, 그것은 상해임정은 물론 재건 국민의회까지 기존의 정부는 모두 부정하고 새로 정부를 조직해 장악하겠다는 의미였다. 그 전단계로 김립과 이동휘는 한인무장부터 장악하고자 했다.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하기 전에 조선과 이주민들 사이에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단체들 및 좌파 민족단체들과 공동블록을 결성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예정된 대회에 참가하기로 결정했다. 우리 블록의 명칭은 전한군사혁명위원회통합의회”라는 보고서 내용이 그것이다.

위의 ‘전한군사혁명위원회통합의회’는 박용만이 주도하는 ‘군사통일촉성회’와 ‘중로연합선부’는 물론 재건 국민의회 산하의 한인무장부대 그리고 상해임정 산하의 한인무장부대, 나아가 한인사회당 산하의 연해주 한인무장부대를 통합하는 최고사령부였다. 보고서에서 이동휘는 “전한군사혁명위원회통합의회에 현존하는 모든 한인 단체들에 대한 지휘권이 위임될 것”이라면서 통합의회가 곧 최고사령부임을 분명히 했다. 요컨대 김립과 이동휘는 최고사령부를 조직해 한인무장부대를 모두 장악함으로써 기왕의 열세를 일거에 만회하려 했던 것이다.

이동휘의 ‘전한군사혁명위원회통합의회’와 박용만의 ‘군사통일촉성회’, ‘중로연합선부’ 그리고 재건국민의회 산하의 한인무장부대, 나아가 상해임정 산하의 한인무장부대는 공히 군사노선을 추구하는 세력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공히 이승만의 위임통치청원을 비난했다. 그에 따라 이승만은 고립됐다.

1921년 1월 24일 이동휘가 국무총리에서 사퇴하자 이승만은 다음날 내무총장 이동녕을 국무총리 임시대리에 임명했다. 사실상 이동휘의 국무총리 사퇴를 기정사실화한 셈이었다. 실제로 이승만은 2월 4일 이동휘의 사퇴를 정식으로 승인했다.

이승만이 이동녕을 국무총리 임시대리에 임명한 이유는 이동녕으로 대표되는 기호파 중심으로 신내각을 구성하려 했기 때문이다. 충청도 출신의 이동녕은 이시영·신규식·신익희 등과 함께 기호파의 핵심이었다. 게다가 1월 19일 상해에 도착한 학무총장 김규식과 1월 20일 상해에 도착한 군무총장 노백린 역시 구미위원부에서 이승만과 함께 일하던 측근이었다. 따라서 이동녕을 중심으로 하는 기호파에 더해 군무총장 노백린과 학무총장 김규식까지 협력한다면 나름대로 안정적인 내각을 구성할 수 있었다.

그런데 [우남 이승만 문서 동문편(東文篇) 8]의 ‘이승만 비망기(備忘記)’에 의하면, 1921년 2월 23일 노백린이 대통령 사무실을 찾아와 사퇴를 요구했다. 당시 노백린은 “근일 상해에 와서 본즉 위임통치청원 문제가 점점 긴급해지며 안병찬이 장차 탄고문(彈告文)을 발행할 터인데 내가 만류하고 기다리라 했으니, 원컨대 형은 탄핵문으로 물러나지 말고 자의로 사퇴하고 정부 고문관이 됨이 어떠한지요”라고 했다. 노백린 역시 군사노선을 대세라 판단해 대통령 사퇴를 요구했던 것이다. 이승만은 “내가 오래 대통령 명의로 이곳에 머물지 않고 장차 사면하겠노라”고 대답했다.

내·외부의 사퇴 압박 물리친 이승만

한편 [안창호일기]에 의하면, 이날 국무회의에서 김규식은 위임통치청원을 가지고 이승만을 각박하게 몰아붙였다. 그런 김규식을 이승만은 ‘각심(刻甚)’이라 표현했는데 아주 심하게 각박했다는 의미다. 김규식 역시 파리강화회의에서 위임통치청원을 했는데도 마치 자신은 관계없다는 듯 이승만을 몰아붙였다. 이로 보면 노백린은 오전에 대통령 사퇴를 내락받고 나와, 김규식으로 하여금 오후 국무회의에서 이승만을 공격해 사퇴시키려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같은 노백린과 김규식의 사퇴 요구로 이승만은 더욱 고립됐다.

그런데 오전에 사퇴까지 결심했던 이승만은 오후 국무회의에서 돌연 사퇴를 거부했다. 자신이 사직하면 상해임정이 아무 일도 하지 못할 것 때문이라는 것이 명분이었다. 아마도 이승만은 자신이 정말 사퇴하면 상해임정은 곧바로 군사노선을 추구하게 되고 궁극적으로 공산주의 노선으로 기울 것이라 생각해 그랬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1921년의 군사노선과 외교·실력노선 투쟁은 독립운동 노선투쟁이기도 하고 건국운동 노선투쟁이기도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 신명호 - 강원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202312호 (2023.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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