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토리

Home>월간중앙>히스토리

[선비 정신의 미학(93)] 13도의군 도총재 의암(毅菴) 류인석 

“오랑캐 일본 물리쳐야 유교문화 지킨다” 

이항로 제자로 공자 대도(大道) 지키려 제천에서 반개화·항일의병 선도
을사늑약 이후 간도와 연해주 등지 돌며 동포 규합해 의병 운동 지도자로


▎의암 류인석의 주손인 류남균(오른쪽) 씨가 제천의병의 태동지인 자양영당 앞에 섰다. 그 옆은 지역 의병의 뒷이야기를 들려준 권만중 씨. / 사진:송의호
"오백년 신성한 종사(宗社, 종묘와 사직)가 망함에 이르렀다. 또 수천만 예(禮)의 인류가 진멸하기에 이르렀다. 원통하도다. 도맥(道脈)을 붙잡지 않을 수 없으며 강역을 보존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인류를 구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는 바로 만고의 대의이자 천하의 대사다.”

1910년 2월 러시아 연해주 재피거우에서는 국내 외를 망라하는 의병조직인 13도의군(十三道義軍)이 결성됐다. 조선 8도에다 서간도·연해주 등지에 사는 동포를 규합한 첫 시도다. 그 자리에서 이상설·이범윤 등은 의병장을 지낸 유학자 의암(毅菴) 류인석(柳麟錫, 1842~1915)을 도총재(都總裁)로 추대했다. 이로써 의암은 1895년 의병운동을 시작한 이래 집요하게 전개한 항일투쟁의 정점을 찍는다. 이런 움직임과 별개로 6개월 뒤 대한제국은 국권침탈로 멸망하고 만다.

류인석은 13도의군 결성식에서 현실을 통탄하면서 모두가 한마음으로 국가를 보존하고, 특별히 예를 되찾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직후 국권을 빼앗은 일제는 여기에 신속히 대응했다. 일본은 13도의군이 무력 항쟁을 개시하기도 전에 러시아를 움직여 연해주 항일운동에 일대 탄압을 가했고, 13도의군은 와해의 길을 걷는다.

10월 14일 류인석 도총재의 흔적을 찾아 근거지 충북 제천을 답사했다. 박달재 인근 제천시 봉양읍 공전리엔 의암 선생의 초상화를 모신 자양영당(紫陽影堂)이 있었다. 그곳에서 선생의 현손 류남균 씨를 만났다.

영당은 영정이 있는 사당이다. 자양영당에는 의암과 함께 주자(朱子)와 송시열·이항로·류중교·이소응 등 모두 6명의 영정이 있었다. 정면 가운데 주자를 배치하고 오른쪽으로 노론 영수 송시열, 류인석의 스승인 류중교, 동문 이소응 그리고 왼쪽으로 이른바 화서학파를 연 이항로와 문인 류인석이 차례로 자리했다.

호좌(충청도 왼쪽)의병의 태동지, 자양영당


류인석은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의 학문과 정신을 이어받았다. 화서는 18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대궐에 들어가 서양 오랑캐를 물리치자고 주장한 성리학자다. 그는 일본과 서양 문물을 거부하며 공자의 도를 지키고 임금과 나라 사랑을 강조했다. 조선이, 망한 명나라 문화를 이어받아 이제 천하 유일한 문명국이라는 이른바 소중화론(小中華論)이다.

화서의 이러한 위정척사는 김평묵·류중교·최익현·류인석으로 이어졌고 일제강점기엔 항일 의병운동의 이념적 무기가 됐다. 향을 피우고 예를 마치자 주손과 동행한 권만중 씨가 말했다. “자양은 주자의 호(號)입니다. 영정엔 곡절이 있어요. 1970년 무렵 이곳 영정은 모두 도둑을 맞았습니다. 수소문했지만 끝내 찾지 못했지요. 이후 다시 제작한 것입니다.”

유림은 해마다 봄·가을 영당에 제사를 지낸다. 이 건물은 본래 성리학자 류중교가 후진을 양성했던 공간이었다. 그 뒤 의병장 류인석은 1895년 여기서 팔도 유림을 모아 비밀회의를 열었다. 자양영당 앞에는 류인석 등이 제자를 가르친 서당 자양서사(紫陽書社)가 있다. 서사 옆으로 이항로의 가르침을 새긴 목판 등을 보관한 대규모 장판각이 보였다. 자양영당은 이렇게 일종의 서원이면서 제천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호좌(湖左, 충청도 왼쪽)의병의 태동지가 됐다.

류인석이 창의(倡義)를 처음 모색한 것은 1894년. 김홍집 내각이 일본식 개혁인 갑오경장을 시작할 때였다. 그는 통탄했지만 별 호응은 없었다. 이듬해인 을미년 1월 다시 변복령(變服令)이 내려졌다. 관민이 모두 흰색 대신 검은색 두루마기를 입도록 우리 고유 의복 문화를 바꾸는 강제조치였다.

그는 스승 류중교의 유업을 잇기 위해 5월 고향 춘천을 떠나 제천 장담으로 이사한다. 이후 제천과 인근 유생을 모아[춘추]를 강의하고 의병 봉기를 논의한다. 석 달 뒤 이번엔 명성황후 시해 소식이 들려왔다. 거기다 단발령이 공포됐다. 류인석은 유생들과 급변하는 상황에 대처한다. 그는 먼저 선비가 가야 할 세 가지 방안인 이른바 처변삼사(處變三事)를 제시했다. 선비의 행동강령이자 비장한 선언문이다. 첫째가 의병을 일으켜 나라의 원수를 소탕하는 거의소청(擧義掃淸), 둘째가 해외로 망명해 중화 문화를 지키는 거지수구(去之守舊), 셋째가 대도(大道)를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정치명(自靖致命)이다.

의암 류인석은 이 세 가지 방안이 우열은 없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중국 망명을 결심한다. 하지만 안승우를 비롯한 제자들이 의병 봉기에 나설 것을 간곡히 부탁하자 의암은 계획을 바꿔 의병운동에 뛰어든다.

조선에서 재야 유림은 본래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류인석은 의병을 일으킨 뒤 그 당위성을 공자와 주자의 가르침에서 찾아 [소의신편(昭義新編)]에 정리한다. “[춘추]에 따르면 난신(亂臣, 나라를 어지럽히는 신하)과 적자(賊子, 어버이를 해하는 자식)는 누구나 죽일 수 있다. (…) 사안이 국가 존망에 관계되면 비록 재야 선비라도 관여할 수 있다 했다. 하물며 성현의 대도가 망함에 있어서랴.”

의암은 호좌의진의 의병장으로 추대된다. 이후 제천은 한말 의병운동의 본산이 된다. 안승우 등은 앞서 원주에서 포군 100여 명을 규합해 의병을 일으킨 뒤 무과 출신 이필희를 대장으로 지도부를 조직했다. 의병은 단양 전투에서 승리했고 풍기·제천·평창을 거쳐 영월에 집결한다. 1896년 54세 류인석은 여기서 의병 지도부의 간곡한 권유를 못 이겨 의병장에 올랐다. 기치는 ‘복수보형(復讎保形)’. ‘복수’는 명성황후 원수를 갚고 ‘보형’은 의복과 머리털을 보존해 우리 전통문화를 지킨다는 것이다. 의병에는 중앙 고관의 인척과 화서학파 유림, 포군 등이 연합으로 참여했다. 이창식 세명대 교수는 호좌의병은 전성기에 그 숫자가 3000명을 넘었다고 추정한다. 의암은 이 자리에서 전국 각지로 의병 봉기를 촉구하는 ‘격고팔도열읍(檄告八道列邑)’을 발송한다. 의병운동을 전국으로 확산하기 위해서다.

호좌의진은 제천으로 남진한다. 먼저 의병에 비협조적인 개화파 단양군수 권숙과 청풍군수 서상기를 처단했다. 이어 충주성을 공격한다. 충주는 중부권 20여 고을을 관할하는 호서지방 도읍지였다. 일본군은 의병의 숫자에 놀라 달아난다. 의병은 충주성을 장악한 뒤 관찰사 김규식을 체포해 일제 앞잡이라는 죄목으로 목을 벴다. 반외세 투쟁은 이렇게 격렬했다.

의병 해산 권유에 서북행 뒤 간도로


▎제천 자양영당에 모셔진 의암 류인석의 초상화. / 사진:제천시
자양영당을 나와 오른쪽 제천의병전시관에 들렀다. 입구에 부조 동판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사진으로 많이 본 1907년 영국인 종군기자 매켄지가 양평에서 찍은 의병대 모습이다. 류남균 주손이 말했다. “이분들이 바로 제천의병입니다.”

전시관은 시기별로 호좌의진의 활약을 보여줬다. 위정척사를 내건 전기와 의병 해산 이후 황해·평안도로 옮겨간 시기, 전국 의병 봉기를 이끌어낸 전성기, 간도·연해주 망명 등으로 정리했다. 류인석의 손때 묻은 지도, 그가 입은 심의 등도 진열돼 있었다. 전시관 앞뜰엔 제천의병을 형상화한 우람한 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의암은 충주에서 돌아와 제천 일대를 장악했다. 그 무렵 문경의병장 이강년이 합세한다. 병력을 재정비한 호좌의병은 일본군 병참기지가 있는 가흥과 수안보를 다음 공격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시련에 부닥친다. 가흥 전투는 평민 출신 김백선이 지휘했으나 실패로 끝이 났다. 김백선은 패전의 책임을 안승우에게 돌리는 등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자 의암은 군율에 따라 그를 참형한다. 그 일로 의병은 대거 이탈했고 사실상 붕괴 단계로 들어갔다.

그 시기 고종은 의병 해산을 권유하는 조칙을 내린다. 의암은 의병 해산을 거부했다. 관군이 대대적으로 공격해 제천을 함락시키자 류인석은 잔여 의병을 이끌고 재기를 도모하며 북상을 거듭한다. 중국의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원조를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4개월여 만에 도착한 곳은 압록강변 초산.

1896년 7월 류인석은 의병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다. 서간도 회인현으로 들어갔으나 호좌의병은 무장 해제를 당한다. 국경을 넘은 의병은 240명 중 결국 21명만 망명하고 나머지는 귀국해야 했다. 의암은 이후 고구려 옛땅 통화에 정착해 망국단(望國壇)을 쌓아놓고 절하며 유교문화 보존 운동을 펼쳤다. 그는 이듬해 고종의 초유문을 받고 귀국했다가 1898년 제자와 가족 등 50여 명과 함께 다시 중국 통화로 돌아간다. 그곳에서 의암은 동포사회 향약을 시행하는 등 의병 재기를 다지며 해외 독립운동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

안중근 등과 독립운동 방략 논의


▎류인석의 업적을 기려 1994년 중국 랴오닝성 관전현에 세워진 ‘의암기비(毅菴記碑)’. 관전현은 의암이 생을 마친 곳이기도 하다. / 사진:송의호
1900년 중국에서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의화단(義和團)운동이 일어났다. 일본과 서양을 물리친다는 구실로 살해가 빈번했다. 의암과 일행은 여건이 험악해지자 산으로 피신했다가 귀국길에 오른다. 그는 황해도 평산에 머물며 황해·평안도 제자들을 양성했다.

1904년 친일파들이 일진회를 조직하자 의암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화서학파 동문인 최익현을 찾아가 향약 실행을 의논했다. 그러면서 전국에 ‘통고일국진신사림서(通告一國縉紳士林書)’를 보내 다시 의병 봉기를 촉구한다.

1905년 의암은 을사조약이 체결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전 국민 항거를 촉구하는 서신을 발송했다. 이후 정운경 등이 봉기하다 체포되자 친척과 동지들에게 중국 망명을 권유한다. 또 자신도 중국으로 가기 위해 황해도 은율에서 각기병을 치료했다. 그러던 중에도 의암은 춘천에서 화서학파 종장(宗匠)으로 역사 인식을 집약한 [송원화동사합편강목(宋元華東史合編綱目)] 33권을 편찬했다.

1907년 고종으로부터 의병을 일으키라는 밀지가 다시 내려온다. 의암은 일본과 정면충돌을 피하고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 해외에서 의병을 모아 항일전을 전개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듬해 세 번째 망명에 돌입한다. 이번에는 중국이 아닌 부산에서 배를 타고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갔다. 을사늑약 이후 애국지사들은 항일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연해주로 속속 모여들었다. 그 무렵 그를 따라간 문인은 우병렬·이진룡 등 60여 명이나 됐다.

이미 병든 노구인 의암은 그곳에서 전 간도관리사 이범윤, 애국지사 안중근 등과 함께 밀지를 지니고 의병 모집에 나섰다. 안중근은 류인석을 만나 독립운동 방략을 논의하면서 의암을 완고하고 시세에 어두운 사람으로 봤다. 의암은 군사 활동 대신 의병을 후원하고 지도하는 정신적인 대부 역할을 했다. 또 ‘의병규칙’ 35개 조를 짓고 1910년에는 마침내 13도의군 도총재에 오른다. 7월 한·일병합이 이루어진 뒤에는 다시 해외 독립운동 단체인 성명회(聲明會)·권업회(勸業會)의 최고 지도자로도 추대되었다. 류인석은 그때부터 피신과 산속 은거 등 풍찬노숙을 거듭한다.

대도(大道)를 중시한 주자학적 민족주의자


▎제천시 봉양읍 공전리 제천의병전시관 앞에 세워진 의병 기념탑. / 사진:송의호
1913년 의암은 연해주 남쪽 목화촌으로 옮겼다. 그는 그곳에서 자신의 사상을 집약한 [우주문답(宇宙問答)]을 저술한다. [우주문답]은 공화제를 반대하고 군주제를 촉구하는 중국 중심 동양평화론을 담았다.

이듬해 의암은 러시아에서 서간도로 옮겨간 뒤 1915년 1월 중국 랴오닝성 관전현에서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백범 김구는 광복을 맞아 환국하자 가장 먼저 류인석의 묘소를 참배했다. 1962년 정부는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의암은 서양 금수와 일본 오랑캐를 물리치고 중화를 높이자며, 성리학적 가치인 대도(大道)를 나라만큼 중시한 지식인이다. [유림의병의 선도자 유인석]을 쓴 오영섭 교수는 이를 ‘주자학적 민족주의’라고 표현했다.

드라마 ‘미스터 션사인’에서 한 호좌의병은 영국 종군기자 매켄지에게 이렇게 외친다. “알고 있소. 이렇게 싸우다 결국 죽겠지. 허나 일본의 노예가 되어 사느니 자유민으로 죽는 것이 훨씬 낫소.” 죽음을 각오한 의병은 자신이 굳게 믿은 유교의 가치관이 몸에 밴 자유로운 인간이다. 그 의병이 외친 말은 의암 류인석이 반(反)개화와 항일운동 내내 강조했던 정신이었다.

[박스기사] 구한말 의병의 본산지였던 충북 제천 - 이강년 부대 등 연합해 일본군 섬멸

1905년 을사늑약 이후 맨 먼저 봉기한 것은 사실상 호좌(제천)의진이었다. 영월 주천과 단양에서 원용팔과 정운경이 을사의병을 선도한 것이다. 그들은 을미의병 당시 류인석 의병장 아래 중군장과 전군장을 맡아 활약했다. 제천의병의 재기나 다름없다.

을미의병이 단발령 등 민족문화 정체성의 위기에서 봉기했던 것에 비해 을사의병은 노골화하는 일제의 국권 침탈에 맞서는 봉기였다. 비록 제천의병의 을사 봉기는 원주진의대의 습격을 받아 전투를 본격화하기 전에 좌절되고 말았지만 이들의 의거는 전국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또 제천의 의병 혼이 살아 있음을 보여 주었다.

정운경은 당시 원용팔이 체포된 뒤 독자적으로 봉기해 한때 단양을 장악하는 등 기세를 떨쳤으나 곧 원주진위대에 체포됐다. 그는 이후 황해도 철도에서 2년 동안 유배 생활을 했다. 제천시 두학동에는 의병 재기를 논의한 박약재가 남아 있다.

1907년 대한제국은 군대를 해산한다. 이 일은 제천 의병들에게 새로운 계기를 만들어줬다. 대한제국 군대인 원주진위대는 해산령에 저항하며 봉기한 뒤 의병들에게 무기를 나눠줬다. 원주에서 무기를 확보한 이강년 부대 등 수많은 의진은 제천으로 몰려들었다. 이들은 제천 천남에서 일본군 1개 소대를 대파하며 기세를 올렸다. 제천은 다시 의병 천하가 됐다.

-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202312호 (2023.11.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