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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경률의 노래하는 한국사(21)] ‘강남스타일’로 보는 현대사(上)-1960~1990년대 

‘신흥 상류층’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강남개발 아파트 열풍, 8학군 교육특구로 ‘상류층 동네’ 자리매김
부동산투기, 사교육 심화, 오렌지족 향락 비난하면서도 강남 선망


▎가수 싸이가 지난해 1월 16일(현지시간) ‘한국의 날’ 부대행사로 두바이엑스포장 내 쥬빌리공원에서 열린 ‘한국의 날 K-POP 콘서트’에서 ‘강남스타일’을 열창하고 있다. / 사진:청와대사진기자단
"오빤 강남스타일 / 강남스타일 / 낮에는 따사로운 인간적인 여자 /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아는 품격 있는 여자 / 밤이 오면 심장이 뜨거워지는 여자 / 그런 반전 있는 여자 / 나는 사나이 / 낮에는 너만큼 따사로운 그런 사나이 / 커피 식기도 전에 원샷 때리는 사나이 / 밤이 오면 심장이 터져버리는 사나이 / 그런 사나이”

2012년 7월 15일 가수 싸이가 여섯 번째 정규앨범 [싸이6甲 Part 1]의 타이틀곡으로 ‘강남스타일’을 내놓았다. 이 노래는 공개되자마자 세계를 휩쓸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특히 뮤직비디오가 압권이었다. 싸이의 코믹한 말춤과 재미있는 노랫말, 그리고 중독성 강한 리듬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타고 신드롬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유튜브(YouTube)에 올라온 ‘강남스타일’ 뮤직비디오는 폭발적인 조회수를 기록했다. 공개 50여 일 만에 조회수 1억 회를 돌파하더니, 그해 12월에는 유튜브 최초로 10억 회를 넘어서는 대기록을 세웠다. 때마침 동영상 플랫폼 시대가 활짝 열리면서 국적과 국경을 뛰어넘어 기록 행진을 벌인 것이다. 유튜브 조회수는 올해 11월까지 49억 회에 이르렀다.

팝(POP) 음악 시장에서도 강남스타일의 경이로운 신드롬에 주목했다. 팝의 본고장인 미국과 영국에서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졌다. 미국 빌보드 싱글차트 ‘핫100’ 7주 연속 2위, 영국 오피셜 싱글 차트 ‘톱100’ 1위에 올랐다. 강남스타일이 지구촌을 강타하면서 말춤과 함께 강남에 대한 세계인의 관심도 덩달아 높아졌다.

인구 폭증에 남서울에 신도시를 계획


▎박정희(가운데) 최고회의 의장이 1961년 9월 18일 한국경제인협회 기업인들에게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협조해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박 의장을 중심으로 맨 왼쪽이 화신백화점 박흥식 사장. / 사진: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싸이는 2012년 8월 미국 방송 ABC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노래를 이렇게 소개했다. “강남은 미국의 비버리힐스와 같은 한국의 상류층 동네입니다. 하지만 나는 그 비버리힐스에 살게 생기지 않았고, 뮤직비디오의 상황도 그곳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비버리힐스 스타일이라고 우기는 것이 현실을 비트는 포인트입니다.”

비버리힐스는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고급 주택가로, 유명 스타와 부호들이 거주하고 있다. 싸이는 한국의 강남이 비버리힐스에 비견되는 곳이라며 이른바 강남스타일로 허세를 부리는 모습을 노래에 코믹하게 담았다고 한다. 그럼 강남은 언제부터 상류층 동네의 상징이 됐을까? 강남스타일은 어떻게 만들어졌고 또 허상은 무엇일까?

강남의 탄생은 1960년대 서울 인구의 폭발적인 증가에서 비롯됐다. 서울특별시 주민등록 인구를 보면 1960년에 244만5402명(세대수 44만6874호)에서 1970년 543만3198명(세대수 109만6871호)으로 무려 2.22배나 증가했다. 1960년대부터 산업화가 이뤄지면서 농촌과 지방 인구가 대거 서울로 유입됐기 때문이다.

인구 폭증은 서울에 심각한 주택난을 불러왔다. 먹고 살기 위해 무작정 이주한 사람들은 안정된 일자리를 갖지 못한 채 변두리로 밀려나 판자촌을 형성했다. 1966년의 경우 서울 인구 380만 명 가운데 127만 명이 무허가 주택에서 지냈다(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60년대편 3권). 판자촌의 삶은 출렁다리처럼 위태롭게 흔들렸고 주민들은 안간힘을 쓰며 난간에 매달린 형국이었다.

“하천 변에 몇 집만이 움막을 치고 살던 곳이 어느새 수백 세대의 천막촌으로 변해갔다. 몇 년 사이에 큰 동네가 생긴 것이다. 천막과 움막을 차차 판자 조각으로 막고 덮고 하더니 점점 온 동네가 판잣집으로 꽉 들어찼다. 가끔 단속반이 와서 구둣발로 부수고 차고 갔지만 소용없었다. ‘미나리꽝’이라는 동네가 생긴 것이다. 밤이면 석유 등잔으로 불을 밝히고, 물은 골목 입구와 샛물목에 펌프를 장치해 지하수를 사용했다. 하룻밤만 자고 나면 판잣집이 몇 채씩 늘어나고 사람들로 붐볐다.”(이철용, [꼬방동네 사람들])

이와 같은 주택난을 해소하려면 서울을 넓히는 동시에 도시계획을 세우고 개발을 추진해야 했다. 1960년대에 강남개발 구상이 떠오른 배경이다. 이 계획을 최초로 수립한 인물은 화신백화점 사장으로 널리 알려진 사업가 박흥식이었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나자 그는 부정축재 혐의로 잡혀갔다가 군사정권에 협력할 것을 서약하고 풀려났다. 국가재건최고회의는 그에게 “서울 인구 증가에 대비한 주택건설 계획을 구상해 제출하라”는 과제를 제시했다. 이때 박흥식이 내놓은 것이 바로 ‘남서울 신도시 계획안’이었다.

1000만 평 강남 개발과 땅값 폭등


▎태풍 ‘카눈’의 한반도 북상으로 조기 퇴영을 결정한 ‘새만금 세계스카우트잼버리’ 참가 스카우트 대원들이 8월 9일 오전 서울 중구 하이커 그라운드를 찾아 ‘강남스타일’의 말춤을 배우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이 계획안의 골자는 한강 남쪽에 있는 경기도 광주군과 시흥군의 일부 지역에 이상적인 전원도시를 개발한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자금이었다.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제조업 이외의 사업에 정부가 지불보증하는 상업차관을 내줄 수 없다고 하자 박흥식은 일제강점기 때의 연줄을 이용해 1962년 일본기업들과 구상무역 협정을 체결했다. 미쓰이물산 등 일본 4개 회사에서 10년간 건설 자재, 기계류 등을 수입해 그 판매 대금으로 신도시 건설 비용(135억원 상당)을 충당하고 한국 해산물과 축산물을 수출하며 갚아나가는 방식이었다.

자금 조달 방안이 마련되자 정부는 1963년 1월 경기도 광주군 대왕면과 언주면, 그리고 시흥군 신동면 등을 서울로 편입했다. 개울이 흐르고 논밭이 펼쳐진 한적한 농촌이었다. 이곳이 오늘날 강남 3구(강남구, 서초구, 송파구)의 모태가 됐다. 그러나 민간 주도의 남서울 신도시 계획안은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일본 외자 유치와 박흥식의 독점적 개발권이 거센 반발을 부른 것이다. 이후 강남개발 사업은 서울시 소관으로 넘어가 196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됐다.

1967년 박정희 대통령은 대선 공약으로 경부고속도로 건설 계획을 내놓았다. 국가적인 도로 건설 사업과 함께 서울시는 도로 용지를 무상으로 확보하기 위해 강남개발을 서둘렀다. 1966년 1월에 착공한 제3한강교(한남대교)가 1969년 12월 완공되자 강남은 명실상부한 서울 생활권이 됐다. 그러자 말죽거리(양재역 부근)의 땅값이 들썩거렸다. 1966년 초만 해도 평당 200~400원대였는데 1968년 말에는 평당 6000원을 넘어섰다. ‘말죽거리 신화’라고 일컫는 부동산투기 붐의 시작이었다. 땅값 폭등은 곧 강남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당시 강남은 ‘영동(永東)’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일설에 따르면 영등포의 동쪽을 뜻한다고 한다. 1968년 영동1지구 구획정리사업이 시행됐다. 오늘날 서초, 반포, 방배, 사당, 양재, 우면, 잠실 등지에 고속도로를 건설하고 택지를 개발했다. 영동2지구 구획정리사업은 1970년부터 시행됐다. 지금의 신사, 압구정, 청담, 논현, 역삼, 삼성, 대치 등지에 신시가지를 조성했다. 강남 전역에서 1000만 평에 이르는 초대형 개발사업이 벌어진 것이다.

강남 개발의 여파로 자고 일어나면 땅값이 치솟았다. 1963년 땅값을 기준으로 1970년에 학동은 20배, 압구정동은 25배, 신사동은 50배가량 올랐다. 이른바 ‘복부인(福婦人)’들이 땅을 닥치는 대로 사들이며 투기에 열을 올렸다. 하지만 땅 투기를 부추긴 것은 정부였다. 이때 서울시에서 사들인 대규모 토지가 박정희 정권의 정치자금 조달에 쓰였다고 한다(손정목,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서울 격동의 50년과 나의 증언]).

1970년대로 접어들면 강남 아파트가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떠올랐다. 불과 10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인들은 아파트 주거를 낯설고 불편하게 여겼다. 사람들은 온돌도 깔 수 없고 장독대도 두기 어렵다며 아파트를 외면했다. 1962년 12월에 준공된 마포아파트는 연탄보일러와 수세식 화장실을 썼는데, 전체 450세대 중 160여 세대만 입주 신청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파트는 차츰 중산층의 호응을 얻더니 강남개발과 함께 열풍에 휩싸였다.

“반포지구를 시작으로 잠실·압구정동에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강남은 아파트 숲으로 변하게 된다. 1974년부터 강남 지역에서 시작된 아파트 열기는 1978년 절정에 달했다. (중략) 영동 K아파트 분양 때는 124 대 1이라는 엄청난 경쟁률을 보여 사회가 온통 아파트 열기로 달아오르는 듯했다.”(고철, [한국주택변천사], 중앙일보 1994년 7월 13일)

강남 아파트 열풍과 특혜 분양 사건


▎대학수학능력시험의 킬러문항 논란 등으로 사교육비 문제가 화두로 떠오른 가운데 작년 사교육비 총액이 26조원으로 역대 최대 규모를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사진은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학원가. / 사진:연합뉴스
1978년 6월에 터진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특혜 분양사건은 당시 아파트 열풍이 얼마나 뜨거웠는지 보여준다. 1977년 9월에 착공한 현대아파트 5차분은 절반을 사원용, 절반을 일반용으로 승인받아 지었다. 그런데 평당 분양가 30만원이었던 아파트가 준공도 하기 전에 3배 이상 뛰어오른 가격에 거래됐다. 전매 목적으로 시장에 나온 분양권에 몇 배의 프리미엄이 붙은 것이다. 이와 관련해 사원용으로 승인된 아파트를 사회지도층 인사들에게 특혜 분양했다는 소문이 흘러나왔고 청와대에 투서까지 들어갔다.

그것은 사실로 드러났다. 6월 30일 사정 당국은 특혜 분양을 받은 고위공무원 등 220여 명을 적발해 해당 부처에 통보했다고 밝혔다. 공직자 190명, 언론인 34명, 법조인 7명, 예비역 장성 6명, 국회의원 6명 등이 이 사건에 연루됐다. 이 가운데 뇌물 수수자 5명이 구속됐고, 공직자 26명이 파면·사직으로 옷을 벗었다. 또 전매 목적으로 분양받은 자는 아파트를 반납하도록 했으며, 이미 분양권을 처분한 자는 차익금을 세금으로 환수하게 했다.

8학군 교육특구로 몰려온 고학력 고소득 계층


▎1993년 영화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의 한 장면. 영화에서 이른바 ‘압구정 오렌지족’으로 불렸던 신세대는 외제 자동차를 몰고 다니며 압구정동 거리에 널려 있는 환락과 섹스를 낚아채는 족속으로 묘사됐다. / 사진:[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캡처
아파트와 함께 강남을 띄운 것은 바로 입시교육이었다. 1970년대 강남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자 박정희 정부는 서울 인구 분산을 위해 강남 이주를 적극 권장했다. 그런데 걸림돌이 있었다. 강남에 이름난 고등학교가 별로 없었다. 자녀 교육에 관심 많은 학부모는 강남 이주를 꺼렸다. 신생 학교가 생겨도 입시를 제대로 치를지 걱정이었다. 그러자 정부는 강북 명문고의 강남 이전 카드를 빼들었다.

1972년 10월 문교부는 종로구 화동에 있던 전통의 명문 경기고를 강남구 삼성동으로 옮긴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동문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이 계획은 1976년 실행에 옮겨졌다. 서울고, 휘문고, 중동고, 경기여고, 숙명여고 등도 이전했다. 1970년대 이후 강북 도심에서 이사 간 학교 20곳 가운데 15곳이 강남, 서초, 송파 등 강남권으로 옮겼다. 서초고, 양재고, 세화여고, 현대고, 진선여고 등 신생 학교 설립도 잇달았다. 이 학교들을 서울 시내 고등학교 학군제에 따라 8학군으로 묶었다.

교육여건이 좋아지자 강남 8학군의 명성이 학부모들 사이에서 높아졌다. 전문직 등 고학력 고소득 계층이 8학군을 바라보고 강남으로 대거 이주했다. 이 지역에 엄청난 교육열이 형성되면서 과외, 학원 등 사교육도 번성했다. 강남 학부모들은 자녀의 입시를 위해 사교육에 아낌없이 지출했다. 물론 강남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입시의 성패가 인생을 좌우한다고 여기는 한국 사회다. 학력과 소득 수준이 올라갈수록 사교육 의존이 심화됐다. 공교육은 날이 갈수록 위축되고 사회 계층 간 위화감이 커졌다.

1980년 7월 전두환 정권은 교육 정상화 조치로 과외를 전면 금지했다. 당시 입시 사교육은 학원보다 과외가 주를 이뤘다. 경찰과 국세청이 합동으로 과외를 단속하고 강력하게 응징했다. 1987년까지 불법 과외로 적발돼 징계받은 사례를 보면 과외 교사 입건 263명, 과외 학생 정학 643명, 학부모 면직 149명, 징벌적 세무조사 407명 등이었다. 자녀 과외교습을 시키다가 걸리면 부모를 직장에서 해고하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입시학원 또한 유사 과외교습이라고 해 졸업생이나 독학생만 허용하고 초중고 재학생은 금했다.

과외 금지 해제가 공론화된 것은 1987년 민주항쟁 이후였다. 노태우 정부는 1989년 2월 대학생 비영리 과외를, 1991년 7월 초중고 재학생의 학원 수강을 전면 허용했다. 도시의 변두리까지 보습학원이 들어섰다. 월 5~6만원만 내면 되는 서민형 집단 과외였다. 강남에서는 대치동 학원가를 중심으로 더 비싼 특수 과외가 활성화됐다. 중고생들을 학년 별로 편성해 10~20만원씩 받고 입시지도를 했다. 학생운동 전과 때문에 기업체 취직이 어려웠던 86세대 운동권이 ‘강남 일타강사’로 변신해 억대 연봉을 벌기도 했다.

강남 8학군의 명성은 1990년대 중반 이후 대학입시에 내신 성적 반영 비율이 확대되면서 잦아들었다. 수학능력 상위권 학생들이 많고 경쟁이 치열해서 내신 1등급을 받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대신 대치동 학원가에 수천 개의 사교육 업체들이 모여들어 입시 노하우를 축적하고 명문대 진학에 탁월한 성과를 거뒀다. 국내 최고의 교육특구로 강남이 꼽히게 된 이유다. 매년 서울대 입학생의 10% 이상이 강남 3구에서 배출됐다. 강남 아파트 가격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데에는 이런 교육환경이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압구정동 오렌지족이냐, 낑깡족이냐

1960~90년대 개발사업과 아파트 열풍, 8학군과 교육특구 신화로 부유한 엘리트들이 지속적으로 유입되며 강남은 ‘신흥 상류층 동네’라는 정체성을 형성했다. 그러나 부정적인 인식도 만만치 않았다. 부동산투기의 온상이자 사교육 1번지라는 비판이었다. 1990년대 초에 떠오른 ‘압구정 문화’는 그 정체성의 표출인 동시에 비판 여론의 표적이었다.

“압구정동은 체제가 만들어낸 욕망의 통조림 공장이다 / (중략) / 이곳 어디를 둘러보라 차림새의 빈부 격차가 있는지 압구정동 현대아파트는 욕망의 평등 사회다 패션의 사회주의 낙원이다 / 가는 곳마다 모델 탤런트 아닌 사람 없고 가는 곳마다 술과 고기가 넘쳐나니 무릉도원이 따로 없구나”

1991년 4월에 출간된 시집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에서 시인 유하는 압구정동을 ‘욕망의 통조림 공장’이라고 일컬었다. 소비문화가 화려하게 꽃핀 강남 한복판에서 신흥 상류층 주민들이 화려한 백화점으로 쇼핑하러 다니고 외국계 프랜차이즈 식당에서 미식을 맛본다. 신세대는 찢어진 청바지와 미니스커트를 입고 클럽을 들락거리거나 드라이브를 즐긴다. 이곳은 한국식 자본주의의 쇼윈도였다.

세간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미디어는 가시 돋친 보도를 쏟아냈다. 분에 넘치는 사치를 조장하고 외래문화를 무분별하게 수용한다며 질타했다. 대표적인 표적이 바로 로데오거리를 활보하는 상류층 젊은이들, 이른바 ‘압구정 오렌지족’이었다. 영화에서는 외제 자동차를 몰고 다니며 압구정동 거리에 널려 있는 환락과 섹스를 낚아채는 족속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언론은 퇴폐 향락적 저질문화이자 방황하는 신세대의 일탈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압구정동은 대한민국에서 제일 말 많은 동네로 떠올랐다. 문화적으로 압구정동은 한 동네가 아니었다. 강남권의 여러 동네가 모두 압구정동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강남을 욕했지만, 누구나 기회만 주어진다면 강남 주민이 되고 싶어 안달했다. 강남의 세속적인 즐거움에 동참하고 싶은 젊은이들이 아버지 차를 몰고 나와 “야, 타!”하고 외쳤다. 오렌지족이 아니면 어떠리. 낑깡족, 감귤족, 탱자족이라도 괜찮다. 길을 걸으면 욕망과 유혹의 상류층 판타지가 펼쳐진다. “오빤 강남스타일 / 헤이 섹시 레이디”, 싸이가 부른 강남스타일의 출발점이다.

※ 권경률 - 역사 칼럼니스트이자 작가. 서강대에서 역사를 공부했다. 새로운 해석과 기발한 상상력으로 한국사에 숨결을 불어넣는다. 유튜브·페이스북에 ‘역사채널권경률’을 열어 독자들과 역사 하는 재미를 나누고 있다. [모함의 나라](2022), [시작은 모두 사랑이었다](2019), [조선을 새롭게 하라](2017) 등을 썼다.

202312호 (2023.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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